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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 집터(망국의 위기에서 민족 혼을 일깨운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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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에서 진멸하리라. 대저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자는 살 수 있는 법인데, 여러분은 왜 이것을 모르는가. 영환은 한번 죽음으로써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고, 2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과하노라.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고, 저승에서 여러분을 돕고자 하니 우리 2천만 동포 형제들은 천만배로 보답하여 마음을 굳게 먹고, 학문에 힘쓰며, 일심 협력하여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하면 죽은 몸도 저승에서 기뻐 웃으리라. 아, 조금도 실망하지 말라.

1905년 11월 30일 오전 6시.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은 아무도 모르게 작은 칼로 자신의 배와 목을 찔러 순절하였다. 처음에는 작은 칼로 복부를 찔렀지만 칼이 작아 깊이 들어가지 않자, 손에 묻은 피를 벽과 의복에 여러 번 문질러 씻고 난 뒤 다시 찔렀으나 이마저도 여의치 않자 나중에는 목을 찔러 두 치 넓이의 구멍을 내어 순절하였다. 그의 나이 44세였다. 윗글은 자결한 그의 옷소매에서 나온 피맺힌 유서이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서울시 종로구 견지동 27-2
현재 상태 멸실 / 현재 조계사 경내 불교역사문화 기념관 앞마당으로 바뀌었다.

서울에서 태어난 민영환은 민겸호(閔謙鎬)의 아들로 명성황후의 친정 집안 출신이었다. 가문의 배경이 높았지만 다른 민씨 세력가들에 비해 청렴하고 강직해서 그에 대한 고종의 신임이 두터웠고, 이 때문에 1898년 문과에 급제한 이후 빠르게 승진해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그는 1896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유럽 각국의 문화를 시찰하는 세계 일주 여행을 하였다. 다시 1897년 1월부터 7월 중순까지 세계 각국을 순방하였다. 두 차례의 여행으로 서양 각국의 발전상과 선진 문물을 목격한 그는 서구의 근대식 제도를 본받아 군사와 정치 제도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민영환이 당시 근대 개혁을 지향하는 독립협회를 지지했던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그런데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1905년 11월 17일 고종과 대한제국 정부를 협박하여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이로 인해 한국은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겼고 자주 독립 국가로서의 위상을 상실하였다. 조약의 내용이 알려지자 민족적인 울분이 하늘을 찔렀다. 유생과 전직 관료들은 조약 폐기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고, 상인들은 항의하며 가게 문을 닫았고, 학생들은 자진 휴학하여 일제의 침략과 매국노들의 행위를 규탄하였다. 급기야 17명이나 되는 인물이 일제의 침략적 행위에 목숨을 버리는 일까지 벌어졌다. 17명 중에는 관료나 하급 관리 출신뿐만 아니라 인력거 인부나 여종, 심지어 중국인과 일본인도 있었다.
여러 번 조약의 폐기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던 민영환은 어떤 방법으로도 정세를 되돌릴 도리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죽음으로써 국민들을 경각시키기로 결심하고 자결의 길을 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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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출신 배경과 품성

민영환은 1861년 서울 전동에서 호조판서 민겸호의 아들로 태어나 큰아버지인 민태호(閔泰鎬)의 양자가 되었다. 그는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 항렬에 속하여 고종의 인척에 해당된다. 특히 그의 할아버지 민치구(閔致九)가 흥선대원군의 장인이며, 작은아버지 민승호(閔升鎬)는 명성황후의 아버지에게 입적하여 그녀의 양오빠가 되었다. 이러한 가문의 배경 때문에 민영환은 벼슬에 나간 후 정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민영환은 1878년 문과에 급제하고 1881년에 당상관으로 승진하였다.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에는 22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정3품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다. 이러한 파격적인 승진은 그가 고종과 명성황후의 각별한 총애를 받은 인물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던 1882년 임오군란 때 그의 생부인 민겸호가 구식 군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민영환은 3년 상을 마친 1884년 24세의 나이로 이조 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생부의 참변에 따른 충격으로 세 번이나 사직소를 올렸다. 그러나 고종은 끝까지 고집하여 그를 이조 참의에 임명하였다. 그 해 12월 도승지에 올랐고, 이어 전환국 총판, 홍문관 부제학, 이조 참판, 개성 유수, 기연해방영사(畿沿海防營使), 기기국 총판, 내무부 협판 등 중요한 관직을 두루 거쳤다. 이 중 내무부는 고종이 추진한 근대화 정책을 총괄하는 권력 기관이었다. 또한 기연해방영은 경기 연안의 해안 방어를 위한 군사력 강화 목적으로 1883년 설치한 고종의 친위 군사 기관으로 신식 해군의 효시였다.
1887년 민영환은 불과 27세의 나이에 정1품직인 예조 판서에 오른 데 이어 병조 판서, 형조 판서 등의 요직을 거치면서 정책 결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고종과 명성황후의 외교 정책에 따라 친러 정책에 깊이 관여하면서 베베르 러시아 공사와 교분을 쌓았다.
민영환이 빠른 승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당시 권력의 핵심이었던 민씨 집안 출신이라는 것이 작용했겠지만, 다른 여흥 민씨의 고관들에 비하여 청렴하고 강직했던 점이 고종의 인정을 받았을 것이다.
일본인 기쿠치 겐조[菊池謙讓]는 『근대조선사』에서 “민영환은 척족 중 대표적 인물로서 직접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권위와 사람들의 신망을 한 몸에 지니고 있었다.”고 평가하였다.

  • 질문1 민영환의 할아버지와 흥선대원군은 어떤 관계인가요?
  • 질문2 민영환의 아버지 민겸호는 왜 1882년 임오군란 때 구식 군인들에 의해 살해당했을까요?
  • 질문3 민영환이 빠른 승진을 할 수 있었던 이유를 두 가지로 나누어 말해 보시오.
  • 질문4 우리나라 신식 해군의 효시가 된 것은 무엇인가요?
  • 질문5 일본인 기쿠치 겐조가 민영환에 대해 평가한 내용을 찾아 소리내어 읽어봅시다.

읽기자료 2

세계 여행을 통한 견문의 확대

1894년 6월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개화파를 앞세워 갑오개혁에 착수하였다. 이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보호국화’하고 중국 랴오둥[遼東]반도 점령을 꾀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주축이 되었던 이른바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야욕은 좌절되었다. 러시아의 세력이 커지는 국제 환경이 전개되자 고종과 명성황후는 친일 개화파를 축출하고 대신 측근 세력을 등용하여 친러 정책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이에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일본 공사는 1895년 8월 일본 낭인들과 공모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저질렀다.
사사롭게는 집안의 고모가 되고 공적으로는 자신의 강력한지지 기반이었던 명성황후의 시해는 민영환에게 매우 큰 충격이었다. 을미사변 이후 그는 관직에서 물러나 외부와 접촉을 끊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이 일어난 후 민영환은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다. 그는 특명전권대사에 임명되어 윤치호 등과 함께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축하 사절로 파견되었다. 민영환을 비롯한 한국 사절단은 1896년 4월 1일 제물포를 출발하였다. 이들은 군함, 상선, 열차 등을 이용하여 상해 → 나가사키 → 도쿄 → 밴쿠버 → 뉴욕 → 런던 → 플러싱 → 베를린 → 바르샤바 등을 거쳐 4월 20일 모스크바에 도착하였다.
민영환은 5월 26일 대관식에 참가하고, 이후 3개월 동안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렀다. 그는 러시아 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고 군사 교관 파견, 차관 교섭, 고문관 파견 등 러시아의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러시아는 군사 교관 13명을 파견하는 선에서 민영환의 요청을 수락하였다. 8월 20일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난 사절단은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10월 21일에 귀국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유라시아 일주이며, 총 204일간 11개국을 망라한 대장정이었다. 민영환 등 사절단 일행은 러시아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근대화의 궤도에 오르고 있던 서구 열강 및 식민지로 전락한 폴란드의 현실을 목격했고, 뉴욕․런던 등 세계 최고의 문화 도시를 지나며 근대 자본주의 문화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 한국인 최초로 세계를 일주한 민영환은 『해천추범(海天秋帆)』이란 기행문을 남겼다. 한문으로 된 이 기행문은 민영환의 명의로 통역관인 김득련이 작성한 것이다.
1897년 1월 민영환은 또다시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6개국 특명전권공사에 임명되어, 그 해 3월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기념 축하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을 떠났다. 5월 17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여 니콜라이 황제에게 친서와 국서를 전달한 뒤, 6월 5일 런던에 도착하였다. 그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국서와 친서를 바친 후, 여왕 즉위 60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가 7월 17일에 귀국하였다.

  • 질문1 민영환이 러시아에 파견되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민영환 일행이 처음 세계 일주를 하는 동안 거쳤던 주요 도시들을 순서대로 말해 보고, 세계지도에 표시해 봅시다.
  • 질문3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이루어졌던 세계 일주의 총 기간은 얼마나 되었을까요?
  • 질문4 러시아에 다녀온 뒤 민영환 명의로 김득련이 기록했던 것은?

읽기자료 3

민영환의 개혁 사상

두 차례 해외 여행을 통해 각국의 발전상을 둘러본 민영환은 『해천추범』에서 일본의 근대화된 문물 제도를 높이 평가하면서 “이는 일본 사람들이 다 서양의 제도를 부지런히 배워 이로부터 개명한 것”이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유럽을 모방하여 정치 제도를 개혁하고 민권을 신장시켜서 국가의 근본을 공고히 할 것’을 여러 번 고종에게 건의하였다. 그러면서도 대한제국의 황권 강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광무개혁을 추진하였으며, 동도서기의 원칙에 따라 군주의 권한을 회복하려 하였다. 구체적으로 내각제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부활하고자 했는데, 이는 단순한 군주권의 강화가 아니라 열강 사이에서 명분상 자주 독립을 확보하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민영환은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개최가 의회 설립 운동으로 발전하는 것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는 “우리나라에 국회가 없어 나라 일을 의논하지 못하지만, 독립협회의 일이 충군애국과 독립의 기초를 견고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독립협회가 국회의 역할을 대신하기를 기대했다. 그는 황권과 민권의 조화를 꾀했던 것이다.
근대적 체제를 지향했던 민영환은 당시의 개혁 세력으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았고 민영환 또한 개혁 세력을 지지하였다. 1898년 10월 독립협회의 정부 비판 강도가 높아지자 고종은 정교(鄭喬) 등 독립협회 간부들을 불러 해산을 종용하였다. 이 자리에서 정교 등은 “지금 정부 요인 가운데 인민들이 조금이라도 믿는 사람은 오직 민영환과 한규설(韓圭卨)뿐입니다. 만약 민영환을 군부 대신이나 경무사에 임명한다면 민중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안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건의하였다. 이것은 독립협회 회원들이 민영환을 깊이 신뢰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민영환이 독립협회의 신임을 받으며 그들을 후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황국협회에서는 “그대가 세록척신(世祿戚臣 : 대대로 벼슬하는 임금의 친척 신하)으로 만민공동회에 뜻을 같이하여 황명(皇命)을 거역하고 정부를 내몰려고 하니, 이것이 어찌 갑오역당보다 심하지 않다고 하겠는가? 우리가 장차 죽이고 말겠다.”는 협박장까지 보냈다.
1902년 민영환은 일본에 망명 중인 개화파들이 모의한 국체 개혁 운동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국체 개혁 운동이란 1902년 5월 유길준 또는 박영효가 국내의 민영환, 이상재 등을 포섭하여 고종 중심의 전제 황제 체제를 무너뜨리고 의친왕 이강(李堈) 같은 왕족을 새로운 지도자로 내세우려는 체제 개혁 운동이었다. 여기에 민영환이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았다는 것은 그가 개혁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의 정치 사상 또한 개혁적이었음을 말해 준다.

  • 질문1 독립협회의 의회 설립 운동을 지지했을 만큼 진보적이었던 민영환이 황제권을 강화하려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독립협회 회원들이 민영환을 깊이 신뢰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대목을 찾아 소리 내어 읽어 봅시다.
  • 질문3 개혁적 성향을 가진 민영환을 위협했던 단체 이름을 말해 보시오.

읽기자료 4

흥화학교 설립을 통한 근대 교육

특명전권공사로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를 둘러보고 많은 자극을 받았던 민영환은 외국어 교육과 선진 기술 보급 등을 절감하였다. 이를 위해 여러 유지들과 함께 사립 흥화학교를 설립하였다.
1898년 11월 5일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興化門) 앞에 설립된 사립 흥화학교는 영어, 산술, 지지, 역사, 작문, 토론, 체조 등의 교과목이 개설된 근대 학교였다. 입학 자격은 국한문에 대해 어느 정도 해독력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서울에 거주하는 보증인을 요구하였다. 처음 모집된 학생은 주간과와 야간과를 합쳐 수십 명에 불과하였으나, 한달 후인 12월 10일 실시된 제1회 월말 시험 당시에는 주간 47명과 야간 79명으로 총 126명에 달했다. 12월 말에는 주간 60여 명, 야간 90여 명의 총 150여 명으로 늘어났다.
1899년 1월 민영환은 ‘학문을 일으켜 인재를 교육’하는 것을 나라의 급선무로 제시하였고, 특히 외국 유학을 강조하였다. 뛰어난 사람을 외국에 유학시켜서 선진적인 근대 학문을 일정 기간 동안 의무적으로 공부하도록 하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3월에는 학교가 협소함을 지적하고 자신이 솔선하여 기금을 내놓고 독지가들로부터 보조금을 얻어서 학교를 확장하였다. 흥화학교는 건물을 새로 마련하여 처음 설립되었던 경희궁 정문 앞에서 지금의 종로구 청진동으로 옮기고 교과도 증설하였다.
서울의 흥화학교를 모델로 하여 1899년 6월 대구에서도 사립 흥화학교가 설립되기도 했었지만, 을사조약에 반대하며 민영환이 순국 자결하자 주도할 사람이 없게 되어 서울의 흥화학교마저 폐교 위기에 놓였다. 자금난이 심각해지자 황성신문에서 논설을 통해 독지가들의 의연금 출연을 역설하였다. 그 결과 여러 유지들이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고, 황제도 매달 10원씩 내탕금을 하사하였다. 이후에도 기부금은 계속되었고, 흥화학교는 ‘모범학교’로 지정되어 황실의 재정을 관리하는 경리원으로부터 매달 보조금을 받았다. 그러나 ‘사립학교령’ 등을 통한 일제의 압박으로 재정난에 허덕이다가 1911년 폐교되었다.
황성신문은 1906년 8월 16일자 논설에서 진정한 의미의 우리나라 사립학교는 흥화학교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적고 있다.

  • 질문1 민영환이 근대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세운 학교는 무엇인가요?
  • 질문2 ‘흥화’라는 학교 이름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 질문3 서울의 흥화학교를 모델로 사립 흥화학교가 세워진 지역은 어디인가요?
  • 질문4 자금난이 심각한 흥화학교에 의연금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신문은 무엇인가요?
  • 질문5 흥화학교가 폐교된 배경을 말해 보시오.

읽기자료 5

을사조약의 체결과 순국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열강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권익을 보장받은 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한국의 외교 관계를 일본 외무성이 지도 감독하고, 한국은 일본의 중개를 통해서만 국제적인 조약을 체결할 수 있으며, 한국에 일본인 통감을 두어 사무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한국은 독립 국가로서의 위상을 상실했던 것이다.
황성신문 사장 장지연(張志淵)은 ‘오늘 목 놓아 통곡한다[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는 사설로 일본의 침략성을 규탄하고 조약 체결에 찬성한 대신들을 비판하였다. 이후 을사오적의 행위를 규탄하며 조약을 반대하는 투쟁이 확산되었다. 또한 유생과 전직 관료들의 상소 투쟁은 조약 폐기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시켰다. 종로 육의전 상인과 서울의 각 상점들이 문을 닫았으며, 각급 학교의 학생들도 자진 휴학하여 일제의 침략과 매국노의 망국적 행위를 규탄하였다..
조약이 체결될 것이라는 정보를 미리 입수한 민영환은 이를 대비하기 위해 무장출신인 참정대신 한규설을 총리대신으로 추대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막상 조약이 체결될 당시 그는 전실 부인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경기도 용인에 내려가 있었다. 서울로 올라온 그는 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피눈물로 통곡하다가 여러 번 기절하고 피를 토하며 문을 닫아걸고 드러누웠다.
민영환은 곧 정신을 가다듬고 백관의 우두머리 자격으로 두 차례에 걸쳐 연명 상소를 올려 외무대신 박제순 등 을사오적을 처단하고 조약을 파기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자신이 직접 궁궐로 들어가 고종의 재가와 참정대신의 인준이 없는 5조약이 무효임을 주장하면서, 이러한 조약 체결의 책임자인 박제순과 서명한 이지용 등의 처단을 요구하였다. 고종은 물러날 것을 종용하였으나, 그는 황제의 말에 복종치 않고 기왕의 상소 내용을 윤허할 것을 주장하는 세 번째 상소를 올리고는 궁중에 머무르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민영환은 11월 29일 새벽에 평리원(당시 고등재판소)으로 끌려갔으나 고종의 명으로 곧 석방되었다.
자신이 살아서 할 수 있는 어떤 방법으로도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고 판단한 민영환은 죽음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 국민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비장한 결심을 하였다. 11월 29일 서대문 밖의 본가에 가서 어머니와 아내를 만나고 돌아온 그는 주위 사람들을 물리친 뒤 문을 잠그고 혼자 생각에 잠겼다. 이튿날인 11월 30일 아침 6시경 민영환은 평소 지니고 다니던 작은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순절하는 길을 택하였다.

  • 질문1 을사조약의 주요 내용을 말해 보시오.
  • 질문2 을사조약 체결에 서명한 한국의 관리는 몇 명인가요?
  • 질문3 민영환이 자결을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4 민영환이 을사조약이 무효라고 주장한 근거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6

순국의 영향

민영환의 순국 소식이 알려지자 관리, 시민, 유생, 학생 등 그를 조문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대한매일신보는 그의 죽음을 대서특필하면서, “민영환씨는 황실의 아주 가까운 신하로서 공정하고 충직하다는 아름다운 인망이 본래 있었고, 구미 여러 나라에 유람한 식견을 가지고 시애의 급한 임무에 통달하였다. 조정과 민간의 여론이 모두 공의 진퇴로써 국가의 안위를 점쳐 왔다.”고 칭송하였다. 또한 “민영환의 죽음을 슬퍼할 것만 아니라 죽음으로써 그의 충절을 계승하면 국권을 회복할 수 있다.”는 내용의 애도하는 글을 실었다.
민영환의 순국에 대한 대한매일신보의 보도는 그에 대한 추모 열기와 반일 의식을 부추겼다. 조약 반대 및 오적의 처단 상소를 5차례나 올렸던 이상설은 맨 상투에 흰 저고리만을 걸치고 종로 네거리에서 격렬한 어조로 연설하며 통곡하고 땅에 머리를 내리찧었다. 유혈이 낭자하여 인사불성에 이르자 그를 보는 사람들 중 통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원임 의정대신 조병세, 전 참판 홍만식(洪萬植), 학주부사 이상철(李相喆), 평양 진위대 상등병 김봉학(金奉學) 등 순국을 택하는 이들도 잇따랐다. 또한 민영환의 집 행랑에서 거처하다가 인력거를 끌던 사람이 종로 네거리로 나와 통곡하고 집에 돌아가서 종일토록 울다가 밤에 경우궁 뒷산으로 올라가 소나무에 목을 매어 자결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민영환에게 정1품의 벼슬을 내리고 시호를 ‘충정’이라 하였다. 1905년 12월 17일 그를 장사지내는 경기도 용인군 서봉산에 정부 관리는 물론 각국 외교관들도 나와서 슬퍼하였다. 학생, 군인, 시민, 승려, 부녀자들 수만 명이 나와서 줄을 지어 따르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일제는 장례 행렬이 도중에 소요를 일으킬까 두려워 헌병과 기마대를 동원해 용인까지 삼엄한 경계를 폈다.
민영환의 피 묻은 옷과 칼은 마루방에 봉안하였다. 1906년 7월경 이 방문을 열자 마루 틈으로 4줄기에 9가지와 48잎사귀가 돋은 푸른 대나무가 솟아올라 있었다. 이 소식이 삽시간에 알려져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고, 많은 사람들이 시와 노래를 지어 민영환의 충절을 가슴 깊이 새겼다.

  • 질문1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자결했던 사람들은 어떤 신분이었나요?
  • 질문2 민영환에게 내려진 시호는 무엇인가요?
  • 질문3 민영환의 피가 묻은 옷과 칼을 두었던 마루방에서 솟아난 식물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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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다음은 명함에 쓴 민영환의 유서이다.

〈訣告我大韓帝國二千萬同胞〉
嗚呼 國恥民辱 乃至於此 我人民 將且殄滅於生存競争之中矣 夫要生者 必死 期死者는 得生 諸公 豈不諒只. 泳煥 徒以一死 仰報皇恩 以謝我二千萬同胞兄弟 泳煥 死而不死 期助諸君於九泉之下 幸我同胞兄弟 千萬億加奮勵 堅乃志氣 勉其學問 決心戮力 復我自由獨立 即死子當喜笑於冥冥之中矣 鳴呼 勿少失望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
아,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에서 진멸하리라. 대저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자는 살 수 있는 법인데, 여러분은 왜 이것을 모르는가. 영환은 한번 죽음으로써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고, 2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과하노라.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고, 저승에서 여러분을 돕고자 하니 우리 2천만 동포 형제들은 천만배로 보답하여 마음을 굳게 먹고, 학문에 힘쓰며, 일심 협력하여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하면 죽은 몸도 저승에서 기뻐 웃으리라. 아, 조금도 실망하지 말라.

  • 질문1 민영환의 유서 내용을 소리 내어 읽어 봅시다.
  • 질문2 민영환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신문 사설 형식으로 작성해 봅시다.
  • 질문3 내가 당시 민영환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지 말해 봅시다.

시각자료 2

우정총국공원 내에 있는 민영환의 동상이다. 1957년 건립되어 안국동 로터리에 있었다가 도로 확장 공사로 율곡로 돈화문 입구인 와룡동 1번지로 옮긴 후 2003년 3.1절 재현 행사를 계기로 현위치에 옮겼다.

  • 질문1 문화관광해설사가 관광객들에게 민영환 동상을 소개하는형 내용으로 안내문을 만들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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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모둠별로 을사조약에 저항하며 자결한 인물들을 조사하고 신분별로 분류해 봅시다.
모둠활동 2
당시 일제의 침략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항일 의병 운동’, ‘애국 계몽 운동’, ‘자결순국’ 등이 있었다. 어떤 방식이 일제에 가장 효과적으로 타격을 줄 수 있을지 모둠별로 토론하고 그 결과를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모둠별로 민영환이 세계일주 여행할 때 들렸던 나라인 일본, 미국, 영국, 러시아 등에 대한 가상 여행기를 당시의 산업기술의 발달 상황을 조사・반영하여 작성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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