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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 평화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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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여름 9월 말께 일본 히로시마 현 구레시의 한 주택가. 이제 막 결혼식을 올린 낸시 휴머스톤(당시 32세)의 얼굴에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남편 케네스 존 휴머스톤은 

“여보, 아무 일 없을 거야. 그러니 걱정 말고 기다려. 잠시 여행을 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곧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라며 아내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렇게 그녀의 남편은 낯선 나라 ‘한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에게 도착한 것은 전보 한 통뿐. 

‘1950년 10월 3일 호주왕립보병군단 3대대 소속 대위 케네스 존 휴머스톤(34) 전사’.

그리고 60년이 지난 2010년 4월 14일 낸시 휴머스톤 여사는 유엔군 평화공원에 있는 남편 곁에 잠들었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유엔은 1950년 6월 28일 제2차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유엔의 이름으로 연합군을 파병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이 땅에서 40,896 명의 유엔군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이들 전사자를 묻기 위하여 유엔군사령부가 묘지를 조성, 1951년 4월 경상남도 부산시 대연동에 유엔군 묘지가 설치되었다. 유엔군 묘지가 완성되자, 이미 개성·인천·대전·마산 등지에 있던 여섯 곳의 묘지로부터 이곳으로 유해을 옮겨 모셨다.
1955년 11월, 대한민국 국회는 유엔군의 희생에 보답하기 위해 이곳 토지를 유엔에 영구히 기증하고, 아울러 묘지를 성지로 지정할 것을 결의하였다. 같은 해 12월 한국정부로부터 국회의 결의 사항을 전달받은 유엔은 이 묘지를 유엔이 영구적으로 관리하기로 하였다. 이곳은 유엔군 묘역, 유엔기념묘지 등으로 불리다가 2001년 3월부터 유엔기념공원이라 하였다.
이 유엔기념공원[재한유엔기념공원(在韓UN紀念公園)]은 국제연합 기념묘지로서 지정한 세계에서 하나 밖에 없는 유엔군 묘역으로, 처음에는 유엔군사령부에 의해 미국·벨기에·프랑스 등 11,000위가 있었으나 대부분 본국으로 보내지고, 2000년 말 현재 호주·캐나다·네덜란드 등 11개국의 3,000위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묘지에는 무덤마다 고인의 기록을 담은 묘비가 세워져 있다.
이 공원 안에는 예배당(1964년 건축)과 전시장, 사무소(1968년 건축)등이 있는데, 특히 예배당은 여러 나라 용사들의 종교를 고려한 한국 건축가의 설계에 따라 유엔이 건축한 것으로 건축학적 의미가 남다르다. 한편 유엔기념공원 옆에는 유엔조각공원과 평화공원이 조성되었는데, 유엔조각공원은 6․25 전쟁에 참전한 21개국의 조각품을 기증 받아 2001년 조성되었으며, 평화공원은 2005년 11월 부산에서 개최된 ‘2005 APEC 정상회담’에 맞추어 조성되었다. 평화공원이라는 이름은 유엔기념공원과 연계하여 지어진 것이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현재 상태

북한군의 침공을 받게 되자 한국 정부는 즉시 이 사실을 유엔한국임시위원단과 주한 미국대사관에 통보하면서 유엔과 미국에 북한의 남침행위를 즉각 중지시켜줄 것을 요구했다. 미국도 한반도사태를 유엔을 통해 해결하려했다.
6월 25일(뉴욕시간) 유엔은 안전보장이사회(줄여서 ‘안보리’)를 소집하고, 미국이 제출한 ‘북한군의 침략 중지 및 38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어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은 “북한이 유엔의 결의안을 따를 가능성이 전혀 없으며, 빠른 시기에 한국 정부가 무너질 수 있다.”는 비관적인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에 따라 유엔 안보리는 “그들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모든 지원을 제공하자.”는 내용의 ‘6·26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때의 결의안은 미국의 지상군 투입을 법적 또는 명분상으로 합법화하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미국 이외에 유엔 회원국들과 자유우방이 한국에 필요한 원조를 제공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그같은 6·26결의에 따라 미국의 육·해·공군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다. 미군의 참전에 이어 자유진영 32개국이 유엔의 결의를 지지했으며, 7월 중순에는 지지국이 52개국으로 증가했다. 그 후 한국을 돕기 위해 16개국이 전투부대의 파병을, 5개국이 의료 또는 시설을 지원하겠다는 뜻을 유엔에 전달했다.
유엔 안보리는 유엔 회원국이 한국에 파견하게 될 부대의 지휘체계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7월 7일,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으로 제안한 유엔군사령부 설치에 관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 같은 결의는 유엔이 최초로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군지휘기구를 설치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이 결의에 따라 미국은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를 초대 유엔군사령관에 임명했다. 맥아더 원수는 도쿄에서 유엔군사령부를 공식적으로 창설하고, 극동군사령부의 참모진들을 유엔군사령부 참모로 겸임 발령하였다. 결국 미 극동군사령부가 한국 작전 임무를 추가로 받아 유엔군사령부가 된 셈이었다. 이제 미국은 유엔군 작전의 모든 권한을 받아, 유엔군사령부를 통해 모든 유엔군을 지휘하고 통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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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은 38선 전 지역에 걸쳐 전면 남침을 개시하였다.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미국은 25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 소집하여 북한의 무력공격은 평화를 파괴하는 ‘침략행위’라 선언하고, 북한은 즉시 전투행위를 중지하고 그 군대를 38선 이북으로 철수할 것을 요청하는 결의문를 채택하였다. 또한 유엔 회원국들로 하여금 한국에 원조를 제공할 것과 북한에 대하여는 어떤 원조도 중단하도록 하였고, 6월 27일에 이르러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미국의 해군, 공군으로 하여금 한국군을 지원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날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의 무력공격을 물리치고 국제평화와 한반도에서의 안전을 회복하기 위하여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제공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권고문을 채택하였다.
곧이어 6월 28일에는 동경에 있던 극동군사령관인 맥아더가 한국을 방문하여 전선을 시찰하고 미 국방성에 지상군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미국의 군사적 움직임에 따라 7월 7일 열린 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한반도에서 유엔이 군사적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미국에 최고지휘권을 주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미국의 맥아더는 유엔군총사령관에 임명되고 유엔군의 파견이 결정되었다. 
이로써, 한반도에서의 군사지휘권은 미국의 맥아더원수에게 주어졌으며, 한국을 원조하기 위하여 육군, 해군, 공군 및 지상군을 파견한 16개국의 군대는 유엔군사령관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이들의 규모는 지상군이 1개 군, 3개 군단, 9개 사단, 3개 여단, 8개 보병대대와 그 지원부대들로 총 34만여 명 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해군의 2개의 기동함대, 공군의 3개 군의 전력이 동원되었다. 
이 당시 한국에 전투부대를 파견한 국가는 미국, 영국, 터키, 캐나다, 호주, 프랑스, 네덜란드, 뉴질랜드, 남아프리카공화국, 콜롬비아, 그리스, 태국, 에티오피아, 필리핀, 벨기에, 룩셈부르크로 총 16개국이 참전하였다. 
이 중 미국은 유엔 참전군 중에서 제일 먼저 전투부대를 파병한 국가이며, 규모도 가장 컸다. 미국은 6․25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유엔군사령부를 창설하고 이를 통해 모든 유엔군을 지휘하고 통제하면서 한국 전쟁을 이끌어나갔다.
전쟁 기간 중 미 지상군은 3개 군단, 8개 육군사단, 1개 해병사단, 그리고 2개 연대전투단 및 지원부대로 이루어져 총병력이 30만여 명에 달하였다.
해군은 미 극동해군사령부 및 제7함대의 전력이 투입되었으며, 이들은 제90․95기동함대를 중심으로 작전 상황에 따라 해상작전 또는 지상군작전을 지원하였고, 해군항공부대는 공군작전을 지원하였다. 공군은 미 극동공군이 중심이 되었으며, 이들은 제5공군, 제20공군, 제13공군, 군수사령부로 구성되었다. 전쟁 기간 중 최대로 20개 비행단, 77개 비행대대에 대한 작전을 통제하였다.
미국은 유엔의 통합군사령부 설치 결의에 따라 미 극동군사령부를 중심으로 유엔군사령부를 설치하였으며, 유엔군사령부는 미 극동군사령부 소속 구성군사령부인 미 제8군사령부, 미 극동해군사령부, 그리고 미 극동공군사령부의 지휘조직을 이용하여 한국군과 16개국에서 파견된 각 군을 지휘․통제하였다.
휴전 후 미 해․공군은 곧 재배치가 이루어졌으며, 지상군은 1954년 1월부터 철수를 시작하여 다음해 3월까지 7개 사단이 철수하였고, 잔여 부대는 계속 머물면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6․25전쟁에 참전한 유엔군 전투지원부대의 규모는 아래의 표와 같다.


유엔군(전투지원국) 참전 규모

국명 지상군 해군 공군

미국

302,483

극동해군, 미 제7함대

극동공군

영국

14,198

함정 17척(항모 1척 포함)

오스트레일리아

2,282

함정 4척(항모 1척 포함)

전투비행대대, 수송기편대

네덜란드

819

함정 1척

캐나다

6,146

함정 3척

수송기대대

뉴질랜드

1,389

함정 1척

프랑스

1,119

함정 1척

필리핀

1,496

터키

5,455

타이

1,294

함정 8척

수송기편대

그리스

1,263

남아프리카공화국

전투비행대대

벨기에

900

룩셈부르크

44

콜롬비아

1,068

함정 1척

에티오피아

1,271

341,227


  • 질문1 참전한 나라 가운데 “어! 이 나라도 우리나라를 돕고자 참전했었네!”라고 생각되는 나라가 있는지? 자유롭게 대답해 봅시다.
  • 질문2 표에서 가장 많이 참여한 나라는 어느 나라이며,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몇%) 되나요?
  • 질문3 6․25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이 곧바로 대응하고 이렇게 많은 병력을 파견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읽기자료 2

터키 정부는 1950년 7월 중순 유엔 사무총장으로부터 파병 요청을 받자 짧은 기간에 4,500명 규모의 군대를 보낼 것을 결정하고, 이를 유엔에 알려 유엔 회원국으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터키군의 파견이 확정되자 터키 육군은 8월 3일 제28사단 소속의 제241연대와 제2기갑의 제2포병대대를 중심으로 전투부대를 조직한 후 터키 제8군단 제4관구에서 공병, 수송, 병기, 통신, 의무부대를 뽑아 지원부대를 구성함으로써 독자적으로 전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제1여단을 창설하였다. 그리고 9월 10일 제2기갑 여단장인 야지시(Tahsin Yazici) 준장을 초대 여단장에 임명하는 등 지휘부도 구성하였다.
터키 제1연단은 한국에 증원하여 투입할 병력이 급히 필요하자 9월 13일까지 각 병과별로 단기간에 보충교육을 받게 하였으나, 탄약 부족으로 실탄을 사용한 사격훈련은 실시하지 못하였다. 5,090명으로 편성된 여단은 14일 출병 준비를 위한 최종 점검을 마치고 20일 지중해의 항구도시인 이스켄테룬에 집결하였고, 간단한 환송식을 마친 다음 3개 제1제대로 나누어 기다리고 있던 미 수송선에 올랐다. 이리하여 제1제대는 25일, 제2제대는 26일, 그리고 제3제대는 29일 각각 터키에서 출발하였다.
제1여단은 항해 도중에 파견된 5명의 미군 연락장교단으로부터 미국식 무기 사용법을 비롯한 사격술, 전술 및 보전협동작전 등의 교육을 받았다. 여단은 21일간의 긴 항해 끝에 10월 17일 부산에 도착한 후, 20일 대구에 있는 유엔군수용소로 이동하였다. 이때 여단은 한강 이남 후방지역에서 공비토벌작전과 주 보급로 경비임무를 수행 중인 미 제9군단에 배속되었다.
여단은 불필요한 장비를 반납하고 지원된 신식 장비와 무기를 받아 이제 M-1소총으로부터 105mm 곡사포, 그리고 다수의 차량 장비까지 갖추게 되었다. 이후 여단은 대구-대전 간의 주 보급로를 경비하면서 실탄사격훈련은 물론 보존포협동작전까지 완료하고 출동에 대비하였다.
이외에 장승천 전투, 고량포 전투, 네바다 전투 등에 참전하며, 1953년 휴전까지 세 차례에 걸쳐 5,000여 명이 교체되어 한국전에 약 15,000여 명이, 참전국 중 4번째로 많은 수의 병사들이 투입되었다.
휴전 후에도 터키군은 경기도 양주 백석면에 1개 여단 병력이 머물면서 서부 휴전선을 지켰으며, 1966년 7월 7일 16중대가 마지막으로 그들의 나라인 터키로 돌아갔다.

  • 질문1 6․25전쟁에 참전한 유엔군 터키는 몇 번째로 많은 수의 병사들을 파병하였나요?
  • 질문2 터키군은 한국으로 오는 배 안에서 미군 연락장교들로부터 무엇을 배웠으며, 왜 미군들로부터 배워야 했나요?
  • 질문3 6․25전쟁에 UN군으로 활동한 터키군은 어느 해에 처음으로 한국에 도착하여 어느 해에 마지막으로 자기 나라로 돌아갔나요?

읽기자료 3

6․25전쟁 당시 유엔의 지원 결의에 이어 1950년 8월 국제적십자연맹이 한국전쟁에서 전상자 치료활동을 적극 지원해 줄 것을 각국 적십자 기구에 호소하였다. 이 결과 노르웨이, 덴마크, 인도, 이탈리아, 스웨덴 5개국은 의료지원부대를 파견하였다. 이들의 지원은 뒤떨어진 한국의 의료 기술을 발전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의료지원부대들은 참전 기간 동안 그들의 숙련된 기술과 훌륭한 시설, 그리고 희생정신으로 6․25전쟁에서 많은 목숨을 구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또 그 당시 한국인 의사, 간호사, 그 외 의료기술자들에게는 아직 서투른 분야인 마취 기술, 성형외과 수술 기술, 방사선 촬영 등 새로운 의술을 가르쳐주는 것은 물론 병원 운영에 관한 노하우도 전해주었다.
그리고 이들은 피난민들의 영양실조와 비위생적 환경으로 인한 안질, 결핵 등이 널리 퍼지자 환자를 치료하는 데에도 큰 힘을 쏟았다. 특히 결핵을 몰아내기 위하여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BCG접종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노르웨이군은 전쟁 기간 동안 주로 해상물자 운송과 의료 인력, 적십자 지원금, 의류 등을 지원하였다. 그 중 노르웨이군 이동외과병원 제1제대가 일본을 거쳐 1951년 6월 22일 한국에 도착하였는데, 병원은 미 제8군 소속 제1군단 지역 안에서 병원을 운영한다는 방침에 따라 동두천에 세워졌다. 지원 초기에 천막을 건물 대신 사용하였지만 다른 미군 의료 지원부대와 더불어 유엔군 소속 독립부대로서의 모양새를 갖추어 나갔다.
노르웨이군 병원은 1951년 7월 19일부터 1954년 10월 18일까지 3년 3개월간 전투에서 다친 장병들을 치료하는 데 온 힘을 쏟는 한편 상당수의 민간인들도 치료하였다. 한국에 파견된 기간 중 노르웨이군 병원의 입원환자의 수는 14,755명이었고, 그밖에 진료환자와 외래환자가 55,950명이었다. 기간 중 파견근무 인원은 일반의사 80명, 치과의사 5명, 약제사 6명, 군목 7명, 여간호사 111명, 남간호사 22명, 행정장교 및 하사관 98명, 사병 294명, 총 623명이었다.
그리고 덴마크군 병원은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돌아가게 되자 귀국에 앞서 그때까지 갖고 있던 대부분의 약품과 의료기구 등을 한국재건단을 통하여 한국 여러 민간병원에 기증하였다. 다른 회원국들도 귀국에 앞서 갖고 있던 다량의 의약품을 기증하였다.
또 스칸디나비아 3개국(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은 전후복구를 위하여 1956년 한국 정부 및 국제연합한국재건단과 함께 ‘중앙의료원의 설립과 운영에 관한 협정’을 체결, 공동으로 투자하여 1958년 11월 국립의료원을 열기도 하였다. 스칸디나비아 3개국은 한국의 의료 발전에 다시 한번 기여하였다.
이와 같이 의료지원국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선진 기술을 전해주는 것은 물론, 다량의 의약품과 의료기구를 기증함으로써 뒤떨어진 한국의 의료분야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 질문1 6․25전쟁 당시 한국을 돕자고 참전한 의료지원국은 몇 개국이며, 어느 나라들인가요?
  • 질문2 6․25전쟁에 유엔군 자격으로 참전한 의료지원국들은 우리나라에 와서 어떤 일들을 하였나요?
  • 질문3 6․25전쟁에 참전한 의료지원국 가운데 전후복구를 위하여 국립의료원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나라는 어느 나라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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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위의 사진은 유엔기념공원을 찾은 미군 참전용사와 후손의 사진이다. 

  • 질문1 약 60년이 지나 한국을 다시 방문한 노병들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을지 생각하여 발표해보자.

시각자료 2

사진은 유엔기념공원이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한 1951년 4월 5일에 치러진 행사 모습이다.

  • 질문1 사진을 보면 단상에 종교 예복을 입고 있는분과 군인 장교처럼 보이고 분들이 있고, 그 뒤쪽에 작은 십자가들이 모여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무엇을 위해 만들어진 곳으로 생각되나요?
  • 질문2 사진에 나오는 행사가 치러지고 있는 곳은 어느 곳으로 짐작되며, 현재 이곳은 어떤 이름으로 불러지고 있나요?

시각자료 3

위의 사진은 6․25전쟁 당시 참전한 노르웨이군 의료지원부대의 모습이다.

  • 질문1 사진 속에서 이곳이 군병원임을 짐작할 수 있는 것들로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 질문2 표지판에 ‘NORWEGIAN MOBILE SURGICAL HOSPITAL’라고 쓰여 있다. 이를 해석해 보고, 이들 노르웨이군 의료지원부대가 어떤 일들을 하였으며, 또 당시 우리나라 의료분야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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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6․25전쟁이 일어나자 유엔군은 한국군을 돕기 위해 참전하였고, 중국군은 북한군을 돕기 위해 참전하였다. 한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에 다른 나라들이 직접 참전하는 것에 대해 ‘참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측과 ‘참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측, 두 모둠으로 나누어 자신의 생각을 주장해 봅시다.

모둠활동 2
한 나라의 전쟁에 다른 나라가 군대를 파견할 때 정당한 절차를 밟거나 나름대로의 구실이나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6․25전쟁 당시 유엔군이 우리나라에 파병한 과정을 바탕으로 국제사회에서 어떤 절차를 걸쳐 파병이 이루어지는지 조사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6․25전쟁 당시 전 세계의 원조와 지원을 받던 우리나라가 이제는 전 세계 분쟁 지역에 의료 및 공병부대 등을 파견하여 세계평화에 이바지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파병한 나라로는 어떤 나라들이 있으며, 파병된 부대의 이름, 성격, 규모 등을 조사하여 보고서로 제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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