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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 - 독립대동단 활동지(대한민국 임시 정부 지원을 위한 비밀 독립 운동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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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언서
우리 조선 민족은 2천만 성충(誠忠)과 묵계(黙契)의 발동에 따라 반만년 역사의 권위에 의지(倚)하여 인류 대동의 새로운 요구에 응하려 하며 세계 평화의 대원칙을 준수하고 정의․인도의 영원한 기초를 확립하기 위해 앞서 조선 독립을 선포했다. …(생략)…
우리 민족은 민족적 정신의 자각을 진중히 가지며 생존상 기능의 자신(自信)을 발휘하여 엄격한 주장을 관철할 것이다. …(생략)… 모든 우리 민족 일치의 동작으로써 10대 사회 각 단체와 지방 구역이 선출한 인원을 통일․종합시키기 위해서 본단을 조성하고 우리 민족 영세(永世)의 귀추인 3대 강령을 내세워 이를 세계에 선언하는 바이다.

3대 강령
(1) 조선 영원의 독립을 완성할 것.
(2) 세계 영원의 평화를 확보할 것.
(3) 사회의 자유 발전을 널리 실시(廣博)할 것.
조선 건국 4252년 5월 20일
조선민족대동단


위 내용은 조선 민족 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이 주장한 선언서와 3대 강령이다. 조선 민족 대동단은 독립 대동단, 간단히 대동단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3·1운동 이후 독립 의식을 높이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1919년 3월 말경 서울에서 조직된 비밀 독립 운동 단체이다. 회원은 귀족·관리·유학자·종교인·상공인·청년·학생·부녀자 등 각계각층 11개 사회 단체 대표자들로 구성되었으며, 비밀 유지를 위해 점조직으로 운영되었다.
서울에서 창립하여 경기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평안도·함경도·만주 등에 지부를 설치해 조직을 확대한 대동단은 군자금을 모으거나 독립 의식을 드높이는 선언문과 포고문 등을 인쇄․배포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고종(高宗)의 아들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을 국내에서 상하이[上海]로 탈출시켜 임시 정부에 참여하게 하여 외교적 효과를 얻으려는 한편, 의친왕의 이름으로 제2차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여 국내외의 관심을 높여 독립 운동을 촉진시키려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기도 하였다.
제2차 독립 만세 운동을 추진한 인물 가운데 이종욱(李鍾郁)이 있다. 이종욱은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승려로 있으면서 3·1운동에 참여하는가 하면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임시 정부 내무부 특파원으로 임명되어 국내로 들어와 임시 정부와 국내를 연결하는 비밀연락망인 연통제(聯通制)를 조직하고, 정보 수집과 군자금 모금, 대동단 지원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21년 임시 정부 내무부 특파원으로 다시 국내로 몰래 들어와 활동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을 감옥에서 보냈다. 출옥 후 이종욱은 월정사에 머물며 독립 운동을 지원하는 일을 하였다.
하지만 이종욱은 1936년경부터 친일 행위를 했기 때문에 이종욱에 대한 항일과 친일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이종욱의 활동 근거지였던 월정사는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제4교구 본사로서 많은 문화유산을 품은 유명한 관광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다만, 독립 대동단과 관련한 항일 운동에 대한 안내는 거의 없는 편이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63 월정사
[도로명 주소 :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 374-8 ]
현재 상태 변형 / 6·25 전쟁 때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1964년 재건되었다.

1910년대 일제는 무자비한 ‘무단 통치’를 실시하였다. 조선 총독부는 헌병이 일반 경찰의 행정까지 담당하도록 하였는데, 전국 각지에 배치된 헌병 경찰은 치안 업무와 함께 조선인의 모든 생활을 통제하였다. 조선 총독부는 각종 단체를 해산시키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제한하는 등 모든 민족 운동을 철저하게 탄압하였다. 독립 운동가를 찾아내는 것은 물론 1912년에 <조선태형령>을 제정하여 각종 고문을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일삼았다.
또한 조선 총독부는 토지 조사 사업 실시와 함께 1910년 제정한 <회사령> 등을 통해 조선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고 대부분의 중요 산업을 일본 기업이 차지하게 하였다. 일제의 가혹한 통치로 국내 민족 운동은 지하 조직이나 비밀 단체를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고, 오히려 국외에서 민족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민족 자결주의의 영향과 일제의 가혹한 통치에 대한 분노로 일어난 1919년의 3·1운동을 계기로 일제는 통치 방식을 바꾸게 된다.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꾸고, 회사 설립에 대한 허가제를 1920년에 철폐하여 신고제로 바꾸었다. 한국인의 신문 발행 허가, 한국인의 정치 참여 등을 허락하는 이른바 ‘문화 통치’를 내세웠다. 이에 국내에서는 애국 계몽 운동이 활성화되었으며, 국외에서는 독립 운동을 지도할 중심 정부로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해방을 앞당기기 위한 각종 의열 투쟁과 무장 투쟁이 적극 전개되었다.
하지만 일제의 문화 통치는 허울에 불과하였다. 보통 경찰제를 실시한다고 내세웠지만 경찰의 수와 장비는 더욱 늘어나고, 우국지사(憂國之士)들을 전문적으로 탄압하기 위한 고등 경찰제를 실시하였으며, 1925년 제정한 <치안유지법> 등으로 한국인에 대한 탄압이 이전보다 크게 강화되었다. 신문 발행을 허용하였다 하나 검열·삭제·폐간 등을 계속하였으며, 산미 증식 계획으로 일제의 경제적 수탈이 증가하여 우리 농민들은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려야만 했다. 또한 애국 계몽의 한 방법으로 전개한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을 탄압하는 등 한국인에게는 초급과 농업 교육만 가르쳤다. 그리고 일제는 소수의 친일 관료들을 키워 한국인을 이간질하고 분열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이로 인해 민족 운동은 비타협적 민족주의와 타협적 민족주의(민족 개량주의)로 나눠졌다. 민족 개량주의자 가운데는 일제에게 참정권을 얻자는 자치 운동(참정권 운동)을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친일의 길을 걷는 자도 있었다. 결국 문화 통치는 민족 분열 통치에 다름없었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일제는 ‘민족 말살 통치’를 실시하였다. 만주를 점령한 일제는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키면서 한반도를 일본의 중국 대륙 점령을 위한 병참 기지로 삼아 전쟁에 필요한 인력과 군자금, 군수품을 조선으로부터 얻으려 하였다. 이를 위해 1936년 <조선인사상범보호관찰령>을 제정하여 사상 통제를 강화하고, 1940년 산미 증식 계획을 다시 실시하여 곡식은 물론 금속까지 빼앗아갔다. 지원병제와 징용제․징병제를 실시하여 한국인을 전쟁에 동원하고, 여자들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군수 공장 등에 보내거나 일본군의 성노예인 위안부로 내몰았다.
또한 일제는 우리 민족을 아예 말살하고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해 1935년 신사 참배 강요와 1937년 제정한 황국 신민 서사를 강요하고, 1938년 조선어 사용 금지를 법제화하는가 하면, 1940년 우리 이름을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는 창씨개명을 강요하였다.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는 내선일체와 “일본과 조선은 조상이 같다”는 일선동조론으로 우리 역사를 거짓으로 꾸미는 식민사관을 통해 민족 말살 정책을 합리화하였다. 일제의 감시와 수탈은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이후 더욱 심해졌다. 이런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에 굴복하거나 동참하면서 친일의 길로 변절하는 자가 적지 않았으나, 목숨을 바쳐 독립 운동에 헌신하는 이들 또한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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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연통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활동은 비밀 행정 조직인 연통제와 교통국(交通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919년 4월 11일되어 4월 13일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국내외 연락을 위해 같은 해 7월 10일 지하 비밀 연락망인 연통제를 설립하였다. 중앙에 연통부를 두고, 각 도(道)에 감독부, 각 부(府)와 군(郡)에 총감, 각 면(面)에 사감부를 설치하였다. 이들 연통 각 부의 주요 업무는 임시 정부에서 내리는 법령과 공문 전달, 독립 운동의 진행 사항 파악, 독립 전쟁에 대비한 군인 모집과 군수품 모금에 관한 사항, 군자금의 송부, 기타 상부의 명령 전달 등이었다.
또한 연통 각 부는 독립 운동을 하다 순국하거나 부상한 애국열사의 인적 사항, 군자금을 지원하거나 군사 경험을 가진 사람의 인적 사항, 독립 운동에 관한 민심 동향, 일본 군경의 활동 사항 등을 매 5일마다(사태가 긴급할 때는 즉시) 조사해 임시 정부에 보고하였다. 1919년 11월 30일 서울에 임시 총판부(臨時總辦府)가 설치되면서 국내 조직과 기능이 확대되었으나 전국의 말단 행정 단위까지 연통제 조직이 침투하지는 못했다. 평안도․황해도․함경도 등 임시 정부와 교통․통신이 원활한 북부 지역에는 연통제가 비교적 잘 운영되었지만, 전라도․경상도․강원도 등에는 조직을 세우기가 어려웠으며, 경기도․충청도는 일부 지역에서만 연통제가 실시되었다. 처음 연통제는 국내에만 실시하고 해외에는 거류민단을 구성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만주의 독립 운동 단체들과 업무 연락 강화와 행정 통제를 위해 1920년 10월부터 이들 지역에도 연통제를 실시하였다. 시베리아에도 연통제를 추진했으나, 책임자가 의병을 모아 무장 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체포․살해되면서 좌절되었다.
비록 어려움은 많았지만 임시 정부는 연통제를 통해 국내 및 만주의 애국 운동 단체와 지식인 등 독립을 위해 노력하는 세력들과 유기적인 연대를 갖출 수 있었다. 연통제는 임시 정부의 선전․통신․연락과 독립 운동 자금의 수혈 등이 원활히 이루어지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연통제 활동에는 교사와 학생, 승려, 전도사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했다. 그러나 전국 단위의 방대한 조직이다 보니 미행과 단속 등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기가 쉽지 않았다. 일제의 끈질김 감시와 탄압으로 1921년 들어 연통제 조직이 사실상 붕괴되면서 임시정부의 국내 활동도 크게 위축되었다. 이후 임시 정부의 국내 연락은 극소수 비밀 조직원과 국내 애국 단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 질문1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활동은 비밀 행정 조직인 무엇과 무엇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지 써봅시다.
  • 질문2 연통제의 주요 임무는 무엇이었는지 나열해 봅시다.
  • 질문3 연통제 조직이 사실상 붕괴된 때는 언제인지 대답해 봅시다.

읽기자료 2

비밀 결사 조직 ‘독립 대동단’

독립 대동단(獨立大同團)은 거족적인 3·1운동이 큰 성과 없이 끝나자 독립 의식을 더욱 드높이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등과 같은 독립 운동 단체들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비밀 항일 결사 조직이다. 1919년 3월 말경, 한때 일진회(一進會: 1904년부터 1910년까지 일본의 한국 병합에 적극 앞장선 친일 단체) 회원이었으나 뉘우치고 독립 운동가가 된 전협(全協)과 최익환(崔益煥) 등이 중심이 되어, 서울 봉익동 전협의 집에서 조선 민족 대동단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졌으며, 흔히 대동단이라고 부른다. 대동단 단원은 귀족·관리·유학자·종교인·상공인·청년·학생·부녀자 등 각계각층 11개 사회 단체 대표자들로 구성되었으며, 비밀 유지를 위해 점조직으로 운영되었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을 고문으로, 김가진(金嘉鎭)을 총재로 삼았으며, 군자금 등 재정은 전협이, 선전 활동 및 대외 활동은 최익환이 맡았다. 경기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평안도·함경도 등 국내뿐만 아니라 만주 안동(安東, 현 단둥[丹東]) 지역 등 동포들이 살고 있는 국외에도 지부를 설치하고 단원과 자금을 모집하였다.
대동단은 임시 정부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선전과 자금 모집, 항일 무장 조직을 위한 군자금 모금, 선언문·진정서·포고문 등을 인쇄·배포하는 일을 하였다. 『대동신보(大同新報)』를 비밀리에 제작·배포하여 독립 운동에 힘쓸 것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대동단 단원들은 인쇄기와 용지를 구입하여 인쇄한 각종 유인물을 비밀 단원들을 통하여 민가에 뿌리거나 특정인에게 전달하였다. 낮이면 부랑자로 가장한 단원들이 유인물을 배포하고, 밤이면 배추 장수나 상주(喪主)로 변장하여 활동하였다.
친일 활동을 하던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다가 새롭게 독립 운동의 길에 참여하고자 대동단에 참여한 김가진은, 사돈 관계인 의친왕 이강을 상하이로 탈출시켜 임시 정부에 참여시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겼다. 김가진은 임시 정부의 이종욱을 통해 의친왕의 서울 탈출을 추진하였다. 이종욱은 서울에서 대동단 단장 전협을 만나 함께 하기로 하였으며, 1919년 11월 10일 의친왕 등 5명의 일행이 변장을 하고 서울에서 만주 안동행 열차를 올랐다. 뒤늦게 의친왕이 없어진 사실을 알게 된 일본 경찰은 국경 지대에 비상령을 내렸으며, 다음날인 11일 안동역에 도착할 무렵 의친왕 일행은 체포되고 말았다(대동단 사건). 이 사건으로 대동단 조직이 발각되어 많은 단원이 붙잡혀 가 1920년 6월 예심을 거쳐 12월 1심 판결에서 전협과 최익환 등 31명이 징역 6개월에서 8년까지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김가진과 나창헌(羅昌憲) 등이 대동단의 활동을 계승하였고, 정남용(鄭南容)이 붙잡히기 전까지 각종 선언서·포고문 등을 인쇄하여 전국에 배포하면서 독립 정신을 드높이고 독립 운동을 이끌었다.
대동단을 이끈 전협은 한때 일진회 회원으로 친일 활동을 하였으나, 대동단을 계기로 독립 운동에 가담하였다. 친일 활동을 뉘우치고 독립 운동에 뒤늦게나마 참여한 전협과 달리, 대동단 활동을 지원하던 임시 정부의 이종욱은 뒷날 친일 행위를 하여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 질문1 독립 대동단이 조직된 배경은 무엇인지 대답해 봅시다.
  • 질문2 독립 대동단은 임시 정부를 지원하는 등 어떤 일들을 하였는지 나열해 봅시다.
  • 질문3 ‘1919년에 일어난 대동단 사건’에 대해 설명해 봅시다.

읽기자료 3

이종욱의 독립 운동과 친일 활동

호가 지암(智庵)인 이종욱은 1884년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나 1896년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 승려로 있으면서 1919년 3·1운동 때 평창군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고, 1919년 3월 3일 을사오적을 제거하기 위해 이탁(李鐸) 등 27명이 조직한 ‘27 결사대’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19년 3월 20일 결사 투쟁을 약속한 동지들과 같이 인천 월미도에 모여 국내에 임시 정부를 수립할 것을 모의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임시 정부의 무대를 해외에서 찾고자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내무부 참사로 참여하였으며, 임시 정부의 대한적십자회(현 대한적십자사) 설립에도 관여하였다. 또 1919년 6월에는 안재홍(安在鴻)·송세호(宋世浩)·연병호(延秉昊) 등과 함께 임시 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항일 비밀 단체인 대한민국 청년 외교단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10월과 11월 대동단 단장인 김가진의 상하이 망명을 돕고 의친왕 이강의 탈출을 도왔으나, 의친왕이 만주 안동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혀 실패하였다(대동단 사건). 이종욱은 의친왕 탈출 사건 직전에 상하이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여 체포되지 않았다.
1919년 12월 임시 정부 내무부 참사에 임명되고, 1920년 3월 임시 정부 임시 의정원 강원도의원(국회의원)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1920년 3월 임시 정부 내무부 특파원으로 다시 국내로 들어와 연통제 조직을 위해 활동하다 같은 해 8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함흥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이종욱은 오대산 월정사 승려로 지내면서 적극적으로 친일 행위를 하였다. 1930년 조선 총독부의 임명을 받는 월정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선교양종 승려 대회에서 불교계 대표격인 종회(宗會)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37년에는 불교계 31개 본산의 주지들이 모여 총본산(조계종)을 설립하기로 했을 때 총본산 건설 위원회 대표가 되었는데, 당시 불교계의 수장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기까지는 조선 총독부의 후원이 필요하였다. 중․일 전쟁 이후에는 일본군을 위한 기원 법회나 시국 강연회를 열어서 적극적으로 일본에 협력하였으며, 『신불교』 등의 잡지에 친일 글을 쓰기도 하였다. 전쟁 지원을 위한 친일 단체인 국민 총력 조선 연맹, 임전 대책 협의회, 조선 임전 보국단에도 빠짐없이 가담하였다. 나아가 전투기 대금과 국방헌금 모금 운동을 하여 1942년까지 일본군에게 헌납한 비행기가 5대나 되었으며, 일본군이 무기로 사용하도록 사찰의 범종 등을 모아 바치기도 하였다. 또한 일제의 창씨개명과 조선 청년 징병제 등에 적극 찬동하여 모범을 보이고 선동하는 역할까지 하였으며, 일본군의 승리와 미국의 항복을 기원하는 법회를 열기도 하였다.
광복 후인 1945년 8월, 친일 행적으로 1941년부터 맡아온 종무총장 직에서 사퇴하고 징계를 받기도 하였지만, 우익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1945년 12월 신탁 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 강원도 대표로 선출되었고, 1946년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 총무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 강원도 평창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불교계의 거물급 인사가 되었다. 1951년 동국대학교 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하였고, 1952년 친일 행적으로 사직하였던 조계종의 대표 자리인 총무원장에 복직하였다. 그리고 1969년 구례 화엄사에서 사망하였다.
이종욱은 독립 운동 경력을 인정받아 1977년 국가유공자로 인정되어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고, 그의 사리는 1978년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그의 친일 논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1993년 국가보훈처가 친일 경력이 있는 독립유공자들을 대상으로 다시 심사할 때 재심 대상자 8명 중의 하나로 명단에 올랐다. 2002년 민족 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어 결국 201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취소되고 독립유공자에서도 제외되었다.

  • 질문1 이종욱이 을사오적을 처단하기 위해 이탁(李鐸) 등과 함께 조직한 단체 이름은 무엇인지 써봅시다.
  • 질문2 이종욱의 독립 운동은 주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어떤 조직을 통해 이루어졌는지 대답해 봅시다.
  • 질문3 이종욱이 각종 헌금을 모아 1942년까지 일본군에게 헌납한 비행기는 몇 대나 되는지 말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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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대동단사건 예심결정서(1)<br>출처 : 필자 직접 작성(동아일보 기사 캡쳐 및 편집(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0062900209203015&edtNo=1&printCount=1&publishDate=1920 - 06 - 29&officeId=00020&pageNo=3&printNo=88&publishType=00020)

『동아일보』 1920년 6월 29일자 기사 내용이다.

  • 질문1 제목이 ‘대동단사건 예심결정서(1)’이라고 되어 있는데, 대동단 사건은 대동단의 김가진․전협 등이 의친왕 이강을 국내에서 상하이로 탈출시키려다 일제 경찰에게 들킨 사건이다. 대동단이 의친왕을 상하이로 탈출시키려고 한 이유를 대답해 봅시다.
  • 질문2 왼쪽 사진의 세 명은 이강, 김가진, 전협이다. 누가 이강이고, 전가진이며, 전협 인지 사진 맨 아래에 쓰여 있는 내용을 참고하여 연결해 봅시다.
  • 질문3 이들 가운데 김가진과 전협은 친일 활동을 하다가 독립 운동에 나선 사람들이다. 이들이 어떤 단체를 통해 독립 운동을 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혔는지 대답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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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일제 강점기 독립 대동단처럼 항일 운동을 펼친 비밀 결사로 어떤 것들이 있는지 조사하여 간단한 팸플릿을 만들어 봅시다.
모둠활동 2
독립 운동을 하다가 변절하여 친일 활동을 한 이들과, 반대로 친일 활동을 하다가 독립 운동을 한 이들로는 누가 있는지 조사․정리하여 보고서로 제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불교계 일부에서는 이종욱이 1962년에 구술한 기록을 바탕으로, 그가 겉으로만 친일을 한 것이고, 독립 운동가들과 연락하면서 몰래 독립 운동을 도와주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해 봅시다.
모둠활동 4
국가유공가로 인정된 분들 가운데 아직도 친일 논란에 있는 이들은 누가 있는지 조사하여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설명해 보고 그들의 의견을 들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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