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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광문회 터
朝鮮光文會址
조선광문회는 1910년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설립한 단체로 신문화(新文化)의 요람이자 나라를
잃은 지식인의 사랑방 구실을 하던 곳이다.
육당은 이곳에서 ‘삼국사기’ ‘동국통감’ 등 많은
고전을 간행하고, ‘붉은 저고리’ ‘아이들 보이’ ‘청춘
(靑春)’ 등 잡지를 발행하였으며, 또한 1919년에는
기미독립선언서를 기초하기도 하였다.
파란 2층 목조의 조선광문회 건물은 1969년
도로 확장으로 철거되었다.
윗글은 서울특별시 삼각동 한화빌딩의 왼쪽 건너편 길모퉁이의 인도 바로 옆에 세워져 있는 표지석의 내용이다. 표지석에 따르면, 이곳은 우리나라 고전을 수집하고 책으로 펴내는 것을 목적으로 1910년 12월 설립된 조선 광문회가 있었던 자리이다. 조선 광문회가 있던 건물에는 항일 비밀 조직인 신민회의 공개적인 청년 단체인 청년 학우회의 기관지 『소년』을 발행하던 신문관도 있었다.
신문관은 최남선이 출판 사업을 통해 민중 계몽과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1908년 세운 인쇄소 겸 출판사였다. 신문관에서는 『대한역사』와 『대한지지』 등의 책과 월간잡지 『소년』(1908년 11월~1911년 5월)을 발행하였다. 특히 1909년 청년 학우회가 설립되자, 『소년』을 청년 학우회의 기관지로 내세우며 정기적으로 『소년』에 「청년학우회보」를 실었다.
신문관이 항일 비밀 단체인 신민회의 공개적인 사업과 연결된 것처럼 신문관 2층에 간판을 내건 조선 광문회 또한 신민회의 출판 사업과 관련이 있었다. 조선 광문회는 회원제로 운영되었는데, 박은식·유근 등을 고문에 추대하고 최남선 자신이 주간을 맡아 사무를 총괄하였다. 주요 사업으로 『동국통감』과 『열하일기』 등의 고전과 옥편 『신자전』을 간행하는 한편, 주시경에게 부탁해 『조선어사전』 편찬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조선 광문회는 신민회 회원들이 공개적으로 잡혀간 ‘105인 사건’ 이후에도 명맥을 유지하면서 3·1운동 직전까지 국내에 남아 있던 학자와 뜻있는 이들의 사랑방 역할을 담당하였다.
근대 국가 건설을 위한 민중 계몽과 열강의 침략에 맞서 국권을 지키려던 신문관과 조선 광문회는 1914년 초반 무렵까지 경성부 남부 상리동 32통 4호에 입주해 있다가 1914년 후반 무렵 경성부 황금정 2정목 21번지로 이전하였다. 신문관과 조선 광문회가 있던 곳은 1969년 4월 도로 확장 공사로 건물이 도로로 편입되어 사라지고, 현재 인도 한쪽에 조선 광문회가 있던 곳임을 안내하는 표지석만 남아 있다.
역사적 배경
현재 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2가 11 [도로명 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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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태 | 없어짐 / 1969년 헐려 자취를 감추고, 현재 SKT 타워 앞 서편 도로로 바뀌었다. |
러․일 전쟁(1904~1905)을 계기로 일제의 주권 침탈이 본격화하면서 서울은 침략과 저항이 대치하는 최전선이 되었다.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미국․영국․러시아 등 열강의 승인 아래 1905년 11월 18일 경운궁 중명전에서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을사늑약으로 일제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을 간섭할 수 있게 함으로써 우리나라를 보호국화하였다.
이에 우리나라에서는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밝히는 동시에 조약 자체를 거부하는 투쟁이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일어났으며, 지방의 유생과 농민들은 의병을 일으켜 일제 침략에 맞섰다. 장지연(張志淵)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제목의 논설을 실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만천하에 알렸으며, 민영환․조병세 등은 자결로써 항거하였다. 고종 황제 또한 각국 국가 원수 앞으로 열강의 공동 보호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는 한편, 1907년 개최된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를 보내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국제 사회에 호소하였다. 그러나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협박해 1907년 7월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게 한 뒤, 한일신협약(정미 7조약)을 강요해 우리나라 내정에 관한 모든 권한 장악하고 대한제국 군대까지 해산하였으며, 나아가 사법권과 경찰권까지 빼앗아 나갔다.
이처럼 일제의 주권 침탈이 본격화하는 가운데, 국권 회복을 목표로 하는 자강 계몽 운동(실력 양성 운동, 애국 계몽 운동)과 무장 투쟁이 계속되었다. 자강 계몽 운동은 독립협회 이래 개화 개혁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개신 유학자 층과 신지식 층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들은 우리가 일제에 주권을 침탈당한 것은 기본적으로 나라의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생각 아래, 정치․교육․산업의 진흥을 통해 실력을 양성하고 부국강병을 달성하여 국권을 회복해 나갈 것을 주장하였다. 특히 1907년 비밀 단체로 조직된 신민회는 국민 사상과 관습의 혁신, 발육과 산업의 개량, 독립 자유의 신문명국 건설 등을 위한 폭넓은 활동을 펼쳤으며, 국외 독립 운동 기지 건설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무장 투쟁은 무장한 군대를 바탕으로 즉각적인 항일 투쟁을 펼쳐 국권을 회복하려는 방식으로, 의병이나 의열 활동 등으로 나타났다. 일제에 의해 우리 군대가 해산당하자 해산된 군인들이 시가전을 벌였으며, 전국적으로 일어난 의병들이 13도 연합 의병 부대를 조직하여 서울 진공 작전을 펼치며 일제 침략에 맞섰다.
그럼에도 1910년 9월 28일, 한일병합조약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체결되자 우리는 나라마저 통째로 빼앗기고, 일제 총독부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다. 나라를 잃은 억울함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고 의병을 일으켜 저항하기도 하였지만,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국내에서 드러내놓고 투쟁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후 무장 투쟁은 본거지를 국내에서 국외에 옮겨 투쟁을 계속해 나갔으며. 국내에서의 항일 운동은 실력 양성 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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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신민회와 청년 학우회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국권 회복을 위해 전국적인 규모의 단체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안창호을 비롯하여 양기탁·전덕기·이동휘·이동녕·이갑·유동열 등이 중심이 되어 1907년 4월 서울에서 신민회(新民會)가 조직되었다.
신민회는 공개된 합법 단체가 아닌 비밀 결사로 조직되었는데, 그 이유는 일제의 방해와 탄압을 가급적 적게 받으면서 국권 회복 운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였으며, 일제의 법령이나 탄압 조치에 의해 해산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또한 일제가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드는 경우에도 독립 운동을 추진할 핵심 단체를 조직해 두려고 비밀리에 조직하였다. 신민회 조직은 위아래로만 연결되게 하여 당사자 2인 외에는 회원을 서로 알지 못하게 하였으며, 옆으로도 누가 회원인지 전혀 모르게 하였다.
신민회의 궁극적 목적은 국권을 회복하여 자유 독립국을 세우고, 공화 정치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실력 양성’을 내세웠으며, 실력 양성을 위해서 국민을 새롭게 할 것을 주장하여 ‘신민(新民: 새로운 국민)’과 ‘자신(自新: 스스로 새로워짐)’을 강조하였다. 이에 ① 신문·잡지 및 서적을 간행하여 국민의 지식을 계발할 것, ② 각 곳에 계몽 운동가들을 보내 국민 정신을 일깨울 것(계몽 강연), ③ 우수한 학교를 건설하여 인재를 키울 것, ④ 각 곳 학교의 교육 방침을 지도할 것, ⑤ 실업가에게 권고하여 영업 방침을 지도할 것, ⑥ 신민회 회원이 자본을 모아 공장을 건설하여 실업계의 모범을 보일 것, ⑦ 국외에 무관 학교를 설립하여 기회가 올 때의 독립 전쟁에 대비할 것, ⑧ 국외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창건할 것 등을 추진하였다.
신민회는 실력 양성 운동과 무장 투쟁을 함께 전개하였는데, 전국 곡곡에 신식 학교를 설립하는 것은 물론 1908년 잡지 『소년』을 창간하고, 1909년 합법적인 외곽단체로서 청년 학우회를 조직하였다. 또 만주 삼원보에 무관 학교인 신흥강습소를 설립하고 독립군 기지를 창건하여 군대까지 양성하였다.
신민회 회원이던 안창호는 1909년 2월, 독립협회에 소속되었던 ‘협성회’와 같은 청년 계몽 조직의 필요성을 제창하였다. 이에 1909년 8월 윤치호(尹致昊)·최남선·차이석, 이승훈 등 신민회 간부 12명과 유길준(兪吉濬), 김윤식(金允植) 등이 중심이 되어 청년 학우회(靑年學友會)가 조직되었다. 청년 학우회는 구국 운동 단체로 조직되었지만, 공개 합법 단체였기 때문에 겉으로는 비정치적 수양 단체임을 내세웠다. 훈련 강령은 ① 무실, ② 역행, ③ 자강, ④ 충실, ⑤ 근면, ⑥ 정제(整齊), ⑦ 용감 등 7덕목으로 하고, 실천 방법으로는 덕육(德育)·체육(體育)·지육(智育)으로 나누어 강연회와 토론회, 잡지와 도서 간행, 도서관 설립, 간편한 박물관 설립, 순회 경기 등을 추진하였다. 청년 학우회가 설립되자 잡지 『소년』은 청년 학우회의 기관지가 되었으며, 정기적으로 『소년』에 「청년학우회보」를 실었다.
청년 학우회는 처음에는 청년들을 조직하고 훈련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국가 건설을 위한 근본이라 생각하여, 신민회와는 별개의 비정치적 순수 청년 운동 단체로서 운영할 것을 계획하였지만, 나중에는 신민회 요원을 양성하는 조직으로 운영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신민회는 교육 구국 운동, 계몽 강연과 학회 운동, 잡지․서적 출판 운동, 민족 산업 진흥 운동, 청년 운동, 무관 학교 설립과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으며, 나라를 빼앗긴 1910년 전후 대표적인 항일 단체 역할을 하였다.
1910년 12월, 조선 총독부는 안중근의 사촌인 안명근을 무관 학교 설립을 위한 독립 운동 자금을 모은다며 체포하였다(안명근 사건). 안명근은 신민회 회원은 아니었으나, 조선 총독부는 신민회 황해도지회 주요 간부들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날조해 안악군을 중심으로 황해도 일대의 애국 지사를 대대적으로 체포하였다(안악 사건). 나아가 초대 총독으로 부임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를 암살하려고 했다는 음모를 꾸며 1911년 전국의 지도적 애국 계몽 운동가 600여 명을 체포하여 온갖 고문을 하고 105명에게는 1912년 실형을 선고하였다(105인 사건). 이 과정에서 국권 회복을 목표로 한 애국 지사들의 지하 단체가 신민회라는 이름으로 조직되어 있었음이 드러났다. 결국 신민회와 청년 학우회는 이 사건을 계기로 해체되었다. 이로써 국내 독립 운동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으나, 많은 이들이 국외로 망명하게 되어 국외에서의 항일 운동이 오히려 활발히 전개되었다.
- 질문1 신민회는 공개적인 합법 단체가 아닌 어떤 조직이었는지 대답해 봅시다.
- 질문2 신민회는 실력 양성과 무장 투쟁 중에서 어떤 노선을 펼쳤는지 말해 봅시다.
- 질문3 청년 학우회의 기관지로 활용한 잡지 이름은 무엇인지 대답해 봅시다.
- 질문4 신민회와 청년 학우회 해체의 계기가 된 사건은 무엇인지 말해 봅시다.
읽기자료 2
신문관과 『소년』
신문관(新文館)은 1908년 최남선이 당시의 서울 남부 상려동(上犁洞)에 설립한 출판사 겸 인쇄소이다. 신문관에서는 여러 종류의 계몽 잡지를 펴냈는데, 1908년 11월 우리나라 최초의 청소년 잡지 『소년』을 발행하고, 1913년 어린이 교육 잡지 『붉은 저고리』, 이광수가 편집을 담당한 『새별』, 월간 소년 잡지 『아이들보이』를 발행하였으며, 1914년에는 본격적인 대중 계몽 잡지인 『청춘』 등을 발간하였다.
잡지 이외에도 『대한역사』, 『대한지지』, 『외국지지』 등의 교과서와 「한양가」를 비롯한 창가, 다양한 교양 서적을 아우르는 등 각 분야에 걸친 폭넓은 일반 서적을 출판하였다. 또한 조선 광문회에서 편찬한 고전인 『동국통감』을 비롯하여 『해동역사』, 『연려실기술』 등 역사와 고문(古文), 고사(古事)에 관한 희귀한 서적을 대량 출판하였다. 『홍길동젼』을 비롯하여 10여 종의 순 국문 소설을 발간함으로써 대중을 대상으로 한 문고판 형식의 새로운 출판 기획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신문관은 과거 극히 소수의 사대부에게만 국한되어 읽혔던 서적을 널리 보급함으로써 서적의 대중화를 꾀하였다. 특히 나라를 빼앗긴 1910년부터 거국적인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난 1919년까지 일제의 가혹한 무단 통치로 언론·출판·결사·집회의 자유가 전혀 보장되지 않은 암흑기에 폭넓은 출판 활동을 펼쳤다. 이를 통하여 잊혀져가는 우리 문화를 발굴․전승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민족 정신을 드높이는 것은 물론 대중 계몽 교육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소년(少年)』은 1908년 11월 최남선이 창간한 월간 계몽 잡지로, 신문관에서 발행하였다. 창간호에 “본지는 어디까지든지 우리 소년에게 강건하고, 견실하고 궁통(窮通:성질이 침착하여 깊이 생각하는 일)한 인물이 되기를 바라는 고로 결코 연약·나태·의지·허위의 마음을 자극할 듯한 문자는 조금도 내지 아니할 터이오.”라고 편집 방침과 그 성격을 밝히고 있다. 이처럼 『소년』은 당시의 청소년들을 계몽하기 위한 새로운 지식의 보급과 계몽, 강건한 청년 정신의 함양에 중점을 두었다.
초기에는 최남선 혼자 집필과 편집, 발행까지 도맡다시피 하였는데, 3권 2호부터는 이광수와 홍명희 등이 참여하여 개인 잡지의 성격에서 벗어났다. 1909년 3월에 발행된 제2권 제3호에 실린 「이런 말삼을 들어 보게」가 국권 회복에 관한 기사로 간주되어 일제에 압수되는 등 여러 차례 압수와 발행 금지 처분을 반복하다가, 1911년 5월 발행된 제4권 제2호(통권 23호)에 실린 박은식의 「왕양명선생실기」로 인해 압수된 후, 일제에 의해 결국 발행 정지를 당하여 종간되었다.
특히 창간호에 실린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최초의 신체시가 될 정도로 『소년』은 새로운 형태의 시를 비롯하여 언문 일치의 글을 크게 보급시키는 데 기여한 근대적 형식을 갖춘 우리나라 최초의 잡지였다.
- 질문1 우리나라 최초의 잡지인 『소년』을 창간한 사람은 누구인지 써봅시다.
- 질문2 잡지 『소년』을 펴낸 출판사(인쇄소)는 어디인지 대답해 봅시다.
- 질문3 신문관과 『소년』은 어떤 성격의 운동을 전개하였는지 말해 봅시다.
읽기자료 3
조선 광문회와 최남선
1910년 9월 28일, 강제로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여 우리나라를 빼앗은 일제는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애국 지사들을 탄압하였다. 식량 약탈은 물론 우리 민족의 풍습과 전통을 파괴하였으며, 우리 문화를 억압하고 소중한 문화재까지 빼돌렸다. 이에 독립을 위한 다양한 활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우리 것을 지키고 민족 전통을 계승하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우리 문화를 지키고자 고전을 발행하고, 이를 널리 보급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최남선·현채·박은식 등은 우리 고전을 보존하고 발행․보급하며, 민족 문화와 사상을 연구하기 위해 1910년 12월 서울 신문관 건물 2층에 조선 광문회(朝鮮光文會)를 설립하였다. 이전부터 최남선은 출판 사업을 통한 민족의 계몽과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신문관을 창설하여 각 분야에 걸친 폭넓은 서적을 출판해 왔는데, 조선 광문회가 설립되자 주간을 맡아 업무를 총괄하였다.
회원제로 운영된 조선 광문회는 이름 있는 문서나 책을 찾아 빠른 시간 내에 구입한 후 신문관에서 인쇄하여 회원에게 실비로 배부하곤 하였다. 조선 광문회는 고전을 포함하여 우리의 역사와 지리는 물론, 예술·풍속·전기·가사·시문·경전·지도․실업 등 우리 민족의 전통과 정신을 담은 모든 분야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에 『동국통감』, 『동사강목』, 『삼국사기』, 『삼국유사』, 『발해고』 등의 역사책을 펴내고, 『택리지』, 『산수경(山水經)』 등의 지리책을 펴냈다. 또한 『동국세시기』, 『해동제국기』, 『훈몽자회』, 『용비어천가』, 『산림경제』, 『지봉유설』, 『성호사설』, 『열하일기』, 『율곡전서』, 『이충무공전서』, 『매월당집』 등등 다양한 책을 발간․보급하였다.
조선 광문회의 책 발간 사업에는 장지연·유근·이인승·김교헌 등이 참여하였는데, 이들은 180여 종의 고전을 간행하려고 계획하였으나 20종 밖에 펴내지 못하였다. 또한 조선 광문회는 유근·이인승 등을 통해 한자사전인 『신자전(新字典)』을 간행하였으며, 주시경·권덕규·이규영 등을 통해 우리나라 최초의 국어사전인 『조선어사전』 편찬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국어사전 편찬 일을 마치지 못하고 1927년 원고를 계명구락부에 넘겨주었고, 그것은 다시 1931년 국어학의 연구와 한글맞춤법의 정리를 목적으로 박승빈이 조직한 조선어학 연구회로 넘어갔다.
이처럼 조선 광문회는 일제의 지배 아래에서도 고전을 비롯한 각종 서적을 발간해 민족 의식을 드높이며 실력 양성 운동을 펼쳤다.
- 질문1 조선 광문회의 설립 목적을 간단히 말해 봅시다.
- 질문2 조선 광문회는 어떤 인쇄소가 있는 건물 2층에 간판을 달았는지 써봅시다.
- 질문3 조선 광문회 주간으로서 업무를 총괄하였던 이는 누구였는지 대답해 봅시다.

시각자료
시각자료 1

사진은 융희 2년(隆熙 二年, 1908년)에 발간된 한 잡지이다.
- 질문1 이 잡지의 이름은 맨 위쪽에 ‘年少’라고 쓰여 있다.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한글로 써봅시다.
- 질문2 위에서 둘째 줄 맨 오른쪽에는 세로로 ‘新文館’이라고 쓰여 있다. 이는 ‘신문관’을 가리키는데, 이 신문관은 어떤 일을 하던 곳인지 말해 봅시다.
시각자료 2

사진은 1915년 조선 광문회가 편찬한 책이다.
- 질문1 책의 제목이 ‘新字典’이라고 쓰여 있다. 우리말로 읽어 봅시다.
- 질문2 저자는 ‘○南善’이다. 호가 ‘육당(六堂)’인 이 사람은 누구인지 대답해 봅시다.
- 질문3 ‘자전(字典)’은 한자사전인 옥편을 말한다. 옥편을 발행하는 것이 당시에는 단순한 출판이 아니라 애국 운동에 해당하였는데, 왜 그런지 이유를 말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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