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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팔균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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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팔균(申八均, 1882. 5. 19 ~ 1924. 7. 2)은 1902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07년 대한제국 육군 정위(正尉)로 강계진위대에서 근무하다가 1907년 7월 군대가 해산되자 낙향하였다.
그는 고향인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 강당고개에 보명학교를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힘썼다. 보명학교는 신팔균이 인재를 양성하여 국권을 회복하려는 생각으로 친척들을 설득해 평산 신씨 종중재산으로 설립한 것이다. 신팔균이 교장으로 취임하여 3년간 민족정신과 배일사상을 고취시키고 신학문을 가르쳤다. 이때 보명학교로 사용한 건물은 공주판관을 역임한 신욱이 1897년에 설립한 학당을 확충한 것이다. 
신팔균은 1909년에는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1910년 8월 국권이 강탈당하자 보명학교를 동생인 신가균과 신필균에게 맡기고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1918년에는 동지 38인과 함께「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1919년에는 서로군정서에 참여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서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고 1922년 대한통의부에 참여하였으며, 1924년 그 사령관에 취임하여 무장투쟁에 앞장섰다. 그러던 중 일본군의 사주를 받은 장쭤린〔張作霖〕군대의 습격을 받아 결전을 벌이다가 전사하였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현재 상태

신팔균은 1882년 5월 19일(음) 서울 정동(현, 영국 대사관 자리)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평산이며, 그의 관원이력서에는 거주지가 충북 진천군 이곡면 노곡리(현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로 되어 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무과에 합격하여 무관을 지낸 사람이 많았다. 그의 고조부 홍주는 훈련대장을 지냈고, 증조부 의직도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를 지냈다. 
특히 그의 조부 신헌(1810~1884)은 무과에 급제한 후 삼도수군통제사, 병조판서 등 주요 무관직을 역임하였다. 특히 그는 전권대사로서 1876년 강화도에서 일본과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체결하고, 1882년에는 미국의 R. W 휴페펠트와 조미수호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의 최초 개항에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던 인물이다. 또 초기 개화파 인사로서 국방문제 등에 있어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무반이었으나 어느 문인 학자 못지않은 학문으로 유장(儒將)이라고 불렸다. 
신헌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신팔균의 아버지인 신석희는 병마절도사, 포도대장 등을 거쳐 한성부판윤, 내부협판, 경무사, 중추원 일등의관 등을 역임하였다. 
신팔균은 동생으로 가균과 필균이 있었는데, 가균은 그와 함께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인의 길을 걸었다. 
무인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가 무관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신팔균은 1900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제 2기생으로 1903년 보병과를 졸업하였다. 당시 육군무관학교 입학자는 정부 유력자의 친족이나 양반 지배 계층의 자제들이었고, 경쟁률도 높아 1898년 8.5:1, 1906년에는 14:1을 기록할 정도였다. 
그는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03년 3월 시위대 제 3대대 견습무관으로 시작하여, 1906년 7월 20일 정식으로 배속되었다. 1907년 3월 6품, 4월에는 보병 부위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1907년 8월 대한제국군이 강제로 해산되어 대부분의 장교는 해임되고 장졸은 귀가조치 되었다. 황실 의장 및 근위를 담당하는 1개 대대만이 존치되었다. 신팔균은 이후 1909년까지 군대에 남아 정위까지 진급하지만 결국 퇴역하였다. 
신팔균이 대한제국 군대에서 시위대 등 요직에 근무하고, 군대해산 이후에도 계속 근무할 수 있었던 것은 가문의 배경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퇴역이후 교육운동을 통한 구국운동을 전개하고, 중국으로 망명을 떠나 독립운동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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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신팔균은 퇴역을 하고 1909년 8월 이후 고향인 이월면 노원리로 내려왔다.
신팔균은 인재를 양성하여 국권을 회복하려는 생각으로 교육사업에 참여하였다. 그는 동생인 필균이 1908년 문중 재산으로 설립한 사립 보명학교에 교사로 재직하였다. 여기에 동생 가균, 조카 이조영 등도 함께하였다. 보명학교에서는 한문, 국어, 지리, 역사 등을 가르쳤다. 그는 만주로 망명할 때까지 학교 운영에 참여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정신과 배일사상을 고취시키고 신학문을 가르쳤다.
이 시기 신팔균은 대동청년단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대동청년단은 안희제를 중심으로 1909년 10월경 서상일·이원식·남형우 등과 함께 조직한 비밀결사였다. 대동청년단은 청년들의 민족정신 및 실력 함양을 목적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신팔균은 대동청년단 동지들을 통해 체득한 구국의 사상과 방략을 보명학교를 통해 전파시켰다. 
신팔균은 대대로 내려오던 진천군의 고택을 저당 잡혀 군자금을 마련하기도 하였으며 1914년 이전에 만주로 망명하였다. 
만주로 망명한 신팔균은 서로군정서와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활동 하였다. 서로군정서는 3․1운동 이후 서간도지역에서 조직된 무장독립운동단체로 1919년 4월 초순 류허시엔〔柳河縣〕고산자에서 조직된 군정부이다. 이 무렵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1919년 11월 17일 군정부는 임시정부에 참여하는 한편 명칭을 서로군정서로 개칭하였다. 한편 신흥무관학교는 1919년 5월 3일 개교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신흥무관학교의 교육은 군사교육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으며, 이때 사용된 병서들은 윤기섭이 일본군의 병서와 중국군의 병서를 바탕으로 우리에게 맞게 새롭게 만든 것들이었다. 또한 민족의식 함양을 위하여 우리나라의 국어, 국사, 지리교육을 강조하였다. 이외에도 근대지향적 인간 덕성교육과 경제․교육․과학․교육 및 사범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런 교육을 통해 졸업생들은 서로군정서․북로군정서․의열단․광복군 등에서 활동하였을 뿐 아니라 사범교육을 통하여 학교에서 교원으로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서로군정서와 신흥무관학교에는 대한제국군 출신인 신팔균을 포함하여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에서 활동하던 일본군 보병 중위 지청천과 기병 중위 김경천 등 근대적인 무관교육을 받은 이들이 참여하였다. 
신팔균은 호가 동천으로, 지청천, 김경천과 함께 ‘남만주 삼천’이라고 불렸다. 신팔균 등이 신흥무관학교 생도 및 농촌 청년층의 군사훈련을 담당하면서 신흥무관학교가 활기를 띠게 되었다. 신팔균은 서로군정서의 군인이자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 질문1 보명학교의 설립 주체와 교사진의 특징에 대하여 써봅시다.
  • 질문2 신팔균이 교육사업에 뛰어든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3 신흥무관학교가 무장독립투쟁에 공헌한 점은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2

대한통의부는 1920년대 서간도 일대의 통합 무장투쟁 조직으로서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성립 후 활동은 순탄하지 않았다. 특히 공화주의자들과 왕조를 부활하고자 하는 세력 간의 내분이 발생하면서, 일부 세력이 의군부를 세우면서 이탈하였고, 대화와 재결합 노력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한통의부는 1924년 1월 신팔균에게 사람을 보내어 군사위원장으로 취임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신팔균은 대한통의부 군사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대한통의부의 군사권을 장악한 신팔균은 대일항전의 차원을 높이기 위하여 군사훈련 및 염탐에 주력하였다. 또한 그는 군사위원장에 취임하자마자 각지에 주둔하던 부대원을 점검하면서 자질이 부족한 군인을 뽑아 따로 군사훈련을 시켰다. 군사위원장이 직접 지도하였기 때문에 점차 전투력도 강해졌다고 한다. 이러한 신팔균의 군사 활동은 대한통의부 군대의 질적 역량을 증대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신팔균의 참여로 대한통의부의 실력이 강대해져 ‘독립단 중 제1위’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신팔균의 활동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24년 7월 2일 이른 아침부터 신팔균은 흥경현 이도구의 산악지대에서 부하들의 훈련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날 오후 1시경 대한통의부 군대는 중국군의 공격을 받아, 신팔균과 유창열이 전사하고 2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으며, 중국군도 8명이 사상하는 ‘흥경사변’ 또는 ‘이도구사변’이 발생하였다. 
대한통의부를 공격한 중국군은 ‘중국지방병’, ‘토군’ 등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 무렵 중국 만주지역의 군벌의 독립군에 대한 태도가 강경했을지라도 그들이 일본외무성 등의 협조가 없이 단독으로 작전을 펼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중국군이 아닌 일본군으로 보는 것에도 무리가 따르며, 일설에는 일본의 사주를 받은 마적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렇듯 신팔균의 전사는 많은 의문을 남겼다. 
그의 죽음은 대한통의부와 독립운동사에 엄청난 손실이자 비극이었다. 신팔균은 대한통의부의 내부 갈등을 통합으로 이끌면서 강력한 군대양성에 주력하여 전력을 한층 상승시켰다. 대한통의부의 군사 활동에서 신팔균의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이런 그가 전사하자 대한통의부는 한 때 본부를 옮기는 등 존립의 근간을 위협받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그의 장례는 대한통의부장으로 치러졌으며, 베이징 천도교종리원에서는 신팔균 등 희생자에 대한 추도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신팔균의 전사는 가족사에도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 때 그의 부인 임수명은 임신 중이었는데, 남편의 전사를 차마 알릴 수 없었던 주변인들이 강권하여 그녀를 귀국시켰다. 그러나 남편의 죽음을 안 그녀는 남편이 죽은 지 꼭 4개월이 지난 11월 2일 유복녀와 함께 음독자결을 하였다. 
신팔균의 독립 활동과 순국은 조선후기 유력한 무반가문의 하나였던 평산 신씨의 후예가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몸소 실천하였던 상징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 질문1 신팔균이 대한통의부 군사위원장으로 활동한 내용을 써봅시다.
  • 질문2 신팔균의 삶과 독립활동을 보고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것은 어떤 것일지 생각하여 발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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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위의 왼쪽 사진은 신팔균이 대한제국군 장교시절 동료들과 함께(앞줄 왼쪽) 찍은 사진이다. 신팔균은 명문가문의 자제로 군인으로서 출세가 보장되었다. 그리고 오른쪽의 사진은 만주에서 독립군 시절의 사진이다. 이 시절 신팔균은 서로군정서 군인으로서,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서 또는 대한통의부 군사위원장으로서 활동을 하고 있었다.

  • 질문1 대한제국군 시절 신팔균이 가졌던 자신의 미래는 어떠하였을지 생각하여 봅시다.
  • 질문2 그리고 국가가 망하고 나서 독립운동을 할 당시 신팔균이 꿈꿨던 미래는 어떠하였을지 생각해봅시다.

시각자료 2

현재는 신헌고택으로 불리는 신팔균이 살았던 진천의 옛 집이다. 신팔균은 1909년 낙향한 후 이곳에서 머물며 교육활동과 대동청년단 활동 등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1914년 이전 고향을 떠나 중국으로 망명을 하였다. 

  • 질문1 이월초등학교에 신팔균의 사적비가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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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신팔균은 명문 가문에서 태어나 대한제국의 군인으로서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이 시절 수많은 명문가의 자제들이 경술국치를 당하자 현실에 안주한 것에 비하여 신팔균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영광을 뒤로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내가 만약 신팔균이라면 이 당시 어떤 결정을 할 수 있었을지 생각해봅시다. 또 위와 같은 결정을 내렸을 때, 어떤 고민들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2

모둠별로 신팔균의 삶과 독립활동을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주제로 연극대본을 작성해 봅시다.

* 노블리스 오블리제 :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

   

모둠활동 3

신팔균의 부인 임수명이 임신 중 남편의 전사를 알지 못한 채 귀국한 후, 남편이 죽은 지 꼭 4개월이 지나 유복녀와 함께 음독자결을 하였다. 모둠별로 임수명의 입장에서 유언문을 작성하여 발표하여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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