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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선 순국지(정통 유학자, 일제 침략에 맞서 죽음을 선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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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야에 있는 송병선은 목숨을 끊으려 하면서 삼가 대궐을 향하여 피눈물을 흘리며 상소를 올려 성상께 영결을 고합니다. 삼가 아룁니다. 신은 역적을 처단하고 조약을 폐지하는 일로 상소문과 차자문을 올리고 삼가 처분을 기다린 지 이미 며칠이 되었는데, 그간 여러 번 대면을 청하였으나, 성상의 체후가 편치 않다고 하기에 대궐문에서 명령을 기다렸습니다. ···

아! 여러 역적들을 처단하지 않고 강제로 체결된 조약을 폐기하지 않는다면 500년 종묘사직은 지금 멸망할 것이고 삼천리 강토는 오늘 없어질 것이며, 수백만 백성들은 지금 멸망할 것이고 5,000년을 내려오던 도맥(道脈)이 오늘 끊어질 것이니, 신이 오늘날 산다 한들 무엇 하겠습니까? 지하로 돌아가 우리 열성조(列聖朝)와 선정신(先正臣)들을 모시고 《춘추(春秋)》의 큰 의리를 저버리지 않으려 합니다.
- 고종실록, 43년 2월 3일 -


1906년 1월 24일, 충청남도 회덕(현재 대전광역시 동구 성남동)에 있던 자택에서 연재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은 임금에게 올릴 상소를 작성한 후 독약을 마시고 향년 71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순국이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행위다. 유교적 전통에서 임금이나 나라를 위하여 신하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충신의 기본 요건으로 가장 아름답고 선한 행동으로 여겨져 왔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이 국권을 상실하고 일제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자 많은 전·현직 관리와 유생들이 망국의 책임을 느끼거나 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을 선택하였다. 특히 민씨 집권 세력 중 하나로 높은 벼슬을 두루 거치었던 민영환의 순국과 재야 선비의 영수(領袖:우두머리) 중의 한명이었던 송병선의 순국은, 그들의 사회적 지위에 걸맞게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당대의 지식인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제 침략에 맞서 싸우지 않고 자결이라는 소극적인 방법, 그러나 매우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유를 연재 손병선의 삶을 통해 알아보자.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대전광역시 동구 계족로 342-1
현재 상태 멸실 / 1994년 신협 북대전지점 건물이 들어섰으며, 신협에서 이곳이 송병선 집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과 안내판을 입구 옆에 세워 놓았다.

일제는 한국을 식민지로 삼는 데 마지막 걸림돌인 러시아를 제거하기 위해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동시에 서울로 쳐들어와 주둔시킨 군대를 동원하여 궁성을 장악하고 한국의 주권을 강탈해 나갔다. 1905년 5월 일본 해군이 쓰시마 해전에서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괴멸시킴으로서 일본의 승리가 확실해 졌다. 또한 일제는 같은 해 7월에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 8월에는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하여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한반도 지배의 승인을 받았으며, 9월에는 러시아와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체결하여 전쟁 승리와 함께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러시아로부터 확인받았다. 열강으로부터 승인을 얻은 일제는 1905년 11월 무력을 동원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을 일제의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고 늑약을 무효화시키려는 다양한 활동이 나타났다. 각계각층에서 조약 파기를 요구하는 상소가 빗발쳤다. 전·현직 관리나 유림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조약 체결의 부당함을 알리고 조선 민중들에게 항일 의식을 불어넣었다. 대한매일신보 등의 신문 등은 늑약의 무효와 늑약 체결에 찬성한 5명의 대한제국 대신들, 즉 을사오적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였다. 고종을 비롯한 집권층은 늑약의 무효와 대한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밀사를 강대국에 파견했다, 각지에서 무력 투쟁론자들은 항일 의병을 일으켜 무장 투쟁을 전개해 나갔으며 실력양성론자들은 국권회복에 필요한 실력을 양성하기 위해 계몽운동에 주력하기도 하였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송병선은 즉각 조약의 파기와 5적의 처단을 제기하는 상소를 두 차례 올렸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답이 없자 선생은 70세의 노구를 이끌고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한 자리에서 현재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대책으로 10가지 시책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고종을 움직이는데 실패하여 서울에 계속 머물며 조약 반대운동을 전개하려 하자 일본 헌병대는 그를 유인 및 납치하여 대전의 자택으로 강제 호송하였다. 『연재집』 「행장」에 의하면, 송병선 선생은 대전 성남동 고택에서 태어나 1905년 이곳에서 순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현 고택 터에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어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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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송병선, 대학자 송시열의 후손으로 위정척사 사상을 가지다.

송병선은 1836년(현종 2년)에 은진 송씨의 가문에서 송시열의 9대손으로 태어났다. 송시열은 자타가 공인하는 조선후기 대학자로 조선의 주자 성리학을 확립시켰으며, 또한 집권세력인 노론의 영수로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가로 활약한 인물이었다. 존화양이와 의리정신으로 대변되는 송시열의 사상은 여러 세대를 거치며 집안 대대로 전하여 오는 학문으로 송병선에게 계승되었다. 송병선은 어린 나이에 부친을 잃고 9세부터 예학과 성리학에 뛰어났던 백부 송달수에게 『소학』을 배웠고,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당시 좌의정으로 정부의 개화정책을 반대했던 숙부 송근수 밑에서 학문을 익혔다. 또한 이상수·박성양·정해필 등 호서지역의 산림(山林: 학식과 덕망을 갖추었으나 벼슬을 하지 않고 향촌에서 은거생활을 해 유학자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인물)들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닦아나갔고, 전국 각지의 명승지를 돌며 견문을 넓히는 것을 학문수련의 한 방법으로 삼았다.
19세기말, 산업화를 이룬 제국주의 서구 열강의 동양 진출이라는 세계사적 파도는 개항에 반대하던 조선을 비켜가지 않았다. 서구화와 근대화의 티켓을 먼저 거머쥔 일본의 압력에 조선은 문호를 개방해야 하였다. 곧 이은 개항과 개화 정책으로 전통적 질서가 무너지던 이때는 조선이 근대 사회로 넘어가던 격동의 시대였다.
송병선은 선대로부터 이어져 온 송시열의 학문을 계승한 유학자로서, 그가 성리학 본연의 학문자세와 외세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진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며, 그는 평생을 주자 성리학적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송병선은 외세의 침략 속에서 이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위정척사 사상을 정립하여 널리 전파함으로써 외세에 대한 사상적 무장에 적극 힘썼다. 위정의 대상은 성리학적 질서이며, 척사의 대상은 나라의 위기를 초래하는 일체의 외부세력이며 심지어 나라 안에 개혁을 주장하며 개화책을 주장하는 사람까지 포함되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송병선은 “강화도 조약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며, 결국에는 조선의 망국으로 이어지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라고 지적하면서, 위정척사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 질문1 송병선과 같은 유학자 집단에서 폭넓게 공유한 위기극복책은 보수적인 가치관인 위정척사론입니다. 위정척사론의 내용을 위 글에서 찾아 써 봅시다.
  • 질문2 당시 역사의 흐름에서 위정척사론은 어떤 의의와 한계를 지녔는지 조사하여 정리해 봅시다.

읽기자료 2

각지를 다니며 강연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제자를 양성하다.

송병선은 동지를 모으고 사상적 무장을 확대하기 위해 제자를 양성하는데 힘을 쏟았다. 유림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가 강회를 개최하고 성리학적 유교질서를 전파하고, 위정척사운동을 위한 정신적 무장을 강조하였다. 1867년 옥천의 이지당 강회를 시작으로 기국정(1889), 영산의 풍천당(1893), 임피의 낙영당(1901), 고암서당(1905), 영동의 빙옥정, 무주의 서벽정, 거창 병산서재, 경상도 지례의 세심대 등지에서 선비들을 모아 강회를 개최하였다. 송병선은 강회활동을 통해 충청지역은 물론 전라, 경상도 등지에서 유림들과의 접촉을 통해 위정척사운동의 여론을 확산시키고 문인들을 규합하는 계기로 삼았다. 특히 전라북도 임피 낙영당에서의 강회 때에는 화서파의 거두이자 태인 의병을 이끌었던 최익현이 참석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대개 유학자는 거주지 또는 출생지를 중심으로 문인들이 형성되었지만, 송병선의 경우 전국에 걸쳐 문인과 제자들이 분포하는 현상을 보였다.
송병선은 1877년부터 1903년까지 총 23차례에 걸쳐 관직에 천거되었지만 한 번도 이에 응하지 않았다. ‘나아가지 않고 도(道)’를 지키는 것이 성리학적 질서가 무너지는 조선 말기 사회에서 유학자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로지 강회와 저술로 위정척사의 학문에 매진하고 상소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나타내는 것을 나라가 망할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행동으로 삼았다. 송병선의 대표적인 상소로는 1881년 황준헌의 『조선책략』이 유포되자 개화정책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위정척사정책을 펼칠 것을 촉구한 「신사봉사」8개조가 있다. 여기서 그는 성리학의 정진, 언로의 개방, 국가 정통성 확립, 재정절약, 인사정책 개혁, 조세 경감, 일본과 서학의 배척 등 당시 현안 문제에 대책방안을 제시하였다. 송병선이 20여 차례 이상의 상소를 통해 추구하였던 것은 대대적인 국정 운영의 정비를 통한 내수 강화와 외세로부터의 주권보호와 독립이었다.

  • 질문1 1881년 송병선의 「신사봉사」는 대표적인 척사상소입니다. 같은 해 곽기락은 다음과 같은 상소로 척사론자들을 비판하였습니다. 이를 읽고 송병선의 시각에서 반박문을 써 봅시다.

    일본이 우리와 서로 내왕한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되지만, 최근에 들으니 부강해져서 옛날과는 같지 않고 각국에 제멋대로 돌아다녀 막을 수 없다고 합니다. 가령 우리나라와 처음부터 내왕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제 좋은 관계를 맺자고 와서 청한다면 의리상 그만두자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이전에 300년 간이나 좋은 관계를 가졌던 나라가 세계의 통상 규례를 시행하자고 요청하는 것을 무슨 말로 거절할 것이며 거절한다고 해서 오지 않겠습니까?
    불화를 조성하고 말썽을 일으켜 강한 적을 건드린다면 오늘 우리나라의 형세와 군사의 힘으로 능히 관문을 닫아걸고 조약을 폐기하여 우리 강토에 한 발자국도 들여놓지 못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지탱하지 못하여 마지못해 따르는 것보다는 차라리 순순히 나가서 관계를 견고히 맺고 신의를 보임으로써 옛날의 좋은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런 다음 적당한 대책을 세워 스스로 강해지기를 생각할 뿐입니다. ··· 그리고 기계에 관한 기술과 농림에 대한 책과 같은 것이 만약 이익이 될 수 있다면 또한 반드시 선택하여 행하고 그들의 것이라 해서 좋은 법까지 함께 배척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 질문2 곽기락처럼 “유교의 의리는 지켜야 하지만, 서양 문물이라도 이익이 될 수 있는 것은 받아들이자”고 주장한 조선의 온건 개화론자들의 사상을 뭐라고 부르나요? 다음 중 고르시오.

    ① 중체서용론
    ② 동도서기론
    ③ 구본신참론
    ④ 문명개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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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심의(深衣)을 입고 복건 쓴 송병선의 초상화

다음은 연재 송병선의 사진이다.

2015년 3월,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그동안 송병선의 종손이 보관하고 있던 송병선과 그의 동생 송병순(1912년 순국)의 초상화를 2점을 대전시립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심의를 입고 복건을 쓴 모습의 송병선의 모습은 유학자이자 위정척사론자로서 일제의 침략에 저항한 굳건한 의지를 담고 있는 듯하다. 심의는 유학자들이 입던 겉옷으로 백세포(白細布)로 만들어 깃·소맷부리 등 옷의 가장자리에 검은 비단으로 선을 두른 옷을 말한다.

  • 질문1 일제 치하에서 치욕스럽게 살지 않기 위해 자결한 송병선의 행동을 충분히 이해하는 측면과 아쉽게 여기는 두 측면에서 말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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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모둠별로 송병선 선생이 자결을 하려다가 마음을 바꿔 집안사람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가정한 시나리오를 작성하여 역할극으로 꾸며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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