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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좌 터 - 형평사 창립 축하식 개최지(백정들의 인권 해방을 주장한 사회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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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평은 사회의 근본이고, 애정은 인류의 본성이다. 고로 우리는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권장하여 우리도 참다운 인간이 되고자 함이 우리 단체의 주장이다.
지금까지 조선의 백정은 어떤 지위와 어떤 압박에 있었던가? 과거를 회상하면 종일토록 통곡하여도 피눈물이 그치지 않는다. …(중략)…
우리 단체는 시대의 요구보다도 사회 실정에 부응하여 창립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도 조선민족 2천만의 한 사람이다. 1894년 6월부터 법령으로써 백정의 칭호가 없어지고 평민이 된 우리들이다. 애정으로써 상호부조하여 생활의 안정을 도모하고 공동의 번영을 꾀하려 한다. 이에 40여 만이 단결하여 우리 단체의 목적인 우리의 주장을 분명히 밝힌다.


일제 강점기, 조선 형평사(朝鮮衡平社)가 밝힌 취지문의 내용이다. ‘저울[衡]처럼 평등한[平] 사회를 지향하는 단체[社]’란 뜻을 가진 형평사는 백정(白丁)의 인권을 위한 사회 운동 단체이다. 형평사는 계급을 타파하고, 백정에 대한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고, 백정도 참다운 인간이 되게 한다는 것을 목적으로 1923년 4월 25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조직․창립하였다.
1894년의 갑오개혁으로 우리나라에서 신분제는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수 천 년을 이어온 신분에 따른 생활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는 없었다. 백정은 여전히 사회적으로 무시당하였으며, 조선 총독부가 백정을 호적에 등록할 때 ‘도한(屠漢: 짐승을 잡는 자)’이라는 글씨를 추가하여 차별 정책을 유지하였다. 이런 일제의 차별에 대항하여 백정들은 진주에서 형평사를 조직하고 형평 운동을 시작하였는데, 당시의 형평 운동은 항일 독립 운동의 성격도 띠었다.
1923년 5월 13일 형평사 창립 축하식을 개최한 진주시 대안동 진주좌(晋州座)는 이후 진주극장으로 사용되다가 없어져 그 원형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현재 대형 쇼핑몰인 ‘몰에이지(Mallage) 1030’이 들어서 영업하였으나, 현재는 폐업 상태다. 다만, 몰에이지 건물 앞에 형평사 운동 기념 조형물과 함께 ‘형평사 창립 축하식이 열린 곳’이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형평 운동 70주년을 맞아 1992년 창립한 형평운동기념사업회에서는 1996년 12월 10일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촉석루 동문 앞에 ‘형평 운동 기념탑’을 건립하여 형평 운동의 정신을 기리고 있으며, 또한 ‘형평 역사 캠프’와 ‘형평 운동 유적지 답사’ 등을 운영하고 있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경상남도 진주시 대안동 13-13
[도로명 주소 : 경상남도 진주시 진주대로 1057]
현재 상태 없어짐 / 진주극장은 멸실되어 원형을 알아볼 수 없으며, 최근까지 극장을 포함한 대형 쇼핑몰이 영업 중이었으나 현재는 폐업 상태이다. 옛 진주극장 사진과 비교했을 때 도로, 터 등에 있어서 큰 차이는 없다.

고려 시대 농민을 가리키는 말이었던 백정(白丁)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 소나 개, 돼지 따위를 잡는 도살업을 하는 천민을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다. 백정은 기와집에 살 수 없고, 명주옷은 물론 가죽신을 신을 수 없으며, 갓이나 망건·탕건도 쓸 수 없어 외출할 때 패랭이(평량갓)를 쓰고 다녀야 했다. 또 일반인 앞에서 음주와 흡연이 금지되고, 결혼할 때에도 말이나 가마 등을 사용하지 못하였다. 심지어 죽어서도 상여를 사용하지 못하고, 묘지도 일반인과 같은 곳에 두지 못하게 하는 등 여러 가지 제한과 차별 속에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았다.
1894년 동학 농민군의 폐정 개혁안 12개조 내용 중에서 갑오개혁을 통해 ‘7종의 천인에 대한 대우 개선과 백정이 쓰는 평량갓 폐지’와 ‘문벌과 양반, 상민 등의 계급 타파’가 이루어졌다. 조선 시대 신분 제도가 마침내 법적으로 철폐되어 백정을 포함한 천민의 신분 해방이 적어도 제도적으로는 이루어졌다. 그러나 사회적 제약이나 차별 대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896년 9월 <호구조사규칙>이 공포․실시되어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호적에 올랐다고 하나, 백정은 승려와 함께 호적이 별도로 작성되었으며, 또 직업을 ‘도한(屠漢)’이라고 써 넣어 백정 신분이 그대로 드러나게 하였다. 이후 새로운 <민적법>(1909년 3월 법률 제8호로 공포·실시한 호적법)이 시행되면서 일반인들과 호적이 통합되긴 하였지만, 1910년 나라를 강제로 빼앗은 조선 총독부가 새 호적을 만들면서 여전히 백정 출신은 직업난에 ‘도한’이라고 써 넣거나 붉은 점을 찍어 구분하였다. 학교 입학 통지서에서도 백정 신분임을 밝힘으로써 입학이 거부되거나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는 일도 많이 일어났다.
이처럼 갑오개혁 이후에도 천민에 대한 사회적인 억압이나 통제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특히 법률상의 신분 해방과 달리 실제 생활에서는 일반인의 천민 차별 관습이 개선되지 않았다. 1898년 10월 26일 서울에서 열렸던 독립협회의 관민공동회에서 백정 박성춘이 연설을 하는 등, 백정도 평등한 사회의 일원이라는 자각을 한 백정들이 사회적 차별 철폐를 위해 발 벗고 나서기도 하였는데, 한편으로는 신분 차별에 저항하는 백정에 대한 일반인의 집단적인 박해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백정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제대로 펼치기 위해서는 혼자나 몇몇이 아닌 보다 조직적인 활동이 필요하였다.
갑오개혁 이전에도 서울에 백정조합이 설치되어 전국적으로 서로 연락하는 조직을 갖고 있었고, 평양과 같은 지방에서도 부락에 나름의 조직망이 있어 서울과 연락을 하곤 하였으나, 갑오개혁과 함께 이들 조직이 없어졌다. 1910년경에 이르러 갑오개혁 이후 해체되었던 백정의 이러한 조직을 다시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1910년 초반에 서울 도수조합(屠獸組合)의 최용규(崔鎔圭)가 경상남도 지부를 결성할 목적으로 진주를 방문한 사실이 있으며, 1921년 12월에 서울의 수육상(獸肉商)들이 집성조합(集成組合)을 결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평양의 수육판매조합(獸肉販賣組合)에 대한 기록도 단편적으로 보인다. 이러한 조직체들은 백정의 사회적 지위 향상보다는 조합원들의 경제적 이익에 일차적인 관심을 기울인 것 같지만, 조직을 통한 연대 활동은 이후 형평 운동을 일으키는 데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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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진주에서의 형평사 창립과 진주좌

형평사(衡平社)는 천민 계급, 특히 백정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 위한 정치적 투쟁을 목적으로 창립된 정치 단체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형평사는 1923년 4월 25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창립되었다. 당시 진주 지방에는 약 350~400명 정도의 백정이 살고 있었는데, 이 숫자는 다른 지역보다 유난히 많은 숫자도 아니었다. 또 진주 지방의 백정이 다른 지방의 백정보다 더 많은 차별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사회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형평사가 서울이 아닌 지방, 그것도 내륙 끄트머리 남해안에 있는 진주에서 창립된 데에는 진주는 이미 역사적으로 사회 운동과 관련된 경험이 많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19세기 중반 전국을 휩쓴 농민 봉기의 선구적인 역할을 한 임술 농민 봉기가 일어난 곳이 진주였고,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은 물론 의병 활동이 활발히 전개된 곳이 진주였으며, 1919년 3·1운동 때에도 큰 역할을 하였을 한 곳이 진주였다. 형평사 창립 이전부터 진주에는 청년·여성·농민·노동·소년 운동 등 각종 사회 운동 단체들이 조직되어 개혁 운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많은 곳이었다. 여기에 1925년 도청이 부산으로 이전되기 전까지 진주는 경상남도 도청소재지이자 경남 지역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중심지였으며, 선진 문물이 들어오는 길목으로서 여러 가지 정보를 다른 지역보다 빨리 얻을 수 있는 곳이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부라쿠민[部落民(부락민, ぶらくみん): 일본에서 최하층의 신분인 천민]들이 신분 해방 운동으로 수평사(水平社)를 조직하고 수평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에 진주가 갖고 있던 사회 개혁 운동의 분위기에 일본의 수평사 운동이 자극을 주어 “계급을 타파하고 백정에 대한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여 백정도 참다운 인간이 되게 한다.”는 목적 아래 진주에서 백정 인권을 위한 사회 운동 단체인 ‘조선 형평사’(朝鮮衡平社)가 창립되었다.
백정 출신의 장지필(張志弼)·이학찬(李學贊) 등은 사회운동가 신현수(申鉉壽)·강상호(姜相鎬)·천석구(千錫九) 등과 함께 1923년 4월 25일 진주 대안동 진주청년회 회관에서 조선 형평사를 창립하였으며, 5월 13일 진주 대안동 진주좌(晋州座)에서 형평사 창립 축하식을 열었다. 형평사 창립 대회는 회원 8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되었는데, 임시 의장으로 추대된 강상호의 사회로 대회가 진행되었다. 이들은 먼저 형평사 주지(主旨: 취지문, 선언문)와 사칙(社則: 회칙)을 채택하면서 “계급 타파, 모욕적 칭호 폐지, 교육 권장, 상호의 친목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임원 선거와 함께 형평사 유지 방침, 교육 기관 설치, 회관 설치, 각지에 출장하여 취지를 선전할 일, 발회식 거행을 신문지상에 광고할 것 등의 안건을 의결하였다.
창립 축하식은 각 지방에서 백정 대표자 100여 명과 일반 내빈 500여 명이 참석한 성대한 축하식이 되었다. 이날 아침부터 형평사원은 자동차로 진주 시내를 시위하면서 형평사 취지와 축하식 행사를 알리는 선전지 7천여 장을 시민들에게 배포하였다. 활동의 위상을 높이고 참여자에게 긍지를 심어주기 위해 활용된 이러한 방법은 전통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으로써 이후 각 지역 행사 때마다 이러한 방법이 이용되었다.
이렇게 형평사는 1923년 4월 25일 형평사 주지와 사칙을 발표하면서 공식적으로 출범하였고, 5월 13일의 창립 축하식을 통해 대외적으로 출범을 선포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백정 해방을 위한 단체가 탄생하였다. 진주좌에서의 형평사 창립 축하식은 진주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천대받는 백정들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형평 운동이 진주 최대의 공공장소에서 벌어졌다는 데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계기로 형평사가 전국적 규모의 사회 운동 단체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의미도 컸다.
1923년 5월 13일 조선 형평사 창립 축하식을 개최한 진주시 대안동 진주좌(晋州座)는 1922년 11월 11일 준공되어 1923년 1월 개관하였다. 이후 1937년 728명을 수용할 수 있는 2층 벽돌 구조의 진주극장으로 바뀐 이래 수차례에 걸친 개보수와 재건축을 거쳐, 1996년 2월 현대식 건물로 재건축되면서 진주극장은 없어져 그 원형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2004년 12월 극장을 포함한 대형 쇼핑몰인 ‘몰에이지(Mallage) 1030’이 들어서 영업하였으나, 현재는 폐업 상태다. 다만, 몰에이지 건물 앞에 형평사 운동 기념 조형물과 함께 ‘형평사 창립 축하식이 열린 곳’이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이 안내판마저 주변 상가에 묻혀 사람들의 눈에 띄기 어려울뿐더러 관리마저 소홀한 편이다. 대신 1996년 12월 10일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촉석루 동문 앞에 건립된 ‘형평 운동 기념탑’이 형평 운동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 질문1 조선 형평사가 창립된 날짜와 창립 축하식이 열린 날짜를 각각 써봅시다.
  • 질문2 조선 형평사가 창립식을 가진 장소와 창립 축하식을 개최한 장소를 각각 써봅시다.
  • 질문3 백정들의 인권 운동 단체인 형평사는 회원이 백정들로만 조직된 것은 아니었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었다. 조선 형평사 창립에 관여한 인물로 백정 출신 인물과 사회 운동가 출신 인물을 각각 대답해 봅시다.

읽기자료 2

일제 강점기 형평 운동

형평 운동은 1923년부터 일어난 백정들의 신분 해방 운동으로, 진주에서 조선 형평사가 창립되면서 형평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조선 형평사는 구체적인 활동에 들어가 먼저 각 지방 백정에게 형평 운동을 이해시키고 홍보하여 참여를 유도하는 한편, 지사나 분사의 설립을 직접 주도하거나 지원하고자 선전대를 편성하고 파견하였다. 이에 창립 1년 만에 전국적으로 68개 지사와 분사가 조직될 정도로 사회 각층으로부터 깊은 관심과 함께 많은 격려를 받았다. 특히 백정들이 많이 살고 있던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언론과 사회주의 진영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백정에 대한 편견과 차별 철폐를 주장하였고, 교육을 위한 강습소 등도 운영하였다. 결국 1930년대 들어 관청에 기록되었던 백정 표시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으며, 백정 자녀들의 학교 입학도 허용되었다.
이러한 형평 운동의 급격한 발전은 보수적인 이들로부터 사회적인 반대를 불어오기도 하여, 1923년 5월 진주에서 ‘소고기를 사지 말자’는 우육 비매 동맹(牛肉非買同盟)이 조직되고, 7월에는 경상남도 삼가(三嘉)에서, 8월에는 경상남도 김해와 충청북도 제천에서 형평 운동을 반대하는 반형평 운동(反衡平運動)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형평사는 발전을 거듭, 1923년 11월 7일 대전에서 최초의 형평사 전국 대표자 대회가 열려 형평사 본부를 진주에서 대전으로 옮기기로 하였다. 그런데 1924년 2월 10일과 11일 부산에서 개최된 형평사 전국 임시 총회에서, 본부를 옮기는 문제를 둘러싸고 형평사 내부의 대립이 표면화하여 남북 양파로 갈리게 되었다. 남파(南派)는 경상도에 지지 기반을 둔 강상호·신현수 등 보수파이고, 북파(北派)는 전라도·충청도·강원도에 지지 기반을 둔 장지필·오성완 등 혁신파였다. 혁신파는 부산 대회 직후인 2월 13일 대전에서 형평사 혁신 동맹 준비회를 조직하였으며, 이어 3월 12일 천안에서 혁신 동맹 창립 총회를 열어 본부를 서울로 옮기기로 하고, 잡지 『형평』 발간과 피혁공장(가죽공장) 설립 등을 결의하였다. 보수파도 4월 24일과 25일 진주에서 전국 형평사 대회를 열었다.
이처럼 형평사는 창립 후 불과 1년 만에 분열되고 말았다. 그 뒤 양파의 반목과 대립에 대한 회원들의 걱정이 커지자 5월 21일 남북 협의회가 열리고, 7월에는 양파 간부들의 간담회가 열려 형평사 통일에 대한 토의가 진지하게 논의되었다. 그 결과 8월 15일 대전에서 형평사 통일 대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남북 양파의 대표자(강상호·장지필)의 퇴진이 결의되고, 형평사의 명칭을 ‘조선 형평사 중앙 총본부’로 고치는 동시에 본부를 서울에 두기로 하였다. 그러면서도 양파의 갈등은 그치지 않았다.
1923∼1924년 새로운 사회 운동 단체(조선 노농 총동맹, 조선 청년 총동맹 등)가 탄생하면서 이들의 지원을 받게 되고, 또 이들 단체와 협력이 이루어지면서 형평 운동은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각지에 형평 청년회가 조직되고, 형평 청년회의 중앙 기관으로 12월에는 형평사 청년 총연맹이 탄생하게 되었다. 또, 자녀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형평 학우회도 조직되어 각지에 권학단(勸學團)이 파견되었다.
이러한 때 1925년 8월 세상을 놀라게 한 반형평 운동으로 경상북도 예천형평분사가 습격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형평사 본부에서는 긴급 회의를 열어 전국 형평사 회원이 예천으로 총출동할 것을 결의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으며, 각 사회 운동 단체(조선 청년 총동맹 등)에서도 독자적으로 조사단을 파견하여 형평 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조사 결과 사건은 이곳 청년회 회원이 주동이 되어 일어 난 것으로 밝혀졌고, 이들의 사죄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당시의 진보적인 여러 사회 운동 단체와 형평 운동과의 제휴는 더욱 강화․촉진되어 이후 각종 파업과 소작 쟁의 등에 참여하는 등 다른 사회 운동 단체와 더불어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 결과 이 시기 형평사의 조직도 크게 확장되어갔다.
그러나 1926년 9월 임시 대회에서는 사회주의 운동가의 세력 갈등 영향으로 내부 혼란이 커졌으며, 1927년 1월에 일어난 고려 혁명당 사건에 장지필·서광훈 등 중앙 간부가 관련되면서 이후의 형평 운동은 해를 거듭할수록 온건과 혁신의 파벌 투쟁에, 사회주의자들이 주축이 된 급진파까지 가세하면서 형평사는 쇠퇴의 길을 걸었다. 여기에 1930년대 일제 경찰이 형평 운동을 사회주의 활동으로 규정하고 압박을 강화하자 급격히 쇠퇴하였다. 특히 1931년 4월의 형평사 해소 논쟁과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은 1932년 12월의 형평 청년 전위 동맹 사건은 형평사 활동을 위축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결국 1935년 4월 제13회 전국 대회에서 형평사의 명칭을 대동사(大同社)로 바꾸고, 회원의 경제생활 개선으로 사회적 지위 향상을 얻기 위하여 자본금을 모아 피혁회사(가죽회사)를 만들어 그들의 복리를 꾀하였다. 이에 따라 초창기의 인권 해방이라는 목표도 퇴색하고 단지 백정 계급의 경제적 이익 단체로 변모함과 동시에 오히려 일제에 영합하는 친일 단체로 전락하고 말았다.
여하튼 형평 운동은 백정들의 자기 해방 운동인 동시에 일제 강점기에 다른 사회 운동 단체와 함께 연합하여 일제에 맞선 민족 해방 운동의 역할도 담당한, 우리 역사상 평등 사회를 이룩하려는 대표적인 인권 운동이었다. 무엇보다도 1935년 이름을 대동사로 바꿀 때까지 만 13년간 활동한 형평사는 일제 강점기에 전국 규모로 가장 오랫동안 활동한 사회 운동 단체의 하나였다. 이 같은 정신을 기리고자 형평 운동 70주년을 맞아 1992년 형평운동기념사업회가 창립되었으며, 형평운동기념사업회에서는 1996년 12월 10일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촉석루 동문 앞에 ‘형평 운동 기념탑’을 건립하여 형평 운동의 정신을 오늘날에 되새기고 있다.

  • 질문1 ‘우육 비매 동맹’과 같은 ‘반형평 운동’은 무엇인지 설명해 봅시다.
  • 질문2 형평사는 1935년 제13회 전국 대회에서 이름을 무엇으로 바꾸었는지 대답해 봅시다.
  • 질문3 형평사와 대동사의 차이점을 그들이 활동한 방향을 중심으로 간단히 설명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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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진주에서 처음으로 발기한 형평사<br>출처 : 고숙화, 「형평운동」,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32권, 독립기념관, 2009, 48쪽.<br>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32권 - 제2장 형평사의 창립 - 1. 창립과정(https : //search.i815.or.kr/Degae/DegaeView.jsp?nid=1054)

‘진주에 형평사 발기’라는 제목의 어느 신문 기사 내용이다.

  • 질문1 기사 제목 옆에 3줄로 쓰여 있는 내용(“階級~운동”)을 읽고 형평사의 주장을 정리하여 대답해 봅시다.
  • 질문2 형평사 창립을 어떤 곳에서는 4월 24일, 어떤 곳에서는 4월 25일로 설명하고 있다. 기사의 ‘二十四日에發會’라는 소제목 옆 2줄에 “24일에 기성회를 열고 25일에 형평사를 조직”하였다는 내용을 참고하여 창립일을 언제로 보는 것이 좋을지 말해 봅시다.
  • 질문3 맨 마지막에 쓰여 있는 형평사 위원 가운데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는 모두 일반인이었다. 강상호는 초대 동아일보 진주지국장, 신현수는 조선일보 진주지국장, 천석구는 진주자작농회 간부였다. 그리고 장지필은 백정으로 일본 명치대학 중퇴의 학력을 가진 자, 이학찬은 백정 자산가였다. 그러면 조선형평사의 회원이 될 자격은 어떠했을지 대답해 봅시다.

시각자료 2

진주좌에서 형평사 창립축하식이 개최된다는 기사(『동아일보』, 1923년 5월 12일)<br>출처 : 국내독립운동·국가수호사적지 사이트(http://sajeok.i815.or.kr/) - 진주좌 터

1923년 5월 12일자 『동아일보』 기사 내용이다.

  • 질문1 제목이 ‘衡平社發起會’라고 쓰여 있는데, 우리말로 읽어 봅시다.
  • 질문2 형평사는 1923년 4월 25일 진주청년회 회관에서 이미 창립하였다. 기사 중간쯤에 “동사(형평사) 발기회를 진주좌(晋州座)에서 개최하기로”한다고 쓰여 있는데, 이 발기회는 창립 축하식에 해당한다. 개최 날짜를 몇 월 며칠로 안내하고 있는지 찾아 써봅시다.
  • 질문3 형평사는 진주에서 창립하였지만 전국적인 조직이었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내용으로, 기사에서는 어느 지역에서 지부를 설치하기로 하였다고 안내하고 있는지 찾아 써봅시다.
  • 질문4 역사신문의 기사 제목을 ‘진주에서 형평사 창립되다’로 정하고, 위 두 신문 기사의 내용을 참고하여 400자 내외로 기사를 써 봅시다.

시각자료 3

형평사 제6회 대회 포스터(1928년)<br>출처 : 형평운동기념사업회(http://hpmove.com/bbs/board.php?board=homemenu42&command=body&no=61)<br>또는 http://ifeeltong.org/m/view.php?bo_table=feel_news_01&wr_id=183&page=1

일제 강점기인 1928년에 발행된 포스터이다.

  • 질문1 포스터 속 인물이 들고 있는 깃발에 한글로 써 있는 내용을 읽어 봅시다.
  • 질문2 맨 위의 ‘會大期定鮮全回六第社平衡(회대기정선전회육제사평형)’라고 쓴 제목은 어떻게 읽어야 할지, 제대로 읽어 봅시다. 그리고 ‘전선(全鮮)’의 뜻은 무엇인지 말해 봅시다.
  • 질문3 1928년이 제6회 대회라면 조선 형평사는 어느 해에 창립되었는지 계산하여 써봅시다.
  • 질문4 아래쪽에 정기 대회와 기념 대회, 형평 청년 대회를 3일에 걸쳐 하는 것으로 안내하고 있다. 이들 대회는 각각 몇 월 며칠에 한다고 쓰여 있는지 대답해 봅시다.
  • 질문5 포스터 좌우에 쓰여 있는 글 “全鮮에 散在한 衡平階級아 團結하자, 千差萬別의 賤視를 撤廢하자”를 해석하여 형평사가 주장한 내용을 말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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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우리나라 역사에 등장하는 천민과 신분 해방 운동에 대해 좀 더 많은 자료를 찾아 시대별로 정리하여 보고서로 제출해 봅시다.
모둠활동 2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사회 운동라고 할 수 있는 형평 운동은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이처럼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이나 어린이들의 인권 신장을 위한 활동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었을지 조사하여 보고서를 제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자신이 1923년 4월 25일 진주에서 형평사를 창립하는 사람이 되어 형평사 주지(취지문, 선언문)을 작성하여 친구들 앞에서 크게 읽어 봅시다.
모둠활동 4
인터넷 검색을 통해, 내가 사는 지역이나 인근 지역에도 형평사 지부(지회)가 조직되었는지, 어떤 활동을 했는지, 형평사와 관련된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조사하여 발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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