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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조선 총독부 - 김익상 의거지(의열단의 폭파 대상 1번지, 조선 총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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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놈들이 나를 죽일 수는 있지만, 내 뒤에는 또 수많은 내가 있다. 일본은 반드시 망하고, 조선은 반드시 독립한다.

윗글은 의열단원 김익상(金益相)이 일본 재판소에서 사형이 확정될 때 재판장을 공격하며 군중들을 향하여 한 말이다. 김익상은 의열단(義烈團)으로부터 조선 총독부를 폭파하라는 지시를 받고 중국에서 서울로 몰래 들어와 1921년 9월 12일 전기 수리공으로 가장하고 남산 중턱의 조선 총독부 청사(廳舍: 관청의 사무실로 쓰는 건물)에 들어가 폭탄을 던졌다.
몸을 숨겨 베이징[北京]으로 돌아온 김익상은 1922년 2월 상하이[上海]로 가서 같은 해 3월 28일(2월 28이라는 주장도 있다) 상하이 세관 부두에서 필리핀에서 도착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田中]를 향해 폭탄을 던지고 총을 쏘았다.
의열단은 ‘7가살’(七可殺: 죽여야 할 일곱 대상)과 ‘5파괴’(五破壞: 파괴해야 할 다섯 기관)를 행동 목표로 두어, 조선 총독 이하 고위 관리, 매국노와 친일파 등을 암살하고 조선 총독부나 동양척식회사와 일제 경찰서 등을 파괴하는 일에 앞장섰다. 대표적인 것으로 1920년 9월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1920년 12월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1921년 9월 김익상의 조선 총독부 폭탄 투척, 1923년 1월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1924년 1월 김지섭의 도쿄[東京] 궁성 폭탄 투척, 1926년 나석주의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 폭탄 투척 등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의열단의 활동이 펼쳐졌다.
옛 조선 총독부가 있던 자리인 현 남산 중턱의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입구에는 이곳이 김익상의 조선 총독부 폭파 의거가 일어난 곳이라는 안내 표지석이 세워져 있어 그의 항일 정신을 기리고 있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 8
[도로명 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소파로 126]
현재 상태 없어짐 / 현재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들어서 있다.

1910년 9월 28일, 한일병합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일제는 대한제국의 명칭을 ‘조선’이라 바꾸고, 1905년 을사늑약으로 내정 간섭을 위해 세운 통감부를 폐지하여 보다 강력한 통치 기관으로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였다. 조선 총독부는 처음 남산 왜성대(倭城臺)의 통감부 청사를 그대로 사용하다가, 1916년부터 경복궁 정면에 새 총독부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1926년에 새 총독부 청사가 완공되자 남산에서 경복궁 앞으로 옮겼다.
조선 총독부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게 된 한양(서울)은 수도로서의 지위를 잃어버렸으며, 이후 서울은 청계천을 경계로 한 북쪽의 조선인 구역과 남쪽의 일본인 구역으로 도시 공간이 나뉘어졌다. 당시 조선인의 대표적 거리는 종로이고, 일본인의 대표적 거리가 진고개[본정통(本町通: 혼마치도리), 현 명동․충무로]였다. 일제 침략과 더불어 진고개를 배후로 한 을지로와 남대문로 일대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식산은행, 조선은행 등 일제의 경제 침탈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할 기관들이 들어섰다.
그리고 광화문에서 남대문을 잇는 서울 남북축에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위한 관청들이 들어섰다. 1926년 경복궁 안에 새로 들어선 조선 총독부 건물을 중심으로 그 앞에 경기도청, 경성부민관(府民館: 조선 총독부의 관립 극장. 현 서울특별시 의회 건물), 경성부(京城府: 일제 강점기 서울의 명칭. 현재의 서울특별시에 해당. 경성부 청사는 현 서울시청) 건물 등이 차례로 배치되었다. 그리고 남산에는 일본 천황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조선 신궁(朝鮮神宮)이 들어서고, 남대문 밖에는 1925년 9월 완공된 국제 규모의 경성역(京城驛)이 경성부의 관문으로 자리를 잡았다. 또한 용산역 주변 신용산 일대에는 철도국을 비롯한 철도 시설과 조선군 사령부를 비롯한 군사 시설이 진을 쳤다.
이렇게 일제 침략의 바탕이 되는 건물들이 서울의 남북으로 펼쳐진 가운데, 서대문과 동대문을 가로지르는 종로 일대는 조선인의 거리가 형성되어 이곳은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추구하는 민족 운동과 사회 운동의 공간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조선 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의 정치․경제․사회․문화는 물론 경찰과 군대 등 모든 정책을 총괄하는 최고 기관으로, 조선인의 삶을 일일이 간섭하고 통제할 수 있었으며, 조선 총독은 그 최고의 위치에 있었다. 조선 총독은 일본 내각의 통제를 받지 않고 일본 천황이 직접 임명하였으며, 행정권·입법권·사법권 및 군대 통수권까지 장악하여 절대적인 권력을 휘둘렀다. 총독에게 이와 같이 막강한 권한을 준 것은 독립 운동을 총독 마음대로 신속하고 철저하게 탄압하기 위한 방안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조선 총독은 조선인에게 원망의 대상이자 암살 대상 1호였으며, 조선 총독부는 파괴 대상 1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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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조선 총독부(朝鮮總督府)

일제는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을 체결하면서 통감부를 설치하고, 왜성대(현재 남산공원)에 있던 일본 공사관 건물을 통감부 건물로 사용하였다. 왜성대(倭城臺)는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과 회현동1가에 걸쳐 있던 지역으로, 조선 시대 군사들이 훈련하던 무예장이 있어 무예장, 예장, 예장골이라 불렀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왜장, 왜장터, 왜성대 등으로 불렀으며, 1884년 갑신정변의 결과로 1885년 체결된 한성조약에 따라 도성 내에 일본인의 거류지가 허용되자 일본인들이 남산 주변 지역에 정착하였다.
일제는 한성조약 제4조에 따라 왜성대 지역에 공사관을 지을 땅을 얻고 건물의 공사비까지 조선 정부에 요구하였다. 1893년경 새 건물을 지어 2층짜리 목조 건물인 일본 공사관을 세웠다. 남산의 일본 공사관은, 을사늑약으로 1906년 2월 한국 통감부(조선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통감부 청사로 사용되다가, 1907년 1월 통감부가 남산 왜성대 신축 청사(현 중구 예장동 8번지)로 이전하면서 통감 관저(官邸: 정부에서 장관급 이상의 고관들이 살도록 마련한 집)로 바뀌었다. 그리고 1910년 한일병합 이후에는 조선 총독부 청사로 사용되어 왜성대는 일제 침략과 일제 식민지 지배의 본거지가 되었다.
조선 총독부의 권한은 막강하였다. 조선 총독부는 일제 식민 통치의 최고 기관으로, 그 우두머리인 총독은 행정과 입법 및 사법권은 물론 군대 통수권까지 가졌으며, 조선 왕족(王族) 및 조선 귀족에 대한 특별 권한까지 가졌다. 육군대장 또는 해군제독 가운데 임명된 총독의 권한은 중앙과 지방의 행정 기관을 통해 행사되었는데, 1910년에 조직된 총독부의 중앙 기구는 총독관방(總督官房)을 비롯해 총무부·내무부·탁지부·농상공부·사법부 등 1방 5부 9국으로 구성되었다. 3·1운동 이후에는 내무부·탁지부·농상공부·사법부를 내무·재무·식산·법무의 4국으로 개편하고 학무국을 내국으로 승격시키는 한편, 독립 관청이던 경무총감부를 폐지하고 총독부 내국으로 경무국을 설치했다. 지방 행정 기구는 전국을 13도로 나누고 그 밑에 부(府)·군(郡)·도(島)와 말단 행정 단위로 읍·면을 둔 3단계 조직이었다.
조선 총독부는 1926년 1월 경복궁 정면에 새로 지은 청사로 이전하였다. 경복궁 흥례문(興禮門) 구역을 헐고 조선 총독부 청사를 짓겠다고 지진제(地鎭祭)를 올린 것이 1916년 6월 25일이고, 건물을 완공해 이른바 시용식(始用式)을 거행한 것이 1926년 1월 4일이니까, 무려 10년 가까운 시간이 걸린 셈이다. 경복궁 안에 지은 조선 총독부 신청사는 일본을 상징하는 일자(日字)형 평면에 지층과 지상 4층을 올린 총건평 9,600여 평의 건물로, 철근 콘크리트 구조에 벽돌로 기둥 사이의 벽을 채우고 외부를 화강석으로 마감한 위에 돔 모양의 중앙탑옥을 얹었다. 르네상스 양식에 바로크 양식을 절충한 절충주의 양식으로, 식민지 지배 기구로서의 권위를 강조하는데 역점을 둔 건물이다. 총독부 신청사의 준공과 함께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은 궁성 동쪽으로 밀려났고 그 앞에는 광장이 조성되었다. 이렇게 일제는 경복궁의 많은 건물들을 부숴 없앴으며, 광화문(光化門)도 헐려고 하다가 반대에 부딪혀 1927년 동쪽의 건춘문(建春文) 옆으로 옮겼다. 광화문의 양쪽 담장 끝에는 주변을 살피는 망루인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이 있었는데, 일제는 1923년 서십자각은 부숴 없애고 동십자각 앞으로는 도로를 내어 1929년경 동십자각을 찻길 속의 섬으로 만들어 버렸다. 일제가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勤政殿) 앞에 거대한 조선 총독부를 건설한 것은 조선 사람의 자존심을 무너트리는 행위이자 우리 민족의 정기를 짓밟는 행위였다.
경복궁 조선 총독부 건물은 해방 후 미 군정청과 대한민국 정부 청사인 중앙청 건물로, 1986년 8월부터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였다. 1991년부터 경복궁 복원 사업이 이뤄지는 가운데 철거 찬반 논란을 거쳐 일제 잔재 청산과 민족 정기 회복 차원에서 광복 50주년인 1995년 8월 15일 철거가 시작되어 1996년 완전 철거되었다. 현재 그 자리에 흥례문 등이 복원되었으며, 철거 당시 남은 돔 지붕 끝의 첨탑과 건축 부재(部材: 건물의 뼈대를 이루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는 여러 가지 재료)는 현재 독립기념관 야외 전시 공간인 ‘조선 총독부 철거 부재 전시 공원’에 두어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 있다.
1926년 조선 총독부가 경복궁 안으로 옮긴 이후 남겨진 남산 왜성대 조선 총독부 건물은 1929년 4월 은사과학관(恩賜科學館)으로 바뀌었다. 광복 후 1956년 그 자리에 한국방송공사(KBS) 사옥을 신축할 때까지 과학관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 이곳에는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들어서 있다.

  • 질문1 조선 시대 예장골 일대를 왜성대(倭城臺)라 부르게 까닭은 무엇인지 대답해 봅시다.
  • 질문2 남산 왜성대에는 일제 침략과 관련된 어떤 건물들이 있었는지 세 가지 이상 써 봅시다.
  • 질문3 조선 총독부가 처음 있었던 곳과 새로 건물을 지어 옮긴 곳에 대해 설명해 봅시다.
  • 질문4 독립기념관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조선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남은 일부분을 야외 전시장에 어떤 모습으로 전시하였는지 찾아봅시다.

읽기자료 2

의열단(義烈團)

1919년 3·1운동으로 독립 운동의 근거지를 해외로 옮긴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일부는 일제의 무력에 대항하여 더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 운동 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1919년 11월 9일, 만주 지린[吉林]에서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하자.”는 뜻의 의열단이 항일 비밀 조직으로 만들어졌다. 의열단은 당시 만주와 중국 본토에서 조직된 독립 운동 단체들이 미온적이고 온건하다고 생각하고, 직접적 투쟁 방법인 암살과 파괴·테러라는 과격한 방법을 통한 폭력 투쟁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출신이 중심이 되어 13명으로 창단된 의열단은 김원봉(金元鳳)이 단장을 맡았으며, 창단 직후 ‘공약 10조’를 채택하고 뒤에 ‘7가살’, ‘5파괴’라는 행동 목표를 독립 운동의 지침으로 채택하였다. 의열단의 공약 10조는 “①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야 단원이 됨, ④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何時: 언제), 하지(何地: 어디)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 하지에서나 초회(招會: 단체의 부름)에 필응(必應)함,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이었다.
그리고 의열단의 7가살(七可殺: 죽여야 할 일곱 대상)은 “① 조선 총독 이하 고관, ② 군부 수뇌, ③ 대만 총독, ④ 매국노, ⑤ 친일파 거두, ⑥ 적탐(밀정), ⑦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으로, 침략의 원흉과 고위 관리 및 일제와 손을 잡은 이들에 대한 암살을 목적으로 하였다. 5파괴(五破壞: 파괴해야 할 다섯 기관)는 “① 조선 총독부, ② 동양척식회사, ③ 매일신보사, ④ 각 경찰서, ⑤ 기타 왜적 중요 기관 등”으로, 일제 식민지 통치 기관 및 그 관련 기관 시설에 대한 폭파를 목적으로 하였다.
이에 의열단은 ① 1920년 제1차 암살 파괴 계획-밀양·진영 폭탄 반입 사건, ② 1920년 9월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③ 1920년 12월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④ 1921년 9월 김익상의 조선 총독부 폭탄 투척, ⑤ 1922년 3월 김익상․오성륜․이종암의 상하이 황푸탄[黃浦灘] 의거, ⑥ 1923년 1월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⑦ 1923년 제2차 암살 파괴 계획-황옥·김시현 등의 폭탄 반입 사건, ⑧ 1924년 1월 김지섭의 도쿄 궁전 니주바시[二重橋] 사쿠라다몬[櫻田門] 폭탄 투척, ⑨ 1926년 12월 나석주의 동양척식주식회사 및 식산은행 폭탄 투척 등의 활동을 펼쳤다.
의열단은 창단한 얼마 뒤에 근거지를 지린에서 베이징[北京]으로 옮기고, 상하이에서 단원들을 포섭하여 1924년경에는 약 70여 명의 단원을 이룰 수 있었다. 후일 한국 민족 운동사에 이름을 남긴 김구·김규식·김창숙·신채호 등이 실질적인 고문 역할을 했고, 장제스[蔣介石] 중화민국 총통의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김원봉의 요청으로 신채호(申采浩)가 작성하여 1923년 1월에 발표한 「조선 혁명 선언(의열단 선언)」에는 일부 독립운동가의 문화운동론, 자치론, 외교론, 준비론 등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일체의 타협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민중에 의한 폭력적인 직접 혁명을 추구하는 의열단의 기본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하지만 1920년 후반부터 개인 폭력 투쟁에 대한 한계를 느낀 의열단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중국 정부의 도움으로 의열단원을 황푸군관학교에 입학시키고 체계적인 군사 훈련을 받도록 하는 한편, 1930년대에는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하고 군사 훈련을 실시하여 조직적인 항일 무장 투쟁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 질문1 의열단의 ‘의열(義烈)’의 뜻을 해석해 봅시다.
  • 질문2 의열단이 암살 대상으로 삼은 ‘7가살’은 누구인지 써봅시다.
  • 질문3 의열단이 파괴 대상으로 삼은 ‘5파괴’는 무엇인지 써봅시다.
  • 질문4 신채호는 「조선 혁명 선언」에서 독립 운동의 여러 주장 가운데 어떤 노선을 반대하고 어떤 방식을 주장하였는지 조사하여 말해 봅시다.

읽기자료 3

김익상(金益相)과 조선 총독부 폭파 의거 및 황푸탄 의거

김익상은 과거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탓인지 1895년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났다고도 하고, 김익상의 집터와 본적도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라는 설과 지금의 서울 마포구 공덕동이라는 설이 뒤섞여 있다. 또 어린 시절에 부모를 잃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 다니던 마포의 삼호보성소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철공소 견습공으로 취직했다는 주장과 평양의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기독교계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 서울로 올라왔다는 주장이 있다.
1919년 서울 서대문 밖에 있는 담배공장 광성공사(廣城公司)의 기계 감독으로 근무하던 김익상은, 1920년(또는 1921년) 6월 광성연초공사 펑톈[奉川; 현재의 선양] 지점으로 발령을 받았다. 중국으로 건너가게 되자 회사를 그만둔 그는 어릴 적부터 꿈꾸던 비행사가 되기 위해 비행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심하고 상하이를 거쳐 멀리 광둥[廣東]으로 갔다. 그러나 당시 중국에서 군벌 정부와 국민당의 싸움으로 비행학교가 폐쇄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중국을 돌아다니던 김익상은 베이징에서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을 만나게 되었다. 김원봉의 뜻에 감동받은 김익상은 조국 광복과 민족 독립을 위해 생명을 받쳐 헌신할 것을 맹세하고 의열단원이 되었다.
의열단에서 조선 총독부를 폭파하라는 지시를 받은 김익상은 1921년 9월 9일 김원봉으로부터 폭탄 2개와 권총 2정을 받아 다음 날 베이징을 떠나 9월 11일 무사히 서울로 몰래 들어왔다. 동생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김익상은 9월 12일 전기 수리공으로 위장하고 서울 남산 중턱의 왜성대 조선 총독부 청사 2층에 있는 비서과로 올라가 출납여비계실에 폭탄 1개를 던졌다. 그 방을 총독실로 착각하였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우선 폭탄 1개를 던지고 다시 회계과장실로 들어가 나머지 1개의 폭탄을 던졌다. 그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폭탄이 2개만 터지면 총독부 청사는 무너지고 총독과 일제 직원도 모두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비서과에 던진 폭탄은 불발이었으며, 회계과에 던진 것은 폭발은 하였지만 위력이 그렇게 크지 못하여 유리창, 마룻장, 의자, 책장 등 몇 개의 기물만 부서지는데 그치고 말았다. 폭발에 놀란 일본 관리들이 황급히 2층 회계과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는 동안 전기 수리공 복장의 김익상은 유창한 일본어로 “아부나이, 아부나이(위험하다, 위험하다)”라고 소리치니 아무도 그를 폭탄을 던진 사람으로 여기는 자가 없었다. 김익상은 유유히 청사 뒷문으로 나와 몸을 피하고 다시 변장한 후 기차를 타고 평양 등을 거쳐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1922년 3월 초 상하이로 간 김원봉은 베이징의 의열단원들을 불렀다.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가 중국 상하이에 온다는 정보 때문이었다. 다나카는 평소 대외 침략 정책을 강력히 주장하는 침략주의자이자 ‘간도 불령선인 초토화 계획’의 구상 및 작전 계획을 총지휘한 인물인 동시에, 제26대 일본 육군대신을 역임한 군부의 실세로 당연히 의열단이 처단할 대상이었다. 김원봉·이종암·오성륜·김익상·서상락·강세우 등 의열단원들이 마주 앉아 의논하는 가운데, 오성륜(吳成崙)·김익상·이종암(李鍾岩)이 앞 다퉈 자신이 거사를 하겠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순서를 조정해야 했다. 결국 다나카가 배에서 내릴 때 오성륜이 1선을 맡아 저격하고, 이것이 실패하면 김익상이 다나카가 차로 향할 때 2선으로 저격하고, 이마저 실패하면 다나카가 자동차에 오를 때 이종암이 저격하는 것을 3선으로 계획하였다.
1922년 3월 28일 오후 3시 반경 상하이 황푸탄[黃浦灘, 현 와이탄] 세관 부두에 도착한 다나카가 마중 나온 인사들과 악수를 나눌 때 오성륜이 권총을 꺼내 저격하였다. 다나카에게 적중했다고 생각한 오성륜은 “독립 만세”를 외쳤지만, 실제로 맞은 이는 곁에 있던 영국 여인이었다. 이에 2선의 김익상이 승용차를 향해 도망하던 다나카를 향해 권총을 쏘았으나 명중시키지 못하고 다나카의 모자만 뚫었다. 다시 김익상은 폭탄을 꺼내 던졌지만 불발이었다. 마침내 3선의 이종암이 군중을 헤치고 나가서 다나카가 탄 차에 폭탄을 던졌지만 이 또한 불발이었고, 미 해병이 발로 차 바다에 빠뜨렸다. 1선․2선․3선의 공격이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이종암은 재빨리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던지고 군중 틈으로 몸을 숨겼지만, 오성륜과 김익상에게는 일본 헌병과 경찰은 물론 중국 경찰과 인도 경찰까지 달려들었다. 오성륜은 현장에서 체포되고, 김익상은 허공에 권총을 쏘면서 도망가다 추격하던 영국 경찰이 쏜 총탄에 손과 발이 맞아 중국 순경에게 막다른 골목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오성륜과 김익상은 상하이 일본 영사관으로 끌려가 수감된 채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1922년 5월 2일 오성륜은 영사관 감옥을 깨뜨리고 탈옥에 성공하였으나, 5월 6일 김익상은 나카사키[長崎] 재판소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았다.
김상옥은 조사 과정에서 조선 독립을 위하여 육군대장 다나카를 습격하였음은 물론, 작년 가을 조선 총독부 청사에 폭탄을 던진 자가 자신이라는 사실까지 말하여 세상 사람들은 놀라게 하였다. 또한 그는 재판 과정에서도 일제의 침략, 폭력 행위를 거듭 밝히며 자신의 거사는 다만 조선의 독립을 위함이라고 말하였다. 그해 11월 사형이 확정될 때 의자를 들어 재판장을 공격하며 군중들을 향하여, “저놈들이 나를 죽일 수는 있지만 내 뒤에는 또 수많은 내가 있다. 일본은 반드시 망하고, 조선은 반드시 독립한다.”고 외치며 “조선 독립 만세”를 삼창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재판 과정에서도 당당하게 독립 의지를 밝히고 사형 판결에 대해서도 상고하지 않는 등 법정 투쟁을 계속하던 김익상은 무기징역으로, 다시 징역 20년으로 감형되어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42년 형을 마치고 국내로 들어와 살았으나, 일본인 고등경찰에게 끌려간 뒤 행적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정부는 김익상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였으며, 국가보훈처에서는 2010년 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여 그의 항일 투쟁을 기리고 있다. 서울 중구 예장동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앞에는 ‘김익상의사의거터’라는 작은 표지석이 세워져 있어 이곳이 김익상의 조선 총독부 폭파 의거가 일어난 곳임을 안내하고 있다.

  • 질문1 김익상이 의열단원이 된 것은 누구를 만나 영향을 받아서인지 그 사람의 이름을 써봅시다.
  • 질문2 김익상은 조선 총독부를 폭파하기 위해 폭탄 몇 개를 던졌으며, 던진 폭탄은 어떻게 되었는지 대답해 봅시다.
  • 질문3 중국 상하이에서 벌어진 황푸탄 의거는 1선․2선․3선까지 계획하였다. 1선․2선․3선을 담당한 의열단원은 누구였는지 차례대로 대답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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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남산 조선총독부(위)와 경복궁 앞 조선총독부(아래)<br>출처 : 국내독립운동·국가수호사적지 사이트(http://sajeok.i815.or.kr/)<br>위(http://sajeok.i815.or.kr/i815/view_region/108/page/1/sfl/all)<br>아래(http://sajeok.i815.or.kr/i815/view_region/496)

사진은 일제 강점기 서울에 있던 최고 통치 기관의 모습으로, 위 사진은 처음 사용한 건물이고 아래 사진은 1926년 새로 지어 옮긴 것이다.

  • 질문1 이 기관의 이름은 무엇인지 써봅시다.
  • 질문2 위 사진은 남산 왜성대에 있던 것이다. 아래 사진은 새로 지은 것으로, 어느 궁궐 정면에 세워진 건물인지 대답해 봅시다.
  • 질문3 김익상 의사가 폭탄을 던져 파괴하려고 했던 건물은 위․아래 건물 가운데 어느 건물인지 대답해 봅시다.

시각자료 2

『동아일보』 1922년 4월 1일자 7면 기사<br>출처 : 동아일보 동네(http://dongne.donga.com/) - 김익상 검색 - <이 사람이 ‘김익상’ 특종보도>

“작추(昨秋) 경성 모사건(京城 某事件)의 / 범인도 자기라 하는 김익상 / 전중 대장 암살범 3명 인도 / 장차(將次) 나가사키 재판소(長崎裁判所)로 호송(護送)”이라는 제목의 1922년 4월 1일자 7면에 보도된 『동아일보』의 기사이다.

  • 질문1 제목을 알아듣기 쉬운 우리말로 풀어 봅시다.
  • 질문2 이 기사는 1922년 3월 28일 중국 상하이 황푸탄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룬 것이다. 황푸탄 사건은 누가 누구를 암살하려고 한 사건이었는지 기사 내용을 중심으로 대답해 봅시다.
  • 질문3 기사에 의하면, 김익상은 자신이 ‘경성 모사건’까지 일으켰다고 자백하였다고 한다. 경성 모사건은 어떤 사건인지 대답해 봅시다.
  • 질문4 결국 조선 총독부 폭파 사건은 황푸탄 사건을 조사하면서 그 일을 벌인 사람이 밝혀진 셈이다. 김익상처럼 일제 관청을 파괴하거나 일본 관리 또는 매국노를 암살하는 일을 무슨 활동이라고 하는지 대답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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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일제 강점기 의열 활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로는 의열단 이외에 한인 애국단이 있다. 의열단과 한인 애국단을 비교․정리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2
남산에 있던 조선 총독부 건물은 현재 사라지고 없으며, 경복궁 안에 있던 조선 총독부 건물은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을 맞아 철거되었다. 총독부 건물의 철거 당시 “철거를 해야 한다, 해서는 안 된다.”는 논란이 있었다. 조선 총독부처럼 치욕적인 역사적 건물의 철거를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 두 모둠으로 나눠 토론해 봅시다.
모둠활동 3
7가살(七可殺)은 의열단이 제시한 것 이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제시한 7가살도 있다. 임시정부에서 제시한 7가살을 찾아 의열단의 7가살과 비교․정리한 후 사람들에게 쉽게 안내할 수 있는 팸플릿을 만들어 봅시다.
모둠활동 4
신채호의 「조선 혁명 선언」 전문을 읽어본 후, 의열 투쟁을 포함한 무장 투쟁을 지지하는 모둠, 자치론을 지지하는 모둠, 준비론을 지지하는 모둠, 외교론을 지지하는 모둠, 네 모둠으로 나눠 자기 모둠의 주장을 정리․발표하고 상대방의 노선을 서로 비판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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