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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호지면사무소 3·1운동 만세시위지(민관이 합심한 호서 지역의 대표적인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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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

간교한 일본은 강폭(强暴)하고 이를 주장하여
드디어 아국(我國)을 억탈(抑奪)하였으니
우리에게는 이로 통탄(痛歎)을 조우(遭遇)케 되었느니

생(生)컨데 거소(居所)가 없고
사(死)하여도 장지(葬地)가 없으니
이 원수를 보복하지 않고 어찌하겠느냐

각인(各人)이 노력하고 동심협력(同心協力)하여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를 보복하고
무궁후세(無窮後世)의 아국가(我國家)를 독립시키자


위 가사는 대호지 3·1운동을 전개할 때 한운석에 의해 만들어진 애국가이다.
1919년 4월 4일 시작된 대호지 3·1운동은 충청남도 당진군 대호지면 조금리에 있는 대호지면사무소 앞을 출발해 인근의 정미면 천의리 천의 장터까지 행진하며 전개한 만세 운동이었다. 대호지 3·1운동은 고종의 인산일[장례식]에 참여한 당진 지역 유생들, 면장 이하 면 직원과 각 동리 구장들, 그리고 대호지면의 전주민이 참여한 조직적인 만세 운동이었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조금리 183
[도로명 주소 :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4·4만세로 55-1]
현재 상태 멸실 / 현재 새 건물이 세워져있으며 면사무소 정문 앞에 1972년에 제막된 '3·1운동 순국 선열 영세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한민족 대부분이 참여한 3·1운동은 10여 년에 이르는 제국주의 일본의 폭력적인 통치가 원인이 되어 일어났다.
1910년 일제가 대한 제국의 국권을 강탈한 후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폭압적인 무단통치를 실시하여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근대적 기본권을 박탈하였다. 또한 회사령을 실시하여 민족 자본의 형성을 가로막고, 광업령 및 어업령 등을 통해 식민지의 자원을 장악하였다. 국권 강탈 이전부터 계획하였던 토지 조사 사업(1910~1918)도 본격적으로 실시하여 일본인들에게 싼 값으로 조선의 토지를 공급하고, 식민지의 자원을 철저하게 파악하여 총독부 수입을 늘렸으며, 지주의 권리를 강화하여 조선 지배의 협력 세력을 마련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인 농민들은 빠르게 소작농으로 전락하면서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불만과 저항이 거세어져 갔다.
1910년대에는 강압적인 식민 지배를 벗어나기 위한 국외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 국내 비밀 결사 운동·교육 문화 운동·생존권 수호 투쟁 등을 통해 독립 운동의 역량이 강화되어 갔다. 일제의 압제에 고통받던 한국인들은 제1차 세계 대전을 전후하여 나타난 국제 정세의 변화가 독립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 판단하였다. 특히 1918년 1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발표한 민족 자결 주의는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크게 드높였다.
손병희, 최린 등 천도교계, 이승훈 등 기독교계, 한용운 등 불교계가 먼저 독립선언을 계획하였다. 독립선언서를 비롯하여 파리강화회의 등에 보내는 독립 청원서, 일본 정부에 보내는 독립의견서 등을 작성하였고, 2월 27일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어 종교 교단을 중심으로 미리 배포되었다. 그 후 고종의 장례일인 3월 1일 정오에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지에서 동시에 독립 선언식이 이루어졌다. 3·1운동은 참가 계층이 학생과 지식인에서 노동자와 농민으로, 지역적으로는 도시에서 농촌으로, 방법으로는 비폭력에서 폭력적인 방법으로 확산되면서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대호지 3·1운동은 4월 4일에 대호지 면사무소와 정미면 천의시장 일대에서 있었다. 남주원 등 유림들은 2월 말경 상경하여 고종의 국장에 참례하고 서울지역의 3·1운동을 직접 목격하였으며 독립 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했다. 대호지 3·1운동은 이들이 ‘독립운동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두 차례 회합을 가지면서 대호지의 3·1운동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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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대호지 3·1운동의 지리적 배경

대호지면은 당진군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평리만을 사이에 두고 서산시 성연면과 대산면, 동쪽으로는 대호만을 사이에 두고 당진군 고대면과 석문면에 인접해 있다. 주변이 바다로 둘러싸여 해상 교통은 그런대로 통하였으나 육상 교통은 동남쪽에 위치한 정미면 천의리를 거쳐야 했기 때문에 대호지면은 전체적으로 폐쇄적이고 소외된 지역이었다.
대호지면 사성리 포구는 열악한 교통 문제를 해결해주는 유일한 장소였고, 대호지 주민들은 이곳을 통해 서울・경기 등 여러 방면으로 나갈 수 있었다.
대호지 3·1운동 당시 대호지면에는 지형적인 폐쇄성으로 인하여 면사무소 이외의 행정 기관이 설치되지 않았다. 면사무소 직원도 지역 주민 가운데 임명되었다. 일제는 대호지면의 치안 유지를 소홀히 하였고, 편의상 정미면 천의주재소의 통제를 받도록 하였다. 3·1운동 당시 대호지에 주재소가 없었기 때문에 대호지 주민들이 치밀하고도 조직적인 항쟁을 준비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

  • 질문1 대호지의 지형적 폐쇄성이 대호지 3·1운동에 미친 영향을 써봅시다.

읽기자료 2

대호지 3·1운동의 경제·사회적 배경

대호지면은 동족 마을 형성에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농업 구조상 밭농사와 논농사의 비율이 비슷할 정도로 평야 지대가 적고 구릉지가 펼쳐져 있어 대단위 벼농사에는 적합치가 않았다. 이 때문에 대지주나 세력가들의 침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대호지면의 토지 소유는 대부분 토착 지주나 자영농의 소유지였고, 다른 지역에 거주하면서 대호지면에 땅을 소유한 지주의 소유지는 많지 않았다.
이와 같은 입지 조건으로 대호지는 9개 리 중에서 1개 리를 제외하고 모든 마을에 동족 마을이 있었다. 1920년대 동족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각 성씨의 인원도 1,275명에 달해 거주 지역 주민 4,657명의 27.3%에 해당하였다.
이들은 문중의 결정에 최대한 순응하면서 혈연 공동체를 유지하였다. 서당이나 ‘종숙’을 설치하여 문중 자제들을 교육시켰고, 유교의 덕목과 ‘문중 혼’을 강조하면서 항일 정신을 일깨우기도 하였다. 대호지 3·1운동을 전개한 주민들의 결속이 강했던 것도 동족마을 구성원이었기에 가능하였다. 문중의 자제를 교육하기 위한 서당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의령 남씨가 1901년에 세운 도호의숙이다. 동족 마을의 서당들은 대호지 3·1운동의 중요한 배경을 이루었다.

  • 질문1 대호지면의 농지 소유 형태가 어떠했는지 말해 봅시다.
  • 질문2 대호지면에 존재하였던 동족 마을이 대호지 3·1운동에 끼친 영향은 무엇인가요?
  • 질문3 대호지면에 있었던 대표적인 문중 서당은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3

의병과 천도교의 영향

대호지 3·1운동은 의병 운동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대호지면에서의 의병 활동은 조금리의 강윤원, 송전리의 임정규, 적서리에서 체포된 정주원, 도이리의 남정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의병 활동은 한말 항일 항쟁에 큰 역할을 하였고, 대호지 지역 주민들에게 강렬한 항일 의식을 심어주었다.
대호지는 전통적으로 유학적 전통이 강했으나 송전리를 중심으로 천도교가 들어와 있었다. 천도교는 대호지 3·1운동의 준비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하지는 않았으나, 주동 인물 중 이달준, 남상락, 김도일 등이 천도교를 믿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대호지에서 3·1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옥중까지 항쟁이 계속된 것은 천도교의 항일 정신이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송전리에서 대호지 만세 운동이 끝난 직후인 1919년 4월 8일 제2의 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강렬한 천도교적 민족의식이 바탕이 되었다.

  • 질문1 대호지면에서의 의병 활동이 대호지 3·1운동에 끼친 영향은 무엇인가요?
  • 질문2 천도교가 대호지 3·1운동에 끼친 영향을 써봅시다.

읽기자료 4

고종 인산 참례 유생과 면직원의 논의

1919년 2월 28일경 남주원을 중심으로 남상돈, 남상락, 남상직, 남계창, 이대하, 이두하 등의 지역 유생들이 고종의 인산에 참례하기 위해 상경하였다. 이들은 서울에서 3·1운동을 목격하고 내려와 대호지에서도 독립 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때 남상락은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 1통을 구해서 귀향하였다.
3월 26일, 이들은 면사무소에서 면직원인 민재봉, 김동운, 강태완, 송재만 등을 만나 만세 운동에 대한 논의를 벌였다. 이때 김동운은 “현재 각 지방에서 조선 독립 만세를 힘껏 부르고 있는데 서산군에서 부르지 않음은 다른 지방에 대하여 부끄러운 일이니 우리도 고창(高唱)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수의 사람을 집합시켜야 하는데 우선 사람들을 집합시키는 방법을 알아보자.” 하고 헤어졌다.
상경하였던 유림들은 위정척사적 사상에 의하여 만세 운동을 전개할 것을 논의하였고, 여기에 면사무소 직원들이 가세하면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구체적 준비에 들어갔다.

  • 질문1 대호지 지역 유생의 고종 인산 참례가 대호지 3·1운동에 끼친 영향은 무엇인가요?
  • 질문2 면직원들이 면사무소에서 모여 논의한 내용은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5

만세 운동 추진위원회 구성

고종의 인산에 참여했던 유생들을 중심으로 대호지 3·1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추진위원회’을 구성하였고, 두 차례의 모임을 거치면서 상당수의 주민이 가담하였다. 대호지 3·1운동의 주동자 12명 중 절반에 가까운 5명이 도호의숙에서 유학을 공부한 인물이었다. 그 중 한운석은 도호의숙 훈장이었고, 상경하였던 유생들도 모두 도호의숙 출신이었던 것을 보면 도호의숙 출신의 유생들이 대호지 3·1운동의 중심이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추진위원회는 1919년 4월 4일(음력 3월 4일), 정미면 천의리 장터에서 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는데, 면사무소 직원들도 같은 의견이었다. 즉 김동운이 만세 운동의 필요성을 제기했던 다음 날인 3월 27일 오후 4시경, 민재봉, 김동운, 송재만 등 3인이 면사무소에서 다시 만났다. 이때 김동운이 “각 구장에게 도로를 수선한다는 취지의 공문을 발송하여 4월 4일 오전 8시경에 면내 각 호는 1명씩을 면사무소에 집합하게 하여 만세를 고창하게 하고, 그 날이 천의 시장의 장날인 고로 군중을 인솔하여 시장으로 가자.”고 발의하였다. 천의 시장은 대호지면 면소재지에서 7km 떨어진 곳이었으나 인근의 정미면, 대호지면, 고대면의 주민이 모이는 곳으로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
추진위원회와 면직원들은 마을별로 연락을 담당할 인물을 선정하여 봉기 전날 봉화로 연락하기로 하였으며, 청년들로 선봉 행동대를 구성하여 시위 대열에 앞세운다는 계획을 세웠다.

  • 질문1 추진위원회에 참여하였던 인물들은 대부분 어떤 신분이었나요?
  • 질문2 면직원들은 어떤 계획을 세웠는 지 써봅시다.
  • 질문3 만세 시위 장소를 천의장으로 잡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4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한 날을 4월 4일로 정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6

주민 동원과 태극기 제작

만세 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준비는 면사무소 직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919년 4월 2일 밤 면사무소에는 민재봉, 강태완, 김동운, 송재만 등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강태완은 대호지면 각 구장에게 보내는 ‘도로 수선과 나무 정리의 건’이라는 공문을 작성했고 송재만은 이를 인쇄하였다. 강태완은 공문에 면장의 직인을 날인하였다.
4월 3일, 송재만은 면내 각 구장을 방문하여 공문을 전달하면서 4일에는 도로 수선을 위해 각 호당 1명씩 반드시 면사무소에 집합할 것을 당부하였다. 각 구장들은 공문의 내용을 주민들에게 전달하였고, 4월 4일 아침 면사무소에 집합하거나 정해진 구역의 도로를 보수하도록 하였다.
4월 3일 밤, 면직원들은 다시 면사무소에 모였다. 이 자리에는 한운석도 참여하였다. 당시 한운석은 도호의숙의 한문 훈장이며 남주원이 운영하던 반곡서당 훈장도 겸하고 있었다. 이들은 애국가를 지어 배포하기로 결정하였다. 한운석이 애국가를 지어 320장을 인쇄하였다. 송재만은 자신의 수의를 짓기 위해 사두었던 흰 광목을 활용하여 대형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 질문1 대호지 3·1운동을 실무적으로 준비한 사람들은 어떤 신분이었나요?
  • 질문2 4월 4일 주민들을 모으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했나요?
  • 질문3 애국가를 지은 사람은 누구이며 신분은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7

대호지면사무소에서 대호지 3·1운동 시작

1919년 4월 4일 아침, 유생들과 행동 대원, 그리고 도로 수선을 위해 참여한 주민 등 500명이 대호지면사무소에 모여 들었다.
송재만이 만든 태극기를 높게 매달았다. 대호지 면장 이인정은 주민을 향하여 “여러분을 모이게 하였음은 도로 수선을 하고자 함이 아니라 조선의 독립 운동을 일으키고자 하는 것이니 여러분은 이에 찬동하여 조선 독립 만세를 힘차게 부르며 정미면 천의 시장으로 향하라.”는 취지의 연설을 하였다. 이어 남주원이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였고, 한운석에 의해 제작된 애국가가 이대하의 선창으로 제창되었다. 이어서 이인정의 선창에 따라 조선 독립 만세를 부르고, 송재만의 선창에 따라 다음과 같은 선서문을 제창하였다.

선서문
① 우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최후의 일각까지 몸 바쳐 싸우자.
② 우리는 끝까지 행동을 통일하고 생사를 같이한다.
③ 우리는 우리 독립운동의 기밀을 누설하지 않는다.

참여자들은 천의 장터로 향하기 위해 3개 편대를 구성하고 편대장을 임명하였다. 태극기를 앞세우고 이인정 면장이 말을 타고 선두에 선 가운데, 천의 시장을 향해 행진을 시작하였다. 도로 연변에는 대호지면 주민들이 도로 정비를 위해 나와 있었다. 송재만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인쇄한 애국가 약 400여 장을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대호지면 조금리에서 출발한 행렬은 대호지면 장정리와 정미면 승산리를 거쳐 천의리에 이르게 되었다. 약 7㎞에 달하는 정미면 천의 시장까지 가는 사이에 동참한 주민의 수는 900여 명이 넘었다. 행렬이 천의 장터에 이르러 태극기를 시장 광장에 세우자 시장에 모여 있던 장꾼, 인근 주민, 여타 군중이 합세하여 1,000여 명의 군중이 독립 만세를 외치게 되었다.

  • 질문1 대호지 3·1운동이 시작된 날짜와 장소를 써봅시다.
  • 질문2 대호지면사무소에 모인 주민은 몇 명이었나요?
  • 질문3 대호지 3·1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행한 송재만의 활동에 대해 써봅시다.
  • 질문4 대호지면사무소에서 시작된 대호지 3·1운동 행렬이 향한 곳은 어디인가요?
  • 질문5 천의 장터에 모인 군중은 몇 명이었나요?
  • 질문6 처음에 도로 보수를 위해 모였던 군중들과 각 마을 주민들이 왜 적극적으로 만세 시위 운동에 가담했을지 생각해 봅시다.

읽기자료 8

천의 장터에서의 만세 운동

천의에 도착한 군중은 남주원의 연설을 들은 후 다시 시가행진을 하였다. 이들은 천의주재소와 정미면사무소로 이동하며 조선 독립 만세를 높이 외쳤다. 이때 천의 주재소에 근무하는 일본인 순사와 한국인 순사보가 시위를 제지하자, 군중들은 오히려 이들을 잡아 대열에서 만세를 부르도록 종용하였다. 이들은 만세를 부르다가 도망하여 당진경찰서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당진경찰서에서는 무장경관 2명을 천의로 파견하였다.
만세 시위는 오후 4시경까지 이어졌다. 만세 운동이 끝나갈 무렵 지원 요청을 받은 당진경찰서의 일경(日警)이 도착하여 대형 태극기를 탈취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남태우, 김팔윤 등은 순사들을 논 가운데로 밀어 넣었으며 이런 와중에 두 순사가 권총을 발사하여 시위대 4명이 중상을 입었다. 순사의 발포와 부상자의 발생으로 군중이 크게 분노하여 그들에게 돌을 던졌다. 이들의 투석전은 격렬했으며 일제 순사들을 구타하고 환도를 빼앗기도 하였다. 결국 주재소가 파괴되고 주재소 순사 및 당진에서 지원 온 순사도 구시장 쪽으로 도망하였으며, 그 뒤를 수십 명의 군중이 쫓아가는 등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이때 ‘다지리’라는 일본인이 순사가 매를 맞고 주재소가 파괴되는 것을 말리려다가 군중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송재만과 이대하가 쫓아가 다지리의 집을 부수고 들어가 엽총 1정과 권총 1정, 그리고 탄약 약간을 탈취하였다.
만세 운동이 끝나고 참여자들은 다음 연락이 있을 때까지 일단 귀가하기로 하였다. 탈취한 무기는 사성리 이대하의 집에 모았고, 송재만은 이를 대호지에서도 가장 오지인 적서리의 한적한 숲 속에 숨겨 두었다. 송재만은 사성리에 돌아와 남주원과 만나고 남세원의 자전거를 빌려 타고 송전리로 이동했다. 4월 4일 밤, 만세 운동 주동자들은 송전리 민재봉의 집에 모여 재차 거사를 논의하였다.

  • 질문1 만세 시위 군중이 처음으로 향한 곳은 어디인가요?
  • 질문2 만세 시위는 몇 시까지 진행되었나요?
  • 질문3 일본 순사를 구타하고 격렬한 투석전을 전개한 직접적인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 질문4 송재만과 이대하가 일본인 다지리로부터 탈취한 무기는 무엇이었나요?
  • 질문5 4월 4일 밤, 만세 운동 주동자들이 송전리 민재봉의 집에 모인 이유를 써봅시다.

읽기자료 9

헌병대의 출동과 2차 시위

홍성수비대 군인 5명, 서산과 당진경찰서에서 8명으로 구성된 일제 군경이 천의로 출동하였다. 이들은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던 송봉운과 대호지면사무소 앞 광장에서 마주치자 그를 폭행하고 면사무소 앞 200여 미터 정도에서 총격을 가해 사망하게 하였다. 그 후 수비대는 사성리 남주원의 집에 근거지를 확보하고 주모자 색출에 주력하였다.
한편 대호지 3·1운동은 인근 지역에 만세 시위 운동을 확산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같은 날인 4월 4일 밤에는 면천 8개 마을, 순성 10개 마을 등 당진 대부분의 지역에서 높은 산에 올라가 불을 피우고 만세를 부르는 봉화 시위를 하였으며, 4월 5일에는 송악면 기지시리에서 군중 수백 명이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4월 8일에는 인접한 서산군 성연면 갈현리에서 성왕산에 올라 만세 시위를 하였고, 같은 날 서산군 운산면 수평리에서는 주민 300여 명이 만세 운동을 전개했으며, 그날 밤 운산면 용현리에서는 주민 50여 명이 보현산을 중심으로 횃불 시위를 하였다.
4월 4일의 천의 장터 시위가 있은 후, 주동자들은 재봉기를 논의하여 다음 거사일을 4월 8일로 정하였다. 4월 8일 오후 6시, 대호지면 송전리의 뒷산에서 봉화가 솟아올랐다. 20여 명의 송전리 주민들이 경계 중이던 일제 경찰 및 군인을 폭행하면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송전리의 재봉기에 일제 경관 6명, 군인 2명이 출동하여 총칼로 진압으로써 사상자 2명이 발생하였다. 오후 7시경에는 대호지면 조금리 주민 70여 명이 벌인 만세 시위 운동은 일제의 진압으로 사망자 1명, 부상자 1명이 발생하였다. 마지막으로 밤 10시경, 정미면 수당리에서도 300여 명이 봉화산에 올라가 봉화 시위를 하였다. 이곳에도 일제 경찰 4명, 군인 2명이 출동하여 총칼로 진압함으로써 1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 질문1 대호지 3·1운동에서 일제에 의해 처음 사망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 질문2 대호지 3·1운동이 인근 지역에 끼친 영향은 무엇인가요?
  • 질문3 대호지 3·1운동이 재봉기는 언제 일어났는지 써봅시다.
  • 질문4 일제 군경은 당진 지역의 평화적 만세 시위를 어떤 방법으로 진압하였나요?
  • 질문5 대호지 3·1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일제 군경의 무력 탄압에 대해 어떻게 저항했나요?

읽기자료 10

일제의 탄압

대호지 3·1운동에 참여해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모두 199명에 이르렀다. 현장 순국자는 1명이고, 서산경찰서로 연행되어 태형 90대의 처분을 받은 인원이 72명, 대전지방검찰청 공주지청에 이송되거나 명단이 확인되는 인원이 126명이다. 이들 126명 중 공주지청에서 태형 90대를 받은 사람이 16명, 불기소 처분 및 면소 방면 68명, 옥중 순국 3명, 징역 8월 이상 5년형까지 받은 인원이 39명이었다. 3·1운동에 참여한 대호지 주민들은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탄압 속에서도 끊임없이 항쟁하였다. 특히 일제의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에 상고까지 요구하였다. 이는 대호지 주민들이 3·1운동을 전개하고 독립을 요구한 사실을 지극히 정당하고 떳떳한 행위로 자부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 질문1 대호지 3·1운동에 참여해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몇 명인가요?
  • 질문2 3·1운동은 예산, 홍성, 아산 등 인근 지역에서도 모두 일어났었는데, 당진 대호지 3·1운동이 다른 지역과 조금 달랐던 점들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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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사진은 1972년에 세워진 3·1운동 순국 선열 영세 추모비이다.

  • 질문1 기념비에 어떤 내용이 새겨져 있는 지 상상하여 써봅시다.
  • 질문2 내가 사는 고장에도 3·1운동이나 독립운동가를 추모하는 비석이 있는지 조사해보고, 비석의 제목을 써봅시다.

시각자료 2

다음 기사는 대호지 3·1운동으로 구속된 인물들이 공주지방법원의 판결에 반대하여 항소한다는 1919년 11월 19일 자 『매일신보』기사이다.

  • 질문1 대호지 3·1운동으로 구속된 인물들이 공주지방법원의 판결에 반대하여 항소한 이유를 써봅시다.
  • 질문2 기사의 맨 오른쪽 제목을 읽어보면 “서산 소요 범인 불복 항소”인데, 대호지 3・1운동을 “소요”라 하고, 참여한 분들을 “범인”이라 표현한 것으로 보아 이 신문은 일제 식민 통치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고 있던 신문이었을까요?

시각자료 3

사진은 대호지 3·1운동에 참여하신 분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숭고한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영구히 기리기 위해 1992년 2월 25일 건립한 창의사이다.

  • 질문1 창의사에 모셔진 순국선열을 추모하는 짧은 글을 써봅시다.
  • 질문2 내가 사는 지역에도 순국선열을 추모하는 사당이 있는지 알아보고, 사당의 이름을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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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모둠별로 대호지 3·1운동 참여를 독려하는 격문(유인물)을 써봅시다.
모둠활동 2
모둠별로 대호지 3·1운동을 주도하는 입장에서 만세 운동의 계획을 시간대별로 구체적으로 작성해 봅시다.
모둠활동 3
모둠별로 ‘한국독립운동사정보시스템’, ‘공훈전자사료관’ 등 인터넷 검색을 통해 우리 고장에서 3·1운동이 일어났던 지역과 지도자, 참여 인원 수 등을 조사해서 간단한 표로 정리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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