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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하구려 - 협동학교 교사(김대락, 위정척사파에서 만주 항일 독립투사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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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워서나 서서나 복수를 다짐하며 / 臥立皆薪膽
만나는 사람이 모두 형제와 같아 / 逢迎盡弟兄
황하가 맑아지길 기다릴 수 있다면 / 河淸如可俟
나이 들었다고 어찌 이루기 어려우랴 年老奈難成
(1911.5.17.)

진나라 조정의 이레 통곡 / 秦庭七日哭
회계산 상담의 십년 기한 / 會稽十年期
고생 길 먼먼 삼천리에 / 困迹三千里
나이는 벌써 예순인데도 / 邵齡六十朞
붉은 마음 장차 적과 싸우려니 / 丹心將死敵
머리야 도리어 아이가 되었네 / 由髮反爲兒
원하노니 새 세상이 되거든 / 願將新世界
다시 옛 모습 찾아 가세나 / 還作舊時規
(1911.6.5)


윗 글은 백하 김대락(金大洛, 1845∼1915)이 만주로 망명한 이후 쓴 일기의 일부로 조국의 광복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는 시이다. 자신의 나이는 60이 넘었고 일제는 강성하지만 먼 만주땅에서라도 동지들과 힘을 키워 나라를 되찾고자하는 그의 마음이 절절히 녹아있는 시이다.
그는 1845년 출생으로 안동 천전문중의 장남이었다. 당시 그의 집안은 ‘사람 천석, 글 천석, 살림 천석, 합이 삼천석’이라고 부를 정도 재산, 명망, 문장 등 어느 것에도 뒤지지 않는 명문가였다. 이러한 개인적, 지역적 환경으로 그는 개항 이후 자연스럽게 위정척사사상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점차 사상적 변화를 겪게 되어 근대교육시설인 협동학교를 위해 자신의 집을 내놓는 결단을 보여준다. 그러나 1910년 나라를 빼앗긴 이후 일제 치하에서 살기를 거부하며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게 된다.
백하 김대락의 삶을 통해 구한말 위정척사사상을 가진 한 유학자가 어떻게 개화사상을 받아들여 애국계몽운동의 길로 나아가고 만주로 나아가 독립운동의 최전선에 서게 되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국가의 위기를 맞이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 진짜 선비의 모습과 정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내앞길 35(천전리 257)
현재 상태 변형 / 협동학교 교사로 이용되었던 백하구려의 별채 사랑은 없어졌으나, 축대와 초석 일부가 사랑채 앞에 남아 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지속적인 침략을 시도하던 일제는 1894년 청·일 전쟁, 1904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그 결과로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통감부를 설치하고 외교권을 빼앗아가며 대한제국을 자신들의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1907년에는 고종을 황제자리에서 강제로 쫓아내고 순종을 새로운 황제로 올리는 한편, 대한제국을 지키는 근간이었던 군대마저 해산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최익현, 민종식 등의 유생들뿐만 아니라, 신돌석과 같은 평민들도 의병부대를 이끌고 항일의병투쟁을 전개하였고, 군대 해산 이후에는 일부 군인들이 의병 부대에 합류하였다. 한편 개화된 관료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실력 양성을 통하여 국권을 회복하려는 애국계몽운동이 나타났다. 이들은 각종 정치․사회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거나, 학교를 설립하여 새로운 인재를 양성하고, 신문과 잡지를 통해 국민을 계몽하였다.
백하구려가 위치한 천전리는 안동시 중심지에서 동쪽으로 14km에 있는 농촌 마을로 의성김씨 청계 김진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었다. 이들은 전통적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한 위정척사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1894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촉발된 을미의병부터 항일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1904년부터는 신문화 신사상을 수용하여 계몽운동으로 전환하여 협동학교를 설립하고, 대한협회와 교남교육회 안동지회를 결성하여 중앙의 계몽운동에 발맞추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모습은 의병운동과 계몽운동이 별도로 병행 전개되었던 모습을 생각해보면 매우 남다른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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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의병운동을 지원하다.

백하구려가 위치한 안동지역은 김대락이 속한 의성 김씨 천전문중 이외에 퇴계 이황을 배출한 도산문중과 서애 유성룡을 배출한 하회문중 등의 명문가들이 많다. 뿐만 아니라 후조당 김부필을 배출한 오천문중, 경당 장흥효의 금계문중, 대산 이상정의 고산문중, 정재 유치명의 수곡문중, 석주 이상룡의 도곡문중, 권오설의 가곡문중, 이준태의 풍산문중, 김지섭의 미동문중, 역동 우탁의 문중, 농암 이현보의 분천문중, 단계 하위지의 송야문중 등 전통적인 양반 가문들도 이곳에 있다.
백하 김대락(1845, 헌종 11-1914)은 안동 임하 천전리에서, 금부도사를 지낸 우파 김진린(1825-1895)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그의 집안은 당시 사람들이 ‘사람 천석, 글 천석, 살림 천석, 합이 삼천석’이라고 할 정도로 번성하였다.
어린 시절 서산 김흥락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많은 안동 유림의 선비들과의 교류하면서 자신의 세계관을 형성해 갔다. 그러므로 ㉠ 개화 문제에 대한 백하의 사상은 당시 유림과 마찬가지로 매우 보수적이었으며, 국가의 위기 또한 국가 운영을 잘못했다는 내적인 부분보다는 외세의 침략에 의한 것이라는 외적인 부분을 더 중요시하였다.
안동지역에서는 1895년 11월 15일 단발령이 반포되자 1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모여 대대적인 의병을 일으켜 저항했다. 이를 제1차 안동의진이라고 하는데 이 당시 51세이던 김대락은 아버지가 돌아가셔 상을 치르느라 직접적으로 참여하지는 못하고, 군자금을 모아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 질문1 19세기 후반 안동지역을 대표하는 양반 가문을 찾아 써 봅시다.
  • 질문2 밑줄 그은 ㉠과 같이 성리학을 기반으로 외세에 적극적으로 싸울 것을 주장한 당시 정통 성리학자들의 사상을 무엇이라고 하나요?

읽기자료 2

협동학교 설립에 반대하다.

을미의병을 일으켰던 안동지역의 유림은 1904년부터 새로운 문화와 사상을 수용하여 애국계몽운동으로 전환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가졌던 유교 사상을 버리고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대의 변화에 따라 유학을 재해석하고 있다는 의미이며, 이러한 유학자들을 ㉠ 혁신유림(革新儒林)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변화를 이끈 사람은 류인식이다. 류인식은 1903년 서울로 올라가 장지연과 신채호 등과 시국을 논하고 교육을 통하여 백성을 계몽하는 것이 나라를 구하는 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서구 문물을 수용하고 이해하려 노력하였다. 이와 더불어 이상룡은 근대화된 강력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해서는 의병과 같은 전통적 방식이 아닌 전혀 새로운 방식의 국권회복 방안을 모색해야만 한다는 생각하고, 성리학의 세계를 벗어나서 서양의 다양한 학술과 사상을 연구한 후 애국계몽운동으로 사상적 전환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혁신유림으로 김대락, 이상룡, 류인식, 김동삼 등이 있다.
1907년 류인식은 이상룡과 함께 대한협회를 창설하고, 김후병, 하중환, 김동삼 등과 함께 천전리에 협동학교를 설립하여 근대 교육을 시작하였다. 협동학교라는 명칭은 안동의 류인식, 김후병, 하중환 등이 중심이 되어 안동군의 동쪽 7개면이 힘을 합쳐 설립한다는 뜻에서 ‘협동(協東)’이라고 하였다. ㉡ 이 때 류인식의 스승 김도화와 아버지 류필영이 반대하였으며, 김대락 또한 이러한 신교육에 적극적으로 반대를 하였다.

  • 질문1 밑줄 친 ㉠과 같은 혁신유림이 가진 사상에 대해 간단히 정리해 봅시다.
  • 질문2 밑줄 친 ㉡처럼 김대락, 김도화, 류필영 등이 협동학교의 설립에 반대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읽기자료 3

협동학교 확장에 공헌하다.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위정척사사상을 가지고 협동학교 설립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백하 김대락은 1909년 초 마침내 류인식과 이상룡의 사상을 이해하고 대한협회와 협동학교를 중심으로 한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백하 김대락이 위정척사사상에서 벗어난 이유는 그의 「독대한협회서유감讀大韓協會書有感」이란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늙은이 눈 어두워 죽은 듯이 누웠다가 창문에 기대어 대한서(大韓書)를 읽는다.
폐부를 찌르는 말 마디마디 간절하니 두 눈에 흐르는 눈물 옷깃을 적시네.
때끼고 녹슨 거울 비춰볼 수 없어서 오랫동안 서랍 속에 버려두었다가
때벗기고 닦아내어 옛 모습 되살리니
비로소 알았노라 청동거울 본래는 밝은 것을
칼집에 넣어둔 검 칼이라 할 수 없어 십년 두고 검을 갈며 정신을 가다듬어
난마처럼 얽힌 사슬 단번에 베어내니
비로소 알았노라 추련(秋蓮)같은 칼도 써야만 검인 것을

산속에 묻힌 구슬 겉모습이 돌 같아 통곡하며 호소한들 어느 누가 알아줄까
하루아침 쪼개어 천하에 드러내니
비로소 알았노라 어주(魚珠)는 보배가 아닌 것을


이 글에서 백하 김대락이 『대한협회보』를 읽고 “때가 낀 거울을 다시 꺼내어 닦는 것처럼, 칼집에 넣어 둔 칼을 내어 가는 것처럼, 옥돌을 깎는 것처럼” 스스로 깨달아 류인식, 이상룡과 같은 혁신유림의 길을 가겠다고 결의하고 있다.
당시 협동학교는 의성 김씨 서당인 가산서당을 교사로 사용하고 있었으나 이 무렵 학생 수가 늘어나 새로운 공간이 필요하였다. 이에 김대락은 자신이 살던 집의 사랑채인 백하구려를 학교 교사로 내놓았다. 이 건물은 정면 8칸인데 서쪽 4칸은 사랑채이고, 동쪽 4칸은 중문간을 비롯한 아래채이다. 이렇게 협동학교에 반대하던 김대락이 적극적으로 협동학교를 지원하게 되자 협동학교는 새로운 발전의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안동지역은 의병의 고장에서 계몽운동의 고장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또한 1909년 1월 교남교육회 안동지회가 결성되어 안동지역은 교육진흥의 분위기가 넘쳤다.

  • 질문1 위의 시 「독대한협회서유감讀大韓協會書有感」에서 김대락이 대한협회보의 논설을 읽고 비로소 개화의 중요성을 깨달았음을 얘기하면서 비유한 물건 3가지를 찾아 써 봅시다.
  • 질문2 우리 고장에도 근대 교육 시설로 사용되었던 전통 건축물이 있는지 조사해 봅시다.

읽기자료 4

만주로 망명하다.

일제는 을사조약 이후 고종의 강제퇴위, 군대 해산, 정미7조약 등을 통해 국권을 빼앗아가고 있었고,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29일에 일제에게 완전히 나라를 빼앗기게 되었다.
이렇게 나라가 망하자 백하 김대락을 둘러싼 지식인들 사이에는 큰 움직임이 일어났다. 특히 김대락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이만도와 이중언이 단식으로 자결하였다. 이만도는 김대락의 매부인 이중업의 아버지였고, 이중언은 김대락의 조카 김만식의 장인이었다.
이에 김대락은 1910년 12월 24일 재산을 정리하고 온 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망명 당시에 백하는 67세의 고령이었다. 망명 가족은 50명 가량의 문내 청장년 가족과 만삭의 임산부인 손녀와 손부까지 거느린 대가족이었다. 이 망명을 전후하여 우당 이회영 가족, 백하의 매부 석주 이상룡 가족, 동산 류인식 등도 모두 망명하였다.
망명 당시 70세에 가까운 고령이었기 때문에 일선에서의 투쟁을 보여주진 못했으나, 망명 지식인들 사이에서 가장 큰 어른으로 중요한 결정과 추진에 힘을 보태었다. 실제 삼원보에서 신흥학교가 설립되자 교장에 수차례 추대되기도 하였으나 사양하였고, 1911년 4월 최초의 독립운동조직인 경학사를 세우는 데 공헌하였다.
그리고 김대락은 고령의 나이로 1910년 12월 압록강을 건널 때부터 1914년 정월 초하루까지 망명하여 삼원보에 정착하는 만 3년 동안의 과정을 일기로 남겼다.
1914년 12월 10일 자신의 마지막 정착지였던 남산촌에서 별세하였고, 광복 후에 건국훈장에 추서되었다. 묘소는 남산촌에 있었으나 시신을 찾을 수 없어, 후손들이 안동시 임하면에 그의 옷을 대신 안장한 묘소를 만들었다가 현충원에 다시 모셨다.

  • 질문1 김대락이 자신의 재산을 모두 정리하고 만주로 망명한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생각해 봅시다.
  • 질문2 김대락 선생 등이 심혈을 기울여 세운 경학사에서 한 일들이 무엇인지 조사하여 말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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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백하구려 전경

백하구려

백하구려는 구한말과 일제 초에 국민계몽과 광복운동에 몸바친 백하 김대락(1845∼1915) 선생의 고택으로 사랑채를 확장하여 이 지역 최초로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 교사로 사용했던 유래가 있는 집이다. 집은 김대락의 나이 42세 때인 1885년에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가옥은 앞면 8칸으로 서쪽 4칸은 사랑채이고 동쪽 4칸은 중문간을 비롯한 아래채이다. 사랑채는 막돌로 쌓은 2층 기단 위에 서 있으며, 아래층 기단은 앞쪽으로 3m가량 돌출되어 있는데 협동학교 교사로 쓰기 위해 사랑채를 확장할 때 넓힌 것으로 보인다.
앞에 쪽마루가 설치된 동쪽 2칸은 큰사랑방인데, 이 사랑방 서쪽 뒤로 방이 한 칸 붙어 있어 안마당으로 통할 수 있게 하였다. 아래채는 사랑방과 붙어 중문간이 있고 동쪽으로 광, 아랫방, 마루방이 1칸씩 배열되어 있다.
안채는 전면이 개방된 3칸 대청을 중심으로 동쪽에 남북으로 긴 2칸 방이 놓이고, 그 앞으로 2칸 부엌이 뻗어 앞채의 아래방에 접하였다. 안채와 사랑채 모두 간소한 구조이지만 안채 대청 앞면 기둥은 둥근기둥을 세워 장식하였다.
당시 협동학교의 교사로 쓰던 건물은 광복운동 군자금 마련을 위하여 처분되어 사라졌지만, 지금도 건물이 서 있던 축대와 초석 일부가 사랑채 앞에 남아 있어, 그의 애국정신을 엿볼 수 있게 한다.

  • 질문1 전통건축에서 칸(間)은 건축물의 크기를 측정하는 단위로 기둥과 기둥사이를 1칸이라고 합니다. 사진 속에서 건물 앞면이 몇 칸으로 되어 있는지 확인해 봅시다.
  • 질문2 1904 ~ 1910년 사이에 벌인 운동으로, 협동학교처럼 교육을 통해 실력을 양성하거나, 언론 등을 통해 계몽 활동을 벌인 운동을 무엇이라고 하나요?

시각자료 2

백하구려 관련기사, 황성신문(1909년 5월 8일)

위 기사는 1909년 5월 8일 황성신문에 ‘교남교육계에 신적치(新赤幟)’라는 제목으로 실린 기사로 “근래에 안동에서 온 소식에 의하면 안동군 임현 내면 천전리에 사는 김대락씨가 교육을 일으키고자 하는 생각으로 자기 소유의 건물 50여 칸의 가옥을 교사로 사용하도록 내어놓고 자신은 자그마한 집으로 이주했다. … 김대락씨는 원래 구학문(성리학)의 대가로 수구파에 속하여 수년 전에 신교육을 시작하는 언급이 있으면 크게 노하고 극력 반대하였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 크게 각성하고 신교육에 대해 시급함을 일찍 깨닫지 못함을 후회하며 크게 헌신하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 질문1 만약 여러분이 백하 김대락과 같은 입장이었다면, 그와 같이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지역 교육의 발전을 위해 내놓았을지 생각해 봅시다.
  • 질문2 교남교육회는 각 지역의 교육계몽단체 중에서 가장 늦게 설립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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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만약 여러분이 김대락과 같이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여 학교의 설립과 확장에 공헌한 사람이라면 학생들에게 어떠한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지 토의하고 문장을 작성해 봅시다.
모둠활동 2
백하 김대락 선생의 일대기 중에서 다음 사항들에 해당하는 삶의 장면을 찾아서 적어 봅시다.

○ 자신이 해오던 것만 고집하지 않고, 새로운 것이 합당하면 받아들임
○ 나라와 백성을 지키는 올바른 일을 위해 자신의 마음과 재산도 기꺼이 바침
○ 위기에 빠진 나라와 민족을 구하기 위해 자신과 가족은 희생함
○ 죽기까지 의로움을 굽히지 않고 바른 일을 위해 헌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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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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