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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매일신보』 창간 사옥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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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내 신문이 가진 권력이란 비상한 것이다. 이토의 백 마디 말보다 신문의 일필(一筆)이 한인(韓人)을 감동하게 하는 힘이 매우 크다. 그 중에도 지금 한국에서 발간하는 외국인의 대한매일신보는 확증이 일본의 제반 악정을 반대하는 한인을 선동함이 연속부절하니 이에 관하여는 통감이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

    

이는 당시 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한 연설장에서 한 말이다. 통감부 통감조차 두려워했던 반일 언론, 그 중심에 『대한매일신보』가 있었다. 일제는 1906년 조선통감부를 설치한 직후 언론 통제에 들어갔다. 그러나 검열이 어려운 신문들이 있었다. 특히 『대한매일신보』는 양기탁이 영국인 베델을 발행인으로 내세워 운영하는 신문이었기 때문에 단속하기가 어려웠다. 『대한매일신보』의 발행부수는 국한문 7,500부, 한글 4,500부, 영문 500부로 합계 1만 2500부였다. 이는 당시로서는 대단히 많은 부수였고, 구독자 대부분이 여론 주도층이었다. 『대한매일신보』는 외국인의 치외법권을 이용하여 전국에 독립운동을 전하는 등 항일사상을 고취시키는 대표적인 신문이었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현재 상태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 7월 18일 박동(현 수송동)에서 영국인 신문기자 베델〔裵說, E. T. Bethell, 1872-1909〕을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양기탁(梁起鐸, 1871-1938)을 총무로 하여 창간되었다. 처음에 국문 2면, 영문 4면으로 발행하던 것을 1905년 8월부터 국한문 혼용판과 영문판으로 나누어 발행했는데, 이때 박은식·신채호 등이 논설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사업이 확장되면서 사옥을 1907년 1월 지금의 프레지던트호텔 부근으로 이전하였다. 1907년 5월 30일부터 국한문판 · 영문판 · 순 한글판 세 종류의 신문을 발행했는데, 발행부수가 1만 부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무렵 『대한매일신보』는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의 기관지 역할까지 담당하면서, 의병운동을 비롯한 항일투쟁에 대한 사실 보도와 일제 침략을 비판하고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하는 논설을 통해 민족 언론으로서 확고히 자리매김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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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1904년 7월 18일 베델을 사장으로 추대하고 양기탁이 총무가 되어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였다. 제작진은 주필 박은식을 비롯하여 신채호 ․ 최익 ․ 옥관빈 ․ 장도빈 등 이었다.
처음에는 1896년 『독립신문』을 모방하여 1일 6면에 국문 전용의 한글판과 영문판을 같이 수록하여 발간하다가 1905년 8월 11일부터 국문판은 국한문 혼용의 『대한매일신보』로 바꾸고 영문판은 별도로 '코리아 데일리 뉴스(Korea Daily News)'라는 제호로 나누어 발행하였다. 1907년 5월 7일부터는 국한문 전용판으로서 『대한매일신보』를 별도로 발행하였다. 이 신문은 당시 영국인의 명의로 발행되었기 때문에 일제 통감부 당국의 검열을 피할 수 있었고, 또 일본 관헌의 사옥 출입을 금하는 안내문을 붙이기도 했다.
1907년 1월 16일에 을사늑약의 무효를 선언한 고종의 친서가 미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에 전달되었다는 사설을 크게 보도하였으며,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쓴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즉각 전재하고 영문판에도 영어로 번역 게재하여 세계에 알리었다. 1909년 10월 26일에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다는 소식을 호외로 보도하기도 하였다. 국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하여 간행된 영문판은 일제의 침략상과 한국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리는데 획기적인 역할을 하였다. 당시 다른 신문에서는 일제의 소위 신문지법에 의하여 의병운동을 보도하지 못하였으나 『대한매일신보』는 의병활동을 상세히 게재하고 이를 높이 평가함은 물론 항일의식 고취와 구국언론운동에 적극 앞장서 민족의 대변지로 성장하였다. 또한 1907년 5월 23일부터는 한문을 해독하지 못하는 백성들을 위하여 한글판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하였다. 1908년 5월 현재 발행부수는 한글, 국한문, 영문판을 모두 합쳐 13,400부였으며, 지사는 1907년 11월 현재 모두 32곳이었다.
1907년 1월 대구에서 시작한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신문사 안에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개설하여 많은 보상금을 모금하였다. 일제는 당시 총무직을 맡고 있던 양기탁을 국채보상금 횡령이라는 터무니없는 혐의를 씌어 구속하였으나 사장인 베델이 증거를 들어 허위 조작된 것임을 증명함으로써 결국 2개월 만에 무죄로 풀려났다.
이러한 탄압과 싸우던 과정에서 베델이 물러나고 비서였던 영국인 만함(万咸, Marnham, A. W.)이 사장이 되었는데, 1910년 6월 14일 만함은 갑자기 판권 일체를 전 사원이었던 이장훈에게 4만 원에 매도하고 우리나라를 떠나버렸다. 그리하여 6월 14일자부터는 이장훈의 명의로 신문이 발행되었다.
양기탁은 각 신문에 광고를 내어 자신은 이 신문에서 손을 떼었다는 것을 밝혔다. 이미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의 뜻대로 통감부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었다. 그리하여 8월 28일까지(1,461호) 발행되다가 경술국치 다음날부터 ‘대한’ 두 자를 떼어낸 채 『매일신보』가 되어 총독부 기관지로 바뀌었다.

  • 질문1 『대한매일신보』가 자유롭게 항일운동을 펼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며 발행인은 누구인지 써 봅시다.
  • 질문2 『대한매일신보』가 펼친 항일운동의 내용을 써 봅시다.
  • 질문3 일제가 『대한매일신보』를 『매일신보』로 이름을 바꾸어 총독부 기관지로 만든 이유가 무엇인지 추론하여 써봅시다.

읽기자료 2

“나는 죽더라도 신문만은 살려 한국 동포를 구원하겠다.” 파란 눈의 영국인 기자 베델이 한 말이다. 
한국식 이름으로는 배설이라고 불리는 베델은 영국 브리스틀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완구점을 하는 아버지를 도와 장난감 가게를 운영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왔다. 그때 마침 러 ․ 일전쟁이 터지고 일본이 승리했다. 일본의 침략 행위에 분노를 느낀 베델은 이에 맞서 싸울 수단은 언론밖에 없다고 판단하였다. 곧 베델은 한국인들에 대한 일본의 탄압을 알리기 위해서 1904년 『런던 데일리 뉴스』지 특파원으로 한국에 왔다. 
한국에 도착한 그해 7월,  베델은 자신의 사재와 통신원 월급을 털어 양기탁과 함께 『대한매일신보』와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창간하였다. 이 두 신문은 일본의 침략 전쟁을 과감한 논조로 비판하였다. 당시 영국은 일본의 중요한 수교국이었기 때문에 영국인이 사장으로 있는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이 함부로 탄압하지 못하는 불가침의 영역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실어 전국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이에  베델은 『대한매일신보』에 장지연의 행동을 찬양하는 사설을 싣고 호외까지 발행해서 일본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였다. 대한매일신보사는 대구에서 시작해서 전국으로 퍼져 간 ‘국채보상운동’의 지원금 총합소로도 그 명성이 자자하였다. 1908년 4월 17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정명운과 장인환의 친일 미국인 스티븐슨 사건을 보도하면서 용기있는 행동이라고 칭찬하였다. 또한 양기탁, 박은식, 안창호, 장지연 등을 필진으로 내세워 애국사상을 고취시켰다. 
베델의 『대한매일신보』는 거침없는 논조와 애국지사들의 충절 어린 사설로 한국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는데 당시로서는 경이로운 17,000부를 발행하는 최대 규모의 신문이었다. 이러한 활동은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이 베델이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일본은 영국인으로서의 치외법권을 이용하여 배일론을 내세우는 『대한매일신보』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베델과 『대한매일신보』를 몰아내기 위해 기회를 노리던 일본은 영국정부에 외교 공작을 펴 베델을 국외추방을 꾀했다. 결국 베델은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의 재판에 회부되어, 상하이에서 3주간 금고형을 마친 후 한국에 돌아온 뒤부터 심장병을 앓기 시작하여 1909년 5월 13일 37세의 나이로 순절하였다. 

  • 질문1 베델이 신문만은 살려 한국 동포를 구원하겠다는 결심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매일신보』를 두려워한 이유를 써 봅시다.
  • 질문3 『대한매일신보』의 독립활동 내용을 정리하여 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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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이 비는 베델의 추모비로 원래 1910년 장지연이 비문을 썼지만, 일제는 칼과 망치로 그 내용을 지워버렸다. 현재의 비는 광복 후 20년이 지난 1964년 되어서야 언론인들이 성금을 모아서 원래의 비문을 새긴 작은 새 비이다. 현재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있다.

  • 질문1 베델의 추모비를 일제가 칼과 망치로 그 내용을 지워버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 질문2 장지연이 쓴 비문의 내용을 추론하여 써봅시다.

시각자료 2

양기탁은 베델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을 뿐만 아니라 1907년 안창호 등과 비밀 독립운동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1920년 『동아일보』창간 때 편집고문에 취임하였으며, 고려혁명당을 세워 무장투쟁을 지원하였다. 독립운동으로 인하여 투옥과 탈출, 투쟁을 반복하였으며 193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이 되었다. 

  • 질문1 양기탁의 독립운동에 대하여 써봅시다.
  • 질문2 양기탁이 언론활동을 통해 달성하려고 했던 목적은 무엇인지 써 봅시다.

시각자료 3

지난 번 이등(伊藤) 후작이 내한했을 때에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 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주선하겠노라 자처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케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하여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상하가 환영하여 마지않았다. 그러나 천하 일 가운데 예측키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꿈밖에 5조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을 빚어낼 조짐인 즉, 그렇다면 이등후작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대황제 폐하의 성의(聖意)가 강경하여 거절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니 조약이 성립되지 않은 것인 줄 이등후작 스스로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도다. ㉮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던 것이다.
아, 4천년의 강토와 5백년의 사직을 남에게 들어 바치고  2천만 생령들로 하여금 남의 노예되게 하였으니, 저 개돼지보다 못한 외무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하지만 명색이 참정(參政)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수석임에도 단지 부(否)자로써 책임을 면하여 이름거리나 장만하려 했더란 말이냐.
김청음처럼 통곡하며 문서를 찢지도 못했고, 정동계처럼 배를 가르지도 못해 그저 살아남고자 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 폐하를 뵈올 것이며 그 무슨 면목으로 2천만 동포와 얼굴을 맞댈 것인가.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천만 동포여, 노예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단군. 기자 이래 4천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 질문1 장지연의 논설과 관련 있는 역사적 사건은 무엇인가요?
  • 질문2 ㉮에서 지칭하는 사람의 이름을 모두 써 봅시다.
  • 질문3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쓴 목적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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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대한매일신보기자가 되어 시일야방성대곡을 지지하는 기사를 써 봅시다

모둠활동 2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독립을 위하여 활동한 외국인에 대해서 조사해 봅시다.

   

모둠활동 3

모둠별로 베델의 석방을 촉구하는 탄원서를 작성하여 발표하여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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