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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상급생 언니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일제의 압제 밑에 있는 우리나라가 독립하는 것이 급선무인데 이 운동에 나가서 동참해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그 말을 듣는 우리들의 마음에 뜨거운 열성이 불붙기 시작하였다. 그 후부터는 기숙사 이방 저방에 쫓아다니면서 태극기 만들기와 그날에 입고 나갈 의복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이 내용은 대구 3·1운동 만세 시위 당시 신명여학교 2학년에 재학했던 김학진 할머니의 회고록 중 한 구절이다.
대구 지역의 3·1운동은 서문장날인 3월 8일부터 약 한 달 동안 크게 3차에 걸쳐 전개되었다. 여기에는 계성학교, 대구고등보통학교, 신명여학교,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 등 학생들의 참여가 두드러졌으며, 연인원 약 2만 3천 명이 참가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들 가운데 재판에 회부되어 실형을 선고받은 인사는 80여 명이다.
대구의 만세 시위는 영남 지방 3·1운동의 시발점이 되어 이후 영남 각 지역에서 일어난 3·1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역사적 배경
현재 주소 |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15 [도로명 주소 : 대구광역시 중구 국채보상로 99길 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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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태 | 멸실 / 시장은 없어지고 건물이 들어서 있다. |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은 점차 지방으로 확산되어 갔다. 지방에서는 대체로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장터에서 장이 서는 날에 맞춰서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영남 지방의 중앙에 위치한 대구는 동문과 서문 밖에서 장이 열렸는데, 서문 밖의 장은 3․8일에 서고 동문 밖에서는 5․10일에 장이 섰다. 장날에는 도내뿐만 아니라 멀리에서 수만의 군중이 모여들어 1년 거래액이 250만원에 달하였다. 또한 대구에서는 봄(음력 3월 10일~4월 10일)과 가을(음력 11월 10일~12월 20일)에 약령시(藥令市)가 열렸다. 약령시가 열리면 전국으로부터 수십만 명의 장꾼들이 모여들어 한 달 동안의 거래액이 30만원에 이르렀다.
한편 1918년 1월 현재 인구 통계에 의하면 대구에는 8,845호, 35,879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국인은 6,565호에 25,737명, 일본인은 2,732호에 9,997명이며, 중국인 28호에 105명, 구미(歐美)인은 20호에 40명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을 착취․억압하였던 일본인이 대구 전체 인구의 28%로 다른 지역에 비하며 매우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읽기
읽기자료 1
대구 3·1운동 만세 시위의 준비 과정
대구 지역의 3·1운동은 서울보다 늦은 3월 8일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3월 1일 이전에 이미 대구 지역에서는 3·1운동이 예정되어 있음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일찍이 1919년 2월 15일 상하이[上海] 신한청년단 소속의 김순애(金順愛)가 계성학교 교사 백남채(白南埰)를 만나 대구에서 봉기할 것을 제안하였던 것이다. 또한 2월 24일에는 세브란스 병원에 근무하며, 기독교 측 대구․경북 지역 독립선언서 배포 책임자인 이갑성(李甲成)이 대구의 인사들을 찾아와 서울 소식을 전하고 대구에서도 궐기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갑성은 세브란스 전문 의학생 이용상(李容祥)을 시켜서 독립선언문 200매를 이만집(李萬集) 목사에게 전달하였다.
독립선언문이 도착되자 목사 이만집, 조사(助事) 김예련(金兌鍊), 계성학교 교사 백남채(白南埰) 등을 중심으로 바삐 움직였다. 이만집은 동지들을 규합하면서 만세시위의 권유 임무를 맡았고, 김태련은 독립선언서를 준비하였다. 백남채는 계성학교 교감 김영서(金永瑞)를 비롯하여 동료 교사 최경학(崔敬學) 등과 대구에서 독립운동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논의하였다.
1918년 경성중앙학교를 수료하고 대구로 내려온 이상화(李相和)는 그의 자택에서 대구고보 학생인 백기만을 만나 계성학교와의 제휴를 제안하여 승낙받았다. 이로써 대구고보와 계성학교가 서로 힘을 합치게 되었다. 또 3월 4일에는 대구고보 학생 허범(許範)이 신명학교 교사 이재인(李在寅)을 찾아가 상의하여 이선애, 임봉선 두 학생에게 학생 동원의 책임을 부탁하였다. 이렇게 대구고보, 계성학교, 신명학교 등 대구 세 학교의 학생 동원이 계획되었다.
3월 6일 이만집, 김태련, 김영서, 최경학, 이재인 등이 회합하여 3월 8일 서문시장(‘큰장’ 또는 ‘서문 밖 시장’으로도 불리었으며, 현재 대신동 섬유회관 맞은 편 골목 안 일대이다.) 장날인 8일 오후 1시에 시위를 일으키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남산교회 지하실에서 태극기와 선언서를 준비하으나 정보가 새어나가 계성학교에서 비밀리에 준비하기로 하였다. 김태련은 7일 밤 자택에서 독립선언서 200매를 인쇄하고, 태극기 40개를 준비하였다. 또 계성학교 교감 김영서와 교사들은 학생 7~8명에게 계성학교 아담스관 지하실에서 독립선언문을 등사하게 하고, 일부 학생들에게는 각자 집에서 태극기를 만들어 오게 하였다. 계성학교 학생 이영식(李永植)은 독립선언서 일부를 자전거에 싣고 밤을 틈타 칠곡, 인동까지 전달하는 등 각 지역으로 비밀리에 배포하였다.
이와 같이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 만세 운동은 기독교계 인사 및 계성학교 교사들의 논의에서 출발하여 계성학교, 대구고보, 신명여학교 학생들에 의해 추진되었다.
- 질문1 대구에서 독립선언문을 처음으로 전달받은 사람은 누구인가요?
- 질문2 대구 지역 만세 시위에 학생들의 동원을 계획했던 세 학교의 이름을 말해보시오.
- 질문3 3월 8일 만세 시위를 결정하고 처음으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준비했던 곳은 어디인가요?
- 질문4 대구 서문시장 만세 운동을 추진하였던 사람들의 신분을 말해보시오.
읽기자료 2
서문시장의 제1차 만세시위
만세 시위를 계획한 3월 8일은 토요일이어서 계성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는 척 하면서 시장 주변으로 잠입하였다. 대구고보 학생들도 4학년 학생들을 중심으로 백만기, 허범 등이 교실을 돌며 신호를 보내자 모두 교문을 박차고 나와 계성학교 학생들과 합류하여 서문시장으로 들어갔다. 또한 장로파 주최로 도내 각지에서 모집된 동산성경학교 성서 강습생 약 20여 명도 함께 하였다. 신명여학교 여학생 50명은 머리와 허리를 수건으로 졸라매고 서문시장 입구에서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감시 중이던 일본 경찰은 몰려드는 학생들을 가혹하게 탄압하며 제지하였다.
이날 만세 시위의 총책임자인 이만집 목사와 김태련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기 위해 쌀가마로 만든 단 위에 올라섰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 제지하여 겨우 공약 3장만을 선창하였다. 이 때 이만집 목사는 “지금이야말로 한국이 독립을 할 수 있는 때다. 각자가 독립을 성취하기 위해 만세를 부릅시다.” 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크게 선창하였다. 학생들과 군중들도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일제히 호응하였다.
곧이어 시위 행진이 시작되었다. 안경수(安敬守)가 선두에 서고 계성학교, 대구고보, 신명여학교 학생들과 기독교인, 장꾼 등 1,000여 명이 행렬을 이루었다. 만세에 참가하는 사람은 계속 늘어갔다. 인근 주민들이 가세하였고 지게꾼, 양복쟁이, 머슴, 전당포 주인, 약방 주인, 술집 종업원까지 쫓아 나와 대열에 합류하였다. 만세 행렬이 온 시가를 덮는 듯하였다.
시위 대열은 경찰의 제지를 뚫고 현재의 대신동 동산파출소 앞 서문교를 지나 대구경찰서 쪽으로 향하였다. 시위대는 경찰서 앞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지금의 대구 종로인 경정통(京丁通)을 통과하였고, 현재의 동아쇼핑 북쪽에 위치했던 남성정 파출소를 거쳐 현 대구백화점 부근인 달성군청 앞에 이르렀다. 이곳에 일본군 제80연대가 기관총을 가설해 놓고 시위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뒤로 무장한 일본군이 착검된 총으로 시위대를 겨냥하였다.
무장한 일본 군경은 시위대에 달려들어 닥치는대로 구타하고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157명이 검거되었고, 실형을 당한 인물은 71명에 달하였다. 연령으로는 16세에서 49세까지 나타났으며, 직업은 목사, 장로, 조사 등의 교회 지도자와 계성학교, 신명여학교의 교사, 계성학교, 대구고보, 동산성경학교의 학생, 농민, 상인, 수공업자, 병원 근로자 등으로 다양하다. 대구 지역 거주자가 많으나 경북 지방의 인사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에게 내려진 형량은 적게는 6개월에서 많게는 3년이었다.
- 질문1 3월 8일 만세 시위의 총책임자는 누구인가요?
- 질문2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의 직업을 나열해 봅시다.
- 질문3 1차 시위에서 검거된 사람들과 실형을 받은 사람들은 각각 몇 명이었나요?
읽기자료 3
계성학교와 대구고보 학생들의 제2차 만세 시위
제1차 만세 시위로 대구의 학생들과 시민들의 항일 의식은 더욱 높아졌다. 3월 9일 오후 3시경에 계성학교 학생들과 군중 150여 명이 달성공원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려 하였으나 경찰에게 제지당하였다.
한편 계성학교 교감 김영서와 학생 6명, 대구고보 학생 2명, 시민 5명은 3월 10일 덕산정시장에서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고 준비하였다. 덕산정시장은 ‘남문밖 시장’ 또는 ‘새장’이라고도 불리었으며, 현재의 동아쇼핑센터 옆의 염매시장이다. 3월 10일이 되자 계성학교, 대구고보 학생들과 시민들은 장꾼으로 가장하고 덕산정시장으로 잠입하였다. 그러나 시장의 경계가 삼엄하여 경계하는 일본 군경의 수가 장꾼보다 많을 정도였다. 이들은 기회를 기다리다가 4시 30분 경 서로 신호하여 일제히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한국 독립 만세”라고 쓴 태극기를 휘두르면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200여 명의 군중들이 외치는 만세 소리가 시장을 진동케 하였다.
그러나 일본 군경의 수가 워낙 많아 만세 시위는 1시간 정도 진행되다가 해산당하였다. 이날 대구고보, 계성학교, 신명여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지고 일본 보병 80연대가 주둔하여 삼엄한 경계를 펴나갔다.
제2차 만세 시위는 1차 만세 시위의 연속선상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계성학교와 대구고보 학생들이 독자적으로 시민들을 규합하여 만세 시위를 전개했다는 특징을 지닌다.
제2차 만세 시위에서는 65명이 체포되었고, 그 중 9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6개월에서 1년 형을 받았다. 실형 선고를 받은 인물은 계성학교 학생 2명과 대구고보 학생 2명, 농민 2명, 상인 2명, 수공업자 1명이었다. 연령은 20대가 대부분이었으나 56세의 고령인 농민도 있었다.
- 질문1 제2차 만세 시위가 벌어진 곳은 어디인가요?
- 질문2 제2차 만세 시위는 언제 일어났나요?
- 질문3 3월 10일 덕산정시장에서 만세 시위를 벌인 사람들은 몇 명 정도였나요?
- 질문4 제2차 시위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 질문5 제2차 시위로 실형을 받은 사람들의 직업을 말해 보시오.
읽기자료 4
동화사 지방 학림 학생들의 제3차 만세 시위
윤학조(尹學祚)는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의 학생으로 3월 1일 서울 탑골 공원의 만세 시위에 참가한 후 고향인 달성군 공산면으로 내려왔다. 그는 3월 23일 공산면 도학동에 있는 동화사(棟華寺)로 가서 동화사 부속 지방 학림 학생 김문옥(金文玉), 권청학(權淸學) 등을 만나 서울의 봉기 소식을 전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이곳 학생들도 궐기할 것을 종용하였다. 그리하여 학생들이 공산면 백안시장에서 시위를 벌이려고 계획을 세웠다. 윤학조는 그 시장에서 봉기하면 효과가 적을 것이므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대구 덕산정시장에서 일으키자고 주장하였다.
김문옥과 권청학은 3월 28일 지방 학림 학생 전원을 동화사 안에 있는 심검당(尋劍堂)에 모이게 했다. 김문옥은 학생들에게 “신문 기사를 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조선 내 여러 지역에서는 이미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 우리들도 조선 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였다. 학생들이 이구동성으로 찬성하며 호응하였다. 학생들은 협의를 계속한 끝에 대구 덕산정시장에서 다가오는 장날인 3월 30일에 봉기하기로 결의하고 비밀리에 계획을 세워갔다.
3월 29일 김문옥 등 9명의 주동자들이 준비물을 몰래 감추어 동화사를 출발하였다. 그날 밤은 대구의 동화사출장소 김상의(金尙義) 집에서 지냈다. 다음날인 3월 30일 김문옥은 소지해 온 하얀 천으로 큰 태극기를 만들어 장대에 달아서 들고 같이 온 학생들과 함께 덕산정시장으로 몰래 들어갔다. 오후 2시경이 되자 장꾼들이 약 2~3천 명으로 불어났다. 학생들은 시장 복판에서 준비해 온 태극기를 높이 세우고, 일제히 “조선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모든 군중이 일제히 여기에 호응하였고, 학생들을 선두로 하는 군중 시위대가 시장을 누비면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곧 일본 군경이 달려왔다. 이들은 총검으로 군중을 탄압하여 해산시키고 동화사 지방 학림 학생 주모자를 전원 체포하였다. 9명이 체포되어 징역 10개월 형을 받았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이 만세 시위로 지방 학림은 약 1개월간 강제 휴교를 당하였다.
- 질문1 서울에서 내려온 학생으로 제3차 만세 시위가 일어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끼친 인물은 누구인가요?
- 질문2 제3차 만세 시위가 일어났을 때 덕산정시장에 모여 든 장꾼의 수는 얼마나 되었나요?
- 질문3 덕산정 시장의 만세 시위에서 체포된 9명이 받은 형량은 얼마나 되었나요?

시각자료
시각자료 1

대구 3·1운동 만세 시위가 처음 일어났던 자리에 세운 표지석이다.
- 질문1 표지석에 새겨진 글을 큰 소리로 읽어 봅시다.
- 질문2 이러한 표지석을 세워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자신의 생각을 글로 써봅시다.
- 질문3 3・1운동의 의의와 영향을 간단히 정리해 봅시다.
시각자료 2

대구의 ‘삼일 운동길’이다.
대구 3․8 만세 시위 당시 학생들이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동산병원 솔밭길을 이용하여 서문시장으로 향하였다. 현재 동산병원 솔밭길은 사라졌으나, 3·1운동의 정신을 기리고자 그때의 솔밭길과 닿아 있었던 이 길을 삼일 운동길이라고 이름 지었다.
- 질문1 삼일 운동길과 그 주변의 대구 제일교회, 선교사 주택 등을 묶어서 안내하는 팸플릿을 제작해 봅시다.
- 질문2 내가 사는 고장에서 일어난 3・1 운동에 대해 알아보고, 그 장소를 찾아가 당시의 광경을 상상하여 그림으로 그려봅시다.

모둠활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