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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척식 주식회사 - 나석주 의거지(식민지 경제 침탈 투탄 의거를 단행한 의열단원)

도입

조선일보사 귀중

계자(啓者) 본인은 우리 2천만 민족의 생존권을 찾아 자유와 행복을 천추만대에 누리기 위하여 의열 남아가 희생적으로 단결한 의열단의 일원으로서 왜적의 관·사설기관을 물론하고 파괴하려고 금차 회국(回國) 도경(到京)한 바, 최후 힘을 진력하여 휴대물품을 동척 회사, 식산 은행에 선사하고 힘이 남으면 부내(府內) 본정(本町) 1·2·3·4정에까지 출두하여 시가화전(市街火戰)을 하고는 자살하겠기로 맹서코, 실행 전 동포 동족을 보고하오니 이차(以此) 조량후(照亮後) 본인의 의지를 가급적 귀보에다 소개하여 주심을 바랍니다. 그런데 본인이 자살하려는 이유는 저 왜적의 법률은 우리에게 정의를 주려고 만들어놓은 것이 아닌데 불행히 왜경에게 생포되면 본인의 전투력은 다 빼앗긴 후에 소위 심문이니 무엇이니 하면서 세계에 없는 야만적 악행을 줄 것이 명백하기로, 불복하는 뜻으로 현장에서 자살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더 쓰지 않고 그만둡니다.

12월 28일 희생자 나석주 올림.


윗글은 나석주 의사가 1926년에 조선 식산 은행과 동양 척식 주식회사에 투탄 의거를 계획하고 의거를 실행하기 전 조선일보사 신석우 사장에게 게재를 요청했던 편지이다. 그러나 그때 보도되지 못하고 사진 촬영 본이 보관되어 있다가, 21년만인 1947년 12월에야 『조선일보』에 실렸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2가 181
[도로명 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66]
현재 상태 멸실 / 현재 외환은행 본점이 들어서 있다.

나석주가 폭탄을 던진 곳 중 하나인 동양 척식 주식회사는 1908년 일제가 한국 경제를 독점, 착취하기 위하여 설립한 국책 회사였다. 동양 척식 주식회사는 토지 조사 사업의 결과로 총독부에게 불하받은 토지를 대규모 농장으로 운영하면서 농민을 착취하였으며, 일본인의 한국 농업 이민을 주관하여 농촌 공동체를 파괴하고 착취하는 등 일제의 식민지 경제 정책을 일선에서 수행하였다. 또한 1918년에 조선총독부가 설립한 조선 식산 은행은 한국의 산업 금융을 장악하여, 동양 척식 주식회사와 한국으로 이민 온 일본인들의 대토지 획득과 경영을 뒷받침하고, 1920~30년대 일제의 산미 증식 계획을 지원했던 기관이었다.
1910년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든 일제는 헌병 경찰제에 의한 무단 통치를 실시하였다. 한국인들은 강압적인 무단 통치 아래에서도 비밀 결사 활동, 독립 운동 기지 건설 등을 통해 항일 투쟁의 기반을 닦아 나갔다. 나라 안팎의 노력이 마침내 1919년 거족적인 3·1운동으로 나타나 민주 공화제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이라는 성과를 낳았다.
일제는 3·1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 통치’를 내세우면서 우리 민족운동을 회유하고 분열시킬 계책을 꾸몄다. 말로는 ‘문화 정치’를 내세웠지만, 일제는 여전히 경찰력으로 사회를 통제하고 각종 악법을 무기로 삼아 한국인의 저항을 철저히 억압하고자 하였다.
이에 비무장·비폭력 독립운동의 한계를 절감한 망명 독립 지사(志士)들은 민족 독립 달성을 위한 최선의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얻은 결론은 조직적인 무장 투쟁과 폭력적 수단이 필수적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김원봉이 중심이 되어 1919년 만주 지린성[吉林省]에서 항일 무장 독립 투쟁을 표방하는 의열단이 조직되었다.
의열단원 나석주는 1926년 12월 28일 동양 척식 주식회사 및 조선 식산 은행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단행하였다. 일제의 한국 농민 수탈에 앞장섰던 동양 척식 주식회사는 한국 농민들의 원성과 민원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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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읽기자료 1

국내에서의 활동

나석주는 1890년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 진초리에서 아버지 나병헌과 어머니 김해 김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고향의 보명 학교를 거쳐 안악에 있는 양산 학교를 다녔는데, 이때 설립자이며 교사였던 김구의 애제자가 되었다. 동양 척식 주식회사가 재령평야 9만 평을 강제로 빼앗은 지 2년 후인 1913년, 나석주는 처자를 데리고 북간도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이동휘가 운영하던 나자구 무관 학교를 다녔다.
1915년 모친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귀향하여 농사를 지으며 정미소를 경영했는데, 1917년 동척(동양 척식 주식회사의 줄임말) 사리원 지점에 농토를 전부 몰수당하고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김덕영을 비롯한 동지들과 수만 장의 태극기를 만들어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3월 10일 재령군 북률면 내종리 장터의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3·1운동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그는 출옥 후 1920년에 김덕영, 최호준, 최세욱, 박정손, 이시태 등의 5명 동지들과 항일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무기를 구입하였다. 이들은 군자금 모금 활동과 친일파 숙청 등을 전개하였다. 사리원 부호 최병항과 안악의 원형로 등의 부호로부터 독립 운동 자금을 받아내고, 농민들의 원성이 높았던 은율 군수와 일경(日警) 1명을 처단하였다. 이들의 활동이 봉산, 사리원, 황주, 재령, 안악 등 황해도 일원으로 확대되자 일본 경찰은 감시를 강화하였다. 그후 구월산 일대를 중심으로 군자금을 획득하던 이들 ‘6인 권총단’이 밀고로 전원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나석주는 단신 탈출하여 목선을 타고 황해 바다를 건너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 질문1 나석주와 김구는 어떤 관계인가요?
  • 질문2 나석주가 북간도로 이주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3 나석주가 소작농으로 전락한 이유를 써봅시다.
  • 질문4 3·1운동 당시 나석주는 어떤 활동을 하였나요?
  • 질문5 6인 권총단의 활약에 대해 써봅시다.

읽기자료 2

중국에서의 활동

상하이로 건너간 나석주는 김구를 만나 국내에서 모금한 군자금을 전달하였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 경무국 경호원으로 근무하다 허난성 감단[河南省 邯鄲] 중국 군관학교로 파견되어 재교육을 받았다. 수료 후 중국군 장교로 임관되어 바오안[保安]의 육군강무당(陸軍講武堂)에서 복무하다 퇴역하였다.
그동안 노부모와 처자가 남아있던 황해도 재령에서는 3년째 흉년이 계속되었고, 동양 척식 주식회사의 주도로 한국에 이민하여 정착하기 시작한 일본 농민들이 농토를 계속 잠식해 나갔다.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계속 건의·진정·항의하고 집단 시위를 여러 번 벌였지만, 결국 일제 경찰에게 진압되었다. 이 고향의 소식을 들은 나석주는 비통함을 금치 못하였다.

  • 질문1 나석주 의사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어떤 활동을 하였나요?
  • 질문2 나석주 의사가 고향인 재령의 소식을 듣고 분노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3

심산 김창숙과의 만남

1925년 봄, 베이징에서 김창숙은 이회영과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대한 뜻을 모았다. 내몽골 지방에 독립 비용을 자급할 둔전(屯田)을 두어 농사를 지으며 군사 훈련을 하는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과 무관 학교를 설립한다는 것이었다. 김창숙이 북경 정부와 교섭한 결과, 내몽골 대신 쑤이위안성 바오터우[綏遠省 包頭] 지방의 황무지 3만 정보(1정보: 약 3,000평)를 대여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같은 해 8월 김창숙은 개간 및 이주 비용 20만원을 마련하기 위해 혼자 국내로 잠입하여 유림과 부호들을 상대로 비밀리에 모금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모금액이 적어 둔전 형태의 독립 운동 기지 건설 계획을 포기하고, 1926년 4월 상하이로 건너갔다.
상하이에서 김창숙은 이동녕, 김구, 김두봉을 만나 국내 정세가 어려워 독립 자금의 모금 성과가 빈약했음을 설명하였다. 그는 청년 결사대를 국내로 침투시켜 일제의 통치 기관을 습격하고 친일파를 처단하는 거사를 일으켜 민족혼을 일깨울 것을 제의하였다. 김구는 텐진[天津]에서 중국군 장교로 복무 중인 제자 나석주와 의열단원 이승춘 등을 추천하고, 류자명과 상의해 볼 것을 권하였다. 이에 김창숙은 류자명과 의열단 간부 한봉근을 같이 만나 거사 계획을 설명하고, 1천 5백 원을 주면서 무기 구입을 부탁하였다. 그 돈으로 한봉근이 폭탄 3개, 권총 7정, 실탄 490발을 구입하여 김창숙에게 건네 주었다.
1926년 5월 초에 김창숙은 베이징으로 가서 신채호 등을 만나 거사 계획을 설명하고, 그 중 신채호에게 무기 보관을 부탁하였다. 이어서 텐진으로 간 그는 나석주, 이승춘과 면담하여 거사 임무를 맡겠다는 승낙을 받았다. 7월 21일 류자명과 한봉근이 텐진에 와서 이들과 합류하였다. 이들 5인이 모여 앞으로의 계획을 의논하였는데 이때 나석주가 의열단에 가입한 것으로 보인다. 이 모임에서 동양 척식 주식회사와 식산 은행을 타격할 것과 함께 모인 4인의 의열단원이 동반 입국하여 거사를 실행할 것이 합의·결정되었다. 타격 목표를 동양 척식 주식회사와 식산 은행으로 정한 것은 나석주의 의견인 것으로 추측된다.

  • 질문1 1925년 봄 김창숙과 이회영이 합의한 내용은 무엇인가요?
  • 질문2 김창숙이 상하이에서 이동녕 등에게 일제 통치 기관 습격과 친일파를 처단하는 거사를 일으키자고 제의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 질문3 김창숙이 베이징에서 거사에 필요한 무기 보관을 맡긴 사람은 누구인가요?질문4) 거사를 논의하기 위해 텐진에 모인 5명의 이름을 써봅시다.
  • 질문4 거사를 논의하기 위해 텐진에 모인 5명이 결정한 내용을 써봅시다.

읽기자료 4

나석주 의사의 의거 결행

텐진에서 거사를 결정하고 국내에 입국할 방법을 찾다보니 몇 달이 지나고, 그 사이 거사 자금 1천 1백 원이 거의 바닥이 났다. 결국 나석주가 신채호로부터 폭탄을 인수하고 혼자 황해를 통하여 밀입국하여 거사를 결행하기로 하였다.
마중덕이라는 이름의 중국인으로 위장하고 1926년 12월 27일 인천항에 도착한 나석주는 기차를 타고 서울로 잠입하여 남대문의 중국인 여관에서 하룻밤을 잤다. 이튿날 유서 3통을 방에 두고 여관을 나온 그는 식산 은행과 동양 척식 주식회사를 사전 답사하였다. 오후 2시가 되자 동양 척식 주식회사에 1차 진입을 시도하였지만 여의치가 않아, 식산 은행으로 달려가 안으로 들어서며 투탄하였으나 폭탄이 터지지 않았다. 이에 그는 다시 동양 척식 주식회사로 뛰어 들어가며 1층 사무실과 계단에서 일본인 사원과 기자 1명씩을, 2층 토지개량부 기술과에서 일본인 과장과 차석을 쏘아 쓰러뜨린 다음, 총을 난사하며 나머지 폭탄 1개를 던졌다. 현관 앞 수위와 방문객 1명에게도 총격을 가하며 동양 척식 주식회사를 빠져나온 나석주는 황금정(黃金町) 길에서 마주친 경기도 경찰부 경부보 다하타[田畑唯次]에게 권총을 쏘고, 뒤쫓아 온 일본인 경관 4~5명과 총격전을 벌였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폭탄 폭발음이 들리지 않았다. 마음이 급하여 안전핀을 빼지 않아서였다고도 하고, 6개월 동안 보관하면서 폭탄의 뇌관에 이상이 생겨 불발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황금정 2정목(丁目)에 이르렀을 때 완전히 좁혀진 일경의 포위망 속에서 나석주는 구름처럼 모인 군중을 향해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고 외쳤다. 말을 마친 그는 세 발의 실탄을 자신의 가슴에 쏘아 쓰러진 후 일경에 의해 병원으로 급히 옮겨졌으나 4시간 만에 숨을 거두었다.
조선 총독부가 이 사건의 보도를 통제했다가 1927년 1월 14일에야 해제하여, 뒤늦게 사건의 전말이 신문 호외 등으로 크게 보도되었다. 나석주의 시신을 인수하러 상경한 맏아들 응섭은 일경에 구금되었다가 일주일 만에 풀려나 공동 묘지에 가매장된 부친의 시신을 찾았다. 나석주의 시신은 재령으로 모셔졌으나 일경의 입회 아래 비석도, 푯말도, 문상객도, 상여꾼도 없이 봉분조차 없는 무덤에 묻혔다.

  • 질문1 나석주가 의거를 결행한 때는 언제인가요?
  • 질문2 나석주가 투탄 의거를 결행한 장소를 써봅시다.
  • 질문3 나석주가 마지막에 외친 말을 써봅시다.
  • 질문4 내가 나석주 의사처럼 의거를 하고 일경과 교전을 벌이다가 완전 포위되었다면 어떻게 했을지 말해 봅시다.

읽기자료 5

나석주 투탄 의거의 의의

나석주의 의거는 추진 과정의 마지막까지 적어도 3명의 간부급 의열단원들이 관여했고 나석주도 분명히 의열단원이었다. 하지만 이 의거를 단순히 의열단만의 단독 결행이라고 할 수는 없다. 유림인 김창숙의 기획, 김구 등의 조언, 임시 정부 경호원으로 근무했던 나석주의 경력 등을 고려할 때, 의열단과 유림 독립운동 및 임시 정부 계열이 합작한 연합 의열 투쟁의 대표적 사례였다고 볼 수 있다.
마침 1926년을 전후한 시기는 중국 관내에서 독립운동의 결집을 위한 유일당 촉성 운동이 시작되었던 때였다. 나석주의 투탄 의거는 사회주의 계열의 ‘베이징 그룹’과 민족주의 계열의 상하이 임시 정부 세력 사이의 화해와 융합의 결과물이자, 중국에 있는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과 단결을 고무·촉진시킨 구체적인 사례였다. 거사일 하루 전인 1926년 12월 27일 김창숙이 임시 의정원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독립운동의 노력을 보여 준다. 한편 김창숙은 나석주 의거의 배후 조종 혐의로 1927년 2월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고, 결심 공판에서 14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아 혹독한 옥고를 겪었다.

  • 질문1 나석주가 속했던 독립 운동 단체의 이름을 써봅시다.
  • 질문2 나석주의 투탄 의거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인가요?
  • 질문3 나석주의 투탄 의거를 기획하고 추진하였던 김창숙은 일제로부터 어떤 어려움을 당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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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사진은 1999년 11월 17일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 외환은행 본점에 세워진 ‘나석주 열사의 상’이다.

  • 질문1 ‘나석주 열사의 상’이 이곳에 세워진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나석주 열사의 상’ 건립 취지문에 어떤 내용이 새겨져 있는지 써봅시다.

시각자료 2

나석주의 투탄 의거를 보도한 1927년 1월 13일자 「동아일보」 호외 기사 이다. “지난해(1926년) 말 일어난 나석주 열사의 의거를 소개하기 위해 호외를 특별 발행”했으며 ‘게재금지 금일해금’이라고 『동아일보』제호 밑에 설명하고 있다.

  • 질문1 일제가 나석주의 투탄 의거 보도를 통제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 질문2 동아일보가 나석주를 “범인”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1920년대의 시대적 배경을 말해 봅시다.

시각자료 3

사진은 1908년 세워진 동양 척식 주식회사이다.

  • 질문1 동양 척식 주식회사는 어떤 일을 했나요?
  • 질문2 농민들이 동양 척식 주식회사에 대해 원성을 많이 가졌던 이유를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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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모둠별로 나석주가 의거 전 아들에게 보내는 가상 편지를 써봅시다.
모둠활동 2
모둠별로 나석주의 일대기를 연극으로 만들기 위한 시나리오를 작성해 봅시다.
모둠활동 3
모둠별로 나석주와 관련있는 인물(김구, 김창숙, 류자명, 김원봉) 중 한 인물을 선택하여 조사한 후, 그 인물을 소개·홍보하는 포스터를 만들어 발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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