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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일신여학교 3·1운동 만세시위(부산 여학생들,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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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3·1운동은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 서북 지방과 경기, 충남지방을 시작으로 전국으로 파급되어 갔다. 부산·경남 지역은 3월 3일 부산과 마산에서〈독립선언서〉가 배포되고, 11일 부산진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부산·경남 지역 3·1운동의 효시를 이룬 부산진일신여학교의 사례를 통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일어난 3·1운동의 정신을 살펴보자.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768-1
[도로명 주소 부산광역시 동구 정공단로17번길 17]
현재 상태 원형보존 / 2004년도에 국시비 6억원의 지원을 받아 지붕·교실·벽체·담장·석축 등 보수정비사업을 추진해 2006년 6월 23일 준공하였다. 2010년 2월 부산진일신여학교 기념전시관으로 개장하였다.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하면서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이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끝났다. 그리고 1919년 1월 4년간의 세계대전을 마무리하기 위한 강화회의가 프랑스 파리에서 열렸다. 그 결과 국제질서는 미국, 영국 등 승전국들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이와 같은 제1차 세계대전 진행과정에서 러시아 혁명에 성공한 레닌은 세계의 식민지, 반식민지의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하였다. 한편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공개적인 평화조약, 비밀조약의 폐지, 군비축소, 해양자유의 원칙, 국제통상의 평등주의, 민족자결, 국제연맹의 창설 등의 내용이 포함된〈14개조 평화원칙〉을 발표하였고, 이러한 원칙은 연합국 측의 이념으로서 전 세계에 선전되었다.
이에 따라 세계는 바야흐로 해방,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가 세계를 풍미하게 되었고,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던 우리나라도 독립의 의지를 세계 여러 나라에 알리기 위한 노력들이 전개되었다. 우선 중국 상하이에서 조직된 신한청년당은 1919년 1월 김규식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하여 외교활동을 전개하였고, 만주와 일본에서는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1919년 고종이 사망하자, 이를 계기로 1910년대 일제의 무단통치에 신음하던 우리 민족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종교계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손병희와 이승훈 등 종교계 인사 33인은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 등 만세 시위의 원칙을 정하고, 고종의 장례식을 이용하여 서울 탑골공원을 비롯한 전국 주요도시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하였다.
이와 같은 독립에 대한 열망과 만세시위의 열기가 부산·경남지역에도 퍼져 3월 11일 밤 9시에 부산 일신여학교를 중심으로 시작되었고, 이후 동래, 창녕으로 이어져 4월말 마산, 고성, 사천에 이르는 두 달 동안 지속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일신여학교의 만세시위는 부산·경남 지역 3·1운동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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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부산·경남 지역에서 처음으로 만세시위가 일어나다.

부산·경남 지역의 만세시위는 3월 11일 밤 9시에 부산 일신여학교에서 시작되어 점차 확산되었다. 부산은 3·1운동을 즈음하여 일본·상하이 등지에서 독립을 준비하던 민족 지도자들이 몰래 드나들었던 곳이므로 「2·8독립선언」등 국외의 민족 독립운동계의 움직임을 일찍이 접할 수 있는 도시였다. 게다가 3·1운동 직전 부산부의 인구를 보면 한국인이 32,846명이었고 일본인은 28,012명으로 일본인이 부산 전체 인구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부산은 한일병합 이전부터 일본이 자주 드나들던 곳이었으며, 특히 처음 개항된 도시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일본인들의 사회·경제적 수탈이 심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여건 때문에 부산은 경성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 도시였지만 일찍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
3·1운동이 서울에서 시작된 직후인 3월 2~3일경에 ㉠ 「독립선언서」가 부산과 마산에 배송되었고, 경성학생단의 이름으로 서울 학생대표가 내려와 부산상업학교와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대표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독립운동을 할 것을 권유하였다. 또 3월 7일에는 서울의 연희전문 학생이, 3월 10일경에는 동래고보를 졸업하고 경성고등공업학교를 다니던 곽상훈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와서 독립의거를 거행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부산지역의 학생대표들은 의거일을 3월 13일 장날로 정하고 3월 11~13일 사이에 의거 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이처럼 여러 차례에 걸쳐 서울과 연락하고 만세시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무슨 이유에서인지 일신여학교에는 정식 연락이 없었다.
그런데 ㉡ 3월 11일 아침 일찍이 학교 교정 청소를 하러 나갔던 4년생 김응수가 교정에 만세시위를 권유하는 삐라가 많이 있는 것을 보고 얼른 그것을 주어다가 기숙사 주경애 선생에게 전하였다. 이미 이전부터 평소 민족정신이 강하여 학생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주었던 교사 주경애는 동료교사 박시연과 함께 고등과 학생 11명을 모아 3월 10일 저녁에 벽장 속에 숨어서 밤새워 태극기를 만들게 하는 등 만세시위 준비를 하였는데, 이 일을 계기로 하여 본격적으로 추진되게 되었다.
이들은 마침내 3월 11일 오후 9시에 준비한 태극기를 손에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기숙사 문을 나와 좌천동 거리를 누비면서 만세시위를 하였다. 이때 거리의 대중들이 이에 힘입어 시위에 호응하였고, 시위군중은 삽시간에 수백 명이 되어 2시간 동안 시위를 하였다. 그러나 출동한 일제 군경때문에 시위는 더 이상 계속될 수가 없었고, 두 명의 교사와 학생들이 체포되었으며, 이들은 심한 구타와 고문을 당하며 신문을 받았다. 재판에 넘겨진 교사 주경애와 박시연은 징역 1년 6개월, 11명의 학생은 6개월을 선고 받고 부산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였다.

  • 질문1 밑줄 친 ㉠이 가리키는 독립선언서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조사하여 서술해 봅시다.
  • 질문2 밑줄 친 ㉡의 내용처럼 만약 여러분이 만세 시위를 권유하는 삐라를 주웠다면 어떻게 하였을지 생각해 봅시다.

읽기자료 2

3·1운동을 적극 지원한 외국인 선교사

일신여학교에서 만세시위가 계획․준비되는 과정에서 이 학교의 교장을 맡고 있던 캐나다인 여선교사 데이비드와 기숙사감이었던 맨지스, 그리고 여교사였던 호킨스는 적극적으로 이를 지원하였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일제 경찰은 다음과 같은 사찰기록을 남기고 있다.

부산진 소재 기독교 단체가 경영하는 일신여학교의 조선인 여교사 임말이 외 학생 1명을 취조한 바 동교 교장인 캐나다인 여선교사 데이비스 및 조선인 여교사 주경애가 주축이 되어 교원 일동에 대하여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개시하고 있으므로 우리 학교에서도 거행하자’고 협의하고 이를 생도에게 전하여 3월 10일 동교 고등과 생도 11명이 기숙사에서 구한국기 50개를 제작, 이를 동교 기숙사 감독 맨지스에게 주었다고 하였다. 이에 맨지스를 취조한 바 깃대 31본을 생도에게 제공했다는 자백을 받았다. 가택수색 결과 기숙사 쪽에 있는 미곡(米穀) 속에서 구한국기를 발견하고 또 기를 제작하는데 쓰는 붓 등 여러 가지를 발견하여 압수하였다.
그리고 데이비스와 동료 여교사 호킨스는 의거 당일 “부르시오! 만세를 부르시오”라고 소리 높여 외치면서 학생들을 지휘하였고, 이에 따라 학생들이 만세를 부르면서 행진한 사실을 목격한 사람이 있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일신여학교에서는 애국의지가 강한 조선인 교사와 학생은 물론 외국인 선교사의 적극적인 후원 하에 만세시위가 준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시위에 참여한 여학생들이 모두 16세 전후의 소녀들이었다는 점과, 만세시위가 일어난 지역이 일제의 침략세력이 가장 깊이 뿌리박은 지역 중 하나인 부산이라는 점은 의의가 매우 크다.

  • 질문1 호주 출신의 선교사 및 교장, 교사들이 왜 조선인 교사와 학생들이 주도하는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지원하였는지 생각하여 말해 봅시다.
  • 질문2 이 만세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은 모두 16세 전후의 소녀들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이 학생들이라면 어떻게 하였을지 발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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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부산 일신여학교 만세운동기념비<br>건립일자 : 1984. 11.(1992. 5. 19. 이전)<br>소재지 : 부산광역시 금정구 부곡동(동래여고 교정)<br>건립기관 : 부산광역시<br>관리기관 : 동래여자고등학교<br>시설규모 : 부지 6평, 비(높이 3.4m, 둘레 6m)

다음 사진은 1984년 11월에 건립되어 1992년 현재 동래여자고등학교로 이전된 ‘부산진일신여학교 만세운동기념비’입니다. 동래여자고등학교를 방문하여 기념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보고 비문에 새겨진 글을 읽어본 후 아래 글의 빈 칸을 채워 봅시다.

일본이 우리의 주권을 빼앗아 총칼을 앞세우고 □□□□를 강행한 지 10년에 접어드는 □□□□년 □월 □일 이 날을 기하여 반만년 역사의 권위를 딛고 온 겨레의 성충과 민족자긍의 의지를 독립선언문에 담아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을 찾고 □□를 회복하려는 우리의 결의를 일본 당국에 통보하고 세계만방에 호소하였다. 누가 조국을 사랑하지 않으며 자유를 원치 않으랴. 독립의 외침은 요원의 횃불처럼 삼천리 강토에 메아리쳐 나갔다. 이곳 □□□□□에서는 이러한 서울 소식을 알고 거사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완료한 후 꽃같은 젊은 여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손에 손에 태극기를 흔들며 □□□□□□를 하늘 높이 외치니 아아 하느님 이 소녀들의 외침을 굽어 살피소서. 자유 그것 아니면 죽음도 사양치 않겠다는 이 겨레의 꽃들을 어여삐 여기소서! 남자는 그래도 의리를 배웠지만 여자의 가는 길은 부도인데도 어찌하여 위국충절에 앞장섬인고. 더욱이 님들의 독립만세는 부산 경남지역의 선구가 되니 국사에 어찌 남녀의 구별이 있으랴. 당시 학생인 □□□님이 경찰심문에서 세 살 먹은 아이도 제 밥을 빼앗으면 달라고 우는데 우리들은 우리나라를 돌려달라고 하는데 무엇이 나쁘냐고 한 평범한 진리를 되새기며 님들의 장한 뜻을 후세에 전하고자 사연의 대강을 돌에 새겨 당시의 일신여학교 자리에 세우는 바이다.

시각자료 2

다음 사진은 1984년 11월에 건립되어 1992년 현재 동래여자고등학교로 이전된 ‘부산진일신여학교 만세운동기념비’입니다. 동래여자고등학교를 방문하여 기념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보고 비문에 새겨진 글을 읽어본 후 아래 글의 빈 칸을 채워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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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1922년 2월 4일 공포된 조선교육령에 대항하여 일신여학교에서는 어떤 조취를 취하였는지 조사하여 발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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