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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 집(한국 아나키스트의 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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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창(獄窓)의 겨울밤은
아득히 깊었는데
찬 기운은 살을 에이고
언(凍) 하늘에 주린 듯
허리 굽은 그믐달은
철창(鐵窓)으로 엿볼제
우당탕
지게문을 흔드는 찬바람
아- 저 달이 몸서리를 친다
달아
반가운 명절은 왔건마는
닥쳐오는 풍한(風寒)을 어찌하랴
부와 귀에 추세(追勢)하는 명절이
헐벗고 주린 우리에게
어찌 그리 반가우랴
고르지 못한 세상
생지옥(生地獄)의 이 세상
아 원수의 생지옥
달아
풍한(風寒)에 수족이 얼었으리니
추(醜)하나마 쉬어가라
달아 이 밤은
나와 함께 이곳에서
동학(東學)이나 강론(講論)하자구나


윗글은 박열이 1926년 옥중에서 새해를 맞이하며 지은 시이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경상북도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 98
현재 상태 복원, 박열이 살았던 집은 없어졌고, 현재 건물은 문경시에서 새로 복원한 것이다.

박열은 경상북도 문경 출신이다.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 3·1운동에 참여하면서 민족 문제에 눈을 뜨게 된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같은 해 10월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를 다녔다. 이곳에서 박열은 1921년 정태신, 김약수, 정태성, 조봉암 등과 아나키즘 단체인 흑도회(黑濤會)를 만들고, 일본인 여성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와 이 단체의 기관지 『흑도』의 발간을 맡았다.
그는 1922년 7월 일본 니가타현[新潟県] 댐 공사장에서 일어난 재일 조선인 노동자 100여 명의 집단 학살 사건에 대한 조사단으로 파견되어 항일 투쟁을 이끌었다. 그러던 중 1923년 가을에 열릴 예정인 일본 왕자 히로히토[裕仁]의 결혼식 소식을 듣고, 그곳에 폭탄을 던져 일왕 부자(夫子)와 정부 고관을 한꺼번에 처단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923년 9월 간토[關東] 대지진으로 조선인들이 검속·학살되던 중에 박열은 가네코 후미코를 비롯한 동지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간토 대지진의 혼란을 수습하려던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을 ‘대역 사건’으로 포장하여 조선인의 대량 학살을 흐지부지 덮어 버리는 데 악용하였다.
박열은 1926년 2월 26일 첫 공판정에서 “한인이 일본 국민에게 반항하는 것은 항구적인 운명”이라고 거사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법정 투쟁을 벌였다. 그는 일본 재판정에서 대역죄와 폭발물 취체 규칙 위반으로 사형을 언도받았다가 무기 징역으로 감형되었다. 해방이 되고 1945년 10월 27일 석방될 때까지 그는 22년 2개월 1일의 긴 옥고를 치렀다. 박열은 1974년 사망하였는데, 1989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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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민족 의식의 형성

박열은 1902년 3월 12일 경상북도 문경군 마성면 오천리 98번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처은 이름은 혁식(赫植)이었으나 어려서부터 열(烈)로 불렸고, 호적에는 준식(準植)으로 되어 있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마성면 오천리 일대는 일찍이 일제에 의한 광산촌이 형성되었다. 대개 조선 총독부의 후원 아래 일본 자본가들이 마구잡이로 개발한 광산촌에는 조선인에 대한 가혹한 노동 착취와 저임금, 인권 유린 등의 각종 폐해가 뒤따랐던 만큼, 지역 주민들에게 반일 정서가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오천리에는 인근 산지의 삼림과 식수 관리, 경로 사업 등 마을 자치 활동을 펼치는 성산조합이 결성되어 있었다. 박열의 맏형과 둘째형은 이 조합의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박열은 7세인 1908년부터 서당 교육을 받았으며 10세 때 집에서 40리나 떨어진 4년제 함창공립보통학교에 다녔다. 1916년 3월 졸업식을 앞두고 조선인 교사가 학생들에게 그동안 일본의 압력으로 거짓 교육을 시킨 것에 대해 눈물로 사과하는 것을 보고 조선 역사의 존엄성과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
보통학교 졸업 후 박열은 농사를 지으라는 맏형의 권유를 뿌리치고,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 사범과에 진학하였다. 재학 중 그는 일본인 교사에게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가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 했다는 ‘대역 사건(大逆事件)’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후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였던 박열은 일본인이 세운 학교에 다니는 치욕을 견딜 수 없다며 학업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 문경에 돌아온 이후에도 박열은 친구들과 함께 태극기와 격문을 살포하는 등 만세 시위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친구들로부터 일제의 가혹한 고문과 탄압 만행을 전해 듣고, 더 이상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힘들다는 판단 아래 일본으로 건너가기로 결심하였다.

  • 질문1 박열이 보통학교에 다닐 때 민족의식을 갖게 된 일화를 써 봅시다.
  • 질문2 박열이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중도에 포기하고 내려온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3 박열이 일본으로 건너가기로 결심한 이유를 써 봅시다.

읽기자료 2

도일(渡日)과 조직 활동

1919년 10월경 도쿄에 도착한 박열은 신문 배달과 날품팔이, 우편배달부, 인력거꾼, 인삼 행상 등에 종사하면서 세이소쿠영어학교에 다녔다. 아울러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사카이 토시히코[堺利彦], 이와사 사쿠타로[岩佐作太郞] 등 당시의 저명한 일본 사회주의자들을 찾아가 반제국주의 자유 의식과 아나키즘 사상을 배웠다.
박열은 적극적인 항일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김찬, 조봉암 등 도쿄에 거주하는 고학생들을 모아 의혈단(후에 철권단-혈권단-박살단으로 이름을 바꿈)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친일 행위자들에게 협박장을 보내 철저히 응징하겠다고 위협하였다. 또한 그는 당시 도쿄의 최대 조선인 노동단체였던 조선고학생동우회에서 김약수, 백무, 최갑춘 등과 함께 간부로 활동하였다.
1922년 2월경 박열은 그의 평생 동지이자 훗날 아내가 된 가네코 후미코를 만났다. 그녀는 아버지가 아내와 딸인 후미코를 호적에 올리지 않아 무적자(無籍者)라는 이유로 일본에서 갖은 차별 대우를 받았고, 아버지가 어머니를 버린 후 친할머니가 딸 부부와 살고 있던 조선에서 1912년부터 1919년까지 살았다. 가네코의 친척은 지주이자 고리대금과 아편 밀매를 하던 사람이었는데, 그녀는 이곳에서도 하녀 취급을 당했다. 가네코는 학대받는 자신처럼 고통에 처한 조선인들에게 동질감을 느끼며 일제의 천황제와 군국주의에 반감을 갖게 되었다. 약 7년 동안 조선 땅에서 고생했던 그녀는 도쿄 시내의 작은 음식점에서 일하면서 조선 유학생들과 교류하였다. 그녀는 『청년조선』에 실린 ‘개새끼[犬コロ]’라는 박열의 시를 읽고 “그래, 내가 찾고 있던 것, 내가 하고 싶은 일, 그것은 분명 그의 내부에 있다.”고 강한 감동을 느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사상적 동질성을 확인하고, 민족을 넘어 계급적 동지로서 함께 항일 활동을 펼치면서 동거하였다.

  • 질문1 박열에게 반제국주의 자유의식과 아나키즘사상을 전해준 사회주의자의 이름을 써 봅시다.
  • 질문2 일본에 건너간 박열이 활동한 단체의 이름을 써 봅시다.
  • 질문3 박열의 아내이자 평생 동지였던 가네코 후미코가 박열에게 강한 매력을 느끼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3

흑도회와 흑우회 활동

조선고학생동우회와 혈권단에서 활동하던 박열은 김약수, 원종린 등과 함께 1921년 11월 29일 첫 사상 단체인 흑도회(黑濤會)를 결성하였다. 저명한 일본 아나키스트인 이와사 사쿠타로의 후원 아래 다양한 항일 투사들이 결집한 흑도회의 회원들은 세계 노동절 행사를 비롯해 일본 사상 단체의 반정부 시위에 적극 참여하였다. 박열은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흑도회의 기관지인 『흑도』의 발간 책임을 맡아 창간호와 2호를 발간하여 항일 세력의 규합과 선전 활동에 전념하였다.
흑도회는 1922년 8월 니가타현 나카스가와[中津川]에서 조선인 노동자 학살 사건이 발생하였다. 신월전력주식회사(信越電力株式會社) 수력발전소 공사장 측이 계약 당시의 노동 시간과 임금 조건을 어겼을 뿐만 아니라, 강제 노동을 강요당하던 조선인 노동자가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다 적발되면 이들을 쏘아 죽인 후 본보기로 강물에 던져 버렸던 것이다. 흑도회는 박열과 김약수를 이 사건의 조사단으로 파견하였다. 이어 사건의 진상 조사 결과를 9월 7일 도쿄 YMCA에서 보고하였는데, 일본과 조선의 지식인들을 비롯해 1천여 명의 군중이 모이는 등 큰 관심과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박열은 이 사건과 같은 반인도적 행위가 민족 차별과 식민 지배 체제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식민 지배 체제의 근본적인 파괴의 필요성을 역설하다가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니가타현 조선인 노동자 학살 사건의 조사를 계기로 흑도회는 식민 체제의 근본적인 파괴와 의열 투쟁을 강조하는 박열과 대중을 기반으로 혁명을 추구하는 정당을 지향하는 김약수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였다. 박열은 국내에 사건 보고를 위해 들어왔다가 김한 등 의열단 간부들을 만나 폭탄 구입을 요청하였다. 김약수 역시 조선인노동조사회와 노동자동맹을 결성함에 따라 흑도회의 해체를 불러왔다. 흑도회는 박열을 중심으로 한 무정부주의 일파와 김약수 등 반정부주의적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일파로 나뉘어 해산되었다.
박열은 1922년 12월경 김약수 등과 결별한 후 직접 행동을 추구하는 회원들과 함께 흑우회(黑友會)를 조직하였다. 결성 당시 회원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포함한 신영우, 홍진유, 서상일, 박흥곤, 장상중 등이었다. 흑우회는 민중운동사를 세우고 1923년 5월경 한글로 만든 기관지 『민중운동』을 발간하였다.
흑우회는 일본 및 조선의 여러 사회 단체들과 함께 연대 활동을 전개하였다. 흑우회원들은 『후데이센징(太い鮮人)』과 『현사회(現社會)』라는 기관지를 통해 일제가 1923년 1월 한국인의 사회 운동을 통제하려고 제정한 ‘과격 사회운동 취체 법안’에 대해 반대 의견을 내놓고 대규모 연합 시위에 참여하였다. 또 일본 노동 단체 주최로 열린 세계 노동절 행사에 참가해 ‘8시간 노동제 실시’와 ‘조선의 해방’을 외치다가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밖에도 흑우회원들은 조선 문제 강연회를 열어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는 한편, 서울과 도쿄[東京]의 노동 단체들과 연락 관계를 맺는 등 활발한 대외 연대 활동을 펼쳤다.

  • 질문1 박열이 김약수, 원종린 등과 함께 1921년 11월 29일 결성한 단체는 무엇인가요?
  • 질문2 흑도회가 기관지인 『흑도』를 발간하여 거둔 성과를 써봅시다.
  • 질문3 흑도회가 분열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 질문4 흑우회의 활동 내용을 정리해 봅시다.

읽기자료 4

불령사의 조직과 일왕폭살계획

박열은 1923년 4월 중순 흑우회와 따로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하였다. 불령사는 조선인 15명과 일본인 6명의 총 21명으로 구성되었다. 박열은 불령사의 정기 모임을 통해 일본 아나키스트의 강연을 듣거나 국내의 파업 투쟁을 후원하고, 사회주의를 매도한 조선 기자를 폭행하는 등 반일 활동을 주도하였다.
나아가 더욱 적극적이며 파괴적인 의열 투쟁을 펼치기 위해 다방면에서 노력을 기울였다. 박열은 외국에서 폭탄을 운반하여 들여올 방도를 논의하거나 직접 만들려고 시도하였다. 실제로 그는 의열단의 중요 간부인 김한을 만나 폭탄 구입을 요청해 폭탄 50개를 반입하려 하였다. 폭탄을 반입하려던 3번의 시도가 실패했지만 박열은 1923년 가을에 일본 왕자의 결혼식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거사 계획을 세웠다. 그는 자신의 명성을 듣고 도쿄로 찾아온 김중한에게 폭탄 구입이 가능한지 알아보았으나 구입 비용이 부족하여 잠시 미루었다.
1923년 9월 1일 도쿄 일대에 대지진이 발생하였다. 일본 내각과 군부는 1918년 쌀 폭동 때와 같은 민란을 미리 막기 위해 도쿄 시내와 인근 5개 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출동시켰다. 완전무장한 군대와 경찰은 이 상황을 사회주의자와 조선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의 기회로 악용하였다. 일본 정부에서 시작되어 언론 보도로 더욱 과격해진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도둑질을 하고 불을 지른다.”는 유언비어에 현혹된 자경단과 학생을 포함한 민중들의해 오스기 사카에를 비롯한 일부 일본인 노동조합 간부들과 약 7천여 명의 조선인들이 살해되었다. 또한 “선량한 한인을 보호하기 위해”라는 명분으로 한인들에 대한 검속을 실시한 결과 약 6,200여 명이 연행되어 경찰서에 강제 수감되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그리고 불령사 회원들 역시 9월 3일경 보호 검속이란 명목으로 체포되었다. 일본 경찰은 이어 ‘일정한 거주 또는 생업 없이 배회하는 자’라는 구실로 한 달간 가두더니, 곧 불령사를 ‘비밀 결사의 금지’ 위반 혐의로 구속하고 형사 사건으로 법원에 재판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박열과 불령사를 오랫동안 감시해 온 경찰의 사전 계획에 의한 조치였다.
경찰의 취조 도중 박열의 폭탄 구입 계획 사실이 알려졌다. 이때부터 일본 정부와 검찰은 불령사를 폭동과 천황 암살을 꾀한 조직 사건으로 비화시키기 시작했다. 검찰은 이듬해 1월 27일 박열 부부의 폭발물 유입 계획과 불령사 조직을 연결시켜 이 사건을 ‘대진재(大震災)를 틈탄 조선인 비밀 결사의 폭동 계획’, 즉 ‘대역 사건’으로 보도하였다. 조선인 대학살에 대한 각계 여론과 조선인들의 들끓는 비난을 모면하려는 일본 정부의 계략인 셈이었다. 하지만 일본 검찰이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김중한 세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불령사 회원들을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함으로써 ‘불령사 사건’으로 개칭하였다. 이로써 간토 대지진 당시 조선인 대학살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박열 등을 이용하려고 했던 일본 정부의 계획은 실패하였다.

  • 질문1 불령사의 활동 내용을 정리해 봅시다.
  • 질문2 박열이 1923년 가을 거사 계획을 세우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 질문3 일제가 일본인 사회주의자와 조선인들을 대규모 학살한 사건의 계기는 무엇인가요?
  • 질문4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불령사 회원들이 일본 경찰에게 구속된 죄명을 써 봅시다.
  • 질문5 일본 검찰이 불령사를 폭동과 천황 암살을 꾀한 조직 사건으로 비화시킨 계기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5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옥중 투쟁

박열은 검찰에 기소된 이후, 1923년 10월 24일부터 1925년 6월 6일까지 총 21회에 걸쳐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신문(訊問) 과정에서 그는 일본 천황을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구입하려 했다고 당당히 밝혔다. 그는 1926년 1월 공판에 앞서 재판장에게 자신을 죄인 취급하지 말 것과 재판장과 동등한 좌석을 설치할 것, 조선 관복을 입을 수 있게 할 것, 공판 전에 자신의 선언문 낭독을 허용할 것 등 4가지 조건을 요구했다. 일본 사법부가 그의 요구를 일부 받아들임에 따라 그는 조선 전통 관복을 입고 출두해 반말로 답변하는 법정투쟁을 벌였다. 미리 써 두었던 「음모론」과 「나의 선언」, 「불령선인이 일본 특권 계급에게 준다.」등의 글로 일본 천황의 죄를 폭로하였다.
일본 정부는 1926년 3월 두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사형 판결 후 박열은 미소를 지으며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맘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 검찰이 10일 만에 사형에서 한 등급 감형해 달라는 「은사 신청서」를 제출하였고, 이에 일본 정부는 1926년 4월에 두 사람을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특별 감형한다는 사면장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일본 정부의 기만 술책에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철저히 저항하였다. 박열은 은사장을 받지 않으려 하였고, 곧 단식으로 저항하였다. 가네코 후미코는 무기징역 사면장을 받자마자 찢어 버렸다. 이러한 두 사람의 저항 의지에 대해 일본 재판장까지 감동하여 호의적인 발언을 했다가 파면을 당하기도 하였다.
두 사람은 사형 선고 1개월 전에 혼인서를 제출하여 영원히 삶과 죽음을 함께 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각각 지바[千葉] 형무소와 도치기[栃木] 형무소로 분리 수감되었다. 가네코는 옥중에서 자신의 가혹한 삶과 자유 사상을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라는 책자로 출간하였다.
일제는 두 사람의 항일의 지를 꺾기 위해 사상 전향 공작을 끊임없이 펼쳤다. 편지 왕래나 독서 내용을 제한한 것은 물론, 글 쓰는 것도 방해하였다. 그러던 중 1926년 7월 23일 급작스럽게 가네코 후미코의 자살 소식이 전해졌다. 자살의 원인이나 방법도 알려지지 않아 타살이 아니냐는 의문 속에 그녀의 사체는 교도소 측에 의해 서둘러 가매장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유골은 옛 동지들의 노력으로 비밀리에 박열의 친형에게 전해졌고, 경상북도 문경시 팔령산에 묻혔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기구한 삶과 사랑은 두 사람의 다정한 포즈가 담긴 사진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또 다시 일본 정계를 뒤흔들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에게 호의와 존경심을 가졌던 검사와 예심 판사가 두 사람을 동석시켜 사진을 찍었고, 이 사진을 빌미로 야당이 ‘대역 죄인 우대’라는 정치 공세를 펼친 것이다. 이 사건은 당시 내각 총사퇴와 사법관 파면 등 세간의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일제는 박열에게 꾸준히 전향 공작을 펼쳤는데, 일본 사법 당국은 1934년부터 1938년까지 모두 4차례에 걸쳐 박열이 전향 선언을 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전향서라고 밝힌 글들은 별다른 설명 없이 ‘천황의 적자’를 자처하거나 불교에 귀의하겠다는 등 일관성이 없으며, 이전에 쓴 문장과 달리 일본식 표현을 쓰는 등 조작의 흔적이 짙었다.
더욱이 일제는 박열의 전향 선언을 발표하면서 그에게 어떠한 감형이나 출옥의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1945년 10월까지도 정치범이 아니라 대역사범이라는 이유로 그를 석방하지 않으려 했다. 제국주의와 천황제에 맞서 싸운 박열을 일제가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 질문1 박열이 공판에 앞서 일본 사법부에 요구한 네 가지를 써 봅시다.

    가.
    나.
    다.
    라.
  • 질문2 일제의 사형 구형에 대해 박열은 어떻게 행동했나요?
  • 질문3 무기징역 사면장을 받은 가네코 후미코는 어떻게 행동했나요?
  • 질문4 일제는 두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사상전향 공작을 벌였나요?

읽기자료 6

박열의 석방과 활동

21세에 투옥된 박열은 1945년 10월 27일 홋카이도[北海島] 변방의 아키다[秋田] 형무소에서 44세에 석방되었다. 약 22년 2개월의 오랜 수감 생활을 한 것이다.
도쿄에서 열린 석방 환영 대회에서 그가 수감되었던 형무소 소장 후지시타 이사부로[藤下伊三郞]가 수천의 조선인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연설을 하였다. 그는 참회의 뜻으로 자신의 아들을 박열의 양자로 삼게 하고, 이름 또한 박정진(朴定鎭)으로 개명한다고 밝혀 주위를 감동시켰다.
박열은 도쿄로 돌아와 이강훈, 원심창 등 항일 동지들과 함께 1946년 1월 20일 신조선건설동맹을 결성하여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민주주의적 건국 의식’, ‘사해동포적 세계 협동’, ‘근로 대중의 동지’ 등의 문구가 들어있는 동맹의 강령을 통해 신조선건설동맹이 아나키즘의 자유 사상과 개방적 민족주의를 융합한 중도 우파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박열은 좌파 아나키스트였으나, 광복 후 민족주의 중도 우파로 사상을 전환한 것이다.
박열은 1946년 5월 백범 김구의 부탁으로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3의사의 유해 송환 책임을 맡았다. 자신의 민족 자주적 독립 사상과 자유·평등 이념을 밝힌 『신조선혁명론』을 발간하였다.
신조선건설동맹은 1946년 10월 3일 김구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법통으로 삼는 재일조선건국촉진동맹 등 우파 단체들과 통합하여 재일조선거류민단(이하 민단)을 발족시켰다. 박열은 초대 단장이 되었고, 부단장은 이강훈, 사무국장은 원심창, 도쿄 지국장에는 고순흠 등이 맡았다. 이로써 초기 민단은 일제 치하에서 아나키즘 사상을 통해 함께 항일 운동을 펼친 동지들이 중추를 이룬 반일․반공산주의적 재일 동포 단체로 자리잡아갔다.
당시 이승만도 일본에서 박열의 입지를 고려해 미국 방문길과 귀로에 그를 만나 향후 진로를 상의하였다. 이 회담 이후 박열은 ‘건국 운동에서 공산주의를 배격한다.’는 방침을 대내외에 밝히고,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적극 지지하였다.
하지만 박열을 대한민국 국무위원으로 초빙하겠다는 이승만의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고, 독재 정권의 부패와 권력 남용으로 인한 부작용은 민단 내부에도 영향을 미쳐서, 민단의 분열만 촉진시켰다. 박열은 1948년 2월 ‘재일조선거류민단’이 ‘대한민국거류민단’으로 바뀌기 전, 민단의 재정 고갈과 이승만 정권 반대 세력 등의 내부 갈등으로 인해 단장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박열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축전에 초대되어 귀국하였으며, 고향을 찾아 부인 가네코 후미코의 묘소를 참배하고 친지들과 옛 스승을 만났다. 그리고 재단법인 박열장학회를 설립하여 후학들을 위한 장학 사업에 뛰어 들었으며, 이듬해 5월 영구 귀국을 결심하고 돌아와 서울에 머물렀다. 하지만 6․25전쟁 당시 북한군에 의하여 납북되었다.

  • 질문1 박열이 석방된 뒤 1946년 1월 20일 도쿄에서 조직한 신조선건설동맹이 추구한 방향은 무엇인가요?
  • 질문2 재일조선거류민단을 출범시킨 대표적인 두 단체의 이름을 써 봅시다.
  • 질문3 좌파 아나키스트였던 박열이 왜 해방 후 민족주의 우파로 사상의 방향을 전환했을지 추측해 봅시다.

읽기자료 7

박열의 아내이자 평생 동지 가네코 후미코

일본 요코하마[横浜]에서 태어난 가네코 후미코는 1922년 박열을 만나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아나키스트의 길을 걸었다. 경찰이었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고 가난에 찌든 어린 시절, 신문을 팔거나 식당에서 일을 하며 힘든 생활을 했던 이력도 그녀가 아나키스트가 되는 데 크게 작용하였다.
7년 동안 조선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는 그녀는 일본 제국주의의 희생물로서 고통 받는 식민지 조선인과 가족 제도의 희생물로서 노예처럼 살아온 자신을 동일하게 파악하였다. 그 정점이 자신이나 조선인들과 같은 희생물을 만든 근본 원인이 천황제도라고 인식하여 천황제를 부정하였다.
가네코 후미코는 1923년 9월 1일 간토 대지진 때 일왕을 암살하려 했다는 대역죄로 박열과 함께 검거되어 1926년 3월 25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일본 당국은 그 해 7월 가네코 후미코가 일본 도치기현 우쓰노미야[宇都宮] 형무소 여죄수 독방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형무소 측은 자살 도구나 현장 상태에 대해 전혀 공개할 수 없다고 버텼는데, 이러한 태도는 가네코의 죽음의 진실이 드러날 경우 형무소나 국가 권력에 큰 타격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을 얻었다. 당시 박열과 가네코가 옥중 결혼을 했다는 소문이 무성하였고, 가네코가 옥중에서 임신까지 하게 되자 당국이 외부로 알려지면 비난받을 것을 두려워 하여 낙태 수술을 하다가 숨졌다는 설도 있어 그녀의 죽음을 둘러싸고 여러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후 박열의 맏형이 일본으로 건너가 후미코의 시신을 수습하여 그 해 11월 5일 선영인 문경시 팔령산에 안장하였다. 2003년 11월 그녀의 묘는 박열의사기념관 옆으로 이장되었다.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죽고 한국에 묻혔다.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여자로서 조선의 남자를 사랑하고, 민족의 차이를 뛰어넘어 한 남자를 사랑하고 일본 제국주의를 반대했던 것이다. 그녀는 자기 민족만을 위하는 좁은 민족주의를 버리고 세계의 모든 사람이 다 같이 자유와 평등을 누리며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꿨던 것이다.

  • 질문1 가네코 후미코가 천황제를 반대한 이유를 써 봅시다.
  • 질문2 일본인인 가네코 후미코가 경북 문경시에 묻힌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3 가네코 후미코의 사상과 태도 중에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 있다면 무엇일지 생각해 봅시다.

읽기자료 8

박열의 영원한 일본인 동지 후세 다츠시

후세 다츠시[布施辰治]는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인도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변호사이자 법률가, 사회운동가로 활동하였다. 그는 일생 동안 자유․평등․민권을 바탕으로 약자를 위해 온 몸을 불사른 고귀한 정열의 변호사였다. 그의 일생은 “살아서는 민중과 함께 죽어서도 민중을 위하여”라는 좌우명으로 일관하였으며, 일본 민중뿐만 아니라 당시 피압박 조선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우리 민족을 위한 의열 변호사였으며 해방 운동가였다.
박열이 1921년 10월 혈권단을 조직하여 활동할 때부터, 그는 후세 다츠시 변호사와 밀접한 협력 관계를 가졌다. 그 후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흑도』와 『후데이센징(太い鮮人)』과 『현사회』를 발간할 때, 광고란에는 “프롤레타리아의 벗 변호사계의 반역자 후세 다츠시”가 빠짐없이 실려 있었다. 이들은 동지적 관계를 넘어 운명적인 관계로 이어졌다.
후세 다츠시는 박열의 변호인으로 그의 무죄를 주장하였으며,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수감 중인 박열을 여러 차례 면회하였다. 특히 대심원 공판에서 박열이 요구한 4가지의 조건을 사법 당국과 절충하는 등 공판 준비와 교섭 사후 처리를 도맡는 등 동지애를 발휘하였다. 또한 마지막 선고 공판을 앞두고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옥중 결혼 수속을 밟아주었다. 가네코 후미코가 옥사하자 불령사 동지들과 함께 그녀의 유골을 수습하여, 박열의 고향 문경에 안장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 질문1 후세 다츠시의 좌우명을 써 봅시다.
  • 질문2 후세 다츠시가 박열과 동지적 관계를 계속 유지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3 후세 다츠시가 박열을 위해 활동한 내용을 정리해 봅시다.

읽기자료 9

박열의 천황제 반대 이유

내가 일본의 황실, 특히 일본의 천황․황태자를 대상의 하나로, 가장 중요한 자 중 하나로 든 것은 첫째, 일본 민중에 대해서는 일본 황실이 일본 민중의 고혈을 착취하는 권력자의 간판이며 또 일본 민중이 미신으로 하고 있는 신성한 것. 신과 같은 자가 아니라 그 정체는 실은 유령과 같은 자에 지나지 않음을, 즉 일본 황실의 진가를 알리고 그 신성함을 땅에 떨어뜨리기 위해서이다. 둘째, 조선 민중에 대해서는 동 민족이 일반적으로 일본의 황실을 모든 실권자라고 생각하고 있고, 증오의 과녁으로 하고 있으므로 이 황실을 쓰러 뜨려 조선 민중에게 혁명적, 독립적 열정을 자극하기 위해서이다. 세 번째로 침체되어 있는 것 같은 일본의 사회 운동자에 대해서는 혁명적 기운을 불어넣기 위해서였다.

  • 질문1 박열이 천황과 황태자를 암살하려고 했던 이유를 세 가지로 정리해 봅시다.

    가.
    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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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사진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사형 언도를 전하는 1926년 3월 26일자 『조선일보』기사이다.

  • 질문1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사형을 언도받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시각자료 2

사진은 형무소에서 찍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모습이다.

  • 질문1 이 사진의 유출이 당시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지 ‘5. 읽기-5)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옥중 투쟁’에서 찾아 써 봅시다.
  • 질문2 옥중에서 두 사람이 만나 사진을 찍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지 5. 읽기-5)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옥중 투쟁’에서 찾아 써 봅시다.

시각자료 3

사진은 박열 석방 환영대회 광경이다.

  • 질문1 도쿄에서 열린 박열 석방 환영 대회에서 있었던 일화를 ‘5. 읽기-6) 박열의 석방과 활동’에서 찾아 써 봅시다.

시각자료 4

사진은 유해 발굴 작업을 하는 장면이다.

  • 질문1 이 사진은 박열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일이다. 무슨 사업인지 ‘5. 읽기-6) 박열의 석방과 활동’에서 찾아 써 봅시다.
  • 질문2 이 당시에 유해를 봉환한 3의사의 이름과, 그 분들의 묘가 현재 어디에 있는지 말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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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모둠별로 박열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옥중에서 국내 청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2
모둠별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일생을 UCC로 만들어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모둠별로 가네코 후미코의 입장에서 법정에서 말할 최후 진술문을 작성하여 발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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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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