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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양산경찰서터 양산농민조합시위지(일제의 경제 침탈에 맞선 양산 농민)

도입

소작료는 4할로 함.
지세는 지주 부담, 운반은 18정보 이상에는 일체 비용을 지주 부담으로 함.
가마니 철폐, 종자 예납 철폐, 소작계비 및 강제 조 저축 철폐.
근량 철폐, 품종 지정 철폐


1931년 가을 일본인 지주를 비롯한 대지주들이 고율의 소작료를 요구하자 이에 맞서 양산농민조합이 총회에서 결의한 내용이다. 이 결의안을 보면 일제 강점기 양산의 가난한 소작 농민의 부담이 대단히 무거웠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부담을 이겨내기 위해 양산의 농민들은 하나로 뭉쳐 농민조합을 결성하고 맞서 싸웠다.
1931년 일본인 대지주 등은 흉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높은 소작료를 요구하였다. 이해 4월 결성되었던 양산농민조합은 농민들의 권익 보호와 조합원 확대 및 농민 단합을 위한 연설회를 열었다. 양산군 전체를 돌면서 진행된 이 연설회에 대한 처벌로 일제 경찰은 조합원 간부 18명을 검거하여 양산경찰서 유치장에 가두었다.
이러한 탄압에 맞서 경찰서에 갇힌 간부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간부들을 구출하기 위해 벌인 투쟁이 양산경찰서 습격 사건이다. 김장호·김외득·김태근·최달수 등을 선두로 조합원 300여 명이 양산경찰서에 진입하여 수감자들의 무조건 석방을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양산경찰서는 공포탄을 쏘며 저지하였지만 더욱 시위대가 강경해지자, 양산경찰서장은 실탄을 시위대에 발포하여 2명의 조합원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양산농민조합원 80여 명이 검거되고 불구속 100여 명을 포함하여 200여 명이 조사받았으며, 1932년 7월 23일 예심이 종결되면서 소요죄로 17명이 기소되고 3명이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양산경찰서 습격 사건은 일본 경찰의 비호(庇護 : 감싸서 보호함) 아래 자행된 일본인 대지주의 횡포와 착취에 온 몸으로 저항한, 양산 지역의 항일 운동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대규모 항일 민족 운동이었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경상남도 양산시 북부동 331(경상남도 양산군 양산면 북부동)
[도로명 주소 : 경상남도 양산시 북안남5길 15]
현재 상태 당시 건물은 없어지고 현재 노인 회관이 들어서 있다.

일제는 1910년대 토지조사사업, 1920년에서 1930년대 초반에 걸친 산미증식계획, 1930년대 농촌진흥운동 등의 식민 농업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와 같은 정책을 실시한 목적은 일본인 지주와 친일 지주를 중심으로 하는 식민지 지주제의 형성과 그를 통한 토지와 곡식의 약탈이었다.
1910년대 일제의 토지수탈 정책으로 대다수 토지가 총독부에 귀속되어 동양척식주식회사, 불이흥업 등 일본인이 경영하는 토지 회사나 일본인 이민자에게 불하되었고, 일부 한국인 지주도 있었지만 양반 출신으로 대부분 친일 경향을 가진 자들이었다. 경작자인 농민은 경작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매년 다시 계약을 해야 하는 불안한 신분의 영세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또 자작농이라 하더라도 점차로 몰락하여 토지를 팔고 결국 소작인이 되거나 살던 곳을 떠나 떠도는 신세로 전락하여 갔다.
1920년대 일본은 여러 지역에서 쌀값의 폭등으로 폭동이 일어나는 등 식량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일제는 식민지인 조선에서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여 토지 개량과 농사 개량을 통해 늘어난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 자국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결국 늘어난 쌀 생산량보다 더 많은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 조선에서의 쌀값 폭등을 초래하였다. 게다가 대지주에게 이득이 돌아가는 수리조합 설치비용 등, 쌀 생산을 늘리기 위한 각종 비용을 지주가 아닌 소작농이 부담함으로써 가난한 영세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소작농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든 것은 지주가 거둬들이는 고율의 소작료와 마름의 횡포였다. 소작인들은 수확량의 7할~8할까지도 소작료로 내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게다가 지주를 대신하여 소작지를 관리하는 마름은 소작 계약을 무기로 소작료를 늘리거나, 소작인들에게 선물을 받는 등의 횡포를 부렸다.
이곳 양산에서도 일본인 지주를 비롯한 악덕 지주들과 마름에 의한 횡포는 양산의 소작농들에게 커다란 고통이었다. 수확의 70%가 넘는 고율의 소작료는 물론이고 말을 듣지 않으면 소작인을 함부로 바꾸고, 중간에서는 마름들이 소작료를 빼돌리거나 고리대로 폭리를 취하는 등의 횡포에 생계 위협을 느낀 200여명의 영세소작인들이 1931년 4월 4일 양산 청년동맹 회관에 모여 양산농민조합을 결성하게 되었다.
당시 양산 경찰서 건물은 해방 후에도 계속 양산 경찰서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멸실되고 노인 회관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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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일제 강점기 양산 농민들의 고통

통일신라시대의 양산 지역은 양주도독부의 소재지로서 부산, 울산을 비롯한 경상남북도 일원의 광활한 지역을 관할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부터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통도사에서 양산천변에 이르는 적은 면적의 기름진 토지와 대저면의 강변을 개발한 농토 등이 농지의 거의 전부였다. 이마저도 수해로 인해 흉년이 드는 경우가 많아 농민들은 매우 어려운 생활을 해야 했다.
1922년 3월 31일 양산수리조합이 창설되고, 1926년 양산천 개수 공사가 완공되면서 비로소 농지 부족을 벗어나게 되었다. 메기만 사는 쓸모없는 늪지였던 ‘메기들(현재의 양산평야)’이 1,011정보에 이르는 기름진 농토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그 혜택은 양산농민에게 돌아가지 못하였다.
일제의 농업 정책은 기본적으로 지주층을 옹호하면서 생산력 증대를 꾀하여 자국의 부족한 쌀을 보충하기 위한 것으로 동양척식주식 회사를 앞세워 가난한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아 일본인과 조선인 대지주에게 분배하는 것이었다. 양산의 경우에도 일제의 양산천 개수공사 결과 메기들이 기름진 농토가 되었지만, 그 혜택은 소수의 일본인과 한국인 대지주들에게 돌아가고 말았다. 메기들 농토의 대부분은 일본인의 농토가 되었으며, 양산 농민의 약 80% 정도는 영세소작인으로서 대지주의 소작권 이동, 고율소작료 등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처럼 열악(劣惡 : 불리하고 나쁜)한 상황은 소작 쟁의로 표출되었다. 당시 소작쟁의의 쟁점은 소작료, 소작권, 작권료, 조합비, 각종공과금, 잡비 등이었다. 지주들의 횡포로 소작료가 수확의 7~8할을 넘는 경우도 발생하였으며, 고율의 소작료 이외에도 소작을 주는 대가를 징수하는 악독한 지주도 있었다.

  • 질문1 일제 강점기에 개발된 메기들의 기름진 농토가 대부분 일본인 지주의 땅이 된 이유를 찾아 써 봅시다.
  • 질문2 양산의 소작농민들이 소작쟁의를 일으킨 이유를 정리해 봅시다.
  • 질문3 일제 강점기에 농민을 더욱 몰락하게 만든 각종 부담은 어떤 것들이었는지 말해 봅시다.

읽기자료 2

양산농민조합의 결성과 항일 투쟁

1920~30년대 농민운동은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생존권 투쟁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횡포와 일본인 대지주의 수탈에 대항하는 항일운동의 의미도 있었다. 양산 지역의 농민 운동은 1922년 양산수리조합이 창설되고, 1926년 저습지 메기들이 기름진 농토가 되면서 시작되었다.
1920년대 초의 농민운동은 농민들의 자연발생적인 소작쟁의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192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사회주의적 성향을 가진 농민운동 조직들이 전국 각지에 조직되어 활동하였다.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농민운동은 1931년 신간회가 해소되면서 사회주의자들이 공장과 농촌의 현장에 들어와 활동하면서 더욱 활성화되었다.
1930년 초 양산농민조합도 이러한 배경에서 결성되었다. 1931년 양산청년동맹 및 신간회 양산지부가 해산되면서, 두 단체의 역량이 양산농민조합 결성에 집중되었다. 그 결과 1931년 이후 양산의 항일운동은 양산농민조합이 주도하는 농민운동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양산농민조합은 1931년 4월 4일 양산청년동맹회관에서 200여 명의 조합원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되었다. 변한준의 사회로 임시집행부 의장 이원기, 서기에 김용호, 문치선, 사찰 김희수, 설상조 등이 피선되어 의사를 진행하고 강령 및 규약을 축조심의 통과 후, 집행위원장에 이귀운이 선출되었다.
특히 양산의 대표적인 사회주의 운동가였던 전병건이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양산농민조합의 운동 방향과 지침을 결정하는 데 사회주의자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양산농민조합은 일본인 및 한국인 대지주들을 압박하면서 소작 조건을 혁신하기 위한 맹렬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 질문1 양산농민조합의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두 단체의 명칭을 적어 봅시다.
  • 질문2 양산농민조합의 활동에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사상을 이야기 해 봅시다.

읽기자료 3

양산경찰서 습격 사건

양산농민조합의 활동 가운데 특히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은 구속된 농민조합 간부를 석방시키기 위해 1932년 일으킨 양산경찰서 습격 사건이다. 1931년 가을 일본인 대지주 등은 흉년인데도 고율의 소작료를 요구하였다. 양산농민조합에서는 10월 정기총회에서 요구를 거절하고, 소작료를 수확의 4할로 결의하고 이를 일본인 대지주들에게 통고하였다.
일본 경찰은 이 통고문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1931년 10월 27일 집행위원장 오성철과 간부 김용호, 김장호, 변한준 및 소년동맹원 박영환등을 잡아 가두었다가 11월 5일 불기소로 석방하였다.
1932년 2월 양산농민조합 제3회 정기 대회에서 전병건이 집행위원장에 선임되었고, 이날 토의에서도 소작료 4할이 결의되자 대회를 감시하던 일본 경관이 이를 제지하였다. 이후 3월 14일과 16일 양산농민조합의 간부들이 지역을 돌면서 농민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 싸우자는 연설을 하자, 현장에서 이들을 불온 연설자로 잡아서 구류(拘留 : 한 달 미만의 기간 동안 옥에 가둠)와 벌금형에 처하였다.
당시 상서면 교리에 피신 중이던 양산조합 집행위원장 전병건은 김장호로부터 이러한 사실을 보고 받고, 김장호에게 전 조합원을 비상소집하도록 하여 16일 저녁 9시 300여 명의 조합원이 구름처럼 경찰서로 집결하였다. 조합원들이 경찰서로 진입하여 포위하고 구금자 가족을 앞세워 정문 현관에서 대치하면서 석방을 요구하자 경찰서원들이 앞을 막고 저지하였다. 김장호 등은 경찰서 안으로 군중의 진입을 유도하고 경찰서 내로 뛰어들자, 군중은 함성을 지르며 밀고 들어와 저지하던 경찰과 맞부딪쳐 밀고 당기는 난투극이 벌어졌다. 일부 군중은 돌을 던져 서장실 창문을 부수고 기물을 파괴하면서 순사들을 다 죽이라고 함성을 지르며 사태의 분위기는 일촉즉발(一觸卽發 : 조금만 건드려도 폭발할 것 같은)의 험악한 상태로 몰아갔다.
경찰저지대가 공포탄을 쏘았으나 흥분한 군중은 위협을 느끼기는커녕 도리어 강한 기세로 무조건 석방을 외치며 밀어붙였다. 이에 일본인 양산경찰서장 만행호웅(滿行號雄)이 실탄을 장전하여 군중을 향해 발사했다. 이때 조합원 윤복이(당 52세)와 양산면 남부동 이만줄(당 17세) 2명이 총을 맞고 현장에 쓰러져 즉시 의사에게 응급 처치를 받았으나 5시간 후 두 사람 모두 숨을 거두었다.
시위대의 기세가 누그러지자 무장 경찰 70여 명이 트럭에 나누어 타고 저녁 10시 30분경에 도착하여 군중을 강제로 해산하며 주모자를 체포하였다. 그러나 주모자 전병건 등은 피하고 없었다. 해산 군중은 일부 집으로 돌아가고 소년부 요원들은 북부동 조합회관으로 모였다. 전병건의 지시 하에 소년부 요원 50여 명이 새벽 3시를 기하여 경찰서 유치장을 습격하여 구속 간부 탈환 작전을 재시도 하였다. 그러나 경찰병력의 삼엄한 경비망을 뚫지 못하고, 정문에서 구속자 석방을 외치며 항의하다 30여 명의 소년부 요원이 잡혀갔다. 일제는 다음날인 17일 아침 구속간부 17명, 소년부원 30명 도합 47명을 13대의 자동차에 나누어 태우고 경남도경 상무관으로 옮겨 감옥에 가두고 조사하였다.
이 사건의 주모자인 전병건은 피신하여 부산 초량동에 숨어 있다가 같은 해 3월 24일 검거되었고, 그를 숨겨주었던 양산서부자동차 운전기사 정기옥도 함께 잡혔다. 행동대의 주모자였던 김외득은 김해, 부산 등지로 피신하였다가 1932년 4월 2일 밤 물금역에서 마지막으로 검거되었다.
조합원 300여 명이 참여한 이 사건에서 80여 명이 검거되고, 불구속 조사자 100여 명 등을 포함하여 약 200여 명이 조사를 받아 소요죄로 17명이 기소되고 3명이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양산경찰서 습격 사건으로 농민조합의 핵심 간부들이 구속되면서 양산농민조합의 활동은 사실상 중단되었으며 그 후 일경의 계속적인 감시와 탄압으로 조합 활동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양산농민조합은 설립 후 약 1년간에 과감하고도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면서 조합의 권익을 대변하고 일제의 비호 아래 일본인 대지주의 착취와 횡포에 맨손으로 투쟁하였다. 양산지역의 항일운동사에 분수령을 이룬 양산농민조합의 투쟁사와 그 고귀한 항일정신은 재평가 되어야 할 것이다.

  • 질문1 양산농민조합의 소작료 인하 요구에 일본 경찰이 나서서 탄압한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 해 봅시다.
  • 질문2 양산경찰서에 모여든 농민들을 향해 총을 쏜 사람은 누구이며, 이 발포로 농민들이 입은 피해를 적어 봅시다.
  • 질문3 일제 강점기에 노동쟁의・소작쟁의 등 노동자・농민 운동을 주도한 운동가들의 사상은 사회주의이다. 당시 사회주의자들이 추구했던 사회 모습은 어떤 것인지 조사하여 간단히 정리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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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사진은 1931년 4월 10일 보도된 양산농민조합 설립에 관한 기사이다.

  • 질문1 빨간 원 안의 한자를 읽어 보고 순 우리말은 무엇이며, 그 뜻은 무엇인지 써 봅시다.
  • 질문2 위의 제도 철폐와 고리대금 업자의 퇴치를 주요 결의 사항으로 정한 이유를 이야기 해 봅시다.
  • 질문3 일제 강점기 농민들을 괴롭혔던 고리대금업(高利貸金業)의 이자율이 얼마나 되었는지 조사해 봅시다.

시각자료 2

사진은 1932년 3월 18일 보도된 양산경찰서 습격 사건에 대한 기사이다.

  • 질문1 위의 기사에서 양산 농민들이 경찰서를 습격한 이유를 무엇이라고 보도했는지 적어 봅시다.
  • 질문2 양산 경찰서 습격 사건으로 농민들이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 써 봅시다.

시각자료 3

사진은 1931년 당시 양산과 물금역 주변을 보여주는 지도이다.

  • 질문1 위의 지도에서 양산경찰서를 찾아 표시해 봅시다.
  • 질문2 지도에서 양산경찰서 주변의 관공서와 일본인 상점을 찾아 다른 색으로 표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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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일제강점기 농민들 생활의 문제점은 무엇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해 봅시다.
모둠활동 2
1932년 양산에 사는 사람이 되어 양산경찰서 습격사건 당시 나라면 어떻게 행동했을지 상상하여 이야기해 봅시다.(예 : 1. 양산노동조합 간부였다면, 2. 소작농이었다면, 3. 일본인 지주였다면, 4. 양산경찰서 한국인 순사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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