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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 박차정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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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차정(朴次貞, 1910~1944)은 1910년 5월 8일 동래 복천동 417번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일제강점 후 민족의 비참함을 보다 못해 1918년에 한통의 비장한 유서를 남긴 채 자결하고 그 후 오빠인 박문희는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동래일신여학교에 입학한 박차정은 어느 학생보다도 민족의식이 투철하여 항일학생운동의 선봉에 서서 활약하였다.
1929년 3월 동래일신여학교 고등과를 졸업한 후 약 2년 동안 동래청년연맹의 부녀부장 일을 맡아 보다가 21세 때 서울 근우회 선전부장이 되어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이 때 항일운동을 지도한 혐의로, 체포·투옥되었다. 출옥 후 상하이[上海] 인육시장으로 팔려가는 여인들 속에 끼어 인천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건너가 베이징 화북대학에 입학, 졸업하고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결혼하여 무장독립전선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그녀는 여자 의용군의 대장으로 곤륜산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1944년 5월 27일 충칭(重慶)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현재 상태

박차정이 태어난 부산은 지리적으로 일본에서 가장 가까워 부산항을 모체로 발달한 일제 식민지지배의 중요 거점도시였다. 1876년 개항과 함께 근대 무역, 상공업의 중심지로 성장하였으며, 일제식민지시기 대륙침략의 관문이 되었다. 
부산지역에는 한말 객주와 유지들이 중심이 되어 사립학교들이 설립되었고, 이 학교들을 중심으로 3 ․ 1운동과 학생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특히 부산은 부산부청과 경남도청의 소재지로 의열단 활동이 집중되었으며, 상공업이 발달한 곳이어서 임시정부의 재정을 담당했던 백산상회 등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운동과 노동운동 그리고 사회주의운동이 활발히 전개된 지역이었다. 
박차정은 1910년 5월 7일 경남 부산 동래 복천동 417번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일찍부터 신문물에 눈을 떠 한말 동래 지방의 신식학교인 개양학교와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탁지부 주사를 역임한 측량기사였다. 하지만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무단정치에 비분강개하여 1918년 1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이후 어머니 김맹련은 5남매를 키우고 가르치기 위해 삯바느질을 하는 등 어려움을 감수해야만 했다. 어머니는 동래군 기장면 출신으로 일찍이 김원봉과 의형제를 맺었던 김두전과는 육촌 사이었고 김두봉과는 사촌의 사이였다. 집안의 가계로 보더라도 어머니 역시 강한 사상적인 배경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박차정 역시 이러한 주변 환경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어려서부터 식민지 현실을 올바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되었다.
1924년부터 조선소년동맹 동래지부에서 활동한 박차정의 항일의식은 1925년 동래일신여학교 고등과에 입학하면서 더욱 강해졌다. 일신여학교는 선교계 학교이면서도 민족정신의 함양을 중요시하여 조선어, 역사, 지리 등의 교과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많은 민족운동가를 배출해냈고 1919년 3․1운동 때에는 부산지역 만세운동 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러한 민족적 전통을 갖고 있었던 학교에 입학하게 되니 가정에서 키워온 박차정의 항일의식은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박차정은 이때부터 우리 민족의 비극을 말하면서, 이 비극을 극복하는 길은 독립이고 애국지사들이 벌이고 있는 독립운동에 모두 동참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박차정은 항상 일신여학교 동맹 휴학의 주모자로 활동하였다. 
그녀의 항일의식과 투쟁정신은 오빠인 박문희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박문희는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와 동래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운영하며 청년운동에 매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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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읽기자료 1

박차정이 전국적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여성운동과 민족운동을 주도하게 된 것은 근우회 활동에서부터였다. 
근우회는 민족협동전선으로 만들어진 신간회 창립에 발맞춰 조선YWCA와 조선여성동우회 등 민족주의계와 종교계, 사회주의계의 여성운동가를 망라해 여성의 단결과 지위향상을 내걸고 1927년 5월 출범한 여성운동의 총본영이다.
근우회는 창립 이후 전국에 지회를 조직하는 한편 부녀자를 대상으로 한 야학의 설립과 강연회 등을 통해 문맹퇴치와 여성계몽에 주력했는데, 1928년 7월 임시전국대회를 계기로 사회주의 계열이 주도권을 장악하면서부터는 이념 중심의 활동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러나 1930년 이후 활동이 눈에 띄게 침체되어 신간회 해소론의 대두와 더불어 1931년 해소의 길을 걸었다. 해소될 때까지 국내·외에 70여 개의 지회가 조직되어 활동을 펼쳤다.
박차정의 활동 기반이었던 동래지회는 1928년 5월 10일에 결성되었으며, 사회주의계가 결성한 지회였다. 동래지회는 확실한 이념을 갖고 운동을 전개하였던 지회로서 중앙회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박차정을 중심으로 동래지회에서 청년운동과 여성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출판과 선전을 맡았던 박차정은 근우회의 핵심간부로서 활약하였다. 이 때 근우회는 1929년 광주항일학생운동에 이어 1930년 1월에 전개된 서울 여학생시위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하였다. 이것이 바로 근우회 사건으로 박차정과 근우회의 허정숙이 “대중적 위력으로 민족적 항의를 보여줌으로써 구속학생을 석방하고 민족적 기치를 들기 위해 시내 각 여학교의 시위를 적극적으로 지도하자”고 결의함으로써 일어난 사건이다. 1월 15일 오전 9시 30분 일제히 시위를 벌였는데 참가학교는 이화 ․ 숙명 ․ 배화 ․ 동덕여고 등 11개 학교였다. 박차정은 시위조직의 배후세력으로 주목되어 근우회의 허정숙과 함께 구속되었다. 박차정은 처음에는 서대문경찰서에서 취조를 받다가 일시 석방되었지만 1930년 2월 고향인 동래에서 다시 검거되어 서대문경찰서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다. 이후 세 차례의 심문 후 2월 15일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감시는 계속되었고, 2월 20일에는 서대문경찰서에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기소가 성립된다는 의견서가 제출되기도 하였으나, 2월 28일에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불기소로 처리되었다.

  • 질문1 근우회 창립 초기의 활동 목적을 써 봅시다.
  • 질문2 근우회 해체 원인을 신간회의 해체와 관련하여 추론하여 써 봅시다.
  • 질문3 박차정의 구속 원인이 된 근우회 사건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 질문4 박차정과 함께 근우회 사건을 주도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읽기자료 2

불기소 처분으로 풀려난 박차정은 모진고문으로 몸이 상하여 한달 간 꼬박 누워서 치료를 받았다. 
1930년, 박차정은 의열단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둘째 오빠 박문호가 보낸 청년을 따라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베이징에서 박차정은 당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주력하고 있었던 김원봉의 의열단에 합류하여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 중앙부의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3월 김원봉과 결혼한 후에는 남편과 함께 의열단의 핵심이 되어 활약하였다. 1932년 난징〔南京〕으로 이동하여 김원봉을 도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개설을 준비하였다. 김원봉은 국민당정부와 제휴하여 혁명간부학교를 개설키로 하여 본격적으로 학생을 모집하였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개설에 앞장섰던 박차정은 개교 후 여자부의 교관으로 여성의 교양과 훈련을 담당하였다. 이때부터 박차정은 임철애(林哲愛)라는 가명으로 더 잘 알려졌으며 일본 측의 자료에도 이 이름이 더 많이 나온다. 
1935년 7월 난징에서 민족혁명당이 결성되자 박차정은 핵심인물로 활동하였다. 박차정은 1936년 7월 16일에 지청천 장군의 부인 이성실과 함께 민혁당 남경조선부녀회를 결성하고 여성들을 전체 민족해방운동에 편입하고자 하였다. 
1938년 10월 10일 민족혁명당이 창립한 조선민족전선연맹은 한중연합전선의 형식을 빌려 항일무력조직으로 조선의용대를 결성하였다. 김원봉이 주도한 초기 의용대는 조선민족입장에서 중국항전참가․일제타도․조국해방의 임무를 자임하고 창설되었고 그를 수행하기 위한 방법으로 전선공작 ․ 적후공작 ․ 동북진출 세 가지를 설정하였다. 박차정은 22명으로 구성된 부녀복무단의 단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당시 의용대 본부에는 최동선을 단장으로 하는 3․1소년단이 있었다. 여자도 훈련소에서 1개월의 훈련을 마친 후 의용대 대원으로 편입되어 활동하였다. 의용대 내에는 여자대원들이 상당수 있었는데 박차정은 여성대원들의 선봉에서 싸웠다. 1939년 2월 박차정은 강서성 곤륜산 전투에 참가하여 부상을 당하였다. 
박차정은 김원봉이 임시정부의 군무부장에 취임했던 즈음인 44년 5월 27일에 곤륜산 전투에서 당한 부상의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박차정은 병상에 있으면서도 조국의 해방과 혁명을 완수하는데 참여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였다.  어려서부터 민족해방과 여성해방을 위해 항일투쟁에 혼신을 다했던 박차정은 꿈에도 그리던 민족의 해방을 1년 앞두고 3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광복 후 귀국한 김원봉은 부인 박차정의 유골을 가져와 자신의 고향인 경남 밀양 감전동 뒷산에 안장하였다. 

  • 질문1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여자부의 교관으로 활동하면서 박차정이 바꾼 이름은 무엇인가요?
  • 질문2 조선의용대를 결성한 독립운동 조직의 이름을 써 봅시다.
  • 질문3 조선의용대의 창설 목적은 무엇인가요?
  • 질문4 조선의용대에서 박차정이 한 일은 무엇인가요?
  • 질문5 독립활동에 매진하였던 박차정의 삶의 목표는 무엇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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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 질문1 아래 사진은 무슨 장면이며 위의 사진 중 남자는누구인가요?
  • 질문2 박차정의 시신이 광복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국내로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요?

시각자료 2

  • 질문1 조선의용대는 중국 공산당과 항일전에 참여하였다. 공산당과 합작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조선의용대 여성대원들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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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일제강점기에 여성이 할 수 있었던 독립운동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모둠활동 2
모둠별로 1930년 1월에 전개된 서울 여학생의 시위에 참가를 독려하기 위한 선전문을 작성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박차정과 김원봉은 부부이자 민족의 독립을 위한 혁명 동지였다. 여학생은 박차정의 입장에서, 남학생은 김원봉의 입장에서 상대방에게 격려의 편지를 써봅시다. 

모둠활동 4
모둠별로 남편 김원봉의 입장에서 먼저 죽은 부인 박차정을 위한 추도사를 작성하여 발표하여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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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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