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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 이천 연합의병 전투지,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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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산맥 주맥 위에 올라앉은 15만 9,859평 남한산성은 오늘날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남한산성로(중부면 산성리)에 위치하고 있다. 잘 정돈된 산길을 따라 20여 분 올라가면 해발 490m의 산세와 아름다운 굴곡을 따라 병풍처럼 둘러쳐진 야트막한 성곽을 만난다.
석축으로 쌓은 남한산성의 둘레는 약 8㎞이다. 자연석을 써 큰 돌을 아래로, 작은 돌을 위로 쌓았다. 동서남북에 각각 4개의 문과 문루, 8개의 암문(暗門)을 내었으며, 동서남북 4곳에 장대(將臺)가 있었다. 성 안에는 수어청을 두고 관아와 창고, 행궁을 건립하였다. 유사시에 왕이 머무를 남한산성 행궁은 모두 227칸이었다. 이 밖에도 80개의 우물, 45개의 샘을 만들고 광주읍의 행정처(治所) 또한 성 안에 자리 잡았다. 
성벽에서 내려다보면 서울 시내와 성남시가 훤히 눈에 들어온다. 1637년 병자호란 당시 이곳에서 청나라 군사들에게 포위되었던 임금 인조는 끝내 청군에게 무릎을 꿇어 수치스러운 역사의 주인으로 남았다. 259년이 지난 1896년 남한산성은 또다시 외적의 침입을 받게 되는데, 바로 일제의 침략에 맞서 분연히 일어난 ‘남한산성 연합 의병진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현재 성곽 안에는 동·남문과 서장대, 현절사, 문무관, 장경사, 지수당, 영월정, 침괘정, 이서 장군 사당, 숭렬전, 보, 루, 돈대 등이 남아있다. 그 중 4대문과 수어장대, 서문 중간쯤의 일부 성곽은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남한산성은 사적 제57호와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현재 상태

1884년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가 개화사상을 바탕으로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갑신정변이 실패한 후, 조선에서의 10년간은 특히 청·일 양국의 정치적 간여와 음모, 경제적 침투로 말미암아 자주독립마저 위협받던 시기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지만, 그것마저 결국 일본의 무력에 의해 실패로 끝났다. 어쨌든 조선 왕조의 유교적 사회질서와 규범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된 국내 상황과 근대화된 서양 세력이 밀려오는 국제 정세에 비추어 볼 때, 조선의 개혁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시대적 요구를 일본은 조선 침략을 위한 구실로 이용하였고, 청에 대해서는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조선을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삼으려 하였다. 이러한 목적에서 일본은 조선의 내정에 직간접으로 간섭하였다.
일본은 사전에 계획된 개혁안을 조선 정부에 내어놓았다. 그 내용에는 정치·경제·재정·군사·경찰 등 전반적인 제도 개편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일본인의 정치·경제적 세력 진출은 물론 광산·철도 등에서 욕심을 채우려는 계략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은 이와 같은 광범위한 제도 개편을 빠른 기간에 제정하여 실시할 것을 강요하였다. 조선 정부는 일본의 이 같은 개혁 요구가 부당한 내정 간섭임을 내세우는 한편, 자주적 개혁을 담당할 새 기구로 교정청을 설치하고 서울에 주둔하는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도리어 이를 구실삼아 서울 주둔 일본군으로 1894년 6월 21일 새벽 경복궁을 점령하고, 명성왕후를 비롯한 민씨 세력을 몰아냄과 동시에 대원군을 섭정의 자리에 올라앉게 하였다. 이를 갑오변란이라고 하는데, 당시 유생들은 갑오변란을 침략 행위로 단정하여 곧 투쟁에 나섬과 동시에 갑오변란 직후 조직된 김홍집 내각을 친일내각이라고 비판·배척하였다. 또한, 갑오변란은 보수 유생들에게 망국에 대한 구국의식을 느끼게 하여 의병 봉기의 불씨가 되었다.
그리고 1895년 을미사변 또한 의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시모노세키[下關]조약에 따라 청나라로부터 타이완[臺灣]과 랴오둥[遼東]반도를 할양받게 되자, 만주와 국경을 이루면서 남쪽으로 내려올 기회를 노리던 러시아는 독일·프랑스와 함께 일제의 랴오둥반도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게 하는, 이른바 삼국간섭을 하였다. 이후 조선 정부는 친러시아적 성향을 띠게 되었는데, 그 중심에는 그동안 일제에 의해 세력이 약화되었던 명성황후와 그 세력들이 있었다. 이에 일제는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궁중 세력과 친러파를 몰아내기 위해 비상수단으로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명성황후를 시해(弑害; 임금이나 부모 등 중요 인물이 죽임을 당함)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켰다.
일제에 의해 ‘국모’가 무참히 시해되고 뒤이어 폐비까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민중의 분노는 드디어 폭발 지경에 이르렀다. 유생들은 폐비에 반대하며 국모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고, 서울·경기를 비롯한 지방 각지에서는 항일 의병이 일어났다.
한편, 친일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김홍집 내각이 추진한 개화정책에 대한 거부감이 그동안 쌓인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결부되면서 의병이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변복령과 단발령 공포는 조선인들에게 큰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변복령은 전통적인 의복을 서양식 복제(服制)로 바꾸려는 것이었다. 1895년부터 적용되었던 변복령은 관복을 간소화하고 관리와 민간인이 다 같이 검정색 두루마기를 입도록 하는 것이 그 핵심이었다. 당시 변복령의 시행은 전통적으로 의복을 조선인의 문화적 긍지를 나타내는 기준으로 알던 보수적인 지식인들에게는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이들은 ‘음사(陰邪; 음흉하고 사악함)’로 여기던 검은색으로 옷을 입으라는 것에 대하여 크게 반발하였다.
김홍집내각은 을미사변이 있은 지 불과 3개월이 지난 1895년 11월 15일(양력 12월 30일) 단발령을 공포하였다. 단발령은 상투를 강제로 자르게 한 것으로, 이때 내세운 명분은 ‘위생에 이롭고 작업에 편리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교 윤리가 일반 백성들의 생활에 깊이 뿌리내린 조선 사회에서 상투는 곧 인륜의 기본인 효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단발령의 공포는 유생들에게 신체적 박해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인륜의 파멸, 즉 문명인을 야만인으로 떨어지게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더욱이 단발령은 일제가 위협하는 가운데 친일내각에 의해 강제적으로 내려진 것이었기에, 단발 강요에 대한 반감은 개화 그 자체를 증오하는 감정에서 반일 의식으로까지 연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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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단발령이 공포되자 명성황후 시해를 계기로 부분적으로 일고 있었던 의병 봉기의 기운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경기 지역에서도 본격적인 의병 봉기는 단발령이 공포된 후 ‘이천수창의소’의 성립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이천수창의소 의병진(義兵陣)[또는 의진(義陣)]은 구한말 일제 침략에 맞서 1896년 경기도 이천에서 의병들이 봉기하여 조직한 의병진영(陣營)을 말하는데, 이천수창의소 의병진이 조직되는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김하락·조성학·구연영·김태원·신용희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서울에 있으면서 단발령으로 고종이 직접 머리를 자르는 사태가 일어나자 의병항쟁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단발령이 공포된 다음날인 1895년 11월 16일(양력 12월 31일) 서울을 출발하여 1896년 1월 1일(음력 11월 17일. 이때부터 양력으로 사용) 이천에 도착하여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김하락 일행은 이천에 도착하자 우선 이천군 화포군(火砲軍) 도영장(都領長)이었던 방춘식을 방문하여 의병활동에 대한 협조를 부탁하였다. 방춘식은 이들의 요청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포군 100여 명을 선발하여 지원하였다. 김하락을 비롯한 다섯 사람은 이들을 분담, 인솔하여 의병 모집에 나섰다. 구연영은 양근·지평[현재 양평]으로, 조성학은 광주로, 김태원은 안성으로, 신용희는 음죽[현재 장호원]으로 각각 출발하였고, 김하락은 이현(梨峴)에 남아 총지휘관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김하락 일행이 의병 모집에 나서자 곧 900여 명의 군사를 모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 외에도 이천에서의 의병 봉기 소식이 인근에 전해지자 용인·안성·시흥·수원·안산 등에서도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호응해 이천으로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천수창의소’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는데, 이천수창의소는 조직 구성원으로 볼 때 경기도 연합 의병진의 성격을 갖추었다.
창의대장에는 민승천이 추대되었다. 민승천은 이천수창의소에 참여하기 이전 이미 안성에서 대규모 의병진을 이끌고 봉기한 인물로, 이천수창의소에서도 창의대장에 추대되었다. 이외 지도부의 주요 직책은 김하락·조서학·구연영·김태원·신용희가 맡았다. 이렇게 보면 이천수창의소는 경기도 연합 의병의 성격을 띠면서도 이천과 안성 지역에서의 참여 비중이 높고, 지도부는 서울에서 이동해 온 인물들의 비중이 높은 특징을 보였다.
또한, 이천수창의소의 병사계층의 경우, 많은 관포수(官砲手; 국가기관에 소속된 포수)가 참여한 것이 특징인데, 기록에서 확인되는 것만 해도 남한산성의 별패진 군관 300여 명, 양근·지평의 군사 300여 명, 음죽·죽산의 화포군 300여 명, 이천 화포군 100여 명 등 약 1,000여 명의 관포수가 참여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 이천수창의소는 비교적 강력한 전투력을 갖춘 진영이었다.
1896년 1월 17일 의병진의 결성이 마무리되었을 때 일본군 수비대 보병 100여 명이 이천을 공격해 왔다. 이때 의병진에서는 복병전술로 대항할 것을 계획, 조성학·김태원·김귀성·신용희 등이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백현을 중심으로 야산에 매복하면서 일본군 수비대를 기다렸다. 1월 18일 일본군이 도착하자 조성학의 공격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의병진은 첫 전투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상대로 낮과 밤 계속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고, 후퇴하는 일본군을 추격해 모조리 무찌르는 대단한 승리를 하였다. 당시 일본군 수비대는 “180여 명이 출동하여 불과 2~3명만이 살아 돌아갔다.”고 기록에 전한다. 백현전투에서의 대대적인 승리는 구한말 전기 의병사에 있어서 최초의 대규모 승리였다.
백현에서 참패했던 일본군 수비대는 1896년 2월 12일 약 2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다시 이천으로 공격해 왔다. 이때 김태원은 최전방에서 일본군과 직접 전투를 벌이는 역할을 맡았고, 이외 조성학은 원적산에서, 구연영은 이현 동구에서 신용희와 김종만은 김태원의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곧 총격전이 시작되었으나 쌍방이 모두 물러나지 않는 전투가 온종일 계속되었다. 다음날 새벽 다시 전투가 시작되었는데, 의병진을 향해 서북풍이 불고 눈보라가 일어 전세가 아주 불리하였다. 이때 눈보라를 등진 일본군이 일시에 공격하자 의병진은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싸움을 포기한 채 흩어졌다. 의병진이 도망가자 일본군은 의병을 토벌한다는 명분 아래 이현마을 전체를 무자비하게 파괴하였다.

  • 질문1 경기 지역에서 본격적인 의병 봉기는 이천을 중심으로 조직된 부대를 통해 대규모로 조직되어 백현전투에서 대승을 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 의병부대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 질문2 이천수창의소 병사계층의 인적 구성에서 많은 수를 차지하고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계층은 어떤 계층인가요?

읽기자료 2

이현전투의 패배로 이천수창의소 조직이 크게 무너진 후 김하락은 다시 의병활동 재정비에 나섰다. 그는 먼저 2월 14일 여주의 심상희를 방문하여 지원을 요청하였고, 심상희로부터 병사 500여 명을 지원받아 돌아왔다. 이어 이곳저곳으로 알아보아 흩어졌던 구연영·신용희·전귀석·김태원·민승천을 불러들였다. 그리하여 다시 약 2,000여 명의 병사들이 모집되었다. 의병진의 재정비 과정에서 창의대장직에 민승천을 추대하였고, 심상희를 새로이 여주대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처럼 이천수창의소가 조직 정비를 마무리했을 무렵, 남한산성 의병진으로부터 지원 요청이 들어왔다. 이천 의병진은 1896년 2월 28일 남한산성을 둘러싼 포위망을 뚫고 성으로 들어갔다. 당시 남한산성에는 광주·이천 의병 이외에도 양근 의병이 합세, 그 수가 1,600여 명에 달하는 연합 의병진(연합 의진)을 형성하였다.
남한산성 연합 의병진은 남한산성이라는 천혜의 요새지를 점령하고, 풍부한 군수물자를 갖추어 일본군을 위협할 수 있는 형세가 되었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크게 당황한 것은 일본군 수비대였다. 그들은 고종과 관리들을 위협하여 관군을 동원, 남한산성을 포위하였다.
3월 5일 첫 전투가 벌어졌다. 관군은 성을 공격하였으나 의병진은 지형을 이용하여 이를 격퇴하고 송파 부근까지 추격하여 대포 1문을 빼앗았다. 이어 2~3일간 의병과 관군은 산발적인 전투를 벌였으나 대체로 의병진의 승리로 돌아갔다. 이에 관군은 3월 초부터 기존 친위대 병력에 증원 병력과 일본군이 합세하여 식량 공급을 차단하며 압박을 가하였지만, 의병진의 기세는 점차 높아져 갔다.
남한산성 연합 의병진은 그 규모가 점차 확대되어 가면서 서울진공계획(서울진공작전)을 세웠다. 당시 서울진공계획은 우선 1단계로 수원 근방의 의병진들이 연합하여 수원을 점령하고, 2단계로 남한산성 의병진과 춘천, 분원, 공주, 청주 및 수원 의병진이 남한산성 주변에 주둔한 관군과 일본군을 협공하고 격파한 뒤, 3단계로 전라․경상․충청도의 의병과 합세하여 서울로 진격, 4단계로 일본군을 쫓아내고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거주하고 있던 고종을 궁궐로 돌아오게 할 계획이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의병진의 서울진공작전의 1단계 작전, 즉 수원 점령 단계는 성공리에 추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수원 점령 단계에서는 경기도 안성·평택 의병진 외에 충청도의 온양·장원·목천 의병진도 참여하였다. 2단계 계획도 1단계 계획과 동시에 추진되었다. 춘천 의병 1,200명이 양근에 도착하였으며, 그 중 200여 명이 한강 상류를 건너 광주에 합류하였다. 의병의 기세는 날로 확장되어 갔으며 관군을 크게 위협할 정도였다.
전투는 한동안 잠잠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연합 의병진에서는 이때 러시아공사관에 있는 군부대신 이윤용에게 3인의 밀사를 파견, 아관파천 후 새로 조직된 친러정권의 협조를 요청하였다. 하지만 이윤용은 오히려 이들 밀사들을 체포하고 가두었다.

  • 질문1 남한산성 연합 의병진에 참가한 의병부대는 어느 지역부대들인가요?
  • 질문2 남한산성 연합 의병진이 서울로 진격하려는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이었나요?

읽기자료 3

남한산성 연합 의병진의 서울진공작전은 1896년 3월 22일 남한산성 의병진의 급작스런 함락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참령 장기렴에게 1개 혼성대대의 병력을 주어 남한산성의 연합 의병진을 공격하게 하였다. 장기렴 부대는 일본군의 지원을 받으며 공격해 왔으나 의병은 반격하여 격퇴하였다. 그러나 관군이 의병의 식량 보급로를 막자, 시간이 흘러가면서 점차 식량이 부족하게 되고, 병사들이 흔글리게 되었다. 게다가 의병장들 사이에 의견 대립이 심해지면서 병사들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다. 마침내 3월 22일 좌군장 김귀성이 관군의 꼬임에 빠져 병사들에게 술을 먹이고 성문을 열어주고 말았다. 이로써 관군이 남한산성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한산성에서의 전투는 의병 약 500병, 관군 약 300명이 사망하는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인명 피해로 보아 구한말 전기 의병사(義兵史)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로 기록된다. 남한산성의 함락으로 말미암아 서울진공작전이 흐지부지된 것은 물론 의병진들도 큰 타격을 입고 흩어졌다. 4월 7일경 김하락·구연영·신용희·김태원이 다시 모여 의병활동을 계속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관군의 추격이 심해 광주·이천 지역에서는 계속적인 활동이 어려웠다. 결국, 김하락을 대장으로 추대한 이들은 김하락의 제의에 따라 영남지방(경상남․북도)으로 이동할 것을 결정했다. 이때 의병진의 규모는 약 100여 명 정도였다.
1896년 4월 9일 이천에서 출발한 의병진은 여주(4월 9일), 흥원(4월 10일), 백운산(4월 11일)을 경유, 4월 12일에는 제천에 도착, 제천 의병으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다. 이때 의병장 유인석으로부터 제천 의병에 합류할 것을 제의받고 함께 전투를 하기도 하였으나, 원래 활동지로 생각한 계획대로 영남으로 향하였다.
이천 의병은 단양(4월 13일), 풍기(4월 14일), 영천(4월 19일, 지금의 영주)을 거쳐, 4월 20일 안동에 머물렀다. 이때 유인석의 지휘 아래에 있는 의병장 서상렬이 이끄는 부대와 연합을 시도하였으나, 상호 간 전투 방법의 차이로 결국 이천 의병진은 의성에 있는 수정사를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의 주요 전투로는 5월 14일의 청송의 성황현전투, 5월 20일의 의성의 비봉산전투가 있다. 하지만 관군의 추격이 계속되자, 결국 김하락은 의병진을 이끌고 경주로 이동, 이채구가 이끌고 있었던 경주 의병과 연합 의진을 이루었다.
경주 연합 의진은 6월 17일 경주성을 공격·점령하였다. 그러나 대구부에서 파견된 관군과 대구 주둔 일본군 수비대가 경주성을 공격하여 6월 23일 결국 경주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김하락은 이후 부대를 이끌고 영덕으로 이동하여 평민 의병장 신돌석이 이끌던 의진과 연합하였다. 7월 9일에는 안동 의병 유시연 부대도 합류하여 영덕관아 공격을 계획하였다. 7월 12일 이채구·이준구 등의 선발대를 영덕으로 보내고, 김하락은 7월 14일 조성학 등과 함께 영덕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영덕에서 관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의병 부대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때 김하락은 중상을 입었는데, “왜놈들에게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내겠다.”라고 하면서 강물에 투신·자결하였다. 이로써 이천 의병의 항일투쟁은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의병장 김하락이 전사한 이후에도 남아 있던 이천 의병들은 제천 의진·안동 의진·경주 의진·영덕 의진 등과 끊임없이 연합하여 끈질긴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김하락이 일부 이천 의병진을 이끌고 영남으로 이동할 때 대다수는 함께 가지 못하고 이천에 남았다. 이곳에 남은 의병들은 관군의 집요한 추격 때문에 일정 기간 숨어있다가 약 2개월 후인 5월 30일경 다시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다. 다시 의병활동을 시작한 이천 의병은 6월에 집중적으로 활동하여 주로 일본군이 설치한 전신(電信) 시설을 공격하였다. 이는 의병들의 항일 의식이 더욱 높아져갔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 질문1 남한산성이 관군에 의해 함락된 직접적인 원인은 무엇인가요?
  • 질문2 남한산성 함락 이후 이천 의병진이 선택한 활동 지역은 어디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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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왼쪽 그림은 괴한들이 궁궐을 침입하여 여인들을 죽이는 모습을 그린 기록화이고, 오른쪽 사진은 길거리에서 머리를 자르고 있는 모습이다.

  • 질문1 왼쪽 사진과 관련 있는 역사적 사건은 무엇이며, 그림 가운데 앉아있는 여인은 누구일까요?
  • 질문2 오른쪽 사진과 관련 있는 역사적 사건은 무엇이며, 사진에 보이는 사람의 표정이 어떻다고 생각되나요?
  • 질문3 두 사진이 보여주는 역사건 사건은 당시 사회 지도층인 유학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그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였나요?

시각자료 2

지도는 1896년 경기도 지역에서 봉기한 의병 부대의 위치를 표시하고 있다.

  • 질문1 지도에 나타난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을 살펴보면 의병 부대의 최종 집결지는 어디로 판단되나요?
  • 질문2 이천수창의소가 최종적으로 이동하여 연합 의병진을 꾸린 곳은 위 지도에서 성남이다. 이들이 남한산성에 병력을 집결시켰을 때, 한성을 방어하는 입장에서 느끼는 위협감은 어느 정도였을지 자신의 의견을 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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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서구 열강 및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이 노골화되었던 당시 한국인의 대응은 크게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개화파와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척사파로 나누어졌다. ‘개화파’와 ‘척사파’ 두 모둠으로 나누어 당시 이들의 주장을 바탕으로 상대방 모둠을 설득해 봅시다.
모둠활동 2
자신이 일제 침략에 맞서 일어난 의병장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주변 사람들을 의병에 가담하도록 설득하는 호소문을 써 봅시다.
모둠활동 3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봉기하였던 의병 부대의 활동을 찾아보고, 그들의 활동 상활을 날짜별로 정리하여 ‘○○의병 활동일지’를 만들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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