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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옛 경운궁) 중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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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를 알현하는 데에는 다소의 의식이 필요하다. 알현은 대개 황제는 참석하지 않으나 황제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연회 뒤에 거행된다. 외교관이나 외국의 다른 권력자들이 알현할 때에는 대개 군대 의례를 행하는 군인들이 궁 앞에 도열해 있고, 러시아인 기술자가 만든 쇠와 벽돌로된 조잡한 건축물인 알현관 앞에는 대신 민종묵이라는 사람이 손님을 맞기 위해 자리하고 있다. 몇몇 나이 든 대신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어를 할 줄 아는데, 알현관의 큰 뜰에서 차를 마시며 알현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대신들과 흥미로운 대화가 펼쳐지게 된다. 그리고 나서 알현관의 응접실로 들어서면 예기치 않았던 매우 기이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가구들이나 장식이 동양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바닥에는 붉은 카펫이 깔려 있고 주위에는 비엔나풍의 의자가 12개 정도 놓여 있다.”

 

이탈리아 외교관 까를로 로제티(Carlo Rossetti)가 중명전을 묘사 한 글이다. 서울 정동 정동극장 옆 골목, 미국 대사관 공관과 이웃한 중명전은 지금은 나홀로 건물로 되어 있지만 원래 경운궁(현 덕수궁)에 속해 있던 당당한 궁궐 건축물의 하나이다. 이 전각은 우리 역사의 아픔만큼이나 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역사 현장이기도 하다.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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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태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뒤 태프트․가쓰라 각서(1905.7.29), 제 2차 영․일동맹(8.12), 포츠머스 강화조약(9.5)을 통해 미국·영국·러시아로부터 한국에 대한‘지도 보호’의 권리를 승인받고, 한국을 보호국화하는 절차에 들어가 추밀원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한국에 특사로 파견하였다. 1905년 11월 9일 정동 손탁호텔에 여장을 푼 이토는 이튿날 경운궁에 입궐하여 고종황제를 알현하고 일본천왕의 친서를 전달하였다. 11월 15일 재차 황제를 알현한 자리에서 ‘보호조약’ 초안을 내놓고 인허할 것을 강요했으나, 황제는 국가의 중대사인 만큼 대신들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11월 17일 오후 3시 일본군이 궁궐 안팎을 에워싸고 무력시위를 벌이는 가운데 중명전에서 열린 어전회의에서도 장시간 토론 끝에 조약에 반대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자, 이토는 회의장에 들어가 밤늦게 다시 회의를 소집토록 강요하였다. 조약에 반대하는 참정대신 한규설을 밖으로 끌어낸 뒤, 이완용·이근택·이지용·박제순·권중현 등 이른바 ‘을사오적’의 찬성으로 ‘보호조약’이 통과되었음을 일방적으로 선포케 하였다.
이로써 한국정부의 외교권이 일본에 박탈하였고 영국·미국·청국·독일·벨기에 등의 공사관은 영사관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이듬해 1906년 2월에 서울에 한국통감부가 설치되고, 늑약 체결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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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읽기자료 1

일제는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확신하자 1905년 5월 각의를 통해 대한제국의 ‘보호국화’를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한국의 보호국화를 미국으로부터 묵인 받았고,  8월에는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하여 영국의 동의를 얻어냈다. 9월 포츠머스 조약 체결로 러․일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한반도 지배권을 승인받았다. 
그해 11월 이토 히로부미가 ‘보호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특파대사로 한국에 파견되었다. 11월 9일에 서울에 도착한 이토는 다음날 10일, 중명전에서 고종 황제를 알현하고 일본 천황의 국서를 전달했다. 15일에 다시 하야시 공사와 함께 조약 초안을 고종 황제에게 제시하며 조약 체결을 강요하는 한편 각료들을 개별적으로 불러 이를 종용했다. 17일 어전회의가 열리자 하세가와 한국주차군 사령관이 이끄는 완전무장한 일본군이 경운궁을 포위했고, 서울 일대에도 무장한 군대가 배치되었다. 중명전 내 회담장소에도 착검한 헌병 경찰들이 들어가 황제와 대신들을 위협했다. 이토는 대한제국의 학부대신 이완용 ․ 내부대신 이지용 ․ 외부대신 박제순 ․ 군부대신 이근택 ․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 ‘을사오적’을 매수하여 조약 조인에 찬성토록하고, 조약 체결을 반대하는 국민을 총칼로 제압하면서 ‘보호조약안’을 승인하도록 강요했다. 
마침내 11월 17일 “일본국 정부가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하는 대신,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는 이른바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이 조인되었다. 
을사늑약이 조인됨으로써 보호라는 미명하에 한국의 외교권은 박탈되었고, 이른바 통감정치가 실시되었다. 서울에는 일본 정부를 대신할 통감을 두고, 개항지 또는 일본 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방에 통감의 지휘를 받는 이사관을 임명하였다. 초대 통감으로는 을사늑약의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가 부임하였다. 통감부는 조선의 외교 업무를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설치하였지만 사실상 모든 내정을 지휘 또는 간섭했기 때문에 뒷날 총독부와 다름없었다. 
한국정부 문헌에서 “한일협상조약”으로 불린 이 조약은 일본의 무력시위와 위협에 의해 강요된 ‘협약(脅約)’ 이자 ‘늑약(勒約)’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체결과정에도 국제법으로 인정받을 만한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우선 외교권 이양과 같은 중대 사안을 다루는 조약인데도 한국 측의 반발을 예상해 약식협약 형태를 띠었고, 협정문만 있을 뿐 전권위원 위임장이나 협정문에 대한 황제 비준서가 발부되지 않은 것도 자격 미달이라고 할 수 있다. 
외교적 사안은 국가 원수가 대표(전권위원)의 임명장을 발부하게 되어 있으나 이 시기 한국의 보호국화를 추진한 조약들은 전권대사의 위임장과 황제의 조약 비준서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이 조약들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강제 조인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외부대신 명의로 조인된 이 조약문은 원문에 보이는 바와 같이 협정 명칭조차 적혀 있지 않다. 대한제국 황제가 스스로 전권위원 위임장과 비준서가 없다고 밝혔고, 이후 외국에 협약의 무효성을 알리려고 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운명은 이미 기울고 있었다.  

  • 질문1 일제가 대한제국을 ‘보호국화’하기 위하여 사전에 벌인 외교 활동 내용을 써봅시다.
  • 질문2 일제가 대한제국을 ‘보호국화’하기 위하여 강제로 추진한 일은 무엇인가요?
  • 질문3 을사늑약의 주요 내용은 무엇인가요?
  • 질문4 을사늑약에 찬성한 ‘을사오적’의 당시 직위와 이름을 써봅시다.
  • 질문5 을사늑약이 국제법상 무효인 이유를 써 봅시다.

읽기자료 2

을사늑약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강제로 조인되자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조약을 파기할 것을 주장하는 민족적 저항이 이어졌다.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문』등 각 신문은 을사늑약의 부당성에 대한 기사를 연일 다루었고, 기울어 가는 대한제국의 운명 앞에서 민영환 ․ 조병세 ․ 송병선 등은 자결로 항거하였다. 전국 유생대표들은 서울에 유약소를 세우고 조약철회를 요구하는 상소운동을 벌였다. 종로거리의 모든 상점들은 문을 닫았으며 학생들도 자진 휴교하였다.
또 을미의병 이후  해산했던 의병들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다시 전국적으로 일어나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였다. 
대한제국은 을사늑약으로 실질적인 주권을 잃게 되었다. 대한제국은 이미 1902년 초부터 1907년 6월 1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 2차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고종은 2월 16일 외부대신 박제순을 통해 만국평화회의 총재에게 공문을 발송하여 회의 참가를 요청하였다. 또한 고종은 프랑스, 벨기에 주재공사 민영찬에게 이 문제를 협의하라는 훈령을 내렸고, 러․일전쟁 이후 불어학교 교사로 활동하던 마르텔을 비밀리에 베이징에 파견하여 베이징주재 러시아 공사를 만나 헤이그 회의에 대한제국 대표를 초청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네덜란드 정부로부터는 1906년 2월 1일자와 4월 3일자로 초청장을 받았다. 대한제국은 12번째 초청국이었다. 
그러나 1906년 10월 9일, 주일 러시아공사 바흐메찌예프는 일본 외상 하야시 타다스를 만나 헤이그평화회의에 한국의 참가가 불가능하다고 통고하였다. 이는 1년전 1905년 10월 9일, 러시아 정부가 주러 한국공사 이범진에게 헤이그 평화회의에 한국을 초청한다고 통고한 결정을 완전히 뒤집는 조치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고종은 1907년 4월 이준을 중명전으로 불러 헤이그 특사 밀지를 전달하였다. 이로써 이준․이상설․이위종 세 명의 특사는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호소하기 위해 헤이그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로 떠났다. 
1907년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한 특사들은 6월 27일자로 서명된 각국 대표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지니고 활동을 개시했다. 그러나 일본의 집요한 방해공작과 열강의 냉담한 반응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들은 중재재판을 취급하는 만국평화회의 제1분과위원회를 찾아가 한국문제를 다루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일본을 제외한 40여 참가국에게 탄원서를 배포하고, 평화회의 의장을 방문하였으나 면담이 거절되었다. 이어 영국․미국․프랑스․독일의 대표위원을 만나 지원을 호소하였으나 이 또한 거절당했다. 
오히려 특사들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은 헐버트가 사전에 교섭해 둔 영국 언론인 스테드, 평화운동가 스테너 등이었다. 특히 스테드는 『만국평화회의보』를 통해 한국의 불행한 처지를 알리고 한국 정부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결국 특사의 희망과는 달리 만국평화회의는 한국을 외면했다. 이준 특사는 현지에서 순국하고 이상설․이위종 두 특사는 망명했다. 그들은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 질문1 일본의 강압에 의해 강제로 조인된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민족적 저항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 질문2 일본의 강압에 의해 강제로 조인된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민족적 저항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 질문3 헤이그 특사로 파견된 3인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 질문4 고종이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3

『만국평화회의보』 1907년 7월 5일자 1면에는 세 특사의 사진과 이위종의 인터뷰기사가 실렸다. 
 이위종은 1905년 11월 17일 체결된 을사늑약이 적절한 대한제국의 권한에 의해 동의되지 않았음으로 조약이 합법적으로 성립되지 않았다고 강변하였다. 대한제국의 국력이 약하기 때문에 희생당하였으며 일본이 강해서 모든 약정을 무시당했다고 말하고 있다. 

“The Skeleton of the Party(축제의 해골)”

기  자 :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왜 당신의 불길한 존재로 평온한 집회를 방해하고 있습니까?
이위종 : 저는 헤이그의 제단에서 법과 정의 그리고 평화의 신을 찾을 수 있는 지 먼 나라에서 확인하러 왔습니다. 
… 중략 …
기  자 : 그렇지 이것을 봅시다. 1905년 11월 17일 조약을 통해...
이위종 : (중간에 끼어들어) 말씀해주십시오. 이 대표단들이 조약들을 체결할 수 있습니까?
기  자 : 이러한 조약을 최종적으로 비준할 수 있는 주권자의 승인을 받아야만 합니다. 
이위종 : 그렇다면, 소위 “1905년 조약”이라고 불리는 것을 합법적인 조약이 아닙니다. 그것은 대한제국 황제의 지시를 받지 않은 한국 외부대신에 의해 만들어진 협정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리고 서명된 문서는 절대로 승인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무효이고 영향력이 없습니다. 대한제국 입장에서 말하자면, 우리는 그 조약이 발생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불법적이고 가치 없는 문서로 인해 대한제국이 회의로부터 제외당하고 있습니다. 
기  자 : 그럼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위종 : 헤이그에 있는 법과 정의의 신이 있는 제단에 우리의 호소를 올리고 그 조약이 국제법상으로 유효한 것인지의 여부를 묻고 싶습니다. 당신들의 최고 중재재판소가 어디 있습니까? 어디서 우리의 불만을 들어주고 이러한 불법행위가 판정받을 수 있겠습니까?
… 중략 …
기  자 : 그렇지만 (변명을 말했다. 이 왕자는 성급하게 계속 이어 갔다.)
이위종 : 그만하십시오. 저에게 정의에 관해 말하지 마십시오.……대한제국은 모든 언덕들이 자연적인 요새지를 이룬 산지의 나라입니다. 2천만의 대한제국 국민들은 극동의 스위스처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평화로운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7천명의 군사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제가 여기 문 앞에 앉아있는 사실은 자신 칼을 믿는 대신 법, 정의 그리고 평화의 신에게 희망을 갖고 있는 모든 국가들이 기다리는 운명의 암호인 것입니다. 
정의를 기다리며 리데르자알의 문 앞에 여전히 앉아 있는 왕자(이위종)를 떠나 걸어갔다. 그리고 나는 올라프왕의 서사시의 메아리를 들은 것 같았다. 

힘이 세계를 지배한다; / 세계를 지배해 왔다, /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온순한 것은 나약한 것이다; / 힘은 승리하는 것이다.

  • 질문1 고종이 파견한 헤이그 특사가 헤이그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서 달성하고자 한 목표는 무엇인가요?
  • 질문2 헤이그 특사들이 헤이그 회의에서 실망한 점은 무엇인가요?
  • 질문3 이위종은 대한제국이 왜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고 생각했나요?
  • 질문4 이위종과 인터뷰한 스테드 기자의 소속 신문사를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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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1905년 을사늑약 조인 후 기념사진병합기념사친첩

  • 질문1 사진 속의 사람들은 이름을 아는대로 써 봅시다.
  • 질문2 일본이 을사늑약 체결 후 기념 사진을 찍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각자료 2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의 세 특사 임명장

  • 질문1 세명의 헤이그 특사가 고종으로부터 받은 특사 임명장이 임무 수행에 어떠한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을까요?
  • 질문2 실제로 임명장은 당시에 임무 수행에 어떠한 도움이 됐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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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일제강점기 고종황제의 역할에 대하여 토론해 봅시다

모둠활동 2

대한제국 국민이라면 을사늑약에 어떻게 저항했을까? 그 이유를 함께 써 봅시다.

모둠활동 3

헤이그특사가 되어 을사늑약에 부당함과 일본의 침략상을 알리는 청원서를 작성해 봅시다

모둠활동 4

2명으로 모둠을 구성하여 한명은 기자가 되고 한명은 이위종이 되어 인터뷰기사를 작성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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