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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천 파로호 전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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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에서 시작하여 휴전선을 넘은 북한강은 ‘아름다운 냇물’이란 뜻을 가진 화천(華川)에 이르러 파로호를 만나 맑고 잔잔한 호수를 이룬다. 호수 주변으로 높은 봉우리가 둘러싸 있어 경관이 수려하고, 주변 숲에는 각종 동식물과 수면 아래에는 수많은 담수어민물고기들이 낙원을 이루고 있다.
파로호는 일제강점기인 1938년 일제가 대륙 침략을 위해 건설을 시작하여 1943년 준공되었다. 발전용량 10만 800kw의 수력발전소로 화천군 간동면 구만리와 화천읍 동촌리 사이의 북한강 좁은 수로에 높이 86.5m, 길이 435m의 화천댐이 만들어짐에 따라 형성된 저수지이다. 처음 호수가 만들어 졌을 때 이곳의 이름은 ‘화천저수지(구만리저수지)’였는데, 1945년 해방 직후에는 38선 이북 즉, 북한지역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6·25전쟁은 이 호수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이곳에서 미 제9군단 소속의 국군 제6사단과 미 제7사단, 그리고 미 공군이 1951년 5월 24일부터 28일까지 이리저리 흩어지며 쫓기던 중국군(예전에는 ‘중공군’이라고 불렀다.)을 공격, 6·25전쟁 과정에서 가장 큰 승리를 얻게 되었다.
이곳 파로호 전투에서 아군은 중국군 62,000명을 사살하거나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기쁜 소식을 들은 이승만 대통령은 승리를 기리기 위해 화천저수지를 ‘오랑캐를 대파한 호수’라는 뜻으로 ‘파로호(破虜湖)’라고 고쳐 부르게 하였다. 6·25전쟁이 끝난 이후 파로호는 38선 이북이면서 대한민국에 속한 호수가 되었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현재 상태

1950년 10월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향해 거침없이 진격을 계속하게 되자, 한반도의 통일은 현실로 다가온 듯 했다. 그러나 예상외로 중국이 개입함으로써 6·25전쟁의 향방은 다시 뒤바뀌게 되었다. 
당시 중국은 전세가 북한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될 때는 별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이 붕괴되고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향해 진격해가자 공공연히 전쟁에 개입하겠다는 의사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유엔군 측은 “중국은 결국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유엔군의 판단과 달리 실제로 중국은 이미 전쟁에 개입했을 뿐만 아니라 병력 규모도 예상외로 컸다. 
중국이 6·25전쟁에 개입하면서 중국은 “자신들의 참전은 북한의 군사원조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며, 만일 북한이 미국에 의해 점령된다면 적대국가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어 국내 및 국제적으로 자신들에게 불리한 일이 많이 발생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중국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된 후인 10일 1일, 소련과 북한으로부터 공식적인 지원 요청을 접수했다. 이에 따라 마오쩌둥〔毛澤東〕은 10월 8일 ‘항미원조(미국에 대항하고 조선, 즉 북한을 도움) 보가위국(가정을 보호하고 나라를 지킴)’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그동안 출전태세를 갖추어 온 동북변방군을 ‘인민지원군’으로 다시 편성하여 출전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그 사실을 소련의 스탈린과 북한의 김일성에게 통보하였다.
이처럼 중국은 6·25전쟁에 중국군을 투입하면서 그들을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는데 한반도에 파견된 군대는 중국 정부가 미국 또는 유엔 회원국과의 전쟁을 위해 정식으로 파견한 군대가 아니라 인민들이 스스로 지원해 조직된 군대라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이 ‘인민지원군’으로 불렀던 군대는 사실상 중국의 정규군, 즉 ‘인민해방군’의 일부였다. 한국에 투입된 중국군은 참전 경험이 많은 정규 군인들로 구성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지휘부도 마오쩌둥의 명령에 의해 총사령관에 펑더화이〔彭德懷〕, 부사령관에 덩화[鄧華〕·홍쉬에쯔〔洪學智〕·한시엔추〔韓先楚〕, 참모장에 셰방〔解方〕이 임명되는 등 중국군군을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중국이 보내는 ‘지원군(돕기 위한 군대)’이라 하지 않고, 인민이 지원해 이루어진 ‘지원군(바라서 원한 군대)’이라고 한 것은 중국 인민이 조선 인민을 돕는 민간 차원의 군대라고 겉모양을 포장하려 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신들의 참전이 ‘미국과 유엔에 대한 선전포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하여 상대방을 속이기 위한 술책이었던 것이다.
그 후 지원군에 대한 소련의 공군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아 두 차례나 출병이 연기되기도 하였으나 10월 19일, 제4야전군 소속 제13병단의 6개 군 18개 사단(약 18만 명)이, 11월 초순에는 제3야전군 소속 제9병단 3개 군 12개 사단(약 12만 명)이 각각 압록강을 건너 참전함으로써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피리와 꽹과리, 나팔 등을 불며 좁은 장소에 압도적인 병력을 투입하여 밀집대형으로 전진하는 이른바 ‘인해전술’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유엔군의 집중 화력과 공중 공격을 피해 야간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유엔군에 대한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고 최대의 전과를 거두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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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읽기자료 1

1950년 11월 말 중국군은 기습적인 공세(공격)를 감행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향해 진격 중이던 국군과 유엔군을 격파하였다. 예상치 못했던 중국군의 대공세에 충격을 받은 유엔군사령부가 전군을 38선 남쪽으로 철수시키자 그들은 손쉽게 평양을 점령한 후 12월 중순에는 38선까지 남하하였다. 중국군의 개입은 없을 것이라며 자신만만했던 유엔군사령부는 38선으로 철수한 이후에도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중국군이 38선에서 멈춰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자유진영 국가들의 기대는 곧이어 시작된 중국군의 공세로 인해 무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마오쩌둥은 중국군 총사령관 펑더화이에게 즉각적인 공세로 서울을 점령할 것을 명령했다. 마오쩌둥의 지침에 따라 펑더화이는 12월 31일을 공격개시일로 정했다.
1950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은 일요일이었다. 오후 5시경, 서부전선에 배치된 중국군과 북한군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일제히 공격해왔다. 20만에 가까운 대병력이 몰려오면서 서부전선의 계곡과 능선은 중국군으로 뒤덮이게 되었다. 중국군들은 문산 우측의 제1사단과 동두천의 제6사단 등 한국군 부대를 집중 공격했다. 국군은 있는 힘을 다하여 용감하게 싸웠으나 시간이 갈수록 거세지는 중국군의 인해전술을 감당할 수 없었다.
해가 바뀐 1951년 1월 1일 오전,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중장은 전투현장을 확인했다. 그는 국군과 유엔군이 현 위치에서 계속 싸우다 보면 주력(중심이 되는 힘 또는 그런 세력)이 중국군에게 포위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판단했다. 모든 부대를 한강-양평-홍천을 연결하는 선으로 후퇴시킨 리지웨이는 1월 3일 오후 다시 평택-안성을 연결하는 선으로 철수하게 했다. 
이에 따라 1월 4일 오전까지 한강 이북의 모든 부대들이 한강에 임시로 설치된 다리를 이용하여 철수했다[1․4후퇴]. 유엔군이 서울에서 물러나자 그 뒤를 따라 중국군이 서울을 점령했다. 오후 3시경부터 서울시청 등 주요 건물에는 인공기가 펄럭이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철수한 국군과 유엔군은 수원과 오산을 지나 단숨에 37도선까지 후퇴한 뒤 1월 6일, 평택-안성을 연결하는 방어선을 설정했다. 서부전선의 부대들이 중국군에 밀려 평택-안성까지 후퇴하는 동안, 2개 군단 규모의 중국군은 가평-춘천지역에서 북한군과 함께 공격해 왔다. 하지만 중국군의 공세는 1월 8일을 전후해 모든 전선에서 일제히 멈추었다. 그들의 목표가 서울을 점령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평택-안성까지 철수한 서부의 유엔군 주력은 일단 중국군과 부딪히지 않고 부대를 수습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중국군은 서울을 점령할 수 있었지만, 국군과 유엔군 역시 서울에서 빠른 기간에 철수함으로써 주력을 보존해 뒷날 다시 공격할 수 있었다.
그때 만약 중국군이 “유엔군 주력을 격멸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후속부대를 늘려 서울을 점령한 후 계속 공격하거나 북한군과 함께 주력을 원주-충주-대전 방향에 투입했다면 유엔군은 수습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때까지도 유엔군사령부는 중국군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유엔군은 중국군이 공세를 계속했다면 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 질문1 왜 유엔군은 한강 이북의 모든 지역을 포기하고 빠른 기간에 안성-평택 방어선을 만들었을까요?
  • 질문2 1․4후퇴와 관련하여 당시 유엔군에게 있어서 “서울은 빼앗긴 것이 아니라 내주었다.”라는 표현을 하기도 하는데, 이 말이 뜻하고 있는 바는 무엇일까요?

읽기자료 2

국군과 유엔군은 중국군의 공세가 누그러들자 신중하게 한강 남안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미 제8군은 한강 이남지역에서 강력한 수색작전을 실시할 목적으로 ‘선더볼트 작전’ 즉 번개작전이라고 명명된 작전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에는 미 제1군단과 제9군단 그리고 전차가 증강된 미군 1개 사단과 국군 1개 연대를 추가로 투입하여 한강까지 수색작전을 펼치도록 되어 있었다. 
수색작전의 결과 한강 이남에 대규모의 공산군 병력이 관측되지 않자 국군과 유엔군은 한강으로 진출하기 위해 서해안-오산-여주를 연결하는 공격개시선을 점령하였다. 이어서 각 군단은 반격작전으로 전환하여 1951년 3월 초에는 한강남안-횡성-강릉을 잇는 선까지 진출하였다. 이에 따라 아군은 중국군의 개입으로 비롯된 패전의식에서 벗어나 서울을 다시 찾는 것은 물론 38도선의 진출도 눈 앞에 두게 되었다.
미 제8군사령부는 현 전선을 둘로 나누어 서부의 중국군과 동부의 인민군으로 분리시킨 다음, 남쪽과 동측방에서 서울을 포위한다는 작전 전략을 세웠다. 그리고 이번 작전을 ‘전선을 절단하여 적들을 분리한다’는 작전 목적에서 ‘절단작전’이라고 이름 붙였다. 제8군은 이 작전에 전 군단이 참여하되 중부의 미 제9군단이 주축을 이루어 서울 동쪽의 덕소-가평-춘천북방-한계를 연결하는 선까지 진출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적을 둘로 나누는 것은 물론 홍천과 춘천을 점령하여 동측으로부터 수도권지역에 대한 압력을 줄 수 있도록 계획하였다. 
1951년 3월 유엔군의 반격작전에서 주공인 제9군단이 돌파작전을 전개하는 동안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이 한강 남쪽의 낮은 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미 제1군단은 산하 제25사단으로 하여금 한강 이북으로 진출, 북한강을 끼고 있는 높은 지역들을 점령하여 미 제9군단의 측방을 엄호하도록 하였다.
미 제25사단은 3월 7일 동이 트기 직전 3개 연대가 한꺼번에 강을 건너는 작전을 펼쳤다. 사단은 큰 어려움 없이 진격을 계속하여 북한강 서쪽지역까지 올라갔다. 15일 저녁 무렵 제24연대와 제27연대는 서울-춘천 도로까지 진출함으로써 서울의 적을 동측방에서 위협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인천지역을 경계하면서 한강 남쪽의 진지를 방어하고 있던 국군 제1사단의 정찰대는 정찰을 통해 적 병력이 서울-의정부 구간 외곽지역에 광범위하게 배치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미 제8군사령관은 서울 내부에 적이 없음을 확인하고 3월 15일 미 제1군단장으로 하여금 서울 북쪽의 주요 고지군인 북한산 지역을 점령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미 제1군단장은 국군 제1사단은 북한산을, 미 제3사단은 용마산을 목표로 작전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마침내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서울 탈환(빼앗겼던 것을 도로 빼앗아 찾음) 임무를 맡은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는 3월 15일 먼저 제6중대가 강을 건너는 것을 시작으로 다음날인 16일에 제2대대, 제1대대, 제3대대가 차례로 한강을 건넜다. 이들은 시내로 진출, 마침내 서울 전 지역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 질문1 유엔군은 중국군의 공세를 꺾고 전선을 회복하기 위해 실시한 ‘절단작전’은 어떤 식으로 적들을 공격하려는 것인가요?
  • 질문2 유엔군과 함께 국군이 서울 전 지역을 재탈환한 날짜는 ‘언제(몇 년 몇 월 몇 일)’일까요?

읽기자료 3

국군과 유엔군에게 서울을 빼앗긴 이후 중국군은 1951년 4월∼5월 6·25전쟁 참전 이후 최대 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여 두 차례 춘계공세(봄에 이루어진 공격)를 하였으나 대참패를 면치 못하였다. 그들은 4월 공세 때에는 서부전선을 공격하여 서울 외곽까지 진출하였고, 5월 공세 때에는 중동부전선을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다시 일어설 능력을 잃을 정도의 엄청난 손해를 입었다.
반면 유엔군은 전선의 일부가 뚫리면서 30∼65㎞까지 뒤로 물러나긴 하였으나 강력한 화력과 기동력을 이용한 조직적인 지연전을 펼쳐 전투력을 보호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즉시 반격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였다. 특히 국군이 용문산과 대관령에서, 그리고 미군이 벙커고지와 운두령에서 각각 결정적인 승리를 얻어냄으로써 유엔군은 한 달 동안 계속 밀리던 상태에서 벗어나 공격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5월 19일 전선을 돌아본 유엔군사령관은 중동부지역의 적 전선이 지나치게 나와 있다는 사실을 꿰뚫어보고 미 제8군에 전 전선에 걸친 대규모 공격작전을 명령하였다. 중부전선의 미 제9군단은 5월 20일 화천 점령을 목표로 국군 제2사단, 미 제24사단, 미 제7사단, 국군 제6사단으로 공격을 시작하였다. 
25일 오전 춘천 북방지역을 세밀히 관측한 항공 관측자들은 “미 제10군단지역에서 빠져 나오는 1만~1만 2천여 명의 병력과 많은 차량 및 야포가 긴 행군대형을 유지한 채 화천저수지 남쪽을 지나 화천을 향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전선을 맡은 제9군단장은 이들이 통과할 최종 목표인 화천저수지 서쪽의 도로 교차점을 빠르게 점령, 적들이 도망갈 길을 막았다.
공격의 선봉에 나선 미 제24사단 제21연대와 미 제7사단 제17연대는 26일 오전 지암리에서 합류하였고, 이 무렵 국군 제6사단 19연대도 지암리 부근으로 진출하였다. 이로써 3개 연대는 춘천-화천 도로와 가평-지암리 도로, 그리고 지암리 남쪽의 국군 전선으로 형성된 삼각형 모양의 우리 속에 중국군을 몰아넣었다. 
27일 아침을 전후하여 중국군은 대대 규모로 포위망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후퇴로를 막고 있는 아군에 의해 격멸되고 말았다. 이후 조직적으로 탈출을 시도하는 부대는 없었고, 다만 무리를 지어 무질서하게 출구를 찾아 방황할 뿐이었다. 미 제21연대와 제17연대는 북쪽으로 진출하고, 후속하는 국군 제19연대와 증원된 미 제5연대가 합동으로 남은 무리의 적들을 잡아들이는 소탕작전을 펼쳐 2,00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28일 제5연대가 마지막 소탕작전을 펼치는 동안 적은 대규모 집단을 이루어 항복하였는데, 하루에 38,000명의 적이 아군에 항복하였다.
오후로 들어서자 그동안 짙은 구름과 비로 제한받았던 항공폭격이 시작되어 허둥대던 중국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이 틈에 미 제17연대는 오후 2시 화천으로 진입하였다. 그리고 이 무렵 지암리를 공격하던 중 화천저수지 남쪽으로 이동한 국군 제6사단도 이날 공격을 시작하여 적을 격퇴하고 구만리발전소-병풍산 일대로 진출하였다.
5월 28일까지 진행된 이 전투에서 아군은 중국군 62,000명을 사살하거나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 이러한 기쁜 소식을 접한 이승만 대통령은 이 작전의 승리를 기리기 위해 화천저수지를 ‘오랑캐를 크게 무찌른 호수’라는 뜻으로 ‘파로호(破虜湖)’라고 고쳐 부르게 하였다.
한편 중국군의 공세가 끝나갈 무렵 양측은 지금까지 밀고 밀리는 과정에서 어느 한쪽의 결정적 승리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감당할 수 없는 막대한 인적·물적 손실이 따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당시 유엔군이 한반도에 통일한국을 건설할 의지가 있었다면 물러나는 적을 추격해 압록강까지 진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유엔군은 한국 국민과 정부의 간절한 북진 의지를 애써 무시하면서까지 결코 문산-전곡-양양에 이르는 캔사스선을 넘지 않으려 했다. 유엔군의 입장에서 볼 때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전쟁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강 건너 몰려 올 것으로 예상되는 중국군과 장기간에 걸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중국군은 거의 모든 전력을 쏟아 부은 공세가 대참패로 끝나버렸다. 이들은 5차에 걸쳐 최대 80개 사단(인민군 포함)을 투입하여 공세작전을 펼쳐 보았지만, 막강한 화력과 기동력을 앞세운 유엔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낸다는 당초의 목표 달성이 불가능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어찌되었든 전쟁수행 시작 1년 만에 전선은 전쟁 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갔다. 전선이 38도선 부근에서 머물게 되자 양측은 군사적 수단 대신 정치적 수단으로 해결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결국 전쟁의 가장 중요한 세력인 미국과 중국의 이해가 합치되면서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 질문1 이승만 대통령은 화천저수지를 ‘파로호’로 고쳐 부르게 하였는데, 파로호는 무슨 뜻이며, 왜 그렇게 부르도록 하였을까요?
  • 질문2 유엔군이 중국군의 춘계공세를 물리치고 난 뒤 38도선 부근에서 진격을 멈춘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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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 질문1 왼쪽 사진과 오른쪽 사진은 모두 6․25전쟁 당시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다. 왼쪽 사진에서 흩어져 있는 많은 점처럼 보이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되나요?
  • 질문2 오른쪽 사진에서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금속 덩어리들은 무엇이라고 생각되나요?
  • 질문3 두 사진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중국군의 전술은 무슨 전술이었을까요?

시각자료 2

두 사진은 모두 625전쟁에 참전한 중국군(당시 중공군이라 부름)에 대한 관련 사진이다.

   

  • 질문1 위 사진과 아래 사진은 각각 무엇을 보여주는 내용으로 생각되나요?
  • 질문2 위 사진과 아래 사진은 각각 국군·유엔군, 북한군·중국군 가운데 어느 쪽에서 사용한 사진인지 구분해 봅시다.
  • 질문3 위 사진과 아래 사진을 통해 보았을 때 한국군․유엔군과 북한군이 각각 중국군을 바라보는 입장이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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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많은 부분에서 6·25전쟁은 정의내리기 힘든 전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많은 논쟁이 있었던 주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6·25전쟁을 남·북간의 내전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당시 냉전 질서가 만들어 낸 국제전으로 볼 것인지 하는 문제이다. ‘내전이다라는 측과 국제전이다라는 측, 두 모둠으로 나누어 625전쟁의 성격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주장해 봅시다.

모둠활동 2

6·25전쟁에 참전한 유엔군과 중국군은 서로 극명하게 대조되는 전투방식을 사용하였다. 즉 유엔군이 제공권을 장악한 상태에서 압도적인 화력으로 적을 상대하였다면 중국군은 말 그대로 인해전술을 사용하여 전선을 밀어붙이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유엔군과 중국군이 당시 전투에서 사용하였던 무기의 종류를 조사하면서 6·25전쟁에서 사용된 두 전략의 특징을 비교정리하여 보고서로 제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아름다운 자연환경으로 인해 현재 화천 파로호는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 이름이 파로호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6·25전쟁을 머릿속에 떠올리게 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몇 개의 모둠을 만들어 모둠별로 파로호를 찾는 사람들마다 6·25전쟁을 기억하게 하기 위한 아이디어로 어떤 것이 좋을지 토의해 본 후, 토의한 내용을 1000자 내외(A4용지 1)로 정리하여 서로 비교해 보고 가장 좋은 아이디어를 선정해 봅시다.

모둠활동 4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참전용사가 살아계신다면 6·25전쟁에 대한 그분들의 증언을 녹음하면서 들은 후, 녹음된 자료와 함께 그 내용을 정리하여 보고서로 제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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