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학교는 전홍표가 대한제국 초기 밀양읍 내일동에 있는 군관청에 설립한 사립학교이다. 이 학교는 새로운 지식의 습득을 통해 청년을 교육하고 자주독립의 애국사상을 고취하여 항일사상과 항일투사를 육성할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학교를 설립한 전홍표(全鴻杓, 1869~1929)는 밀양군 부내면 내이동 928번지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한학을 공부하였고, 1906년 밀양향교 명륜당 자리에서 시헌 안희원이 중심이 되어 개교한 진성학교 교사를 거쳐, 동화학교를 설립하여 학생들에게 자주독립과 애국사상을 고취하며 항일교육운동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13일 밀양만세운동을 몰래 지도한 혐의로 일제 경찰의 검거 대상이 되자 북간도로 피신하였다. 이곳에서 일제가 3·1운동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상황에서 조선을 해방시키는 방법은 오로지 무장투쟁밖에 없음을 천명하는 내용의「고천문」을 지었다. 이후 밀양으로 돌아와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24년 전후에는 밀양의 향교에 설립된 집성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동화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국권 회복을 위한 항일 투쟁의 필요성을 가르쳤기에 인근 지역에서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몰려들었다. 특히 의열단 설립에 막후 역할을 했던 황상규와 김대지가 동화학교를 나와 모교에서 후배를 양성하였고 그 결과 김원봉·윤세주·최수봉·김상윤 등 의열 투쟁에 앞장섰던 인물이 다수 배출되었다. 특히 김원봉 등은 밀양공립보통학교 등 일제의 노예교육에 반대하며 동화학교에 편입하였다. 동화학교는 한층 더 반일적인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에게 항일사상을 고취시키면서 항일투사로 변모시켜 나갔다. 교사와 학생들은 연무단이라고 하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활동하는 등 향후 의열단 조직의 기초를 닦았다. 또한 3·1운동 때 밀양지역의 만세시위운동을 지도하다 체포, 투옥된 김소지·박소종·정동찬 등도 동화학교 출신이었다. 이 때문에 동화학교는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의 사학 탄압정책에 의해 폐쇄되었고 3·1운동의 막후 역할을 한 전홍표는 일제 경찰의 체포를 피해 만주로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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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
동화학교의 설립자는 누구이며 그의 교육철학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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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2
전홍표의 「고천문」 내용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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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3
동화학교 졸업생 중 의열단원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는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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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4
동화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조직한 비밀결사 조직은 무엇인가요?
조선 의열단은 1919년 11월에 만주 지린성〔吉林省〕 파로문에서 김원봉, 윤세주 등 13인이 조직하였다. 의열단의 이름에는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한다,’ 의미를 담고 있다. 이들은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 단 한명도 배신하지 않았다.
의열단은 창립단원의 절반에 해당하는 인원이 밀양 출신이었다. 특히 이들은 어린 시절 같은 동네에서 유대관계를 맺었던 인물과 같은 지역이지만 밀양강을 사이에 두고 있었던 한봉인·한봉근 형제와 김상윤·최수봉 등 밀양공립보통학교와 동화학교를 통해 유대관계를 형성했던 인물들로 구성되었다. 의열단과 의열투쟁은 밀양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하는 지연·학연·혈연관계를 토대로 하여 결성되었고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고 조선 민중에게 희망을 준 의열단의 동지애와 희생정신은 지역에서 어린 시절부터 맺었던 유대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의열단은 일제의 요인 암살과 식민 통치 기관 파괴를 목적으로 소수 정예의 대원으로 구성되었다. 조직 형태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으며 매우 엄격한 행동 지침을 가진 단체였다. 조직된 지 얼마 후 의열단은 베이징으로 근거지를 옮기고 각지에서 단원을 포섭하여 1925년경에는 70명의 결사 대원을 확보한 단체로 성장하였다.
의열단은 일제에게 위협과 공포의 대상이 될 정도로 많은 의거를 일으켰다. 1920년에는 박재혁이 부산 경찰서 투탄 의거를 일으켰고, 이듬해에는 김익상의 총독부 투탄 의거가 있었다. 1923년에는 김상옥의 종로 경찰서, 김지섭의 일본 황궁 투탄 의거가 있었다. 1926년에는 나석주가 한국 경제 침탈의 본거인 동양 척식 주식 회사와 식산 은행에 투탄하고 총격전을 벌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한편, 1923년 신채호는 김원봉의 요청에 의해 일명 ‘의열단 선언’이라고 불리는 「조선혁명선언」을 발표하였다. 신채호는「조선혁명선언」에서 외교론, 독립준비론과 더불어 당시 국내에서 등장한 자치 운동, 참정 운동을 맹렬히 비판하고 민중 직접 혁명을 통해서만이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개인 폭력 투쟁의 목표가 궁극적으로 민중 혁명을 폭발시키는데 있음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의열단은 1920년대 후반부터 개인 폭력에 의한 의열 투쟁의 한계를 느끼고 무장 투쟁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그리하여 김원봉을 비롯한 단원들은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하여 체계적인 군사교육과 간부 훈련을 받았다. 단원의 상당수가 이때 사회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0년대 후반에는 중국 관내의 민족유일당운동에 참여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1930년대에는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난징 교외에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세워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고(1932), 중국 관내 정당 ․ 단체의 통합운동을 주도하여 민족혁명당의 결성에 중심 역할을 하였다.(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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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
의열단원이 광복이 될 때까지 단 한사람도 배신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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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2
‘의열단선언’으로 불리는 신채호의「조선혁명선언」에서 비판하는 독립운동의 방법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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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3
「조선혁명선언」에서 주장하는 독립운동의 방법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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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4
1920년대 후반부터 의열단원이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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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5
의열단이 체계적인 군사교육과 간부 훈련을 위해 난징에 세운 학교 이름을 써봅시다.
의열단의 의열투쟁의 중심 지역은 창립단원들의 구성을 통해 볼 때 지역적 연고가 있는 경남지역이 가장 유력했고 최고의 의열투쟁 계획도 밀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신문에서 보도된 일명 ‘밀양폭탄사건’ 또는 ‘진영사건’이 바로 그것이었다. 후에 ‘제1차 암살파괴계획’으로 이름 붙여진 밀양폭탄사건은 밀양과 진영에서 직접 제조한 폭탄을 철로와 해로를 통해 각각 들여와 은닉한 후 대부분의 단원이 국내로 잠입하여 투탄의거를 추진하려하였다. 의열단원들은 거사일을 1920년 7월 10일로 정하고 사전에 모여 거사를 계획하다가 부산경찰서와 경기도경찰부의 급습을 받아 체포되면서 좌절되고 말았다. 그 과정에 폭탄 은닉처도 드러났다. 이로 말미암아 의열단원 등 관련자 20명이 일경에 피검되어 그중 15명이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관련자들은 곽재기, 이성우, 김기득, 이낙준, 황상규, 윤세주, 신철휴, 윤치형, 김병환, 배중세, 이주현, 김재수로 대부분 밀양 또는 경남출신이었으며 1차 의거의 대상지를 전국을 목표로 했다 해도 폭탄 은닉처의 위치로 볼 때 경남지역이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1차 암살파괴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한편 ‘제1차 암살파괴계획’이 발각되어 대부분의 동지들이 검거되자, 상하이의 김원봉을 중심으로 하는 의열단은 부산경찰서 투탄의거를 전개하였다. 또 다른 한편, ‘제 1차 암살파괴계획’에서 몸을 숨긴 국내의 의열단은 또 다른 투탄의거를 계획하여 밀양경찰서 투탄의거를 일으켰다.
밀양경찰서 투탄의거를 일으킨 최수봉은 1894년 밀양군 상남면 마산리에서 태어나 밀양공립보통학교와 사립 동화학교를 다니며 동료들과 함께 항일의식을 키웠다. 1920년 11월 밀양군 상남면 기산리에서 김상윤과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고 조선독립을 결의하였다.
최수봉은 1920년 12월 27일을 의거 날로 정하고 26일 저녁 밀양면 삼문리 장봉석 소유의 농막에서 김원석으로부터 폭탄 2개를 건네받았다. 1920년 12월 27일 오전 9시 30분 밀양경찰서장 와타나베가 경찰서원 19명을 모아 놓고 훈시를 하고 있을 때 폭탄 2개를 투척하였다. 그러나 첫 번째 폭탄은 불발이 되고 두 번째 폭탄은 폭발했으나 성능이 좋지 못해 큰 피해는 주지 못했다.
최수봉은 의거 후 자결하고자 하였으나 일제에 체포되고 말았다. 1921년 2월 1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 받았으나 담당검사의 공소로 4월 1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판결을 받았다. 1921년 7월 8일 오후 3시 대구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두 달 전 박재혁의 경우처럼 수많은 조선인들이 몰려나와 또 다른 소요사태를 일으킬까 두려워한 일제는 그의 시신조차 유가족에게 돌려보내지 않았고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집행하고자 한 밀양청년회원들을 기소하는 등 장례까지 치루지 못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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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
의열단원들이 경남지역을 최초의 국내 의열 투쟁의 장소로 삼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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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2
경남지역에서 일어난 의열 투쟁에는 무엇이 있는지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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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3
밀양청년회원들에게 최수봉의 시신을 거두지 못하게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만약 밀양청년회원들이 최수봉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렀다면 무슨 일이 발생하였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