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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 사령부 터(일제 식민 통치의 군사적 기반)

도입

조선에 주둔했던 일본군은 일본의 침략정책을 수행하는 선봉대 역할을 하였다. 1910년 이전에는 조선의 식민지화를 위해 대한제국의 군대를 무력화 시키고, 대한제국을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기반이 되었다. 조선을 강제 병합한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력이 대중의 일상에까지 미칠 수 있는 힘의 원천은 무력이었고, 그 중심에는 ’조선군‘이 있었다.
1920년대 들어 조선군은 일본의 중국 외교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일본 군국주의화를 선도하기도 했다. 조선에 주둔했던 일본군은 전시 동원 체제를 확립해 가는 과정에서, 조선의 최고 지위에서부터 가장 말단 기구까지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조정하였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5가 2-1
[도로명 주소 :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대로 38길 21]
현재 상태 멸실 / 현재 주한미군 군사 시설이 들어서 있다.

1882년 임오군란 결과 체결된 제물포 조약으로 일본 공사관 수비대가 서울에 주둔하기 시작하였다. 1개 중대의 병력은 남산 북쪽의 기슭을 거점으로 남산동, 저동 일대를 점유하며 일본인들의 든든한 배경이 되었다. 이때까지 일본군의 수는 3천여 명에 달했던 청나라 군대의 1/20에 지나지 않았다.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이듬해 1월 일본은 육군 2개 대대와 군함 3척을 거느리고 와서 한성조약 체결을 조선에 강요하였다. 이 조약에 따라 공사관 경비를 구실로 일본군 1개 대대가 증가되었으나, 곧 청과 일본 사이에 톈진조약[天津條約] 체결로 일본군은 1885년 6월에 철수하였다.
10여 년 뒤인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을 진압해 달라는 조선의 요청으로 청군이 출병하자, 일본은 청국이 톈진 조약을 어겼다며 보병 11연대를 위시한 5천여 명의 일본군을 한반도에 주둔시켰다. 청군이 동학 농민군과 가까운 아산에 주둔했던 것과는 달리, 일본군의 핵심 병력은 인천과 서울에 배치되었다.
같은 해 7월 23일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여 조선 정부를 확실하게 장악한 다음 청일전쟁을 감행하여 전쟁에 승리하였고, 일본의 지배에 저항하는 명성황후 살해와 단발령에 반발한 을미의병의 진압을 위해 2개 대대의 병력을 동원하였다. 이후 대한제국의 지배를 놓고 러시아와 경쟁하였던 일본은 1896년 5월 「고무라 웨베르 각서」에 의해 절반이 줄어든 200여 명의 헌병을 주둔시켰다. 이때부터 일본군이 1년씩 교대하며 조선에 주둔하였고, 1903년 12월 한국 주차 사령대(韓國駐箚司令部)가 서울에 설치되었다. 이제 일제가 무력을 기반으로 하여 대한제국의 내정을 간섭할 수 있는 여지가 늘어난 것이다
이어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1904년 2월 강제 체결된 「한일 의정서」에 따라 지금의 용산역 동쪽 광장에 3,940평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의 건물을 짓고 육군 임시 철도감부(陸軍臨時鐵道監部) 청사로 사용하였다. 육군 임시 철도감부는 만주까지 이르는 군용 철도를 부설하기 위한 기관이었다. 러일전쟁을 계기로 용산역의 본격적인 군용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1908년 10월 1일에는 현재의 중구 필동에 있던 한국 주차군 사령부도 용산 군사 기지로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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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한국 주차군의 편성

1904년 2월 6일 일본은 러시아와 교섭을 중단하고 서울을 군사 작전의 근거지로 선점하기 위해 한국 임시 파견대를 보냈다. 2월 8~9일 인천항에 도착한 일본군 함대가 러시아 군함을 격침시킴으로써 러일전쟁이 시작되었다. 곧이어 2월 23일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를 압박하고 「한일 의정서」를 체결하여 일본군이 요구하는 모든 편의를 제공하도록 강요하였다.
1904년 3월 10일 도쿄[東京]에서 한국 주차군의 편제와 사령부를 편성하였다. 처음 한국 주차군의 관할 지역은 대동강~원산 이남이었는데, 러일전쟁의 전선이 점차 만주로 올라가면서 압록강변까지 확대되었다. 1905년 1월 한국 주차군 아래에 압록강군이 편성되었는데, 이 군대는 같은 해 4월 만주군 사령부로 편입되었다.
1905년 10월 러시아와 「포츠머스 강화 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에 대한 독자적 지위를 확보한 일본은 이후에도 러시아를 견제할 목적으로 서울 이북에 병력을 집중 배치하였다. 즉, 함흥에 사령부를 둔 제13사단과 평양에 사령부를 둔 15사단을 주차시키는 등 함경도를 중심으로 병력을 강화하였다. 남부 지방에는 보병 제30여단을 배치하였다. 아울러 1905년 12월 대한제국 정부에 강요한 「을사조약」에 의해 통감부를 설치함으로써 본격적으로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였다.
「을사조약」 체결 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초대 통감은 경찰력을 확장시켜 대한제국의 치안을 유지할 생각으로 군사상 군대가 필요 없는 지점에 경찰을 배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서 1906년 10월 조선 주차 헌병대를 제14헌병대로 축소시켰으며, 제15사단을 일본으로 복귀시키고 제13사단만 남겨 두었다. 제13사단은 사단 사령부와 1개 연대를 제외한 전 병력을 서울 이북에 배치하였다. 일본은 여전히 제1의 가상 적국을 러시아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본군의 방침은 조선에 주둔했던 일본군의 작전이 러시아와 소련에 대한 것에서 대미 작전 중심으로 바뀌는 1945년 1월까지 변하지 않았다.
1907년 7월 해산당한 대한제국의 군대가 의병에 합류하여 의병 전쟁이 확대되자 일제는 다시 한국 주둔 병력을 증강시켰다. 같은 해 9월 26일 임시 파견 기병대를 편성하여 주로 서울 이남에 배치하고, 10월에는 제14헌병대를 다시 한국 주차 헌병대로 개칭하여 병력을 대폭 증강시킨 뒤 1908년 1월 2,074명을 분산 배치하였다. 그런데 다른 지역과 달리 호남 지방의 의병 활동이 1908년 하반기에 들어서도 치열하게 전개되자, 일본은 1909년 5월 임시 한국 파견대 사령부를 편성하여 남부 지방에 주둔시켰다. 새로 편성된 임시 한국 파견대 사령부는 1909년 9월부터 10월 사이에 이른바 ‘남한 대토벌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것으로 국내에서 전개된 조직적인 항일 무장 투쟁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었으며 일본은 1910년 거리낌 없이 ‘위탁’이라는 이름으로 대한제국의 경찰권까지 박탈할 수 있었다.

  • 질문1 러일전쟁 때 대한제국으로부터 일본이 자신들 마음대로 군사적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었던 근거가 된 조약은 무엇인가요?
  • 질문2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가 을사조약 직후 한국에서 일본 군대를 축소하였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3 1909년 남부 지방에 주둔한 임시 한국 파견대 사령부가 벌인 작전의 이름과 목적은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2

조선군 사령부의 창설

일본은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후 한국 주차군을 ‘조선 주차군’으로 개편하였다. 조선 주차군은 군령(軍令)과 관련된 부분은 육군 대신의 지휘를 받았고, 조선 통치와 관련된 부분은 조선 총독의 지휘를 받았다. 조선 총독은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을 만주와 연해주까지 파견할 수도 있었다.
한국 주차군의 작전 지역은 1907년 「제국군의 용병 강령」에 의해 정해졌는데, 이에 따르며 육군은 “만주, 우수리 및 한국을 작전지로 하고, 본작전(本作戰)은 만주에서 지작전(支作戰)은 우수리 방면”에서 수행한다는 전략이었다. 결국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은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는 핵심적인 물리 기반이었으며, 대륙 침략의 최전방 부대였다.
평상시에는 주로 헌병 경찰이 치안을 담당했으나,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핵심 기반은 군대였기 때문에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를 2년마다 교체할 경우 식민 지배에 공백이 생길 우려가 있었다. 이제 임시적인 주차 부대를 주둔 부대로 전환시켜 상주(常駐)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1918년 조선 주차군 사령부 대신 조선군 사령부가 창설되었고, 그 산하에 제19사단(1916년 4월~1919년 2월), 제20사단(1919년 3월~1921년 4월)을 두었다. 조선군 사령부 산하에는 주차 사단, 임시 한국 파견대, 한국 헌병대, 진해만 요새 사령부, 영흥만 중포병 대대, 영흥만 요새 사령부, 조선 육군 군악대, 조선 육군 창고, 조선 위수 병원, 조선 위수 감옥이 있었다.

  • 질문1 대한제국을 병합한 후 편성된 조선 주차군의 작전 범위를 말해 보시오.
  • 질문2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는 가장 핵심적인 기반은 무엇이었나요?
  • 질문3 일제가 조선 주차군 사령부 대신에 조선군 사령부를 창설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읽기자료 3

헌병 경찰제 폐지에 따른 조선군의 개편

3·1운동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 방식을 무단 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전환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주둔 일본군에 대해 새로운 조치가 뒤따랐다.
첫째, 조선 총독과 조선군 사령부의 관계가 새롭게 정립되었다. 1919년 8월 조선 총독이 갖고 있었던 조선군에 대한 출동 명령권이 출동 요청권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조선 총독이 조선군 사령관에게 조선의 치안과 관련된 사항에 직접 명령할 수 없게 되었다.
둘째, 헌병 경찰제가 보통 경찰제로 바뀌면서 헌병은 군사 경찰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조선의 특수한 현실을 감안하여 당분간 국경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업무를 맡았다. 이제부터 치안 업무는 ‘1면(面) 1주재소(駐在所)’ 방침에 따라 경찰이 맡게 되었다. 조선 총독부는 부족한 경찰 병력을 8,054명의 헌병 및 헌병 보조원으로 충당하였다. 다만 헌병은 도지사와 경찰서장 등 정당한 권한을 가진 자로부터 요청이 있으면 행정 경찰과 사법 경찰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셋째, 헌병이 맡고 있던 국경의 감시 및 통제 업무는 1922년 5월에 폐지되었다. 조선헌병대는 이때부터 1937년까지 5개 헌병대 본부 체제로 560여 명에서 580여 명의 인원을 유지하였다.
넷째, 3·1운동으로 인해 다시 실시되었던 분산 배치가 1922년 10월부터 1923년 3월 사이에 집중 배치 방침으로 바뀌면서 각지의 소부대는 기존의 소속 부대로 집중되었다. 그러면서도 조선군은 국경 수비대를 5개로 편성하였고, 다시 1926년에 6개로 늘렸다. 국경 수비대는 조선인이 많이 살고 있는 동만주 지역과 소련에 인접한 곳에 더 많이 배치되었다.
한편 1919년 3·1운동 이후부터 1937년까지 제19사단은 함경도에 주둔하며 대러시아 작전에 대비하면서 주로 동만주 지방의 조선인 문제에 직접 개입하였고, 제20사단은 남만주 지방과 중국 본토에 출동할 때 주로 동원되었다. 전자의 대표적인 경우가 1920년 10월의 간도 참변이며, 후자는 1931년 9월에 시작된 만주 침략이 대표적이다.

  • 질문1 이른바 문화 통치에 따라서 조선 총독의 조선군에 대한 권한이 어떻게 바뀌었나요?
  • 질문2 조선군 국경 수비대가 동만주 지역 및 소련과 인접한 지역에 많이 배치되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3 1920년 10월 간도로 침략한 조선군 부대를 말해 보시오.

읽기자료 4

제17방면군으로 개편

1937년 7월 일본은 중국 본토를 침략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군 제20사단과 1개 육군 비행 중대가 중국의 톈진 일대에 투입되었다. 조선도 전쟁 분위기에 휩쓸리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1937년 만주와 일본 사이의 안정적인 연계를 확보하기 위해, 나진에 요새 사령부를 설치하였고 제2비행 사단 사령부와 비행 부대도 설치하였다. 중일전쟁 직후 조선군의 가장 큰 변화는 식민지 조선의 지배 정책에 전면적으로 관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이다. 조선군은 1937년 10월 신문반(新聞班), 11월 국방 사상 보급부(國防思想普及部)를 설치하여 군민일치(軍民一致)를 위해 여론을 환기하고 시국 인식과 국방 사상을 강력히 보급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1938년 7월 결성된 국민 정신 총동원 조선 연맹(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 1940년 10월에 이 연맹이 개편되면서 결성된 국민 총력 조선 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으로 나타났다. 이런 활동의 목표는 물자 동원을 원활하게 하고 인적 자원도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는 데 있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면서 편제와 작전 구역이 바뀌었다. 조선군은 1942년 9월에 사단의 보병 4개 연대 체제를 3개 연대 체제로 개편하고, 남은 보병을 중심으로 1943년 5월 평양에서 제30사단을 편성하였다. 이에 따라 제19사단은 함경북도, 제30사단은 평안도, 황해도, 함경남도, 그리고 제20사단은 나머지 지역을 작전 구역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전쟁 상황에 따라 예하 사단이 남방으로 이동하였다. 즉 대본영은 후반에 제20사단을 뉴기니아 방면으로, 제30사단은 1944년 5월 필리핀 민다나오 섬으로, 신설된 49사단은 6월에 미얀마 전선으로, 제19사단은 11월에 필리핀 전선으로 각각 이동시켰다.
1944년 6월 연합군에게 필리핀 근해의 마리아나를 빼앗긴 일본군의 패배는 명확해졌다. 이러한 상황에 적극 대비하기 위해 1945년 2월 27일 조선군은 조선군관구 사령부(朝鮮軍管區司令部)와 제17방면군으로 분리되었다. 조선군은 방위와 교육, 병참을 주된 임무로 하는 교육 부대이고, 제17방면군은 대미 작전 준비가 주된 임무였다. 17방면군은 미국의 상륙에 대비하여 호남과 제주도를 중심으로 전력을 보강하여 본토 결전에 대비하였고, 관동군은 함경도 지방에서 소련군에 대비하였다.

  • 질문1 국방 사상 보급부가 설치되고 국민 총력 조선 연맹을 조직한 일제의 의도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조선군이 조선군관구 사령부와 제17방면군으로 분리된 배경을 설명해 보시오.
  • 질문3 조선군이 식민지 조선의 지배정책에 전면적으로 간섭할 수 있게 된 것은 1937년 일제가 일으킨 무슨 침략 전쟁 때문이었나요?

읽기자료 5

조선군의 인력 수탈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부족한 병력 자원을 보충할 수 있는 곳은 조선뿐이었다. 조선군 사령부가 이미 1932년부터 조선인 징병제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1935년부터 지원병제 실시를 건의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일본 육군성은 중일전쟁을 일으키기 한 달 전인 1937년 6월 조선군 사령부에 조선에서 지원병제를 실시하는 문제에 대한 의견 제출을 요구하였다. 결국 조선군 사령부와 조선 총독부의 바람에 따라 같은 해 12월 24일 일본 내각이 조선인 특별 지원병 제도의 실시를 결정하였으며 1938년 2월 23일 「육군 특별 지원병령」이 공포되었다. 조선인은 그 해에 400명이 모집된 이후 1943년까지 16,830명이 지원병으로 복무하였다. 조선인 지원병은 만 17세 이상 20세 미만의 보통학교 또는 그와 동등한 학력의 소지자여야 했다. 그래서 조선군은 초등 교육과정에서 “우리들은 황국 일본의 신민이라는 강한 신념과 긍지를 견지하게” 교육하도록 조선 총독부에게 요구하였다.
1941년 12월 일본이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하면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이에 따라 1942년 5월 8일 일본 내각은 조선에서 징병제를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다음 날 이 사실을 공포하였다. 조선 총독부는 17세 이상 21세 미만의 조선인 남자를 대상으로 일본어 교육과 정신 교육을 철저히 실시하겠다고 발표하고, 1946년부터는 의무교육제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징병제는 1944년부터 시작되었는데, 본격적인 징집은 1945년부터 이루어졌다.
1945년 8월 현재 제17방면군의 부대는 제주도를 제외하고 야전 부대·요새 부대 등과 야전 근무대(野戰勤務隊)·특설 근무대·특설 경비 부대 등으로 구분되었다. 근무대는 각종 군사 시설을 경비하고 진지 구축과 화물 수송 및 비행장·도로·항만 등을 건설하였다. 또한 식량 문제를 군 스스로 해결하려는 의도로 결성된 자활 요원과 농경 근무 요원은이 농경지를 개척하고 고구마를 주로 생산하였다. 결국 징병된 조선인의 대부분이 노무자로 일했던 것이다.

  • 질문1 일제가 지원병제 및 징병제를 실시하게 된 배경을 설명해 보시오.
  • 질문2 일제가 황국신민화 교육을 실시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3 징병되어 제17방면군에 배치된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였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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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1918년에 제작된 경성부 관내도의 일부이다. 헌병 사령부는 1908년 10월 1일 용산의 신축 청사로 이전하기 전에 조선 주차군 사령부가 위치했던 자리이다.

  • 질문1 일제의 식민 통치의 무력적 기반이 되었던 기구가 있었던 자리(위 지도에서 까만 줄 표시된 곳들)를 찾아서, 현재 사용되고 있는 지도에 표시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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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현재 미군 기지로 이용되고 있는 조선군 사령부 터를 미군이 반환한 후 어떤 용도로 이용하면 좋을지, 이곳의 역사성과 주변 지역의 여건을 고려하여 구체적인 계획서를 모둠별로 작성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2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일제에 의해 징병에 끌려갔다 온 어르신을 찾아 인터뷰를 하고 그 내용을 정리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일제의 패망이 머지않았다는 것은 예측하고 있던 내가 1944년에 일본군에 징병당하여 국내의 제17방면군에 배치되었다고 가정하고, 어떻게 탈출하여 어디로 숨어들어가서 어떤 활동을 벌이다 해방을 맞을 것인지 계획을 세워 봅시다. (1944년에 일본군에 학도병으로 끌려가서 중국 전선에 배치되었지만, 탈출하여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까지 찾아가서 한국광복군에 입대한 장준하와 김준엽의 경험을 참고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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