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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집 의려가 홍주 동쪽으로 가나 誰家義旅赴洪東
그 이가 당년 목 찌른 의사라네 云是當年刎頸公
웃기 좋아하는 세인들 웃지를 마라 可笑時人休竊笑
앉아 말만 한들 무슨 공이 있으리오 座談龍肉有何功
1949년 4월 5일, 홍성(옛 홍주, 1914년 홍주군과 결성군을 합쳐 홍성군으로 개편됨)의 군수와 경찰서장 등 공무원들이 홍성의 대교리 인근 야산에서 식목행사를 갖던 중에 많은 유골이 파묻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홍성 군수를 비롯한 유지들은 긴급회의를 열고, 홍주성 인근에 거주하는 연세 많은 분들을 초청하여 자문을 구하였다. 이 당시에는 1910년 한일병합 전후 홍주관아에서 근무했던 이들도 생존해 있었다. 이분들의 증언과 자료를 종합한 결과, 1906년 홍주성 전투에서 순국한 의병들의 유골이 임시 매장된 곳으로 판명되었다. 곧 흩어져 있는 유골들을 수습하였는데 열다섯 발채(짐을 싣기 위하여 지게에 얹는 소쿠리 모양의 물건) 분량이나 되었고, 상투머리에 꽂는 동곳도 약 3되 정도나 발견되었다고 한다. 수습한 유골은 현재의 자리에 모셔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홍주의병이나 동학 연구자들 중에서 1949년에 발굴된 유골이 홍주의병의 유골이 아니고, 1894년 내포 동학 농민 전쟁 시 홍주성 전투 때 전사한 동학군의 유골이라는 주장도 강력하게 제기되어 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이 일제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자, 일제의 침략에 맞서 국권을 회복하려는 의병 항쟁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는데 이 시기의 의병을 을사의병이라 한다. 전국에서 일어난 을사의병 규모가 가장 크고 또 가장 격렬하게 저항하던 곳이 호서지방의 중심인 홍주였으며, 그 주인공이 홍주의병이었다. 일제와 맞서 싸우다 장렬히 산화해간 이름 모를 의병의 유골이 그들의 의로운 죽음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는 듯하다. ‘홍성 홍주의사총’을 통해 일제에 외교권을 빼앗기는 위기의 순간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 걸고 일어난 의병들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역사적 배경
현재 주소 |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의사로 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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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태 | 원형보존 / 1949년 홍주의병의 유해가 발굴된 장소에 조성한 묘역이 그대로 남아 있다. |
1894년 청·일 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한반도에서 청 세력을 제거하고, 나아가 청의 랴오둥 반도까지 할양 받게 된다. 그러나 1895년 4월 러시아가 주동한 삼국간섭에 굴복하여 청에게 랴오둥 반도를 반환하였으며, 러시아 세력의 강화로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침략 정책이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10년 가까이 만주와 한반도를 두고 러시아와 외교적 교섭을 벌여온 일본은 1904년 2월 4일 마침내 러시아와의 전쟁을 최종적으로 결정하였다. 2월 6일 일본은 러시아에게 국교 단절을 통고하는 한편, 2월 8일 뤼순의 러시아 함대를 공격함으로써 러일전쟁을 도발하였다. 그리고 개전과 동시에 대규모 일본군 병력을 한반도에 진주시키기 시작하였다. 전쟁 초기부터 승세를 잡은 일본군은 1905년 1월 엄청난 사상자를 낸 끝에 뤼순항을 함락시켰으며, 3월에는 펑톈성 전투에서 러시아 육군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5월에는 쓰시마 해역에서 일본해군이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사실상 일본의 승리가 굳어졌다.
전쟁에서 승리가 굳어진 일본은 7월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고,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용인하는 대신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승인받았다. 8월에는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맺음으로써 영국의 지지도 받았다. 일본은 여세를 몰아 러시아와 강화조약 체결에 나섰다. 당시 러시아도 국내 사정으로 종전을 원하고 있었다. 미국의 중재로 두 나라 외교관들이 미국 동부의 항구도시인 포츠머스에서 한 달여 간의 지루한 협상을 거쳐 9월 5일 최종적으로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서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대한제국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승인받았다.
1905년 10월 27일 일본내각은 「대한제국 보호권 확립 실행에 관한 각의 결정 건」을 발표하고, 대한제국과의 보호조약 체결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같은 해 11월 9일 일본 천황의 특사로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에 파견되었다. 11월 10일 일본 천황의 칙서를 가지고 온 이토는 15일에 그동안 접견을 미루어오던 고종을 알현하여 4시간 동안이나 조약 체결을 강요하였다. 결국 고종은 조약안을 외부대신을 통해 제출하면 정부에서 의논한 뒤 재가를 청하게 하겠다는 칙명을 내리고 말았다. 11일 17일 아침 도성 밖에 주둔하던 일본군이 모두 사대문 안으로 들어와 무력시위를 하고, 병력 일부는 경운궁 안팎을 겹겹으로 포위하였다. 오후에 열린 어전회의에서 일본과의 협상을 미루자는 결론이 나자, 이토는 한국주차군(일본군) 사령관과 헌병대장을 동행하여 경운궁 수옥헌 별실에 연금 상태에 있던 대신들을 만나 한 명 한 명에게 조약안에 대한 동의 여부를 선택하라고 강요하였다. 이때 한규설과 탁지부대신 민영기는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고, 외부대신 박제순, 법부대신 이하영, 군부대신 이근택은 의사를 명확히 표시하지 않았으나, 이토에 의해 찬성으로 간주됐으며,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은 적극 찬성하였다. 결국 그날 밤을 넘기고 18일 새벽 1시경 하야시 공사와 박제순 외부대신 간에 조약이 체결되었다.
을사늑약의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 외무성이 앞으로 대한제국의 대외 관계 사무를 지휘·감리하여 대한제국과 각국 간의 기존 조약을 이행할 것이며,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의 정부의 중개 없이는 국제적 성질의 계약을 맺지 못한다는 외교권 제한 규정이다. 두 번째는 일본 정부의 대표자로서 대한제국 황제 밑에 1명의 통감을 두어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며, 대한제국의 개항장 및 기타 필요한 지점에 이사관을 설치하여 통감의 지휘 하에 기존 일본 영사에게 속하던 직권 및 본 협약 실행을 위해 필요한 사무를 관리하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기고 일본의 보호국이 되어 사실상 독립국의 지위를 상실하였다.
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에 실린 장지연의 「시일야방송대곡」이란 사설을 통해 늑약 체결의 전말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1월 30일에는 참찬 이상설이 서울 종로에서 조약 무효를 주장하는 대규모 군중집회를 열었고, 상인들의 철시와 학생들의 동맹휴학이 줄을 이었다. 한편 수십 명의 전·현직 관료와 유생들이 늑약의 무효와 을사5적의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민영환·조병세·홍만식·송병선·이상철 등이 늑약 체결의 부당함과 백성의 궐기를 등을 호소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함으로써 여론이 크게 술렁였다. 전국 각지에서는 의병부대가 결성되어 일본 군경이나 관군과 전투를 전개하고 친일파를 처단하였다. 나철·오기호 등은 을사5적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기도 하였다. 또한 고종 역시 늑약 체결 직후부터 미국, 유럽 등 강대국에 밀사나 특사를 파견하여 조야 체결이 무효임을 알리는 외교활동을 전개했으며, 1907년 6월에 열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과 이준, 이위종을 밀사로 파견하여 조약의 부당함을 알리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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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1906년 홍주의병의 활동
1906년 홍주의병의 활동은 3월의 1차 봉기와 5월의 2차 봉기로 구분된다.
1차 봉기는 1906년 3월에 일어났다. 을미사변 이후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을미의병에 참여했던 홍주 출신 이설은 을사늑약 체결 직후 같은 홍주 출신의 김복한과 함께 상경하여 조약의 폐기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오히려 경무국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른다. 1906년 2월 석방된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와 의병 봉기를 계획하고, 을미의병의 동지였던 안병찬(1854~1929, 홍주 교임), 을미사변 이후 청양에 낙향해 있던 전 이조참판 민종식(1861~1917), 박창로, 채광묵, 이세영 등과 연락하여 의병부대 편성에 착수한다. 이들은 약 보름간의 준비 기간을 가진 뒤 3월 15일경 예산군 광시 장터에서 1차 봉기하였다. 창의대장 민종식 휘하에 모인 의병의 규모는 300~600여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들은 홍주성을 점령하여 활동 거점으로 삼아 세력을 확대해 나가기 위해 광시에서 홍주성으로 진격했지만 점령에 실패하고, 청양군 화성면 합천으로 이동하여 머무르게 된다. 그리고 3월 17일 새벽 공주부의 관군과 일제 헌병의 공격을 받아 안병찬·박창로·윤자홍 등 26명이 체포되고 의병부대는 해산되고야 말았다. 1차 홍주의병은 의병부대 결성 후 해산할 때가지 불과 2~3일에 지나지 않았다.
2차 봉기는 1차 봉기가 있은 2달 뒤인 1906년 5월에 전개되었다. 합천 전투에서 탈출한 의병장 민종식은 전주의 친척집에 지내면서 재기를 모색하였다. 이때 처남인 이용규가 전주, 장수, 무주 등지를 돌아다니며 의병을 모집하고 식량을 준비하며 큰 역할을 하였다. 5월 12일 홍산군 지티동(현 부여군 내산면 지티리)에서 민종식은 400여명의 의병과 함께 재봉기함으로써, 제2차 홍주의병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홍주성 점령을 목표로 삼았다. 5월 13일 홍산을 떠난 의병부대는 남하하여 서천읍을 점령하고, 다음날 북상하여 비인을 점령하고 남포를 공격하였다. 남포읍성은 4일 간의 공격 끝에 점령할 수 있었다. 1천 여 명으로 불어난 민종식의 홍주의병은 5월 19일 홍주성의 포위 공격에 들어갔다. 의병부대의 공격을 당해내지 못한 일본군과 관군은 북문을 통해 달아나고 홍주성 탈환에 성공하였다. 홍주성 점령 소식이 주변에 전해지자 신보균, 신현두, 이식, 안항식, 채광묵 등 지방의 명망 있는 유생들이 의병을 모아 차례로 입성하였다. 홍주성 점령 직후 전성기의 홍주의병은 총포로 무장한 의병 600명, 창의 가진 의병 300명, 유회군(양반 유생들과 구성된 부대) 300명등 모두 1천 200여명에 달하였다. 홍주의병에 참여한 인물들의 출신지를 보면 청양·홍주를 주축으로 예산, 보령, 부여, 남포 등지로, 충청남도 내포 지역의 항일세력이 대거 결집된 양상을 보였다.
- 질문1 2차 홍주의병이 봉기하여 곧바로 홍주성으로 진격하지 않고 서천으로 남하했다가 북상한 이유를 말해 봅시다.
- 질문2 홍주의병의 1차 봉기가 실패했을 때, 민종식의 처남으로서 의병 모집과 군량 조달에 큰 역할을 하여 2차 봉기가 가능하도록 한 인물은?
읽기자료 2
일본군과의 치열한 전투 끝에 패배한 홍주의병
의병장 민종식 등이 이끄는 홍주의병 1200여명은 1906년 5월 19일 홍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킨다. 이후 며칠 간 일제 헌병 및 경찰 그리고 대한제국 지방군인 진위대의 공격을 수차례 막아냈다. 그러자 일제는 한국주차군(대한제국에 주둔한 일본군대) 중 보병 2개 중대와 기병 반개 소대, 헌병 부대 등을 출동시켜 홍주성을 공격케 하였다. 1906년 5월 31일 새벽 2시 30분에 동문인 조양문의 성문을 폭파하면서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기관총의 엄호를 받은 일본군의 공격에 의병진은 급속히 무너졌고, 오전 6시에 일본군의 홍주성 점령 작전이 완료되었다. 일본군은 홍주성을 점령 한 후에도 수색작전을 통해 의병들을 처참하게 살육하면서 성 안을 초토화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일본군의 작전 보고에 따르면 의병 사망자 83명, 체포 154명으로 전과를 기록하고 있다. 전투 당시 의병장 민종식을 비롯한 상당수의 의병들은 성 밖으로 탈출에 성공했으나, 끝까지 의병들을 독려하며 전투 지휘를 했던 참모장 채광묵 부자, 성재평, 전태진 등 300명 이상의 의병들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은 일본군의 홍주성 전투 상황 기록이다.
다음날 31일 오전 2시 30분, 서문 밖에서 불빛이 오르는 것을 신호로 하여 즉시 운동을 개시해서 동문에 접근하여 기병이 폭약을 가지고 성문을 파괴하는 작업을 기다림. 오전 3시 20분, 불빛이 한 차례 섬광을 번쩍이며 폭발하여 산악을 진동시키고 견고한 성문도 유감없이 파괴되었음. 선두에 선 보병은 기관포를 연발하며 돌격을 개시하고 헌병대가 이를 뒤따랐으며 우리 경찰대는 후군이 되어 칼을 뽑아 돌입하려고 하는 순간 성루에서 대포 소총이 발사되어 한꺼번에 마구 뿌리는 것과 같음.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성내로 돌진하여 남문 부근의 고지를 향함. 이때 폭발이 다시 일어나 북문 또는 기병의 손에 의해 파괴되었음. 적이 혼비백산하여 난사하는 한밤의 포성은 우리의 함성과 서로 어우러져 그 처절함은 이루 형언하기 어려움. 오전 4시에 이르러 홍주성은 확실하게 우리가 점령하기에 이름. 그렇지만 적 또한 여기저기에 흩어져 여전히 여러 곳에 잠복해 있으므로 보병은 성벽을 포위하여 그들의 도망을 봉쇄함. 또 한편으로는 그 중 한 부대를 나누어 성 밖의 각 요로를 포위하여 적의 도망에 대비함. 우리 경찰대는 헌병과 협력하여 날이 새는 것을 기다려 성 안팎으로 적에 대한 수색작업을 실시하여 오전 7시에 이르러 종료함. |
- 질문1 일제가 홍주성에 군대를 동원하여 의병들을 철저하고 잔인하게 진압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 질문2 홍주성을 탈환했던 의병진이 일본군의 공격 앞에 쉽게 무너진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일까요?
읽기자료 3
살아남 자들의 항쟁
전투 중 체포된 간부 78명은 서울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다. 그 가운데 69명은 석방되고 남규진, 유준근, 이식, 신현두, 이상구, 문석환, 신보균, 최상집, 안항식 9명은 일본 쓰시마 섬으로 끌려갔다. 중군장 이세영은 6월에 체포된 뒤 서울로 압송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황해도 황주의 철도로 유배되었다.
홍주성 전투에서 탈출하여 살아남은 의병들은 해미나 예산, 공주, 청양 등지로 흩어져 소규모 의병부대를 만들어 1910년까지 항일전을 지속하였다. 한편 1906년 10월경 예산군 한곡에 있던 수당 이남규(1855~1907)의 집에 민종식의 처남이었던 이용규를 비롯하여 곽한일 등이 집결하여 재봉기 계획을 추진하였다. 홍주의병의 막후 지원자였던 이남규는 안동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1900년 비서원승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뒤 향리에 퇴거해 있던 고위 관직 출신의 인물이었다. 그는 홍주성 전투 패배 이후에도 그 중심 인물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재기 항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진회의 밀고를 받고 출동한 일제 헌병과 일진회원에게 이남규·이충구 부자를 비롯해 핵심인물들이 체포되어 봉기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으며 공주로 잡혀간 이남규 부자는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그 뒤 홍주를 중심으로 충청도 일대에 항일세력들이 조직적인 활동을 벌이자, 그 배후로 이남규를 의심한 일제는 1907년 기마병 100명으로 하여금 그의 집을 급습하여 체포하였다. 서울로 압송 도중 일본군이 이남규를 회유하여 귀순을 강요했으나 이를 거부하자, 온양 송악의 평촌에 이르러 이남규와 그를 따르던 장자 이충구, 노복 김응길을 살해하였다.
의병장 민종식도 결국 1906년 11월 20일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고종 황제의 종친이었기 때문에 다음날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진도에 유배되었고, 12월에 융희황제 즉위 기념으로 특별사면 되었다. 민종식은 여흥 민씨로 여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민영상이 명성황후의 조카뻘로 충청도 관찰사를 비롯하여 이조·호조·병조 판서를 역임하며 고종의 신임을 받은 관료였다. 민종식 역시 20세의 나이로 문과 급제를 하고 이조 참판을 역임하는 등 탄탄대로의 벼슬길이 보장된 지위에 있었다. 그러나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충청도 정산(현 청양군 정산면)으로 낙향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편안한 삶을 거부하고 항일 의병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의병장으로 추대된 민종식은 집안의 재산을 팔아 2천원을 마련하여 군수품으로 제공했던 인물이다.
안병찬과 박창로는 칠갑산 방면으로 들어가 의병 항쟁을 지속하다가 1907년 12월에 일제 헌병에 체포되었다. 홍주의병 유격장이었던 이만식은 당진, 해미, 서산, 부여를 비롯해 경기도 용인까지 진출하여 활동하였다. 맹달섭은 1907년 1월 70명의 의병을 이끌고 부여군에서 일본인 3명을 처단하고 일제 군경의 추격을 피해 경기도 죽산, 광주, 용인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차상길 등 15명은 6월 6일 당진 소난지도 들어가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이관도는 홍주와 예산, 청양 일대의 금북정맥 산줄기를 타고 다니며 1909년까지 친일 부호 처단 및 군자금 획득, 일본군 습격 등의 활동을 하였다.
- 질문1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란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사례가 될 수 있는 인물들을 홍주의병에서 두 명 찾아보고, 홍주의병에서 그들의 역할을 말해 봅시다.
- 질문2 항일 의병 전쟁을 을미의병・을사의병・정미의병으로 구분할 때, 1906년의 홍주의병은 무슨 의병에서 시작하여 무슨 의병까지 이어진 걸까요?

시각자료
시각자료 1

왼쪽은 광복전 조양문, 오른쪽은 현재의 조양문
- 질문1 일본군은 홍주성 전투 당시 성에 침투하기 위해 조양문의 성문을 가장 먼저 폭파하였습니다. 앞의 ‘4. 지도’에서 그 위치를 찾아 봅시다.
- 질문2 현재 홍성에는 원래의 홍주성 모습이 많이 훼손된 채, 두 방향의 성벽이 남아 있습니다. 인터넷 지도의 항공사진을 찾아서 알아봅시다.
- 질문3 1906년의 홍주성 전투 때는 의병이 성 안에서 방어하고, 일본군이 성 밖에서 공격하였습니다. 1894년에도 홍주성 전투가 있었는데, 그 때는 어떤 군대가 성 안에서 방어했고, 어떤 군대가 성 밖에서 공격했을까요?
시각자료 2

홍주의병 유폐 계획 문서
아래 문서는 이토 통감이 홍주의병을 안정적이고 장기적으로 가두어 둘 수 있도록 일본 내각에 제출해 줄 것을 육군대신 데라우치에게 요청한 전보입니다. 을사늑약 이후 점차 확대되어 가던 항일투쟁을 탄압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던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전국 의병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또 가장 격렬하게 저항하던 홍주의병에 대해 강력한 탄압 방침을 결정합니다. 체포된 중심인물들에 대해서는 여타 의병의 경우와는 달리 대한제국 정부에 처리를 맡기지 않고, 자국의 ‘이곳’에 유폐(幽閉, 깊숙이 가둠)시킴으로써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직접 통제하려 했습니다.
- 질문1 일제가 홍주의병을 유폐시킨 ‘이곳’은 어디일까요?

모둠활동
1906년 5월 19일 홍주의병이 홍주성을 점령한 직후 의병장 민종식은 광무황제에게 올리는 글을 썼습니다. 그는 의병을 모아 일어난 이유를 밝히면서 그 취지를 받아들여 줄 것으로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상주문이 광무황제에게 전달되기도 전에 홍주성은 일본군에게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1906년 5월 19일 홍주의병이 홍주성을 점령한 직후 의병장 민종식은 광무황제에게 올리는 글을 썼습니다. 그는 의병을 모아 일어난 이유를 밝히면서 그 취지를 받아들여 줄 것으로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상주문이 광무황제에게 전달되기도 전에 홍주성은 일본군에게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각 모둠은 전달되지 못한 의병장 민종식의 황제에게 올리는 상주문에는 다음의 내용이 담기도록 작성합시다.
1. 을사늑약과 관련한 당시 일제의 침략 상황
2. 의병을 일으킨 목적
3. 황제폐하께 바라는 요구 사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