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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제국군 전투지 - 서울 시가(일제의 군대 해산에 항거한 격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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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니, 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

위는 보병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 참령이 일제의 군대 해산에 항거하여 권총으로 자결하면서 품속에 남긴 글이다. 무장 해제된 상태로 군대 해산식이 거행되는 훈련원으로 출발하려던 장병들이 박승환의 자결 소식을 듣자 격분하였다. 그들은 탄약과 무기를 탈취해 무장하고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이며 군대 해산에 항거하였다.
대한 제국군과의 시가 전투에 대해 일본군은 “이후 적어도 며칠 동안은 일본인들이 경의를 가지고 한국과 한국인을 대하지 않을 수 없었던 용감한 방어전이었다.”고 평가하였다.
『대한매일신보』에서는 대한 제국군이 일본군과 벌인 시가전을 아래와 같이 전하고 있다.

훈련원에서 한국군을 해산하기 위해 무장을 해제한 병졸을 소집하였다. 세계의 어느 군인인들 이러한 상황에서 무장을 해제 당함은 자신에게 가장 심한 수모인 것이다. 무장을 가진 한국군이 당연히 그러한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점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 엊그제 사상의 잔혹한 경황을 간단히 보도하면 … 한국군은 탄환이 떨어지자 일본 기관포의 잔인한 난사에 혼비백산하여 몸을 숨길 곳을 찾다가 속수무책으로 일본군의 총칼에 무자비하게 죽어 갔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4가 45 서울상공회의소 일대
[도로명 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39 (남대문로 4가 서울상공회의소 일대)]
현재 상태 『한국경성전도』(1903)에 서소문안 남동쪽으로 시위 제1대대 병영(현 서소문동 120)이, 숭례문안 동남쪽으로 친위 제2대대 병영(현 남창동 34)이 표기되어 있는데, 이 두 병영을 중심으로 한 서소문 - 숭례문 일대에서 군대 해산 당시 시가전이 벌어졌다.

일제는 1894~1895년의 청일 전쟁과 1904~1905년의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작업을 구체적으로 진행하였다. 그 첫 단계가 외교권을 박탈하여 국제 사회로부터 한국을 고립시킬 목적으로 체결한 을사늑약(1905)이다.
일제는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국제 사회에 알리려고 한 헤이그 특사 파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한국의 식민지화에 필요한 조치를 단행하였다. 정부 내각의 차관에 일본인을 임명하여 한국의 내정을 장악하고자 하는 정미 7조약(1907)의 체결이 대표적이었다. 이를 통해 일본인 차관의 주도아래 정부 기관의 공문서를 일본어로 작성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한국 주권 탈취에 방해가 될 요소들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일제는 이미 1905년 4월 병제 개혁이란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대한제국 황제 직속의 최고 군사 기관인 원수부를 해체하고 아울러 군대 규모를 절반 수준인 약 8천 명으로 감축시켰다. 그리하여 2년이 지난 후 한국군의 규모는 시위 2개 연대, 지방의 주요 도시에 8개 진위대 및 기타 부대만 남게 되었는데, 총 병력이 7천여 명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이처럼 보잘 것 없는 군사력조차 해체하기 위해 일제는 1907년 정미7조약을 체결하면서 비밀리에 군사력 장악을 추진하였다. 정미 7조약 「부수각서」에는 정예한 군대 양성을 명분으로 군대 해산에 대한 조항이 담겨 있었다. 일제는 전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군대일망정 식민화에 걸림돌이 될 만한 요소라고 판단하여 아예 없애버리려고 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07년 8월 1일에 국가 권력의 마지막 지주인 군대가 해산되어 한국은 실질적으로 완전히 일제의 식민지 통치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박승환의 자결을 계기로 대한제국군은 군대 해산에 반대하여 주둔하고 있었던 서소문∼숭례문 일대를 중심으로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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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읽기자료 1

일제의 군대 해산

8월 1일 오전 7시 시위 연대의 대대장급 이상의 장교들에게 긴급 소집령이 내렸다. 이들은 군부대신 이병무가 읽는 해산 조칙을 듣고 하세가와 요시미치 조선주차군사령관으로부터 “조용히 해산하라.”는 위협을 받았다. 부대로 복귀한 각 대대장들은 중대장에게 사병들의 무기를 반납시키고 병사들을 인솔하여 해산식장인 훈련원에 오전 10시까지 도착하라고 전달하였다.
영문도 모른 채 무기를 반납한 장병들이 훈련원에 집결할 무렵 시내 여기저기에서 요란한 총소리가 들려왔다. 훈련원에 마련된 해산식장이 순식간에 술렁거렸으나, 도수훈련(徒手訓鍊)이라는 말에 빈손으로 모인 이들은 어떠한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이미 일본군이 기관총과 총검으로 무장하고 훈련원의 주위를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산식장에 끌려나온 군인들은 원래 계획보다 훨씬 적은 약 600명에 지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이미 눈치를 채고 부대를 이탈하거나, 무장 해제를 거부하고 항거를 일으킨 부대에 합류했던 것이다. 결국 오전 10시 예정이었던 해산식은 오후 2시에 시작하여 한 시간여 만에 끝났다. 해산 군인들은 은사금을 지급받고 서로 작별하며 헤어졌다.
8월 1일 서울 시위대를 해산한 일제는 1일 수원·개성·청주, 4일 대구, 5일 안성, 6일 공주·해주·평양, 7일 안주, 9일 광주·의주, 10일 홍주·원주, 11일 강화·문경, 13일 강릉·진남, 14일 전주, 16일 안동, 17일 울산·강진, 19일 북한산·경주, 23일 강계, 24일 함흥, 9월 2일 진주, 3일 북청을 마지막으로 지방 진위대를 모두 해산시킬 예정이었다.

  • 질문1 일제가 지휘관들을 긴급 소집하여 한 일은 무엇인가요?
  • 질문2 군대 해산식 장소는 어디였나요?
  • 질문3 군대 해산식이 늦어지고 집결한 군인들이 예상보다 적었던 이유를 써봅시다.
  • 질문4 일제가 서울의 시위대에 이어 지방의 진위대까지 해산하고자 한 목적은 무엇인가요?
  • 질문5 군대 해산식을 위해 훈련원에 모인 군인들이 들은 요란한 총소리는 무엇이었을까요?

읽기자료 2

박승환의 자결

시위대 1대대장이었던 박승환은 8월 1일 7시 조선주차군사령관 관저로 집합하라는 긴급 소집 연락을 받자, 병을 핑계로 고참 중대장인 김재흡을 대리 참석시켰다. 돌아온 김재흡의 보고를 받은 박승환은 “군인은 국가를 위하여 경비함이거늘 이제 외국이 침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홀연히 군대를 해산하니 이는 황제의 뜻이 아니요, 일제가 황명(皇命)을 위조함이니 내 죽을지언정 명을 받을 수 없다.”라고 하면서 비분강개하였다. 그는 충군애국의 신념과 반일 국권 회복을 실현하기 위해 죽음을 택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는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에 항거하여 자결 순국한 민영환의 뒤를 잇는 길이기도 하였다. 박승환은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니, 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라는 유서를 남기고, ‘대한제국 만세’를 외친 다음 차고 있던 권총으로 자결, 순국하였다.
박승환의 순국 사실을 전해들은 휘하의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장병들은 일제히 대대장과 함께 죽기를 맹세하고 봉기하여 항일 무장 투쟁을 개시하였다.

  • 질문1 박승환이 자결, 순국을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박승환의 소속 부대와 직위를 써봅시다.
  • 질문3 박승환이 남긴 유서의 내용은 무엇인가요?
  • 질문4 박승환의 자결, 순국은 해산 군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 질문5 내가 그 당시 박승환의 위치에 있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지 말해 봅시다.

읽기자료 3

치열한 시가전의 전개

일제가 주요 지휘관들을 회유하며 주도면밀하게 군대 해산을 강행하였으나, 그것을 알아챈 일부 군인들은 군대 해산에 대해 강력히 저항하였다. 특히,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와 제2연대 제1대대 군인들은 일본군과의 시가전을 전개하였다. 항쟁의 도화선은 1연대 1대대장 참령 박승환의 자결에서 시작되었다. 박승환의 자결 소식을 접한 제2연대 1대대 중대장 오의선 정위 등도 자결하였다.
제2연대 1대대 남상덕 참위가 “박공과 함께 죽을 사람이 누구냐?”라고 외치자, 모든 군인들이 일제히 “내가 죽겠습니다.”라면서 시가전에 합류하였다. 남상덕을 비롯한 장병들은 무기고를 점령하고 무기와 탄약을 지급받아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제1연대 1대대와 제2연대 1대대를 중심으로 일본군의 집요한 공격을 여러 차례 막아내었으나, 무기의 열세와 탄환 부족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일제는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 제51연대 소속 3개 대대 병력을 투입하였고, 대한제국군 병영과 아주 가까이 있던 숭례문 등을 이용하여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공격을 가하였다. 이같이 불리한 상황에서도 대한제국군은 병영을 중심으로 방어진을 펴고 백병전을 벌이면서 무려 4시간 이상 장렬한 전투를 계속하였으나, 마침내 병영을 빼앗기고 말았다. 병영을 빠져나온 해산 군인들은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가전은 격렬해졌다.
치열한 공방전 끝에 일본군은 가지와라[梶原] 대위를 비롯한 4명이 죽고, 대한제국군은 장교 13명을 포함한 57명이 전사하고 10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또는 일본군은 42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한국군은 전사 70여 명, 부상 104명, 포로 600명의 피해를 입었다고 전한다. 또한 민가 수백 호가 불에 탔으며, 해산 군인을 지휘하던 남상덕도 장렬히 전사하였다. 지휘관을 잃고 탄약이 떨어진 해산 군인들은 다음을 기약하며 전국 각지로 흩어져서 대부분 의병 전쟁에 가담하였다.

  • 질문1 일본군과의 시가전을 주도한 부대 이름을 써봅시다.
  • 질문2 일본군에 맞서 항전에 참여하기를 독려하며 시가전을 지휘한 인물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 질문3 대한제국군이 일본군과의 시가전에서 패한 이유를 써봅시다.

읽기자료 4

시민들의 호응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질 때 병원의 간호사들이 쓰러진 해산 군인들을 정성껏 돌보았다. 뿐만 아니라 연동여학교 학생들은 “저 동포들은 나라를 위하여 죽은 자도 있는데, 우리는 비록 여자이나 어찌 의리가 없으리오.”라고 말하면서, 제중원으로 달려가 부상한 해산 군인을 간호하였다. 당시 관습으로는 여자가 남자의 몸을 함부로 만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연동여학교 여학생들은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는 현장에서 부상당한 해산 군인들을 간호하였다. 해산 군인들의 항일 투쟁에 감동한 김명철·기인홍 등은 기금을 모아 싸우다 죽은 해산 군인들의 장례를 치러 주며 이들의 넋을 위로하였다.

  • 질문1 해산 군인과 일본군의 시가전에서 연동여학교 여학생들은 어떤 일을 하였나요?
  • 질문2 김명철, 기인홍 등이 기금을 모아 싸우다 죽은 해산 군인들의 장례를 치러 준 이유를 써봅시다.
  • 질문3 내가 당시 서울에 살던 시민이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지 말해 봅시다.

읽기자료 5

대한 제국군의 항일 투쟁이 후기 의병에 끼친 영향

해산 군인들의 항일 투쟁은 지방 진위대의 해산 때에도 일어났다. 원주 진위대장 홍우형이 항일 봉기에 나선 부하들을 진압하기 위해 일본군을 인솔하고 오자, 특무 장교 민긍호는 부대의 전 병사 250명을 지도하여 일본군과 맞서 싸웠으며 이후 관동 의병의 핵심 세력이 되었다. 강화 진위대는 군대 해산 소식을 듣고 강화의 자강회 회원과 협력하여 일본 경찰 주재소를 습격해 일본 순사를 사살하고 악명 높은 일진회 총무인 정경수를 총살하였다. 이후 강화 진위대는 해서 지방과 경기 지방 의병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군대 해산은 대한 제국의 실질적인 멸망을 뜻하는 비극적인 사건이었으나, 의병 운동이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첫째, 전국 각지의 진위대 해산 군인들이 의병 투쟁에 참가함으로써 의병 활동 지역이 크게 확대되었다.
둘째, 이때까지 유생들이 주로 의병장이 되었으나 하급 병사 출신의 의병장이 등장하여 의병 대열의 성격이 변화하였다.
셋째, 해산 군인의 작전 지휘로 의병 전쟁의 전투 기술이 향상되어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와 같이, 군대 해산을 계기로 해산 군인들이 의병 부대에 참가한 후기 의병에서부터 항일 의병 투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 질문1 원주 진위대의 활동을 써봅시다.
  • 질문2 강화 진위대의 활동을 써봅시다.
  • 질문3 군대 해산 이후 변화된 의병 운동의 모습을 세 가지로 정리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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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사진은 시위대 1연대 1대대장 박승환의 모습이다.

  • 질문1 박승환은 군대 해산에 어떻게 대응하였나요?
  • 질문2 박승환의 행동은 해산 군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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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모둠별로 일제의 군대 해산에 반박하는 격문(성명서)을 작성해 봅시다.
모둠활동 2
모둠별로 해산당한 대한제국 군인의 입장에서 군대해산 당일의 가상 일기를 써봅시다.
모둠활동 3
모둠별로 대한 제국군의 시가전 상황을 재현할 수 있는 시나리오를 작성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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