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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의병 창의지, 자양영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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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로-김평묵으로 이어지는 화서학파의 거두였던 유중교는 1889년 가을, 서울에서 비교적 가깝고 번잡한 춘천을 피해 한적한 제천 봉양의 장담으로 이주하였다. 같은 해 11월부터 매월 상순·중순·하순에 장담서사에서 강회(講會)를 개최하였다. 이 강회는 1893년 3월 유중교가 별세하기 직전인 동년 1월까지 계속 되었다.
그 후 유중교의 사후에 다시 문도들이 모여서 서상렬을 고과(考課, 스승이 부재 시 그 역할을 대리하는 역)로 하여 강회를 지속하였다. 1895년 3월 의암 유인석을 새로운 스승으로 추대함으로써 윤5월부터 10월까지는 유인석이 강회를 이끌었다. 유인석은 1895년 전국에 단발령이 시행되자, “문경을 포기하고 야만으로 돌아가는 일”이라고 하고, 8도 유림 600여 명을 모아서 의병을 일으킬 것을 발의해 전국에서 처음으로 의병으로 창의하였다. 1907년 유림들은 주자·송시열·이항로·유중교의 영정을 모시는 자양영당을 세웠으며, 후에 유인석·이직신의 영정이 추가로 배향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현재 상태

한말 국권회복 운동의 일환으로 일어난 의병운동은 전기 ․ 중기 ․ 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충청북도의 의병운동은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의 시행으로 일어났다. 당시 화서학파의 대표주자인 유중교는 자양영당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그 뒤를 잇는 유인석이 팔도의 유림들을 모아 자양영당에서 의병을 창의하여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이 상실되자 제천지역 유생들은 제천향약을 조직하여 인심을 단속하고 풍속을 바로잡아 일제에 대항하였다. 그 외에도 상소운동 분사 ․ 오적 암살계획을 벌였으며 장기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해외 이주 등의 투쟁을 전개하였다. 
제천의병의 정신적 지주가 된 유중교(柳重敎, 1821~1893)는 1889년 가을 제천으로 이주하여 자리를 잡았다. 그는 일찍이 화서 이항로에게 배운 뛰어난 학자로서, 스승이 떠난 후 한 무리의 학자들을 이끌던 학문적 지도자였다. 유중교는 잠시 지평 벼슬을 받은 적이 있었지만 사실상 초야에 묻힌 선비로서 제자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유중교가 장담에 자리를 잡자 유인석·주용규·서상렬 등 많은 문인들이 따라와 가르침을 받았다. 유중교는 스승의 법에 따라 열흘마다 집중적으로 제자들과 함께 경전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을 지속했다. 유중교는 별세하던 1893년까지 장담서사에서 정기적인 학술토론회를 열어 학풍을 크게 떨쳤다. 송시열-권상하로 이어지는 노론 학계의 강한 영향을 받아 오랑캐를 배격하는 전통을 강하게 가지고 있던 지역의 식자층도 크게 호응하여 장담에서 열리는 학술토론회에 적극 참여하곤 하였다.
유중교가 세상을 떠나자 선비들은 유인석을 스승으로 받들고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격동의 시기를 맞아 그들은 경전과 함께 옛 스승들의 삶과 말씀을 반복하여 공부했다. 이들은 이어지는 변고에 직면하여 일련의 큰 규모의 집회를 열어 사상적 결속을 다지고 의병봉기를 포함하여 현실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의를 계속하였고, 이는 호좌의진의 봉기와 활동으로 이어졌다. 이렇듯 제천이 의병의 무대로 부각된 것은 유중교-유인석으로 이어지는 화서학파 선비들의 활동과 관계가 깊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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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제천 봉양의 장담은 화서학파의 계보를 이은 유중교가 이주한 1889년 이래 많은 선비가 모여들어 강학에 열중하고 있었다. 유중교의 사후에도 그의 제자들은 유인석을 중심으로 척사의 정신을 천명하고 있었다.
그들은 단발이 강행되자 현실에 대처할 방법을 논의했고, 당시 상황을 ‘중화가 오랑캐가 되고 사람이 짐승이 되는 극한 상황’이라고 진단하였다. 그리고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소탕하는 것과, 국외에 망명하여 도맥을 계승하는 것, 그리고 조용히 자결하는 것 등의 방안이 제시되었다.
유인석은 망명하고자 했으나, 일부 소장파 문인들은 의병봉기의 길을 선택하였다. 안승우는 양평 고향으로 돌아가 이춘영과 포수 출신의 김백선 등과 힘을 모아 1896년 1월 12일 원주 안창에서 의병의 깃발을 올렸다. 그들은 제천으로 즉시 진격하였고, 이필희가 대장으로 추대되면서 장담의 선비들이 의진에 모여들었다. 단발을 강요하던 군수 김익진은 도망가 버렸다. 의병들은 밀려오는 적을 단양의 장회협에서 맞아 싸워 귀중한 첫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지휘부는 포군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 전투에서 승리하였음에도 포군들은 영남 지역으로 흩어져 버렸고, 지휘권은 다시 이춘영에게 넘어갔다. 이춘영은 영남으로 내려갔던 포군들을 다시 수습했고, 제천과 강원도의 영서 지역을 돌면서 포군을 모아온 안승우의 부대와 영월에서 다시 합쳤다. 그들은 효과적인 의병 항쟁을 위해서는 권위 있는 지휘부가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유인석에게 대장을 맡아줄 것을 간청하였다. 유인석은 모친상과 능력부족을 이유로 사양하였으나 결국 1896년 2월 7일 영월에서 호좌의진, 즉 제천의병 대장의 자리에 올라 의병봉기의 명분을 전국에 알렸다. 
제천으로 진주한 의진은 일거에 인근 제천 · 청풍 · 단양 · 영춘 지역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친일적 태도를 보이며 협조를 거부하던 단양 군수 권숙과 청풍 군수 서상기를 먼저 처단하였다. 

  • 질문1 제천 봉양의 장담은 화서학파의 계보를 이은 유중교가 이주한 1889년 이래 많은 선비가 모여들어 강학에 열중하고 있었다. 유중교의 사후에도 그의 제자들은 유인석을 중심으로 척사의 정신을 천명하고 있었다. 그들은 단발이 강행되자 현실에 대처할 방법을 논의했고, 당시 상황을 ‘중화가 오랑캐가 되고 사람이 짐승이 되는 극한 상황’이라고 진단하였다. 그리고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소탕하는 것과, 국외에 망명하여 도맥을 계승하는 것, 그리고 조용히 자결하는 것 등의 방안이 제시되었다. 유인석은 망명하고자 했으나, 일부 소장파 문인들은 의병봉기의 길을 선택하였다. 안승우는 양평 고향으로 돌아가 이춘영과 포수 출신의 김백선 등과 힘을 모아 1896년 1월 12일 원주 안창에서 의병의 깃발을 올렸다. 그들은 제천으로 즉시 진격하였고, 이필희가 대장으로 추대되면서 장담의 선비들이 의진에 모여들었다. 단발을 강요하던 군수 김익진은 도망가 버렸다. 의병들은 밀려오는 적을 단양의 장회협에서 맞아 싸워 귀중
  • 질문2 제천 봉양의 장담은 화서학파의 계보를 이은 유중교가 이주한 1889년 이래 많은 선비가 모여들어 강학에 열중하고 있었다. 유중교의 사후에도 그의 제자들은 유인석을 중심으로 척사의 정신을 천명하고 있었다. 그들은 단발이 강행되자 현실에 대처할 방법을 논의했고, 당시 상황을 ‘중화가 오랑캐가 되고 사람이 짐승이 되는 극한 상황’이라고 진단하였다. 그리고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소탕하는 것과, 국외에 망명하여 도맥을 계승하는 것, 그리고 조용히 자결하는 것 등의 방안이 제시되었다. 유인석은 망명하고자 했으나, 일부 소장파 문인들은 의병봉기의 길을 선택하였다. 안승우는 양평 고향으로 돌아가 이춘영과 포수 출신의 김백선 등과 힘을 모아 1896년 1월 12일 원주 안창에서 의병의 깃발을 올렸다. 그들은 제천으로 즉시 진격하였고, 이필희가 대장으로 추대되면서 장담의 선비들이 의진에 모여들었다. 단발을 강요하던 군수 김익진은 도망가 버렸다. 의병들은 밀려오는 적을 단양의 장회협에서 맞아 싸워 귀중
  • 질문3 유인석이 대장으로 있던 제천의병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 질문4 제천의병이 단양 군수와 청풍 군수를 처단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읽기자료 2

1896년 2월 15일 호좌의진은 충주성 공략에 나섰다. 충주는 당시 관찰부가 있는 호서지방의 요지이므로 이곳을 점거하면 호서 일대를 장악하게 되며, 이를 바탕으로 서울로 북상할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충주성에는 경병 400명, 왜병 200명, 지방대 500명 등 1,000여 명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어 공격이 어려웠다.
2월 16일 유인석은 군사 4,000명을 거느리고 제천을 출발했다. 2월 17일 제천 의병은 지방대 두령들의 협조로 성문이 열려진 충주성의 남문과 북문을 통해 무혈 입성했다. 유인석은 입성 후 의병 토벌죄 및 단발 강요죄 등을 내세워 관찰사 김규식을 처형하였다.
2월 17일부터 제천의병은 충주성, 가흥, 수안보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2월 22일 중군장 이춘영은 수안보의 일본군 병참으로 진군하여 좌우에서 에워싸고 공격 하였다. 이때 일본군 7명이 병참 밖으로 나와 응사하였다. 1시간 동안의 접전에서 이춘영은 일본군이 발사한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2월 23일 제천의병은 충주성을 넘어 기습공격을 가하는 일본군 60여 명을 격퇴시켰다. 2월 24일 성을 포위한 100여 명의 일본군은 사격을 가하는 한편 성 밖의 민가를 불태우고 충주향교에 불을 질러 모든 위패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2월 29일 일본군은 단월 방면에서 2일 동안 다시 충주성을 공격하였다. 제천의병은 근처  주요 길목을 지키던 군사를 성안으로 불러들여 일본군을 방어하였다. 3월 2일 가흥에서 출동한 일본군 3개 중대가 다시 충주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가하였다. 일본군은 성안으로 포를 난사하고 사다리로 이용하여 성을 넘어오려고 하였다. 의병과 일본군 간에 충주성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이틀간의 전투로 충주성은 모든 건물이 불타고 민가 100여 호만이 남을 정도의 폐허로 변했다.
3월 5일 제천의병은 관군과 일본군의 양면 공격으로 양식의 공급이 어려워지자 퇴각을 결정하였다. 이에 유인석은 청풍으로 진을 옮겼다.
 10개 남짓한 인근 고을의 지방관을 쫓아내거나 베어 버리고 수성장을 임명하여 광대한 해방구를 건설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영남 지역에 서상렬 부대를 내려보내 영남의 여러 고을 의병을 결속시켜 항일 전선에 서게 하였으니, 이로써 제천의병은 그 이름을 전국에 떨치게 되었다.

  • 질문1 호좌의진이 충주성을 공격한 이유는 무엇이가요?
  • 질문2 호좌의진이 충주성에서 퇴각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3 충주성 전투의 의의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3

제천의병이 근거지를 중심으로 장기전에 들어가자 가흥과 수안보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의병의 보급로를 끊기 위해 물길과 뭍길을 가로막고 나섰다. 특히 가흥의 일본군 병참은 남한강 물길을 이용한 수송수단에 의존하고 있던 제천 일대에 대한 경제적 압박을 가하였다. 
이런 국면을 호전시키고자 제천의병은 다른 의병과 합공하여 가흥과 수안보 ․ 조령일대에서 적극적인 공세에 나섰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게다가 여러 장수가 공동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증폭되었다. 그 결과, 봉기 초부터 의진을 이끌어 왔던 선봉장 김백선이 희생되는 사건이 있었다.
한편, 정부는 아관파천 이후 친러시아 내각의 수립을 계기로 집요하게 의병해산을 촉구하였다. 강화 진위대장 장기렴은 병력을 이끌고 충주 쪽으로부터 들어와서 왕명을 내세우면서 의병을 해산하라고 압박하였다. 그러나 제천의병은 완강히 해산을 거부하면서 제천 인근 지역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고 항전의 의지를 불태웠다. 이후 한 달 넘도록 관군과 의병은 대치상태를 지속하였다. 그동안 제천의병은 영남으로 근거지를 옮기자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심각한 물자부족에 시달렸다.
결국, 1896년 5월 25일에 장기렴의 군대가 청풍 쪽으로부터 제천으로 쳐들어왔다. 제천 남산에서 승리한 관군은 제천을 일거에 장악하였다.
제천을 상실한 유인석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인근의 군현을 전전하면서 관군과 부딪쳤지만, 한번 기울어진 형세는 만회할 길이 없었다.
을미 의병이 해산된 후, 일제의 침략은 더욱 노골화되었다. 특히 친일세력을 동원하여 일진회를 조직하여 앞장서도록 하였다. 의병에 가담하였던 제천의 의병론자들은 스승의 문집을 간행하면서 결속을 다지고, 때로는 위정척사적 성향을 강하게 띠는 향약운동을 통하여, 또는 비밀 결사체를 구성하면서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 후, 강제된 고종의 퇴위와 군대해산은 잠재하고 있던 의병들이 일시에 들고 있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을미의병 당시 유격장이었던 이강년의 봉기가 대표적이다. 해산된 원주진위대에서 무기를 받은 수많은 의병장들, 해산병 출신의 의병들도 일시에 제천으로 모여들었다. 다시 제천은 의병천하가 되었다.
천남 전투에서 일본군 1개 소대를 격퇴한 의병진은 주천으로 이동하여 체제를 정비하는데, 이 과정에서 이강년은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일본군은 제천에 불을 질러 의병의 근거지를 완전히 초토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후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이강년은 이 일대를 근거지로 하여 활발한 의병활동을 벌여나갔다. 특히 산악전에 능하였던 그는 끊임없는 이동과 기습으로 일본군 부대를 공격하였다.
그의 활동무대는 전국적으로 광범위하였다. 한때는 경기도 양주까지 진출하여 서울입성을 노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토벌이 심해지면서 점차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이강년은 의병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던 호남 쪽으로 나아갈 꿈을 안고 제천 일대로 이동하였다. 남쪽에 남아 활동하던 그의 동료와 합하여 경북 북부 지역에서 전개된 서벽·재산 전투는 그가 지휘한 최후의 대규모 전투였다. 그 후 이강년은 병력을 정비하려고 다시 제천 쪽으로 이동하였다가 1908년 6월 4일에 청풍 금수산에서 일본군·순사대의 기습을 받아 체포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강년의 순국은 제천의병의 끝이 아니었다. 이강년과 연대하며 항일활동을 해나가던 수많은 의병부대가 있었으며, 이강년의 동지였던 김상태도 제천의병의 서슬이 퍼런 깃발을 나라가 망한 이후까지도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저항 정신은 그들이 순국한 이후에도 땅에 묻히지 않았다. 일찍이 제천의병의 지도자 유인석에 의해 시도되었듯이 국외에서의 무장투쟁으로 계승 발전되어 나갔기 때문이다.

  • 질문1 제천의병이 어려움에 빠진 이유를 두 가지 써봅시다.
  • 질문2 충주성에서 퇴각한 제천의병은 어떤 활동을 하면서 재기를 준비하였나요?
  • 질문3 이강년의 의병활동에 대하여 정리해 봅시다.
  • 질문4 제천의병의 의의에 대하여 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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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제천에서 이강년 등이 의병활동을 치열하게 전개하자 일제는 의병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1907년 8월 23일, 일제는 의병을 초토화하기 위해 근거지인 제천시가를 방화하였다. 여주 쪽에서 제천 부근에 이르는 길가의 마을이 불길에 휩싸였다. 박달재 부근의 마을도 모두 불태워졌다. 일본군은 관아를 비롯해 제천의 중심지를 남김없이 태워버렸다. 당시 제천향교도 화마의 피해를 입었다. 이후 제천향교는 1922년에 중수되었다.

  • 질문1 일제가 제천과 제천향교를 불태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각자료 2

원통함을 어찌하리. 국모의 원수를 생각하면 이미 이를 갈았는데, 참혹한 일이 더욱 심하면 임금께서 또 머리를 깍으시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의관을 찢긴 나머지 또 이런 망극한 화를 만났으매, 천지가 번복되어 우리 고유의 이성을 보전 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 부모에게 받은 머리털을 풀베듯이 베어 버리니 이 무슨 변고입니까. (중략) 이에 감히 먼저 의병을 일으키고서 마침내 이 뜻을 세상에 포고하오니, 위로 공경에서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 어느 누가 애통하고 절박한 뜻이 없겠습니까.

-‘유인석의 창의문’, 1895. 12-

  • 질문1 ㉮㉯에 해당하는 역사적 사건은 무엇인가요?
  • 질문2 유인석의 의병활동에 대해서 정리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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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모둠별로 유인석의 입장에서 전국 유생들에게 의병을 권하는 창의문을 만들어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2

모둠별로 충북지역의 의병과 관련된 사적지를 조사하고, 이를 바탕으로 연표를 작성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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