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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향교 강학루 터 - 오강표 순절지(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은 항일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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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라 내 금년 나이 칠순에 이르러 나라가 패하고 임금이 망하는 현실에서 아무런 묘책도 없이 난국을 타개치 못하고 백성들이 함정에 빠지는 것을 구하지 못했으니 죽음만 같지 못하도다. 어찌 분노와 원한을 참고 왜놈에게 허리를 굽힐 수가 있으랴. 원컨대, 우리 2천만 동포는 총궐기하여 주권을 되찾아야 하느니라. 나는 나라가 패하고 임금이 망하였으니 어찌 내 자신도 살아갈 수 있겠는가. 이른바 나는 어디까지나 이씨 조선의 백성이오. 죽어도 이씨 조선의 귀신이로다. 일찍이 공자가 말하기를 뭇 사람은 성인(成人)하라 하였고 맹자는 의(義)를 취하라 하였으니 흰 머리에 붉은 충성은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

윗글은 1910년 9월 28일 일제의 강압적인 한일병합조약 체결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자 충청남도 공주 출신 유학자 오강표(吳剛杓)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남긴 유서의 내용이다. 오강표는 나라를 빼앗긴 슬픔과 분노에 절명사(絶命詞)를 지어 1910년 10월 16일 밤 공주향교 명륜당으로 들어가 절명사를 벽에 붙이고 강학루에서 목을 매어 순국하였다.
이전에도 오강표는 자결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을사늑약의 부당함과 을사 5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관찰사 이도재가 상소를 거절하자 죽음으로써 일제 침략에 항의하고자 하였다. 그는 청나라 상인으로부터 아편을 구해 공주향교 명륜당에 들어가 크게 울은 뒤 아편을 먹고 기절하였으나 죽기 전에 들켜 겨우 목숨을 건졌다.
정부는 오강표의 애국충절 정신을 기리고자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으며, 국가보훈처에서는 그를 2013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현재 오강표가 자결한 공주향교 안에 있던 강학루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철거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공주향교는 해방 후 1954년 문묘·명륜당·동재·존경각 등을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1978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75호로 지정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충청남도 공주시 교동 211
[도로명 주소 : 충청남도 공주시 향교1길 30-6]
현재 상태 없어짐 / 공주향교 안에 있던 강학루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이 철거하여 현재 터만 남아 있다.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일제는 우리 땅에서 일본군의 작전과 군사 기지 설치의 자유를 강제로 보장받은 한일의정서를 1904년 2월 23일 체결하고, 같은 해 8월 22일에는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여 우리나라의 재정과 외교에 간섭할 수 있게 하였다. 러․일 전쟁이 일제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아시아에 대한 일제의 영향력이 커지자, 우리나라를 보호 국가로 삼으려는 속셈을 드러냈다. 1905년 7월 일제는 미국과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8월에는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하여 한국 지배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동의를 받았으며, 러․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9월에는 러시아와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맺은 포츠머스 강화 조약에서 어떤 방법과 수단으로든 한국 정부의 동의만 얻으면 한국을 지배할 수 있도록 국제적으로 승인받았다.
마침내 1905년 11월 17일 저녁,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군대를 이끌고 궁궐로 들어와 대한제국의 정치를 담당하고 있던 8명의 대신(현재 우리나라 정부의 직제로 장관에 해당)에게 “대한 제국의 외교를 일본이 대신해 주고, 이를 위하여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조약의 체결을 강요하였다. 결국 8명의 대신 가운데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 5명이 찬성하였는데, 이때 맺어진 조약을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 을사늑약)이라고 하며, 찬성한 5인을 ‘을사 5적’이라고 부른다.
을사늑약 체결로 일제는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을 간섭할 수 있게 함으로써 우리나라를 보호국화하여 우리나라는 사실상 반식민지가 되었으며, 영국·청(중국)·미국·독일 등 외국 공관들도 철수하였다. 고종 황제는 비밀리에 미국에 편지를 보내 “내가 동의하지 않았으니, 조약은 무효이다.”라고 주장하였지만, 미국을 비롯한 어떤 나라도 고종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 주지 않았다.
을사늑약 소식이 전해지자 이를 반대하는 운동이 펼쳐졌다. 『황성신문』의 주필이었던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오늘 목 놓아 통곡하리)」이라는 글을 써서 조약 체결 과정을 알리고 이에 찬성한 매국 대신을 규탄하였다. 뜻있는 이들은 ‘을사 5적의 처단과 조약 무효화 선언’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도 있었다. 상인들은 상점 문을 닫고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하며 일제를 규탄하고 조약 무효화를 주장하였다.
고종은 을사늑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한국의 주권 수호를 호소할 목적으로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헤이그 특사 파견 사실을 안 일제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이를 핑계로 같은 해 7월 20일 고종을 강제로 물러나게 하고 순종을 황제로 내세웠다. 이어 7월 24일에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우리나라 내정에 관한 모든 권한을 빼앗았으며, 7월 27일에는 언론 탄압을 목적으로 한 <광무보안법>을 공포하여 항일 운동을 강력히 탄압하였다. 이어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였으며, 1909년 7월에는 사법권마저 빼앗았다.
일제는 1910년 5월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를 3대 통감으로 임명, 한국 식민화를 단행하도록 하였다. 데라우치는 막바지 준비 작업으로 1910년 6월 대한제국의 경찰권까지 완전히 손아귀에 넣어 일제는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할 시기만을 노렸다.
1910년 8월 22일 서울 거리에 일본 헌병들을 배치해 놓고 순종 앞에서 형식상의 어전 회의를 열어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 데라우치의 이름으로 이른바 한일병합조약을 맺었다. 일본은 우리 국민의 반발을 두려워하여 조약 체결 사실을 숨긴 채, 사회 단체의 집회를 철저히 금지하고 원로 대신들을 연금한 뒤인 8월 29일 이를 발표하였다. 이 한일병합조약(한일합병조약, 한일합방조약)으로 우리는 나라마저 통째로 빼앗기고, 일본 정부의 한 부서인 ‘조선 총독부’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에 많은 애국 지사들이 나라를 잃은 억울함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고, 의병을 일으켜 저항하기도 하였다. 또 적잖은 이들은 일제의 탄압이 심해져 국내에서 드러내놓고 투쟁하기가 어렵게 되자 국외로 옮겨 항일 운동을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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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순국열사 오강표(吳剛杓)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하자 많은 사람들이 저항하였다.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침략자와 불의에 대항해서 무력으로 의거를 행한 의사와, 죽음으로 자신의 저항 의지를 강력하게 표시한 열사의 투쟁이 줄기차게 전개되었다. 저항의 형태로만 본다면, 의사가 의거를 통해 적극적인 행동을 취했던 데 비해, 열사는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수절로써 살신성인을 구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그렇다고 끝까지 지조를 지키고 마침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열사들의 투쟁이 결코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의 체결 사실이 발표되자 이에 분개하여 여러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저항하였다. 금산군수 홍범식, 판서 김석진, 참판 이만도, 참판 장태수, 정언 정재건, 승지 이재윤, 의관 송익면, 감역 김지수, 무인 전주사람 정동식, 유생 연산사람 이학순, 홍주사람 이근주, 태인사람 김영상, 공주사람 조장하, 구례사람 황현, 환관 반씨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자결하였다. 오강표 역시 나라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한 나머지 자결한 수많은 열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오강표는 1848년(출생 연도가 1841년, 1843년이라는 주장도 있다) 충청남도 공주군 사곡면 월리 도덕동(출생지에 관해서도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면, 전라북도 태인이라는 주장도 있다)에서 태어났다. 그의 자(字)는 명여(明汝), 호(號)는 무이재(無貳齋)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바르고 의(義)를 중시했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1868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상복을 벗지 않았으며,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고, 상을 마친 후에도 매일 관대(冠帶)를 바르게 하고 가묘(家廟)를 모셨다. 홀어머니를 섬기는 데에도 온순함으로 받들어 거스름이 없었으며, 집에서는 책을 가까이하고 말이 적어 바깥 사물에 그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았다.
아버지의 명으로 임헌회(任晦憲, 1811~1876)와 전우(田愚, 1841~1922)에게 공부를 하였으며, 공부하는 동안 스승을 섬기기를 어버이 섬기듯 했고 친구를 사귀는 데에도 예절을 행하는 등 충의의 맘씨가 남 달리 강하고 뛰어났었다고 전해진다. 지은 책으로는 『무이재집(無貳齋集)』이 있다고 전해지나 그 현존 여부를 명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어떠한 사상을 가졌는가를 파악할 만한 자료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문집에 실려 있다고 전해지는 시 한두 편이 남아 있을 뿐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오강표는 크게 분개하면서 “임금의 신하가 되어 이러한 때에 감히 생명을 아끼겠느냐.”고 말하면서 을사오적을 죽여야 한다는 상소문 「토적소(討賊疏)」를 지어 교임(敎任) 한정명(韓鼎命)으로 하여금 관찰사 이도재(李道宰)에게 글을 조정에 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관찰사 이도재는 이를 거절하고 올리지 않았다.
오강표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청국 상인에게 아편을 구입한 뒤, 공주향교 명륜당으로 들어가 대성통곡하고는 마침내 자결하고자 아편을 먹고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행히 주위에 있던 사람이 발견하여 목숨을 건져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오강표는 이토 히로부미를 꾸짖는 글을 쓰고자 하였으나 주변 사람들이 말리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때부터 그는 실의에 빠져서 세상사에 뜻을 두지 않고, 항상 독약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1907년 모친상을 당하니 그때 그는 나이 60을 넘었다.
한편 1905년 이후 한민족의 국권 회복 운동을 무력으로 철저하게 탄압했던 일제는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시킨 데 이어 사법권마저 빼앗았다. 나아가 1907년 일본 내각은 「한국병합에 관한 건」을 결정하고, 군대와 경찰을 전국 각지에 배치하여 한민족의 저항을 사전에 차단한 다음 1910년 8월 22일 이른바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우리의 국토와 주권을 완전히 빼앗았다.
당시 세상을 피하여 명강산(明岡山: 공주 무성산)에서 지내던 오강표는 나라를 빼앗긴 소식을 듣고 놀라 절명사(絶命詞)를 지어 최종화(崔鍾和)를 찾아가 함께 통곡하고는 죽겠노라고 말하자, 최종화가 이곳은 선비가 인(仁)을 이룰 만한 곳이 아니라고 선생을 말렸다. 이에 오강표는 “그렇다면 다시 교궁(校宮: 향교 명륜당)으로 가야한다는 말인가” 하면서 충남 연기에 있는 선산을 찾아 조상들께 인사를 올리고, 청주로 가 아들 병찬(炳瓚)과도 이별을 나눴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스승 임헌회 선생의 묘(廟)에 글로 고하고, 동생 순표(純杓)를 만나 이별을 나눴다.
1910년 10월 12일, 오강표는 다시 최종화를 찾아갔다. 이 날은 비바람이 혹독하게 몰아쳐 몹시 추웠는데도 그는 매우 얇은 옷을 입고 있었다. 최종화가 “왜 솜옷을 입지 않았느냐?”고 묻자, “망국의 노예가 되어 따뜻하고 배부른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고 말하였다. 그 다음 날, 유서 등을 지어서 소매 속에 넣고 갔다. 이때 최종화가 “절개를 지켜 죽는 것은 진실로 아름다운 일이지만 후회가 없겠는가?”하고 물으니, 오강표는 “인(仁)을 구하고 인을 얻는 것에 또한 어찌 후회가 있겠는가?”고 답하였다. 이에 최종화는 오강표의 자결을 더 이상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시를 지어 주었다.

울창하고 높은 봉황산이여 천년의 상쾌한 기상 수양산 같도다
금강은 깊고도 푸르니 후세 사람은 원수(沅水)와 상수(湘水)에 견주도다
슬픈 노래 한 수로 그대를 보내는데 가을바람 쓸쓸하고 해는 차갑도다
긴 세월 속 지금은 어느 때인가 장사가 한번 가니 돌아오지 않도다.


이 시를 본 오강표는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만약 죽지 않는다면 어찌 조상들을 뵐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최종화는 오강표를 마을 앞 산모퉁이까지 전송하였는데, 두 사람은 서로 눈물을 흘리며 헤어졌다.
오강표는 최종화와 헤어진 뒤 곧바로 공주향교의 명륜당에 들어가 벽에 글을 붙이고 한바탕 대성통곡을 하였다. 향교에서 잡일을 맡고 있는 수복(守僕)이 이 사실을 향교의 직원(直員) 이정규(李鼎珪)에게 알렸다. 이정규는 수복에게 선생을 불러오라고 하자, 오강표는 그를 크게 꾸짖으면서 “나는 부른다고 해서 가는 사람이 아니다”고 말하였다. 이정규가 나와서 선생을 보고는 위로하고 타일렀으나 듣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이정규는 선생의 글을 관청으로 보냈고, 관청에서는 다시 이를 경무관에게 보냈다.
10월 16일 밤, 오강표는 공주향교 강학루(講學樓)에서 목을 매 자결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관청에서 크게 놀라 마을 사람들에게 화톳불을 밝히고 밤을 새도록 하였다. 그들은 오강표의 옷차림을 풀어 헤쳐 자세히 조사하여 유서 등을 찾아 갔다. 마침 이날 군수 모임이 있었는데, 그들은 오강표의 자결 소식을 듣고 모두 놀라면서 탄식하였다. 오강표의 자결 소식을 들은 최종화는 “애국충정 하는 데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기에 이르렀으니 매운 그 마음 선열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도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갈운리(현재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해밀리) 마을 입구에 그의 우국충절을 기록한 순절비인 ‘열사무이재오공강표순절비(烈士無貳齋吳公剛杓殉節碑)’와 야산 중턱에 묘가 있었으나, 행정중심복합도시인 세종특별자치시가 건설되면서 열사무이재오강표순절비는 충남 금산군 남이면 매곡리로 옮겨졌다. 오강표의 묘는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5호로 지정되었으나, 원형의 변화가 심하여 문화재적 가치가 떨어져 2007년 9월 10일 지정이 해제된 후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었으며, 묘에 있던 동자상과 문인석, 망주석 등은 행정도시건설청에 기증되었다.
한편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침산리 178 침산공원 안 충령탑 앞에 있는 「연기 출신 독립 의열 명사 숭모비」에도 오강표의 공적이 새겨져 있으며, 충청남도 공주시 산성공원 입구 왼쪽 언덕 중턱에 ‘무이재오선생강표순의기적비(無貳齋吳先生剛杓殉義紀蹟碑)’가 세워져 있다. 그가 태어난 공주시 사곡면 월가리 도덕골에도 ‘우국지사오강표선생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정부는 오강표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으며, 국가보훈처에서는 2003년 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여 그의 항일 정신을 기리고 있다.

  • 질문1 오강표의 호는 무엇이며, 한자로 된 이 호를 해석하면 무슨 뜻인지 대답해 봅시다.
  • 질문2 오강표가 두 번에 걸친 자결을 어째서 시도하게 되었는지 말해 봅시다.
  • 질문3 오강표가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자결한 장소는 어디인지를 써봅시다.
  • 질문4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갈운리에 있던 오강표 순절비를 세종특별자치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금산군 남이면 매곡리로 옮겨놓았는데, 다시 어디로 옮겨놓는 것이 바람직할지 말해 봅시다.

읽기자료 2

공주향교(公州鄕校)

충청남도 공주시 교동에 위치한 공주향교는 조선 초기에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며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지은 교육 기관이다. 공주향교의 창건 연대는 명확하지 않지만, 태조 7년(1374) 웅진동 송산 기슭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광해군 14년(1622) 화재로 인하여 불에 타버려 인조 원년(인조 1년, 1623)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었다고 전한다. 그 뒤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향교로 들어가는 길목에 ‘누구라도 타고 온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뜻의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져 있으며, 입구 맨 앞에 관리인이 일하는 고직사(庫直舍)가 있다. 향교 안은 지세에 따라 2단으로 배치하였는데, 입구 첫째 단의 외삼문(外三門)을 지나면 중앙에 유생들이 학업을 연마하던 명륜당(明倫堂)과 유생들이 공부하던 곳인 동재(東齋), 책과 목판을 보관하던 존경각(尊經閣), 제사용품을 보관한 제기고(祭器庫)가 있다. 그 뒤쪽 한 층 높은 곳에 있는 내삼문(內三門)을 들어서면 정면에 성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대성전(大成殿)과 양쪽에 우리나라 유학자 18분의 위패를 모신 동무(東廡)와 서무(西廡)가 있다.
이렇게 공주향교는 앞쪽의 교육 공간과 뒤쪽의 제사 공간으로 구분하여 건물을 배치하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노비, 책 등을 지급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았다. 현재 공주향교에서는 효제충신, 인성, 서예, 전통의 맥을 잇고자 명륜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공주향교 안에는 순국열사 오강표가 자결한 곳인 강학루가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철거되어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공주향교는 1954년 문묘, 명륜당, 동재, 존경각 등을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1978년 3월 31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75호로 지정되었다.
오강표가 자결한 이곳은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되어 2013년 대전지방보훈청에서는 ‘11월의 우리고장 현충시설’로 ‘오강표 열사 순국지(공주향교 강학루)’를 선정하였으며, 2014년 12월 공주향교 입구 오른쪽에 ‘오강표 순절지-공주향교’임을 안내하는 표지를 세워 그 뜻을 기리고 있다.

  • 질문1 향교에 세워져 있는 명륜당과 대성전의 기능을 설명해 봅시다.
  • 질문2 공주향교를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한 이유는 무엇인지 말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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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유방백세의 순국제열사 - 오강표<br>출처 : 2003년 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국가보훈처](http://mpva.go.kr/narasarang/month_hero_view_photo.asp?id=243&ipp=12)<br>또는 독립기념관 -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http://search.i815.or.kr/OrgData/OrgList.jsp?tid=ns&id=HM1936082904 - 02)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된 독립 운동 잡지 『한민(韓民)』에서 1936년 8월 29일 발행한 「유방백세의 순국제열사(流芳百歲의 殉國諸烈士)」라는 제목의 기사이다.

  • 질문1 유방백세(流芳百世)는 ‘향기가 백세에 흐른다’라는 뜻이다. 그러면 ‘流芳百歲의 殉國諸烈士’는 무슨 말인지 해석해 봅시다.
  • 질문2 기사 끝부분에 “공주군의 조장하, 연산군의 이학순, 전의군의 오강표”라는 내용이 있다. 오강표는 공주 출신의 유학자로,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분이다. 이처럼 우국지사(憂國之士) 가운데 자결로서 저항한 이들을 무엇이라고 부르는지 기사 제목을 참고하여 대답해 봅시다.
  • 질문3 기사 첫 부분에 ‘망국조약’이라는 내용이 있다. 어떤 조약을 가리키는지 대답해 봅시다.

시각자료 2

공주향교 강학루 터<br>출처 : 국내독립운동·국가수호사적지 사이트(http://sajeok.i815.or.kr/) - 오강표 순절지

사진은 충청남도 공주시 교동에 있는 공주향교의 모습이다.

  • 질문1 중앙 건물 현판에는 ‘明倫堂’이라고 쓰여 있다. 우리말로 읽어봅시다.
  • 질문2 향교는 크게 제사 공간과 교육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明倫堂은 어느 공간에 해당되는지 대답해 봅시다.
  • 질문3 순국열사 오강표는 나라를 빼앗긴 슬픔과 분노에 공주향교 강학루에서 목을 매어 목숨을 끊었다. 강학루는 철거당하여 현재 터만 전해지고 있는데, 어느 시기 누구에게 철거되었을지 대답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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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는 방법은 자결, 무장 투쟁, 의열 활동, 애국 계몽 활동, 외교 활동 등 다양하다. 그런데 ‘자결하는 방법도 하나의 투쟁’이라고 여기는 이들도 있고, ‘억울하다고 죽는 것보다 싸우는 게 낫다’라고 여기는 이들도 있다. 이에 대한 생각을 친구들과 토론해 봅시다.
모둠활동 2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분들을 구분할 때 의사와 열사라는 용어를 사용하곤 한다. 의사와 열사의 차이는 무엇인지, 의사와 열사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지 찾아 보고서로 제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다음 예시 자료처럼 우리가 사용하는 말 가운데 역사적인 사건과 관련된 말들을 찾아 정리한 후 주변 친구들에게 홍보할 자료를 만들어 봅시다.

‘을씨년스럽다.’
마음이나 날씨가 어수선하고 흐린 것을 표현할 때 ‘을씨년스럽다’라는 표현을 한다. 이 말은 ‘을사년스럽다’라는 말이 변해서 된 말이다. 을사년(乙巳年)인 1905년 맺어진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본으로 넘어가자 우리 민족은 무척이나 황당하고 음울해하며 뒤숭숭하였다. 그래서 날씨가 좋지 않거나 마음이 불편할 때 ‘을사년처럼 좋지 않다’는 표현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변해 ‘을씨년스럽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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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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