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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해녀 항쟁시위지, 연두막 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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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야학에서 선생님들로부터 근대교육을 받아,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수탈정책에 대항하는 민족의식을 자각한 바 있어. 1931년 추운 겨울에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고순효와 함께 해녀대표 13~14명이 어업 조합 본부가 있는 제주 읍내로 가기로 계획을 세우고, 육로로 가면 일본 순사에게 들킬까봐 바다로 가기로 의견을 모았지. 먹을 양식으로는 메밀가루로 만든 메밀떡 여섯 개를 전대에 넣어 허리에 차고, 머리에는 흰 수건 동여 메고 흰 저고리와 까만 치마를 입었어.

위의 글은 해녀 항일투쟁에 참여한 김계옥 여사의 회상이다. 해녀들은 야학을 통해 교육을 받고 자신들을 착취하는 일제 식민지배 기구인 어업조합과 투쟁을 결심하였다. 1932년 1월 7일 부춘화(당시 25세)·김옥련(당시 23세)·부덕량(당시 22세) 등이 주도하여 벌인 1차 시위가 세화오일장에서 이루어진 이후 해녀대표들의 요구사항을 접수한 구좌면 해녀조합 지부장(구좌면장 겸임)이 1월 12일 구좌면을 방문하는 제주도해녀조합장(제주도사(濟州島司) 겸임)에게 알려 해결해 주겠다는 약속을 함에 따라 1월 12일 다시 구좌면 종달리, 하도리, 세화리 해녀들과 정의면 오조리 해녀 등 700여 명이 연두막동산에 집결해 약속 이행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연두막동산에 집결한 해녀들은 호미와 빗창을 휘두르고 만세를 부르며 세화오일장으로 행진했으며, 세화오일장에 도착한 해녀들은 제주도해녀조합에 대한 불평과 함께 죽음으로써 항쟁하자고 결의하였다. 구좌면과 정의면 각 리별로 20여 명의 해녀대표를 선출, 요구조건을 결정할 즈음 정찰하는 해녀로부터 구좌면사무소를 방문했던 도사가 막 돌아가려고 한다는 정보가 있자 시위대는 즉시 그곳으로 몰려가 차를 타려고 하는 도사를 포위했다. 해녀대표와 도사의 면담 결과, 도사는 해녀들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따라 지정판매 폐지, 경쟁 입찰에 의한 공동판매 부활, 미성년자와 40세 이상 해녀조합비 면제 등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었다. 이날 연두막동산에 집결하여 이루어진 해녀시위는 가장 규모가 컸고 제주도사와의 담판을 통해 해녀들의 요구 조건을 일부나마 관철시킬 수 있었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현재 상태

제주해녀는 제주도 여성의 근면성과 경제적 자립성을 상징하는 역사적 사회적 존재이다. 제주도는 물이 귀하고 땅이 척박하여 논농사는 거의 어렵고 조·보리와 같은 밭농사에 의지하여 생활해야 했으므로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특히 시시 때때로 닥쳐오는 자연재해들은 제주도인들의 생활 경제를 더욱 어렵게 했다. 
그러나 바다 속에는 전복과 해조 등 해물이 많이 있어 이를 채취하여 생계를 영위할 수 있었고 이 일들은 주로 여자들이 담당했는데, 그들이 바로 해녀인 것이다. 제주도에서는 수십 길 바다 속에서 해물을 채취하는 어려운 노동을 여자들이 담당했다. 그러므로 해녀는 제주 경제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강한 생활력을 지닌 해녀들이 바다 속에서 해물들을 채취하는 특수 기술은 세계적인 것이었으며, 그들의 진취적인 성격은 삶의 영역을 제주도 근해에 한정시킬 수가 없었다. 바다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일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가진 제주해녀들은 그들의 활동 영역을 경상남도의 부산·울산·장산포 등지로 넓혀갔으며, 때로는 일본 또는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진출했었다. 1920년도에 활동한 해녀는 10,000여 명에 달했는데, 그중 해마다 4월부터 9월까지 부산·울산 등지로 나아가 활동하는 해녀 수는 4,000명 이상이 되었다. 당시 출가 해녀 한 사람당 채취 생산액이 평균 300원으로 총수입은 약 120만원이라는 큰 수입인 만큼 출가 해녀는 제주도 경제에 있어서 실로 생명줄이었으며, 조선 산업계에서도 중대한 현상으로 인식되었다.
이와 같은 막대한 벌이와는 달리 해녀들의 생활상은 참으로 비참했다. 그 이유는 부모 자식을 이별하고 먼 지역으로 일하러 온 출가해녀들은 물상객주며 거간들과 고리채를 하는 일본인들, 더 나아가 일본인 해조회사 등을 통하여 여러 가지 방법 으로 착취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제주도에서는 해녀들의 권익을 옹호할 기구인 해녀조합 설치운동이 제주도 유지들을 중심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그 결과 1920년 4월 16일에 제주도해녀어업조합이 설립, 해녀들이 조합원으로 가입하고 해녀조합장은 제주도의 행정수장인 도사가 맡았다. 
그러나 제주해녀조합은 해를 거듭하면서 조합장과 담당서기 등이 상인과 결탁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고 해녀들의 생존권을 침탈하였다. 그 결과 해녀들은 자신들의 기본적인 생존 권익을 찾기 위하여 조합에 항의하였고 마침내 격렬한 저항적 시위운동으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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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야학운동은 “선 실력양성 후 독립”을 표방한 준비론적인 민족해방운동이었다. 실력양성운동 일환으로 전개된 야학운동은 문화계몽운동의 주요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야학은 이른바 일본어 보급을 위한 국어강습회로 변질되고 말았다. 하지만 1919년 3·1운동 이후의 야학운동은 노동·농민·여성·무산아동·직공·점원·형평야학 등으로 분화, 발전하였다. 특히 여자야학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당시 일부 신여성을 제외한 대부분의 여성은 과거 인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복종과 순종을 능사로 아는 전통적인 여인상이 조장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여성에 대한 교육은 여성 자신뿐만 아니라 2세 교육을 위해서도 시급한 문제였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교육시설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아 대다수 가정부인은 문맹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난관을 타개하는 방안은 강습소나 야학 운영 등이었다. 즉 시간과 경제력이 부족한 직업 여성들을 위한 여자야학은 여성교육의 중심기관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런 경향은 제주도에도 영향을 끼쳤다. 제주도는 지리·역사적인 배경으로 식민지 모국인 일본과 왕래가 자유로왔는데, 근대문화 또는 여성에 대한 인식이 점차 변화되는 분위기였다.
이 중 1921년도에 설립된 사립 하도보통학교(현 하도초등학교)는 야간에 하도강습소라는 노동야학을 운영하면서 항일의식을 키웠다. 이러한 야학활동은 당시 혁우동맹, 민중운동자협의회 회원 문도배, 강관순, 부승림 등 일부 하도보통학교 교사와지역 청년들이 담당했다. 당시에는 직접적인 독립운동은 노출되어 탄압받기 때문에 간접적이고 장기적인 독립운동을 위한 준비로서 노동야학을 운영하였던 것이다. 
하도강습소는 낮에는 물질하러 바다에 나갔던 해녀들이 지친 몸을 이끌고 와서 밤에 공부하였던 문화계몽운동의 현장이었다. 하도리의 해녀들은 먼저 문맹자를 위한 한글 및 한문 기초교육과 역사를 배웠다. 그리고 『노동독본』, 『농민독본』등 계몽서를 통한 신지식교육뿐 아니라 실생활에서 바로 쓸 수 있는 저울 눈금 읽는 법까지 교육을 받았다. 이러한 근대교육을 통해 제주해녀들은 민족과 계급에 대한 의식이 생겨났고, 먹고살기 위한 수단으로 삼던 물질 노동의 가치에 대하여 자각하게 되었다. 
제주해녀항일투항쟁이 하도리, 종달리, 세화리, 우도, 성산읍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들 신진 청년교사들에 의한 교육이 큰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 질문1 야학운동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여자야학의 중요성이 대두된 이유를 써봅시다.
  • 질문3 해녀들이 하도강습소에서 배운 교육내용은 무엇인가요?
  • 질문4 하도강습소 여자야학의 결과 해녀들의 의식은 어떻게 변화했나요?

읽기자료 2

1930년 성산포에서 일어난 해초 부정 판매에 대하여 해녀들이 항의했으나 조합 측이나 당국에서는 해녀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아무 성의를 보이지 않자 해녀들과 지역 청년들이 당국의 처사를 규탄하는 격문을 작성하여 성산포와 구좌면 일대에 배포하였고, 이 사건으로 인하여 구좌면 하도리 청년 오문규·부승림이 경찰에 검거되어 벌금형을 받았다.
성산포사건은 제주해녀들로 하여금 관제 어영조합에 대한 저항 및 투쟁 의식을 높였다. 관제 어용인들의 해녀의 대한 권익 착취는 해녀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닌 제주사회 전반의 문제였다. 제주 내 사회주의운동 청년들은 민중운동적 차원에서 해녀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해녀들에게 야학을 열어 교육을 시켰다. 아울러 해녀 자신들도 점차 권익 투쟁에 대한 의식을 갖게 되었다. 
해녀들은 조합의 권익 착취에 대하여 처음에는 대화로 풀기위해 노력하였다. 세화리 시위 이전 2~3년 동안 해마다 제주도해녀어업조합에 불공평한 조건들에 대하여 항의하였다. 그러나 시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값을 잘 받을 수 있는 채취 해물 중 감태재와 생복 판매는 생명처럼 중요한 것이어서 이들 판매에 대한 5개 요구 조건을 조합에 제출했다. 해물은 신선도가 떨어지면 상품가치가 떨어지므로 판매 처리에 세심한 주의와 성의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도 조합은 이러한 현실적인 상황들은 외면하고 오히려 해녀들이 채취한 생산물을 착취하는 데만 열을 올렸다.
마침내 1932년 1월 7일 해녀 300여 명은 호미와 빗창을 손에 들고 하도리에서 세화리 장터까지 시위행진을 벌였다. 수천 군중이 운집한 장터에서 부춘화 등 해녀 대표 10여 명이 번갈아 가며 해녀조합에 대한 불평불만을 연설로 통박하고 끝까지 싸우겠다는 각오를 천명하였다. 그리고는 세화리에서 100리나 되는 곳에 있는 해녀조합 본부를 습격하기 위하여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평대리 사무소에 당도했을 때 면 지부장과의 면회가 이루어졌다. 
해녀들의 요구사항은 첫째 조합이 해녀의 채취물을 공동 판매함에 있어 해녀들에게 불이익을 조장하였던 특정 조합원과 상인들에 대한 지정 판매를 반대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해녀들의 경제적 주권을 찾겠다는 의지였다. 다음은 유소, 노약자에 대한 복지적 배려 없이 조합회비를 징수하고 병으로 입어를 못하여 벌이가 없을 때도 조합비를 징수하는 비합리적이고도 비인도적인 처사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해녀들의 복지와 인권을 찾으려는 의지였다.
그러나 해녀조합의 면 지부장인 구좌면장은 자신의 권한 밖의 일이라며 12일에 제주도사가 오면 해결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였고, 이에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 질문1 해녀들이 자신들의 권익에 대한 자각을 하게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 질문2 해녀조합의 불합리한 행위가 무엇인지 써봅시다.
  • 질문3 세화리 오일장터에서 해녀들이 조합 측에 시정을 요구한 사항은 무엇이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3

1차 시위가 세화오일장에서 이루어진 이후 해녀대표들의 요구사항을 접수한 구좌면 해녀조합 지부장이 1월 12일 구좌면을 방문하는 제주도사에게 알려 해결해 주겠다는 약속을 함에 따라 1월 12일 다시 해녀 700여 명이 연두막동산에 집결해 약속 이행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오전 11시 반이 되자 세화경찰관주재소 동쪽 네거리에 종달리, 오조리의 해녀 200여 명, 하도리 해녀대 300여 명과 세화리 해녀대 40여 명이 일시에 동남북으로 모여들어 만세를 부르며 세화리 장으로 행진하였다. 시위대는 세화 장터를 점령하고 각지에서 모여든 군중에 에워싸인 가운데 각 동리별로 대표 해녀들이 나와서 해녀조합에 대한 모든 불합리성과 불평을 조목조목 연설하고 죽음으로써 항쟁하자는 격렬한 각오를 토하였다. 
이어서 각 동리별로 20여 명의 대표를 선출하여 요구조건을 통일적으로 결정하려는 즈음에 정찰 임무를 맡은 해녀가 도사가 돌아가려고 한다고 알려오자 시위대가 즉시로 몰려가서 차를 타려는 도사를 주재소 문 앞에서 포위를 해버렸다. 이것은 아주 순식간의 일이었다. 
경관과 주재소원들이 칼을 휘두르며 시위 해녀들을 위협하고 밀치기도 하고 발로 차기도 하면서 길을 열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자 도사는 시위대에게 조금만 참아주면 잘 해결해주겠다고 간곡한 말로 달래었다. 이에 해녀들은 공동으로 작성한 7개 요구조건과 하도리 해녀들의 11개 요구조건을 도사에게 제출하고 조속히 해결해 줄 것을 강박하였다. 그리고 20여 명의 대표가 도사와 직접 문답을 하였다. 신임 도사에게 제출한 해녀들의 요구조건은 1월 7일 세화리 시위에서 제출되었던 내용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제주도사는 세화리 해녀 시위를 성의 있게 검토하여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무력으로 일거에 제거하겠다는 태도로 임하였다. 2차 시위 날 무장경관 수십 명을 세화리 장터에 급파하였으나, 시위대들은 해산한 뒤였다. 그 뒤 구좌면과 정의면에 형사대를 파견하여 시위대의 배후세력을 검거하기 시작하였고, 1월 24일에 세화리 등 시위 주동지에서 청년 수십 명을 해녀 시위의 배후세력으로 검거하여 경찰서로 호송하려고 하였다. 이때 구좌면 해녀 1,500여 명이 경찰과 충돌하여 경찰관 1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순사의 모자를 빼앗고 제복을 찢었으며 해녀들도 부상자가 생겼다. 이 날 시위가 격화되고 폭력화된 것은 주모자로 검거된 해녀를 탈취하려는 데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검거 해녀들을 석방하라고 밤까지 폭력시위를 계속하며 소란을 일으켰다. 급보를 접한 전라남도 경찰부에서는 24일 밤 응원경찰관 35명을 제주도로 급파할 만큼 해녀 시위는 격화되어 있었다. 
1월 26일 새벽 3시경 경찰관 40여 명이 우도에 피신한 해녀 30여 명을 체포하여 우도 선창에서 배에 태워 제주 본도로 압송하려하자 해녀 800여 명이 경찰들을 포위하고 잡혀가는 해녀들을 탈취하려 하여 다시 일경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경찰은 공포 14발을 발포하여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경무국에서는 이 사건의 배후에는 제주도 지식 청년들의 사회주의 운동단체인 민중운동자협의회가 조종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이들을 대거 검거하였다. 이제 경무국에서는 해녀 시위를 생존권 쟁탈전의 문제로 보지 아니하고 사회 변혁적 운동의 방향으로 몰고 가서 해녀 주동자는 물론 민중운동자협의회 관련자로 지목된 청년들을 대거 검거하였던 것이다. 해녀들은 자신들의 투쟁으로 청년들이 구속되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1월 27일 구좌면 종달리 해녀 100여 명은 피검자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또 다시 벌였다.
3월 초에 이르러 해녀 시위 및 그 배후 조종세력으로 피검된 민중운동자협의회원 약 100명 중 혐의가 없는 사람들은 석방하였다. 해녀 중에는 하도리의 부춘화, 부덕량, 김옥련을 제외하고는 모두 석방하였다. 그리고 민중운동자협의회 관련자는 하도리의 김순종 등 9명, 세화리의 김갑천 등 8명, 연평리의 김성오 등 13명, 종달리의 한향택 등 8명 도합 38명이 검속되었고, 이 중 12명은 최종적으로 재판에 회부되어 형 확정을 받았다. 
반면 혐의가 없는 사람들은 4월 중순부터 석방하기 시작하였다. 이 석방 과정에서 4월 22~23일에 걸쳐 부춘화·부덕량·김옥련도 석방되었다.

  • 질문1 연두막동산 해녀 항일운동 진행 과정을 순서대로 정리하여 써봅시다.
  • 질문2 연두막동산 해녀 항일운동 진행 과정을 순서대로 정리하여 써봅시다.
  • 질문3 일제가 제주도 지식 청년들의 사회주의 운동단체인 민중운동자협의회원을 검거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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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사진은 하도강습소 제1기 졸업생 사진이다. 앞줄 왼쪽부터 문부현, 김남석, 강관순, 김태윤이고, 해녀 항일시위 당시 주도자였던 부춘화는 맨 뒷줄 가운데, 김옥련은 둘째 줄 왼쪽부터 두 번째, 부덕량은 둘째 줄 네 번째에 있다. 이들은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습소를 다녔다. 

  • 질문1 하도강습소가 해녀항일시위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 써 봅시다.
  • 질문2 부춘화와 김옥련, 부덕량 등이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습소에 다닌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각자료 2

위는 제주 해녀 항일운동을 보도한 1932년 1월 26일자 『동아일보』 기사이다. 기사를 보면 ‘오백여명 해녀단’, ‘주재소를 대거습격’, ‘경관대와 충돌 사태는 험악’, ‘쌍방에 부상자까지 내에게 된 모양’, ‘작야(어제 저녁) 제주도에서 충돌’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 질문1 1932년 1월 26일 제주 해녀 항일운동이 기사제목처럼 격렬하게 진행된 이유를 읽기 2)를 읽고 써 봅시다.
  • 질문2 신문기사를 제주도가 아닌 다른 지역사람들이 읽었다면 어떤 생각을 갖게됐을 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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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우리나라에서는 잠녀(潛女)·잠수(潛嫂)라고 불렸고 일본에서는 아마(あま)라고 불리는 해녀는 전 세계적으로 두 나라에만 있다. 이렇게 해녀가 이 지역에만 존재하는 원인에 대하여 조사하고 발표해보자. 아울러 공통점과 차이점도 조사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2

모둠별로 해녀 항일 시위 현장에서 연설하는 해녀의 입장에서 연설문을 작성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모둠별로 해녀 항일 시위 동참을 독려하는 포스터를 공동으로 창작하여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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