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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행 대구지점 터 - 장진홍 의거지(짧은 생애를 조국에 바친 의열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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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일본 제국이 한국을 빨리 독립시켜 주지 않으면 너희들이 멸망할 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 내 육체는 네 놈들의 손에 죽는다 하더라도 나의 영혼은 한국의 독립과 일본 제국주의 타도를 위하여 지하에 가서라도 싸우고야 말겠다.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으로 사형이 확정된 장진홍(張鎭弘, 1894~1930)이 옥중에서 조선 총독에게 보내는 글이다.
장진홍은 1927년 10월 8일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터트려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장본인이다. 장진홍은 거사 후 일제의 철통같은 경계망을 뚫고 일본으로 건너가 또 다른 거사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1년 4개월이 지나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사형을 언도받은 재판정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는 등 불굴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사형 확정 후 일제에 의한 치욕스런 죽음을 피하려 옥중에서 자결 순국하였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 58-1
[도로명 주소 : 대구광역시 중구 중앙대로 433]
현재 상태 멸실 / 하나은행 건물이 새롭게 들어서 있다.

1919년 거족적인 3·1운동 이후 만주 지역의 독립군들이 조직적인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무장 투쟁 못지 않게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독립운동이 의열 투쟁이었다. 의열 투쟁은 독립운동 진영 내부의 지지와 동의를 얻으면서 실행된 독립운동의 한 방략이었다. 1920년대부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조직된 수많은 조직과 단체들의 의열 투쟁이 전개되었다.
의열 투쟁은 조직적인 단체 의거와 개인적인 결단에 의한 의거가 있었다. 의열단과 한인애국단은 조직적 의열 투쟁을 전개했던 대표적인 단체이다. 의열단은 1920년대, 한인애국단은 1930년대 초반에 의열 투쟁을 전개하였다. 반면에 강우규의 서울역 의거, 송학선의 금호문 의거, 장진홍의 대구 의거, 조명하의 대만 의거 등은 개인이 단독으로 수행한 의열 투쟁이었다. 개인 단독 투쟁은 의거를 혼자서 계획하고 실행해야 하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단체의 조직적 의거 보다 훨씬 비장한 각오를 요구하였다.
장진홍은 그의 나이 21세 때부터 일제에 타격을 가하고 독립을 회복하기 위해 국내와 해외에서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34세 때인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터트리는 거사를 일으켰고, 일제에게 사형을 선고받자, 감옥에서 자결하여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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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출생과 성장

장진홍은 1895년 6월 6일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 문림리(현재의 구미시 옥계동)에서 태어났다. 소년기에는 사립 인명학교(仁明學校)를 다녔다. 인명학교는 현재의 구미 강동교회의 전신인 구제동 교회 내에 설립된 초등 교육 기관이며, 이 학교 출신으로는 장진홍과 함께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이내성(李乃成)이 있다. 인명학교에서 장진홍은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장지필(張志必)에게 배우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장지필은 국운이 날로 기울어져 가는 것을 근심하고 일제가 침탈할 것을 미리 알았으나 일개 선비의 힘만으로는 대세를 뒤집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청년들에게 애국 사상을 고취하는 것을 평생의 임무로 삼아 인명․협성(協成)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장진홍이 애국 사상으로 무장하고 독립운동에 몸담은 것은 장지필의 영향이 매우 컸을 것이다. 1907년 장진홍은 인명학교를 졸업하고, 19세가 되는 1914년 3월 조선보병대(朝鮮步兵隊)에 입대하여 상등병까지 승진하였으나 일제의 군대에 가담했다는 양심의 가책으로 1916년 제대하였다.

  • 질문1 장진홍이 태어난 곳은 현재의 어디인가요?
  • 질문2 장진홍이 인명학교에 다니면서 만난 친구로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인물은 누구인가요?
  • 질문3 장진홍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친 장지필이 평생의 임무로 삼았던 것은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2

만주로의 망명과 귀환, 그리고 3·1 만세 시위

조선보병대를 제대한 후 장진홍은 인명학교를 같이 다녔던 동지 이내성과 함께 광복단(光復團)에 가입하였다가, 1918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만주에 도착하여 선산군 출신인 김정묵(金正默), 이국필(李國弼) 등과 조선 독립 운동의 방안을 협의하였다. 그 결과 해외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켜서 국내로 침공한다는 작전을 계획하고, 연해주의 하바로프스크로 건너가 조선인 청년 100여 명을 규합하였다. 3개월 동안 군대 내무서(內務署) 보병조선(步兵操典)을 설치하고 그들에게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후 적군(赤軍)과 백군(白軍) 간의 러시아 내전이 일어나 일본군이 시베리아로 출동하기까지 하였다. 더 이상의 활동이 어렵게 되어 그가 처음 계획했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장진홍의 귀국 후 전국적으로 3·1 만세 시위가 일어났고, 일제가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이 유린당하였다. 약 2백만 명이 시위에 참가하였는데 7천 5백여 명 피살, 4만 6천여 명 체포, 1만 6천여 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교회와 학교 49개 소, 민가 7백 15여 호가 불탔다. 장진홍은 일제의 비인도적인 만행을 조사하고, 세계 열강에 알려서 일본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아버지 소유의 토지 약 1천 평을 팔아 6백원의 자금을 마련하였다. 장진홍은 서적 행상으로 가장하고 전국 각지를 답사하여 일제가 저지른 학살, 방화, 고문 등의 실상을 낱낱이 정리하였다. 1919년 7월 미국 군함이 인천항에 입항하자, 경북 출신의 하사관인 김상철(金相哲)에게 전달하면서 영문으로 번역하여 각국에 배부할 것을 부탁하였다.

  • 질문1 장진홍이 가입했던 독립운동 단체의 이름을 말해 보시오.
  • 질문2 만주로 망명했던 장진홍이 구상했던 독립 운동 방식을 말해 보시오.
  • 질문3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비인도적인 만행을 목격한 이후 장진홍이 취한 행동을 설명해 보시오.

읽기자료 3

폭탄의 제조 및 거사 계획

경북 경산에서 약 파는 일을 하고 있던 1927년 4월, 장진홍은 이내성의 소개로 일본인 폭탄 전문가이자 국제 공산주의자인 호리키리 시게사부로[堀切茂三郞]을 만났다. 장진홍은 폭탄을 투척하여 민심을 자극시켜서 혁명을 촉진시킬 것을 합의하고 폭탄 제조법을 전수받았다.
그 뒤 일본인 고바야시 호지[小林峯次]로부터 다량의 다이너마이트와 뇌관 30개, 도화선 25척(尺)을 15원에 사들였다. 그는 다수의 폭탄을 제조해서 경북도청, 경북경찰부, 대구형무소, 대구지방법원, 조선은행 대구지점,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 동양척식주식회사 대구지점과 친일 부호 장모(張某)의 집 등 9개소에 던질 것을 계획하고 함께 할 동지를 찾았다. 동지를 모으는 것이 여의치 않자 단독 실행을 결심하고 폭탄 2개를 만들어 칠곡과 선산의 경계를 이루는 산 속에서 벼락치고 비가 오는 날을 택하여 실험하였다.
폭탄의 위력을 확인한 그는 운전사를 매수하여 예정되었던 9개소에 폭탄을 투척하려 하였다. 그러나 운전사 매수 또한 어렵게 되자 투탄 장소를 도청, 경북경찰부, 조선은행, 식산은행, 친일부호 장모의 5개소로 변경하고 인동 자택에서 점화식 시한 폭탄 5개와 자결용으로 작은 폭탄 1개를 만들었다. 그런데 친일 부호 장모의 집은 지리적으로 투탄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나머지 4개 장소에 대한 거사로 다시 계획을 수정하였다.

  • 질문1 장진홍에게 폭탄 제조 기술을 전수해 준 인물은 누구인가요?
  • 질문2 장진홍이 폭탄을 던지려고 계획한 곳의 공통점은 무엇인가요?
  • 질문3 장진홍이 단독으로 의거를 감행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4 장진홍이 폭탄을 던지려고 최종적으로 계획한 곳을 말해 보시오.

읽기자료 4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발 사건의 전말

장진홍은 1927년 10월 17일 폭탄 4개를 자전거에 싣고 자택을 출발하여 대구에 사는 매형 김상한(金商翰)의 집에 도착하고, 풀과 노끈 및 포장용 신문을 구입하였다. 18일 오전 9시경, 장진홍은 노동자 차림으로 폭탄과 필요한 물품들을 챙겨서 대구시 화정동에 있는 덕흥여관(德興旅館)에 10시쯤 도착하였다. 그는 “나는 남산정(南山町)에 있는 요시다[吉田] 상점의 점원인데, 어제 이층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하여 4~5일 묵을 예정”라고 하면서 방을 빌렸다. 그리고는 여관방에서 나무 상자 4개에 폭탄을 넣어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신문지로 포장한 다음 11시 30분경에 여관 종업원 박노선(朴魯宣)을 불렀다. 그에게 선물용 벌꿀 상자를 조선은행 지점, 스도우[須藤] 지사, 이시모토[石本] 경찰부장, 식산은행 지점 순으로 각 1개씩 속히 배달해 달라고 부탁한 다음 신속하게 여관을 빠져 나갔다.
박노선은 아무런 의심 없이 맨 먼저 조선은행 지점으로 가서 은행원인 일본인 후쿠치 코조[福地興三]에게 상자 1개를 내놓았다. 포병 중위 출신인 요시무라[吉村潔]가 화약 냄새를 맡고서 이상하게 생각하여 서둘러 열어 보니, 도화선이 타들어가고 있는 폭탄이 들어 있었다. 그는 급하게 도화선을 끊고 다른 3개의 상자도 건물 앞뜰로 내놓게 조치하고는 전화로 경찰에 급히 알렸다.
고등계 주임과 형사 10여 명이 급히 출동하여 상자들을 은행 옆 큰길가로 옮겨 놓게 한 뒤 1~2분 정도 지나자 폭탄 3개가 연달아 폭발하였다. 이 폭발로 은행 창문 70여 개가 모두 파손되어 그 파편이 멀리 떨어진 대구역까지 날아갈 정도였다. 은행 위의 전선이 모두 끊겼고 경관 4명과 은행 사환 1명, 통행인 1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 질문1 장진홍은 어떤 방식으로 조선은행에 폭탄을 배달하였나요?
  • 질문2 조선은행에서 터진 폭탄의 위력은 어느 정도였나요?
  • 질문3 조선은행 폭발 사건으로 부상을 입은 사람은 모두 몇 명이었나요?

읽기자료 5

제2의 계획과 일본 도피

피신한 장진홍은 친척인 장용희(張龍熙)를 설득하여 경북 안동의 경찰서와 은행을 폭파하기로 하고 폭탄 3개를 제조하였으나, 장용희가 병으로 사망하여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다시 영천에 거주하는 김사실(金士實)을 적임자로 생각하고 거사를 권유하여 동의를 얻어냈다. 그와 함께 영천경찰서와 영천의 부호 이인석(李麟錫)의 집을 폭파하기로 하고 폭탄 2개를 그에게 전달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경계 강화로 김사실은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했고, 장진홍은 더 이상 국내에 머무르며 거사를 도모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1928년 2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12월 도쿄[東京]에 이르러 귀족원(貴族院)과 경시청(警視廳)에 투탄하고 연해주 방면으로 탈출할 계획을 세우고 폭약 입수에 고심하였다.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발 사건 직후 일본 경찰은 1천 6백여 명의 경찰을 풀어 전국적으로 비상 경계망을 치고 마구잡이로 수색하여 용의자를 연행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서조차 발견하지 못하자, 초조해진 경찰은 예전에 독립운동 사건에 연루되었던 인물들을 잡아들여 지독한 고문으로 범행을 조작하여 재판에 회부하는 일까지 벌였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무고하게 옥살이를 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 저항 시인 이원록(李源祿)인데, 그는 이때의 수인번호 264를 따서 이육사(李陸史)라는 이름을 지었다.

  • 질문1 조선은행 폭발 사건 후에 장진홍이 폭파하기로 계획했던 장소를 말해 보시오.
  • 질문2 장진홍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3 장진홍은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어디에 폭탄을 던지려고 계획했었나요?
  • 질문4 장진홍의 조선은행 폭발 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했던 대표적인 저항 시인은 누구인가요?

읽기자료 6

체포와 자결 순국

경찰은 고문으로 사건을 조작하여 무고한 인물들을 공판에 회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극비리에 수사를 진행시켜 나갔다. 그러던 중 경북경찰부의 한국인 경부 최석현(崔錫鉉)이 장진홍을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백방으로 탐문하여 오사카[大版]에 거주하는 그의 아우 장의환(張義煥)의 안경점이 은신처임을 알아냈다. 결국 장진홍은 1929년 2월 14일 자정 무렵 급습한 형사대에게 체포되었다. 장진홍이 체포된 후 영천에 사는 김사실도 최석현에게 체포되어 폭탄 2개를 압수당하였다.
같은 해 2월 19일 대구로 압송된 장진홍은 경찰의 심문을 받고 모든 사실을 말한 후 “일제가 한국을 독립시켜 주지 않는다면 일본이 멸망할 날도 그리 멀지 않을 것이며, 이번 거사는 야만 일본을 타도하기 위하여 폭탄을 던진 것이 성공하지 못하고 너희들의 손에 붙들린 것이 천추의 유한이다.”라고 호통치며 불굴의 기개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검거된 지 반년 후 열린 1심 재판에서 사형이 언도되자 장진홍은 그 자리에서 “조선 독립 만세”를 높이 외쳐서 재판장의 가슴을 놀라게 했다. 2심 재판에서도 사형이 언도된 후 몰래 간직했던 주먹만한 돌을 재판장에게 던지고 “조선 독립 만세”를 크게 외쳤다. 사형이 확정된 후 면회를 온 가족들이 목메어 울자 그가 태연한 얼굴로 웃으면서 오히려 울고 있는 가족들을 위로하였다. 적의 손에 죽임 당하기를 거부한 그는 결국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하여, 1930년 7월 30일 밤 11시에 옥중에서 자결하였다. 35세의 젊은 청춘을 조국 독립의 주춧돌로 바친 것이다.
장진홍의 자결 소식이 형무소에 퍼지자 수감자들이 “장진홍 의사 만세”,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감방 문을 부수며 이를 제지하는 간수들을 넘어뜨리고 그가 숨진 감방으로 몰려와서 대성통곡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튿날에는 1천여 명의 재소자들이 다시 일제히 단식 투쟁을 전개하면서 농성하였다. 이에 일제는 주동자 김기용 등 여러 명을 건조물 파괴죄(建造物 破壞罪)로 기소하여 징역 8개월을 더 늘였다.

  • 질문1 장진홍이 체포된 곳은 어디인가요?
  • 질문2 장진홍이 일본 경찰에서 심문을 받았을 때 크게 소리친 말을 찾아 읽어 봅시다.
  • 질문3 장진홍이 옥중에서 자결을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4 장진홍이 자결하였을 때 그의 나이는 몇 살이었는가요?
  • 질문5 장진홍이 자결한 후 감옥에 갇힌 한국인들이 어떤 행동을 하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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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동아일보』 1930년 2월 18일에 보도된 장진홍 사형 판결 기사이다.

  • 질문1 독립운동가의 시각에서 장진홍의 사형 판결 소식을 접한 심정을 일기 형식으로 써 봅시다.
  • 질문2 자신이 장진홍 의사의 변호사였다고 가정하고, 장진홍의 사형 판결이 부당하다는 내용의 변론을 써 봅시다.
  • 질문3 해방 후, 1949년에 특별법에 의해 구성되었으며, 장진홍을 체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한국인 경찰 최석현 같은 악질 친일파들을 체포하여 벌주고자 했던 임시 기관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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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장진홍에 사형 선고를 내린 일본측을 피고로, 한국측을 원고로 설정하여 역사 재판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연극 형식으로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2
일제 강점기에 장진홍처럼 개인 자격으로 의열 투쟁을 감행했던 사례들을 조사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장진홍의 거사가 계획대로 성공했다는 내용의 가상 역사신문을 만들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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