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안희제는 만주와 시베리아를 유랑하면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만나보고 독립 투쟁을 벌이고 있는 현장의 실태를 직접 목격하면서 독립운동도 경제적 뒷받침이 있어야만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국내로 돌아온 안희제가 독립운동을 지원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설립한 회사가 백산상회이다.
처음에는 곡물·면직물·해산물 등을 판매하는 자본금 13만 원의 소규모 개인 상회였지만, 1919년에 영남지방의 대지주들을 규합하여 자본금 100만 원의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장하여 부산에서 제일 큰 회사가 되었다. 사장은 경주의 부호로 여러 민족기업에 간여하고 있던 최준이었다.
그 후 국내의 대구·서울·원산과 만주지역의 안둥〔安東〕·펑톈〔奉天〕 등지에 지점과 연락사무소를 설치하여 활동지역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회사의 경영상태는 항상 결손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회사의 경영이 부실해서가 아니라 회사를 통하여 막대한 자금이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에 대한 지원금으로 나갔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3·1운동 이후 안희제가 남형우와 윤현진을 상하이로 보내 윤현진으로 하여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재정차장을 맡게 하여 임시정부의 모든 경비를 조달해 주면서 회사의 경영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러던 중 백산무역이 독립운동 자금의 공급처라는 것을 눈치 챈 일본 경찰이 회사의 장부 검열과 임직원에 대한 수색·감금·관련 인물에 대한 조사를 집요하게 계속하는 등 끈질기게 탄압함으로써 결국 1927년에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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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
안희제가 백산상회를 설립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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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2
백산상회의 경영 상태가 부실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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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3
백산상회를 부산에 세운 이유를 추론하여 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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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4
백산상회가 1927년 문을 닫게 된 이유를 써 봅시다.
『중외일보』를 통해 언론투쟁을 전개했던 안희제는 일제의 탄압과 감시를 받게 되자, 노정일에게 중외일보사를 양도한 후 중국으로 망명할 것을 결심했다. 그는 그간 구상해 왔던 국외독립운동기지 개척을 실현하기 위해 1933년 중국으로 망명해 발해의 고도였던 닝안현[寧安縣〕동경성에서 발해농장 경영에 착수했다.
발행농장을 건설키로 결심한 것은 김태원과 다각적인 논의 끝에 이루어진 것이다. 김태원은 안희제가『중외일보』를 제작하던 시절부터 발행 자금을 지원하는 등 백산상회 시절부터 그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당시 김태원은 전국 각지를 탐사해 마침내 경북 봉화군 금정광산을 개발하게 되어 일약 거부가 되었다. 안희제는 김태원과 상의한 결과 만주에서 농토를 개간해 발해농장을 경영하는 한편, 국내에서 농민을 이주시키기로 합의했다.
1913년부터 안희제는 김태원과 함께 동경성에 토지를 구입하기 시작했으며, 1932년에는 무단강〔牡丹江〕 상류의 일부를 석축으로 막아 수로를 만들어 광활한 땅을 개간했다. 발해농장에는 남한지역에서 이주한 3백 여 가구를 정착시키고, 자신이 고안한 ‘자작농창제’를 시행했다.
자작농창제란 이주농민에게 무상분배해 준 토지에서 생산한 곡물의 절반을 임대료로 받는 대신 다른 지역의 농지 개관과 수로를 개설하도록 하고, 5년 후에는 또다른 지역의 농토를 개간하고 수로를 개설하게 하는 제도로, 농지 개척과 자작농 육성을 목표로 한 제도였다.
안희제는 이 제도를 통해 만주의 광활한 대지에 수백만 명의 농민을 정착시키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미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이 불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자금 조달조차 어려워졌고 대부분의 독립운동지도자들이 국외로 망명 또는 도피해 있었기 때문에 만주를 거점으로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주한 농민들에 의한 농지개척과 수로확장 사업은 1932년부터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1935년 농지 규모는 직경 4km를 넘었다.
초기의 이주민은 영남지역 농민이 대부분을 차치했으나 각지에 흩어져 살던 함경도․평안도․전라도․강원도 출신 농민들도 소문을 듣고 몰려들어 농장들이 날로 늘어갔다. 또한 수로확장 사업이 계속되어 개별 농장을 잇는 수로의 길이가 16km를 넘었다. 그리고 서로 이어지는 수로에 거대한 수문을 준공해 중국인 수문장을 두어 감시케 했다. 이와 함께 이주농민과 2세들에게 독립운동의 기반이 되는 민족정신과 자주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발해보통학교를 설립하고, 스스로 교장이 되어 교육에 정열을 쏟았다.
이 무렵 안희제는 이주 한인의 지도자로서 또 발해농장의 농장주로서 농지개간사업에 심혈을 기울이는 듯했으나, 사실 이는 국외독립운동기지로서 건설한 발해농장을 은폐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국내에서 망명하거나 도피해 각처에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가들이 동경성으로 모여들자 안희제는 비밀리에 이들과 연락망을 구축해 갔다. 한편, 당시 와룡둔 지역에서 활동하던 중국 마적들과도 비밀리에 교섭을 하는 동시에 항일독립군과 극비리에 연락을 취해 무장투쟁을 준비해 갔다. 발해농장은 표면적으로 농지개간사업을 하는 농장이었으나, 실제로는 국외독립운동기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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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
안희제가 발해농장을 건설한 이유를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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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2
안희제가 발해농장을 건설한 이유를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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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3
안희제가 발해농장을 건설한 이유를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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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4
안희제가 발해농장을발해의 고도였던 닝안현[寧安縣] 동경성에 건설한 이유를 추론하여 써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