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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고보 숙직실 터(3·1운동을 비밀리에 준비한 항일 운동의 본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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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朝鮮靑年獨立團은 我 二千萬 民族을 代表하야 正義와 自由의 勝利를 得한 世界萬國의 前에 獨立을 期成하기를 宣言하노라. …(이하 생략)

(해설) 조선 청년 독립단은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얻은 세계 모든 나라 앞에 독립을 이룰 것을 선언한다.

[B]
吾等은 玆에 我 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 此로써 世界萬邦에 告하야 人類平等의 大義를 克明하며, 此로써 子孫萬代에 誥하야 民族自存의 正權을 永有케 하노라. …(이하 생략)

(해설) 우리는 오늘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이로써 세계 각국에 알려 인류 평등의 큰 뜻을 분명히 밝히며, 이를 자손만대에 알려 민족의 독자적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하고자 한다.

위 두 글은 모두 우리나라가 독립 국가임을 선언하는 글의 일부로, [A]글은 2․8 독립 선언서의 내용이며, [B]글은 3·1 독립 선언서의 내용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고 열린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은 민족 자결주의를 주장하였는데, 이 영향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을 향한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이에 1919년 일본 유학생들이 2월 8일 도쿄[東京]에서 만세 운동을 펼쳤다.
도쿄[東京] 유학생 송계백(宋繼白)은 1919년 1월 중순 경 중앙고등보통학교(현 서울 중앙고등학교) 교사 현상윤(玄相允)과 교장 송진우(宋鎭禹)를 방문하였다. 그는 이 학교 숙직실에서 일본 도쿄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알리고 「2·8 독립 선언서」 초안을 전달하는 등 독립 만세 운동에 대한 불을 지폈다. 1919년 2월 초, 최린(崔麟)·최남선(崔南善)·송진우·현상윤 등이 최린의 집에서 회합을 가진 2~3일 뒤 숙직실에 모여 만세 운동을 논의하였다.
이처럼 중앙고등보통학교 숙직실은 2․8 독립 선언의 소식을 듣고 독립 운동에 필요한 독립 선언문을 작성하는 등 3·1운동 계획을 세우던 곳으로, 현재 숙직실이 있던 자리에 ‘3·1운동을 처음 상의하던 곳’이라는 뜻의 ‘3·1운동 책원비(三一運動策源碑)’라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교정 동북쪽 담장 가에 당시 숙직실 모형을 ‘삼일기념관’이라는 이름으로 복원해 놓고 있다.
1926년 순종 황제의 장례식 날 일어난 6·10만세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이들 가운데는 중앙고등보통학교 학생이나 이 학교 출신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들의 항일 정신을 기리고자 현재 중앙고등학교에는 ‘6·10만세 기념비(六十萬歲紀念碑)’가 세워져 있다.
1919년 3·1운동과 1926년 6·10만세 운동을 몸소 실천하여 모범을 보인 중앙고등보통학교는 항일 운동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민족 교육의 산실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1
[도로명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덕궁길 164]
현재 상태 없어짐 / 현재 그 자리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교정 동북쪽 담장 가에 당시 숙직실 모형을 ‘삼일기념관’이라는 이름으로 복원해 놓았다.

1910년 일제는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합한 뒤 무자비한 헌병 경찰을 앞세워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각 분야에서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을 서슴지 않는 무단 통치를 실시하였다.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을 학살․투옥하고 모든 형태의 항일 활동을 탄압하였으며,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기본적인 정치 권리와 자유도 누리지 못하게 하였다. 1912년 3월 <조선태형령>을 제정하여 가벼운 죄에도 고문 등 가혹한 신체 처벌을 하며 인권을 유린하는 가혹한 지배를 하였다. 또한 1912년부터 1918년까지 본격적으로 실시한 토지 조사 사업과 1910년 12월 제정한 <회사령> 등을 통해 민족 산업의 발전을 억압하고 경제적 수탈을 일삼았다.
일제의 정치 억압과 경제 약탈로 농민을 비롯한 조선 민중의 생활은 크게 악화되었으며, 그만큼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분노와 저항 의지가 높아졌다. 독립 운동 지도자들은 중국·만주·노령(연해주)·미주 등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을 전개하거나, 혹은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도 끊임없이 전개된 민족 운동의 흐름은 곧 전국적인 민족 운동으로 일어날 기세였다.
때마침 국제 정세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쟁탈전이었던 제1차 세계 대전이 독일을 비롯한 동맹국의 패전으로 끝나면서 열강의 세력 관계가 재조정되어 국제 정치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등에서 전제 국가가 무너지고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더구나 이들의 식민지였던 수많은 국가들이 독립하여 신생국으로 탄생하면서 민족주의가 널리 확산되었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17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 황제 중심의 제정이 붕괴하였다. 혁명을 주도한 레닌(Lenin)이 러시아로부터 지배를 받던 민족들에게 민족 자결의 원칙을 선언하면서 식민지 민족 운동에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윌슨(Wilson, T.W.)도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민족 자결주의를 주장하였다.
민족 자결주의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전후 처리 원칙 14개 조항’의 일부로 제기되었다. 윌슨이 주장한 14개조 원칙에는 “5. 식민지 문제의 공정한 해결 / 9. 이탈리아 국경의 민족 문제 스스로 결정 / 10.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의 여러 민족의 국제적 지위 보장 / 11. 루마니아, 세르비아 등 발칸반도 여러 나라의 독립 보장 / 12. 오스만 제국 지배 하의 여러 민족의 자치” 등처럼 약소 민족이나 점령 지역의 독립 및 복귀와 관련된 내용이 7~8개 항에 달할 정도로 민족 자결주의를 강조하고 있었다. 민족 자결주의는 “피지배민족(식민지나 점령 지역)에게 자유롭고 공평하고 동등하게 자신들의 정치적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자결권(自決權)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주장은 세계 식민지 약소 민족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원래 민족 자결주의 원칙은 연합국과 대결했던 독일·오스트리아·터키 등의 식민지에만 적용하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 원칙은 모든 피압박 민족에게 하나의 복음처럼 받아들여져 각각 자기 나라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여 독립을 요구하게 되었다. 한국의 민족 지도자들도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발표에 따라 우리 민족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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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2․8 독립 선언과 3·1운동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 정세가 재편되는 상황에서 국외의 항일 운동 세력은 국제 사회에 일제의 조선 강점의 불법성과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널리 알리기 위한 활동을 준비하였다. 상하이, 만주와 연해주 등 각지에서 움직임이 있었는데, 이중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재미 교포들이었다. 그들은 재미한인대표자회의를 소집하였다. 그 곳에서 이승만(李承晩)·민찬호(閔瓚鎬)·정한경(鄭翰景) 등을 한인 대표로 선출하여, 민족 자결주의의 본질적 이념에 따라 우리 민족의 자결권을 주장하였다. 그 방법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전쟁을 수습하고 평화 체제를 만들기 위해 소집된 파리 강화 회의(1919년 2월 25일~3월 30일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 평화 회의)에 한인 대표를 보내 독립을 호소하려 하였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여권을 내주지 않아 그 노력은 좌절되고 말았다. 이러한 소식은 도쿄에서 발간되는 『저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와 『아사히신문[朝日新聞]』에 보도되어 재일본 조선인 유학생 학우회가 큰 자극을 받았다.
1919년 1월 조선인 유학생 학우회가 도쿄의 YMCA회관에서 웅변 대회로 꾸며 모임을 갖고 최팔용(崔八鏞)․김도연(金度演)․백관수(白寬洙)․서춘(徐椿) 등 10인을 상임위원으로 선출해 독립 선언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각지의 독립 운동가들과 연계를 맺기 위해 송계백과 이광수(李光洙)를 국내와 상하이로 파견하였고, 2월 8일 유학생 대회를 열어 ‘민족 대회 소집 청원서’와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2․8 독립 선언서’는 일제의 국권 강탈을 고발하고 독립 후 건립할 국가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신국가임을 명시하였다.
국내에서도 1918년 말부터 국내의 천도교와 기독교 계통의 민족주의자들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윌슨의 14개조 원칙에 포함된 민족 자결주의에 힘입어 독립 요구를 위한 운동을 계획하였다. 상하이, 미국, 도쿄 등지에서의 독립 운동 소식이 전해지면서 국내 운동의 준비를 본격적으로 논의하였다. 신한청년당의 선우혁은 이승훈(李昇薰)․양전백(梁甸伯)․길선주(吉善宙) 등 평안도 지역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만나 국외 독립 운동의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송계백도 최린을 통해 도쿄 유학생들의 소식을 손병희(孫秉熙)․최남선․송진우 등에게 전했다. 천도교와 기독교 학생들은 처음에는 따로 운동을 계획하다가 1919년 2월부터 함께 협의하였고, 여기에 한용운(韓龍雲) 등의 불교계 인사가 가담하였다.
학생들은 1919년 1월부터 민족 대표들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2월 하순 박희도(朴熙道)와 이갑성(李甲成)에게 종교계의 계획에 합류할 것을 요구받고 일단 민족 대표들의 계획에 합류한 뒤 3월 5일에 다시 서울에서 독자적으로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그 결과 2월 18일까지 ‘독립 선언서’와 일본 정부에 보낼 ‘독립 통고서’ 등이 작성되고, 2월 27일에는 독립 선언서가 인쇄되어 각 종교의 교단 조직을 통해 사전에 배포되었다. 학생들은 군중 동원과 시위, 독립 선언서의 배포 등의 계획을 준비하였다.

  • 질문1 재미 교포들은 1919년 2월부터 개최된 파리 강화 회의에 한인 대표를 보내 우리나라의 독립을 호소하려 하였으나 그 노력이 좌절되었다. 좌절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 대답해 봅시다.
  • 질문2 미국 대통령 윌슨이 주장한 14개조의 주장에서 민족 자결주의는 무엇인지 설명해 봅시다.
  • 질문3 일본 유학생 가운데 국내로 파견되어 최린, 송진우 등을 만나 2․8 독립 선언 소식을 전해 준 사람은 누구인지 이름을 써봅시다.

읽기자료 2

중앙고등학교(옛 중앙고등보통학교)와 숙직실

중앙고등학교는 1908년 6월 기호 흥학회(畿湖興學會)에서 운영하는 기호학교로 출발하였다. 1909년 11월 한성부 북부 대안동(현 화동)에 학교가 들어섰다가, 1910년 9월 유길준(兪吉濬)이 조직한 흥사단(興士團)에서 경영하던 사립 융희학교(隆熙學校)와 통합한 뒤, 1910년 11월 중앙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5년 4월, 제1회 졸업생인 김성수가 인수하여 백두산을 상징하는 백산학교로 이름을 지으려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결국 중앙고등보통학교라고 하였다. 이어 종로구 계동 1번지 언덕에 학교 건물을 새로 짓고 1917년 12월 이사하였으며, 1921년 4월 1일 인가를 받고, 1929년 2월 재단법인 중앙학원을 설립하였다. <조선교육령>의 개정에 따른 교육 제도의 변화에 따라 1938년 4월 1일 중앙중학교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광복 후 1946년 9월 조선임시과도정부의 <교육령>으로 6년제가 되었다가, 1950년 4월 <대한교육법>에 의하여 4년제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1950년 5월 <대한교육법>에 의하여 3년제 고등학교로 중학교와 분리되었다. 현재 중앙고등학교는 고려대학교와 함께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의 소유이다.
중앙고등학교 건물은 역사적 가치가 높아 1981년 9월 25일 본관 건물이 사적 제281호, 서관 건물이 사적 제282호, 동관 건물이 사적 제283호로 각각 지정되었다. 본관 건물은 일제 강점기 박동진이 설계하여 지은 석조 2층 건물로, 김성수가 학교를 인수하면서 1917년 새로 지은 건물이었으나, 1934년 12월 13일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불타버려 1937년 9월 새로 지은 것이다. 우리나라 건축가가 설계하고, 근대 초기 양식으로 건축한 민간 학교 건물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서관 건물은 1921년 10월에 준공한 2층 붉은 벽돌집으로, 1934년에 불탄 옛 본관의 오른편에 지었다. 동관과 쌍을 이루고 있으며, 설계자와 시공자 모두 알려지지 않았다. 뾰족한 아치형의 창틀과 가파른 고딕식 지붕 및 화강암과 붉은 벽돌로 엇물려 쌓은 정교한 솜씨로 보아, 우리나라 20세기 전기 건축 양식의 기념비적 건물이다. 또한 서관 건물은 3·1운동 이후 조선 소년군 창설, 6·10만세 운동, 광주 학생 운동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동관 건물은 1923년 10월에 준공한 2층 붉은 벽돌집으로, 1934년에 불에 탄 옛 본관의 왼쪽에 지어 서관과 쌍을 이루고 있다. 건물 구조는 T자형으로 서관과 동일하며, 1920년대 순수 민간인이 세운 사립학교 건물이다.
중앙고등학교는 ‘3·1운동의 책원지(策源地: 어떤 일을 꾸미거나 이루어 나가는 근원이 되는 곳)’로 불리기도 하는데, 중앙고등보통학교 숙직실에서 3·1운동이 계획되고 준비되었기 때문이다. 1919년 1월 중순 경 일본 도쿄 유학생 송계백은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찾아와 교장 송진우와 교사 현상윤를 만나 도쿄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알리고 「2·8 독립 선언서」 초안을 전달하였다. 1919년 2월 초 최린·최남선·송진우·현상윤 등이 이곳 숙직실에 모여 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하였다. 숙직실은 교장의 사택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현재의 강당 정문 앞에 있던 당시의 숙직실은 강당을 지으면서 철거하고 숙직실이 있던 자리에 ‘3·1운동 책원비’가 1973년 세워졌다. 대신 교정 동북쪽 담장 가에 당시 숙직실 모습을 ‘삼일기념관(三一紀念館)’이라는 이름으로 복원해 놓았다.
중앙고등보통학교 학생과 이 학교 출신들은 6·10만세 운동에도 주도적 역할을 하였는데, 이에 ‘3·1운동 책원비’ 맞은편에 ‘6·10만세 기념비’를 1983년에 세워 이들의 항일 정신을 기리고 있다.

  • 질문1 중앙고등학교에는 사적으로 지정된 건물이 세 개나 된다. 사적 제281호, 제292호, 제283호로 지정된 건물이 무엇인지 대답해 봅시다.
  • 질문2 1919년 3·1운동을 계획하고 준비하고자 모였던 중앙고등보통학교 안의 장소는 어디인지 써봅시다.
  • 질문3 중앙고등학교에 세워진 ‘三一運動策源碑’는 어떤 기념비인지 설명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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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중앙고등보통학교 숙직실<br>출처 : 국내독립운동·국가수호사적지 사이트(http://sajeok.i815.or.kr/) - 중앙고보 숙직실 터

사진은 중앙고등보통학교 숙직실 모습이다.

  • 질문1 숙직실(宿直室)은 무엇을 하던 곳인지 대답해 봅시다.
  • 질문2 원래의 숙직실은 철거되고 대신 근처에 ‘삼일기념관(三一紀念館)’이라는 이름으로 숙직실의 모습을 복원해 놓았다. 왜 숙직실을 삼일기념관이라고 하였을지 대답해 봅시다.
  • 질문3 독립 지사들이 3·1운동과 같은 중요한 일을 왜 숙직실에서 만나 상의하고 준비하였을지 대답해 봅시다.

시각자료 2

‘3·1운동책원비’ 제막 동아일보 1973년 6월 1일자 기사<br>출처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3060100209207013&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73 - 06 - 01&officeId=00020&pageNo=7&printNo=15896&publishType=00020

“ 「三․一運動策源碑」 제막 / 東亞日報․중앙中高校 공동건립”이라는 제목의 1973년 6월 1일자 『동아일보』의 기사이다.

  • 질문1 큰 글씨로 쓰여진 ‘三․一運動策源碑’를 우리말로 읽어 봅시다.
  • 질문2 ‘策源’에서 ‘策’은 ‘꾀 책’자이고, ‘源’은 ‘근원 원’자이다. 그러면 ‘三․一運動策源碑’는 무슨 뜻일지 써봅시다.
  • 질문3 어째서 ‘三․一運動策源碑’를 중앙고등학교에 세우게 되었을지 대답해 봅시다.
  • 질문4 ‘三․一運動策源碑 제막’이라는 제목 왼쪽에 ‘東亞日報․중앙中高校 공동건립’이라는 내용이 보입니다. 왜 동아일보사가 이 비석의 건립에 참여했는지, 1915년에 이 학교를 인수하여 ‘중앙고등보통학교’로 이름 지은 김성수의 행적을 조사하여 말해 봅시다.

시각자료 3

서울 중앙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는 ‘3·1운동 책원비’의 비문 내용이다.

  • 질문1 비문의 내용을 큰소리로 한 번 읽어 봅시다.
  • 질문2 비문에 나오는 1910년 8월 29일은 어떤 날인지 대답해 봅시다.
  • 질문3 비문에서 1919년 3·1운동의 산파역을 맡아 하신 세 분의 이름을 찾아 우리말로 써봅시다.
  • 질문4 비문에서 1919년 3·1운동의 모든 계획을 짜서 이것을 지휘 명령한 곳이 어디라고 밝히고 있는지 우리말로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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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는 약소 국가들의 독립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지만, 실제 제1차 세계 대전 후에 독립을 이룩한 나라는 많지 않았다. 이는 민족 자결주의가 갖는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제1차 세계 대전 전후 처리와 관련된 윌슨의 14개조를 분석하고 그 한계점까지 정리하여 보고서로 제출해 봅시다.
모둠활동 2
1919년 3월 1일 독립 만세 운동을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 독립 선언서를 쓰거나 독립의 행동 강령과 구호를 작성해 봅시다.
모둠활동 3
3·1운동은 전국적인 만세 운동이었다. 자신이 다니는 학교나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일어난 3·1운동을 조사하고, 이를 홍보할 팸플릿을 만들어 봅시다.
모둠활동 4
일제 강점기에 우리 고장에 있었던 학교의 학생들이 어떤 독립 운동을 했는지 조사하여, ‘우리 고장 학생들의 독립 운동’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하고, 블로그나 학교 홈페이지에 올려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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