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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찍이 민족적 및 국제 평화를 위하여 1919년 3월 1일 조선의 독립을 선언했다. 우리는 역사적 복수주의를 반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통치로부터 벗어나려는 것뿐이다. 우리의 독립 선언은 정의의 결정이며 평화의 상징이다.
…(중략)…
형제여! 자매여! 눈물을 그치고 규탄하라! 전 세계의 피압박 민족과 무산자 대중은 모두 함께 정의의 깃발을 들고 우리와 함께 보조를 맞춰나갈 것이며 붕괴하고 있는 제국주의의 하나인 일본 지배 계급도 운명이 다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명백하다. 보라! 그들 관청의 기강은 혼란에 빠져가고 있지 않은가! 그들의 정당은 인간 사냥의 도구로 되고 있지 않은가! 그들의 군대는 살아있는 인간을 물고기처럼 죽이고 있지 않은가!
형제여! 자매여! 최후까지 싸워 완전 독립을 쟁취하자! 혁명적 민족 운동자 단체 만세! 조선 독립 만세!
조선은 조선인의 조선이다
횡포한 총독정치를 구축하고 일제를 타도하자
학교 용어는 조선어로!
학교장은 조선인이어야 한다!
조선의 대학, 전문학교는 조선인으로 하자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철폐하자
일본인의 식민지를 철폐하자
일체의 납세를 거절하자
일본인 물품을 배척하자
조선인 관리는 일체 퇴직하라
공장의 노동자는 총파업하라
동일 노동의 동일 임금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라
소작제를 4·6제로 하고 공과금은 지주가 부담하라
소작권을 이동치 못한다
일본인 지주의 소작료는 주지 말자
위 내용은 1926년 6월 10일 순종 황제의 장례식 날을 맞아 대대적으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에 사용된 격문(檄文: 여러 사람에게 알리어 부추기는 글)이나 전단(傳單: 선전이나 광고 또는 선동하는 글이 담긴 종이)에 나온 구호들이다. 격문과 전단은 사전에 미리 인쇄하여 참석한 이들에게 배부되었는데, 이런 유인물을 인쇄․준비하는 일도 만세 운동과 마찬가지로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일제 강점기에는 들키지 않고 몰래 인쇄 작업을 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항일 운동이었다.
비밀리에 준비하여 순종 황제의 장례식 날 대규모로 일어난 6·10만세 운동은 일제 강점기 3대 독립 만세 운동의 하나로, 1919년의 3·1운동을 계승․발전시켜 1929년 광주 학생 운동으로 이어진 항일 투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3·1운동 후 7년 만에 다시 일어난 ‘제2의 3·1운동’이자 1920년대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일제의 자본주의적 침략에 대중적으로 저항한 반제국주의적 성격이 강한 민족 운동이다.
역사적 배경
현재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37 [도로명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3길 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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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태 | 없어짐 / 현재 덕성여고 교정 북쪽 테니스장으로 바뀌었다. |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일제의 식민지 통치 방침이 바뀌었다. 3·1운동으로 무단 통치의 한계를 느낀 일제는 조선인의 치열한 독립 의식을 누르기 위해 강압적 통치 체제와 함께 고차원의 통치 방식을 동원하였다. 1919년 8월 조선 총독부의 3대 총독에 취임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조선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하고 조선인의 행복과 이익을 증진한다.”라며 문화 통치를 발표하였다.
일제는 무관이 아닌 문관도 총독에 임명될 수 있도록 하고,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꾸었다. 조선인의 문화 창달을 앞세워 조선인이 경영하는 한글 신문의 발행을 허용하였으며, 조선인의 정치 참여를 확대하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부분적으로 허용하는 유화적인 통치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문화 통치는 허울에 불과한 것이자 일제의 기만적인 술책에 불과하였다. 문관 총독이 임명된 경우는 한 번도 없었으며, 헌병을 보통 경찰로 바뀌었을 뿐 실제 경찰관의 수와 장비 및 운영비는 물론 재판비와 감옥비가 3·1운동 이전보다 증가하였다. 문화 통치를 표방한 시기에 오히려 더 많은 애국지사들이 잡혀갈 정도로 1920년대의 문화 통치는 1910년대의 무단 통치보다도 경찰 중심의 지배 체제가 강화된 시기였다.
일제는 조선인의 정치 참여를 확대한다는 구실 아래 제한된 범위에서 자유를 허용하며 일제에 협력하는 친일 세력을 양성하였다. 그러면서도 고등 경찰제를 실시하고, 1925년 <치안유지법>을 만들어 항일 민족 운동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더욱 강화하였다. 문화 통치의 본모습은 민족 분열 정책에 불과하였다. 경제적으로는 1920년대 들어와 국내에 급속히 침투한 일본 독점 자본의 경제적 수탈이 더욱 강화되었다. 그로 인해 조선의 노동자․농민을 비롯한 조선 민중들의 처지는 날로 악화되어 갔으며 민족 자본가의 몰락도 촉진되었다.
일제의 탄압이 치밀하게 강화되었지만 조선 민중들의 반일 투쟁은 더욱 적극화되었다. 1920년대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사회주의 사상이 보급되었고, 생존권마저 위협받던 조선 민중들은 사회․경제적 처지를 개선해야 할 곳을 요구하며 전국 각지에서 광범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1925년 경성전기회사 전차 종업원들의 파업 투쟁과 평양의 인쇄 직공 및 양말공장 노동자들의 총파업, 1926년 1월부터 3월까지 목포제유공장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 1926년 5월의 경성방직공장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이 전개되었다. 학생들도 식민지 노예 교육의 철폐를 주장하며 전국 각지에서 동맹 휴교를 벌여 나갔다. 또한 전라남도 무안의 암태도 소작농민들은 높은 소작료에 반대하는 투쟁을 힘차게 전개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사망하자, 이를 계기로 일제의 가혹하고 기만적인 통치 아래 고통 받아 왔던 조선 민중들의 반일․항일 감정이 원한과 울분으로 나타났다. 1926년 6월 10일 순종 황제의 인산일(因山日: 장례식 날)을 맞아 3·1운동과 같은 대대적인 독립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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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6·10만세 운동
1926년 4월 25일 순종 황제가 승하(昇遐: 임금이 세상을 떠남)하자 슬픔과 함께 나라를 빼앗긴 아픔이 물결치며 항일 분위기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일제는 순종의 승하 사실을 하루가 지난 다음 날인 4월 26일에 공식으로 발표하였으며, 각 신문에서 승하 소식을 보도한 것은 4월 27일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4월 28일, 순종 황제의 조문을 위해 사이토 총독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송학선(宋學先)이라는 청년이 창덕궁 금호문(金虎門)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자동차에서 내리는 이를 사이토 총독으로 생각하고 칼로 찔러 죽였다. 그러나 죽은 자는 사이토 총독이 아니라 일본 극우단체 간부 다까야마 다카유키[高山孝行]였다. 비록 사이토 총독을 처단하지는 못했지만 송학선의 금호문 의거는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으며, 항일 분위기를 고조시켜 3·1운동이 다시 펼쳐질 조짐을 만들었다.
조선 총독부는 3·1운동 때와 같은 항일 분위기가 다시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장례식을 철저하게 간섭하며 자신들이 생각하는 방식대로 순종의 장례를 치르고자 하였다. 따라서 자발적으로 장례식을 추진하려는 조선 민중 및 학생들과 이를 막으려는 일제와의 충돌이 예상되었다.
1926년 6월 10일, 순종 황제의 인산일에 대대적인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병인 만세 사건으로도 불리는 6·10만세 운동은 사회 운동가와 학생 세력, 이렇게 두 갈래에서 추진되었는데, 사회 운동 방면에서 만세 운동 계획을 먼저 추진한 세력은 ‘조선 공산당’이었다. 상하이[上海]의 조선 공산당 임시 상해부는 원래 5월 1일 메이데이(May Day)에 즈음하여 대규모의 투쟁을 계획하고, 이를 위해 김단야(金丹冶)를 국내로 보냈다. 4월 23일부터 4월 29일까지 신의주에 몰래 들어와 대중 시위를 준비하던 김단야는 순종 황제의 승하 소식을 접하였으며, 애도의 물결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보았다. 일제가 순종 황제의 승하로 메이데이 기념 행사를 아예 못하게 하자 지금껏 추진하던 메이데이 기념 시위 계획은 헛수고가 되었다. 조선 공산당은 처음 계획한 메이데이 기념 시위 대신 민족적 운동의 형태인 만세 운동으로 방향을 바꿨다.
조선 공산당 임시 상해부는 6·10만세 운동의 거사를 위해 천도교 세력과 함께 준비하였다. 천도교 지도자들은 앞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지원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3·1운동을 주도했다가 막대한 피해를 입었던 천도교는 일제의 친일 세력 육성을 앞세운 기만적인 분열책으로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였으며, 신파와 구파로 분열하여 형편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어려운 사정은 조선 공산당의 경우도 비슷하였다. 1925년 11월 조직이 발각되어 크게 타격을 입은 조선 공산당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당 중앙 기관과 분리된 ‘고려 공산 청년회’를 중심으로 일을 진행해 나갔다.
경상북도 안동에서 김단야를 만나고 돌아온 고려 공산 청년회 소속 권오설(權五卨)은 1926년 5월 2일 조선 공산당 중앙 집행 위원회에서 6·10만세 운동에 대한 조선 공산당 임시 상해부의 뜻을 전하고 당의 방침을 협의하였다. 마침내 권오설은 고려 공산 청년회의 간부인 박민영·이지탁과 함께 투쟁 지도부를 구성하고 몇 차례의 회의를 통해 ① 사회주의·민족주의·종교계·청년계의 혁명분자 모두가 힘을 합쳐 대한 독립당을 조직할 것, ② 6월 10일에 시위 운동을 전개할 것, ③ 시위 방법은 길거리에 시위대를 분산 배치하였다가 격문 및 전단을 뿌리며 독립 만세를 외칠 것 등의 투쟁 방침을 세웠다.
실무 준비에 들어간 투쟁 지도부는 권동진·박인호·박래홍 등 천도교 세력과 손잡는 한편, 천도교 청년 동맹을 지도하던 박래원과 경성인쇄직공조합 위원장인 민창식 등과 함께 격문을 인쇄하고 지방과 연락을 하였다. 그러나 ‘중국 지폐 위조 사건’과 ‘ 『개벽』지 압수 사건’으로 인쇄해 놓은 격문과 전단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면서, 6월 6일 박래원이 잡혀가고, 7일에는 총책임자 권오설마저 체포되었다. 고려 공산 청년회와 천도교 청년 동맹이 중심이 된 6·10만세 운동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6·10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한 세력으로 학생들도 있었는데, ‘조선 학생 과학 연구회’와 ‘통동계’가 대표적인 세력이었다. 조선 학생 과학 연구회는 1925년 9월 서울에서 창립되어 1920년대 후반 서울 지역 학생 운동을 이끈 단체로, 창립 초기부터 일정하게 조선 공산당과 고려 공산 청년회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통동계(通洞系)는 중․고등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세력으로, 어떤 뚜렷한 조직을 바탕으로 한 세력은 아니었다. 이들은 만세 운동을 계획했던 곳인 통동(通洞: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인동)의 이름을 따서 통동계라 불렀는데, 이들은 대개 같은 학교의 친구 내지 하숙집 친우 관계로 얽혀 있었다.
조선 학생 과학 연구회와 통동계는 3·1운동 때처럼 전국적 만세 운동을 일으키기로 의지를 모아가는 과정에서 서로의 계획을 알게 되었다. 이들 두 세력은 만세 운동을 연합해서 추진할 뜻은 있었지만,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 연락만 하면서 각각 추진하기로 하였다.
조선 공산당과 천도교 계통의 만세 운동 계획이 인산일을 불과 3일 앞두고 발각되자, 일제는 모든 경찰력과 군대를 동원하여 철통같은 경계를 하였다. 서울에 동원된 일본 군대는 약 1만 명에 달하는 삼엄한 상황이었다. 인산 당일 장례 행렬이 지나갈 길 양쪽으로 약 2만여 명의 학생들이 늘어서 있기로 했는데, 학생들의 앞뒤로 일제 기마 경찰과 헌병 및 사복 경찰이 포위하여 엄중한 경계와 감시를 하고 있었다.
1926년 6월 10일, 서울 거리는 조선 박람회와 조선 마지막 황제의 장례식을 구경하고자 온 사람들로 가득 차 교통이 혼잡하였다. 조선 학생 과학 연구회와 통동계의 학생들은 이러한 틈을 이용하여 일제의 삼엄한 경계와 감시망 속에서도 일을 계획대로 추진하여 만세 운동을 펼칠 수 있었다. 이날 장례 행렬은 창덕궁(오전 8시 발인)에서 시작하여 종로3가-청계3가-을지로3가-을지로6가-훈련원(오전 11시 영결식)-동대문-창신동-신설동-청량리-금곡 유릉으로 이어졌다. 조선 학생 과학 연구회와 통동계 학생들은 오전 8시 30분 종로 3가에서의 만세 시위를 시작으로 모두 여덟 곳에서 오후 2시 무렵까지 만세 운동을 펼쳤다.
이날의 만세 시위에는 500~600명의 학생들이 참가하였는데, 을지로 부근에서 일어난 시위는 사범학교 담이 무너질 정도로 격렬하였으며, 동대문 앞 시위 현장에서는 일본 기마병의 말발굽에 치이거나 밀려서 쓰러진 사람들로 일대 혼잡을 이루었고, 70~80여 명이 부상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날의 만세 운동은 대부분 학생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일반 군중은 일제 기마병과 군경의 삼엄한 경계 아래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못하였으며, 군중 가운데 몇몇 만이 호응하는 정도였다. 만세 현장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된 학생이 210여 명에 달하였으며, 이후 전국적으로 파급된 만세 운동에서 1,000여 명이 체포․투옥되었다.
- 질문1 금호문 의거(송학선 의거)는 무엇인지 설명해 봅시다.
- 질문2 6·10만세 운동을 추진한 두 갈래는 어느 어느 세력인지 대답해 봅시다.
- 질문3 조선 공산당 세력에서 추진한 6·10만세 운동이 실패한 이유를 말해 봅시다.
- 질문4 6·10만세 운동을 펼친 학생 세력 가운데 대표적인 세력 둘을 써봅시다.
읽기자료 2
6·10만세 운동의 격문 인쇄와 배부
6·10만세 운동은 조선 공산당 임시 상해부와 천도교 세력이 협력하여 준비하였다. 천도교 측의 주요 임무는 격문 인쇄 및 배포와 만세 운동의 지방 확산에 있었다. 조선 공산당의 고려 공산 청년회 소속이었던 권오설은 천도교 청년 동맹을 지도하던 박래원에게 상하이에서 가져온 운동 자금 1천 5백 원을 맡기고 격문의 인쇄를 부탁하였다. 이미 박래원은 경성일보사 직공으로 노농 총동맹과 인쇄직공조합에 관여하던 민창식을 비롯하여 천도교 청년 동맹과 인쇄직공조합 인사들을 중심으로 동지를 구해 손재기·백명천·양재식·이용재 등과 일을 함께 하기로 하였다.
박래원은 권오설로부터 받은 자금으로 인쇄기 2대와 활자를 구입하여 인쇄에 필요한 시설을 갖추었다. 이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5월 17·18일부터 5월 31일까지 감고당 안 민창식의 집에서 6·10만세 운동에 사용할 격문 등 5만 장의 인쇄를 무사히 마쳤다. 인쇄된 격문 5만 장은 6월 3일 밤 경운동 천도교 총부 안에 있는 손재기의 집에 비밀리에 보관토록 하였다.
박래원과 관계자들은 격문의 지방 배포를 위해 발송 지역을 정하고 그 지역의 조선일보 지사, 개벽 지사, 소비자 조합, 천도교 교구, 기타 청년 단체들에게 『개벽』· 『신민』· 『신여성』 등의 잡지 사이에 격문을 넣어 발송하고자 하였다. 또한 이들 지역에서 만세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책임자를 선정하여 파견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전국을 호남선·경부선·경원선·경의선 방면 등 4개 지역으로 나누고 지역 근거지를 중심으로 활동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그러나 상하이의 김단야로부터 6월 초까지 더 오기로 한 격문과 자금이 전달되지 않고 늦어지고 있었다. 박래원은 천도교 지도 인사인 권동진에게 급히 1만 원 가량의 자금 지원을 약속받고 기다렸다. 하지만 중국인 위조 지폐범을 추적(중국 지폐 위조 사건)하고 있던 일제 경찰이 1926년 6월 4일 대한 독립단 명의로 된 격문 1장을 발견하고 수사망을 좁혀 『개벽』지를 압수하면서( 『개벽』지 압수 사건) 개벽사(開闢社)에 숨겨져 있던 격문을 찾아냈다. 이어 6월 6일 손재기 집에 숨겨둔 격문과 전단까지 발각되어 책임자 박래원이 잡혀갔다. 그날 밤 일제 경찰은 감고당 안 민창식의 집을 급습하여 광 속에 감추어 둔 인쇄기와 활자 만여 자까지 빼앗아 갔다. 6월 7일에는 총책임자 권오설마저 체포되는 등 천도교 간부와 개벽사 인사 80명이 잡혀간 이후 연이어 박래원, 권오설 등의 지도부가 체포당함으로써 고려 공산 청년회와 천도교 청년 동맹이 중심이 된 6·10만세 운동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다행히 조선 학생 과학 연구회와 통동계 학생들이 추진한 6·10만세 운동 계획은 발각되지 않았다. 5월 26일 등사판과 용지를 확보한 학생들은 5월 29일 통동 71번지 김재문의 하숙집에서 공동으로 격문을 작성하였다. 작성된 격문은 5월 31일까지 5,000여 장 정도가 인쇄되었다. 거사에 필요한 자금은 고향에서 보내오는 생활비의 일부와 외투, 책을 팔아 충당하기로 하였다. 인쇄된 5,000여 장의 격문을 1인당 1,000장 정도씩 맡아 포섭된 동지에게 배포하는 한편, 6월 8일과 9일에는 시내 각 학교와 전국의 주요 지방 학교에 격문을 발송하면서 만세 운동을 추진해 나갔다. 이때는 권오설 등의 만세 운동 계획이 발각되면서 일제의 경계와 압박이 극도로 가중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들은 재빠르게 행동하면서 격문 배포와 발송을 마치고, 6·10만세 운동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서울 중앙고등학교에는 ‘6·10만세 기념비(六十萬歲紀念碑)’가 세워져 있다. 이는 6·10만세 운동을 이끈 주요 인물 가운데 중앙고 출신이 많았고, 그들의 역할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6·10만세 운동의 총책임자 권오설이 중앙고 출신이었으며, 만세 운동을 주동한 이동환, 박용규, 이선호, 류면희 등은 중앙고보 학생이었다. 6·10만세 운동에 사용할 격문 3만 장은 중앙고보 학생들을 중심으로 인쇄되어 각급 학교에 배부되기도 하였다. 6월 10일 당일 순종의 상여가 종로를 지나가자 중앙고보생 이선호의 선창으로 수십 명의 학생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미리 준비한 격문과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 질문1 권오설로부터 받은 자금으로 박래원이 6·10만세 운동에 사용할 격문과 전단을 왜 개인 집인 민창식의 집에서 인쇄하였는지 말해 봅시다.
- 질문2 고려 공산 청년회와 천도교 청년 동맹이 중심이 되어 준비한 6·10만세 운동은 무슨 사건 때문에 좌절되었는지 대답해 봅시다.
읽기자료 3
감고당과 민창식
감고당은 서울 북촌의 중심인 안국동에 있던 조선 시대 목조 건물로, 숙종이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친정을 위하여 숙종 13년(1687)에 지어준 집이다. 인현왕후의 부친인 민유중(閔維重)이 살았으며, 인현왕후가 폐위된 후 이곳에서 살기도 하였다. 영조가 인현왕후의 일을 회상하며 ‘감고당(感古堂)’이라 적힌 현판을 내린 이후부터 감고당이라 불렸다. 이후 대대로 민씨가 살았으며, 민유중의 종손 민치록의 딸인 명성황후(1851~1895)가 8살 때 여주에서 한양으로 올라간 후 고종 3년(1866) 왕비로 책정되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본래는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쪽에 위치해 있었으나, 1966년 도봉구 쌍문동 덕성여자대학교 학원장 공관으로 옮겨졌다. 2004년 쌍문고등학교 신축 계획에 따라 감고당이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2006년 명성황후 생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던 여주군이 현재 위치인 경기도 여주시 능현동 명성황후의 생가 옆으로 이전․복원하였다. 감고당은 수차례 옮겨지고 수리되면서 본래의 모습이 많이 변형되었지만, 기본적인 가옥의 구조는 유지하고 있다.
감고당 안에 집이 있었던 민창식(閔昌植, 1899∼1938)은 서울 출신으로 중동학교에서 공부한 후 대동인쇄사와 경성일보·매일신보 등의 신문사 인쇄 직공(노동자)으로 일했다. 1920년대 들어 연우사(鉛友社) 동인, 신흥 청년 동맹 회원, 혁청당 당원으로 활동하며 화요회 회원이 되었다.
1925년 서울에서 경성인쇄직공조합을 결성한 민창식은 상무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인쇄 직공 등의 노동자 권익 확보를 위해 힘쓰며 대동인쇄주식회사·창신인쇄주식회사 파업 등에 참여하였다. 당시 대동인쇄주식회사의 직공 파업은 인쇄소 직공들의 불합리한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일어난 것으로, 회사 측은 직공 측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해놓고는 오히려 주모자 등을 해고하였다. 이에 다시 들고 일어난 인쇄소 직공들의 투쟁으로 결국 직공들의 승리로 끝났다. 이러한 때에 그는 직공들과 함께 동맹 휴업을 벌이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민창식은 같은 해 12월 부산 직공 파업 때에도 이를 지원하고자 ‘착취 계급과 피착취 계급’을 강연하기도 했다. 같은 해 고려 공산 청년회에 가입한 민창식은 활동 범위를 넓혀 청년 운동 및 사회주의 활동을 벌여 나갔다.
1926년 3월 조선 공산당에 입당하여 경성부 위원으로 인쇄직공조합이 설치된 경성부 제2구 제1야체이카의 책임자가 되었다. 1926년 6·10만세 운동 당시 격문의 인쇄와 배포를 담당한 민창식은 상하이의 여운형(呂運亨) 등과 연락하여 격문 10만 장을 인쇄하였으며, 만세 운동의 전국 확대를 위해 원산과 평양 등지에서 선전문을 배포하던 중 일본 경찰에 붙잡혀 6·10만세 운동 현장에 참석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1928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이후 소련에 거주하던 중 1938년 소련 공산당의 한인 탄압 당시 총살되었다가 1989년 복권되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질문1 안국동 감고당에 살았던 조선 시대 왕비로 누가 있을지 써봅시다.
- 질문2 민창식은 6·10만세 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떤 임무를 담당하였는지 써봅시다.
- 질문3 6·10만세 운동을 준비한 민창식이 만세 운동 현장에 직접 참석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지 대답해 봅시다.

시각자료
시각자료 1

원래는 서울 안국동에 있던 건물이었으나, 현재 경기도 여주시 명성황후의 생가 옆으로 이전․복원된 건물의 모습이다.
- 질문1 대문 중앙 위에 ‘感古堂’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우리말로 읽어 봅시다.
- 질문2 感古堂은 인현왕후와 명성왕후가 살던 곳이기도 하다. 명성황후를 지칭하는 다른 용어를 참고로 하여 대대로 어느 성씨가 이곳에서 살았을지 써봅시다.
시각자료 2

빨간색 화살표로 표시된 곳은 민창식의 집이 있던 곳으로, 민창식의 집은 감고당(感古堂) 안에 있었다.
- 질문1 민창식의 집은 어느 동에 위치하고 있는지 찾아 써봅시다.
- 질문2 민창식의 집은 없어지고 집터만 남았는데, 그곳은 학교 테니스장 주변으로 밝혀지고 있다. 어느 학교인지 찾아 써봅시다.
- 질문3 민창식의 집은 6·10만세 운동에 사용할 격문을 인쇄한 곳이기도 하다. 어째서 인쇄소가 아닌 개인 집에서 인쇄를 하였을지 대답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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