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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집터(제국의 심장을 향해 폭탄을 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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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1월 8일 천황행렬에 폭탄을 던진 이봉창은 신문조서에서 자신이 천황을 죽이려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상하이에서 조선독립에 관해 연구하고 싶었으나 그럴 틈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연구결과로 천황폐하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을 먹게 된 것이 아니라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일본인은 관헌까지도 우리 조선인에 대해 차별대우를 하며 학대하고 있으므로 우리 조선인은 어떻게 해서든 조선을 독립시켜 조선인의 국가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터에 백정선(김구)으로부터 천황폐하를 죽이는 것이 조선의 독립을 촉진시키는 첩경이라는 말을 듣고 과연 그렇다고 생각되어 2천만 동포를 위해 희생하여 천황폐하를 죽이자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덧붙여 말씀드리거니와 나는 천황폐하를 죽이는 일을 결코 이봉창 한 사람이 멋대로 벌이는 난폭이 아니라 조선 민족이 전반적으로 독립을 희망하고 있기 때문에 그 민족을 대표하여 제일선의 희생자로서의 결행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봉창 7회 신문조서」


일제 강점기 가난한 환경에 처하게 되어 진학의 길을 포기하고 여러 직업을 전전하는 과정에서 겪은 민족적 차별에 대한 경험은, 조선인에 대한 자기비하 속에 스스로 일본인으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조선인의 삶과 일본인의 삶 중 선택을 강요받기에 이른다.
조선인들과 교류를 단절하고 일본인의 삶을 살아가고자 선택했으나, 일본인으로 행세하는 중에 겪은 고통은 결국 조선인으로 사는 길을 택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희생을 통해 민족과 국가의 독립을 성취시켜야한다는 각오로 일왕(日王)의 마차 행렬이 경시청 정문 앞을 막 통과할 때 미리 준비한 폭탄을 일왕을 향해 던졌다. 비록 목적한 대로 일왕을 처단하지 못하였지만,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과시하여 한국의 독립문제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항일전에 있어 한중합작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민족과 국가의 독립을 성취하기 위해 목숨 바친 용감한 이봉창의 활동과 최후의 모습을 통해 나라사랑을 대대로 이어간 뜨거운 역사를 조명해 보자.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서울특별시 용산구 백범로59길 14-1
현재 상태 멸실 / 금양초등학교 뒷담을 따라 올라간 곳에 위치해 있는데, 현재 다세대 빌라가 들어서 있다. 6호선 효창공원역 1번 출구 옆에 서 있는 이봉창 집터 표지석은 잘못 설치된 것이다.

이봉창은 1901년 8월 10일 부친 이진구와 모친 손씨 사이에 2남으로 태어났고, 주로 용산의 금정(현 효창동) 일대에 살았다. 그는 식민지 시기 ‘조선인’으로 살아가면서 차별대우에 대해 불만도 있었지만 순응하며 살고자 하였다. 이러한 이봉창의 생각이 크게 바꾸어지는 계기가 있었다. 1928년 일왕즉위식을 참관하려다 무고하게 유치장에 감금당한 것이 그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평범하게 살아가던 이봉창의 삶이 크게 변화하였다. 그것은 이봉창에게 있어 조국독립운동에 몸을 바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는 중국 망명을 결심한 후 1931년 1월 중순 상하이에 도착하였고 곧바로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김구와의 만남은 이봉창의 인생행로를 결정짓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에 있을 때 조선인으로 사는 길, 즉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길로 이끌어주는 사람을 간절히 바라다가, 상하이에 와서 김구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일왕의 처단을 추진하였다.
1931년 12월 22일 동경에 도착한 이봉창은 김구에게 “상품은 1월 8일 꼭 팔릴 터이니 안심하라”는 전보를 보내 1932년 1월 8일에 거사하겠다는 것을 알렸다. 1932년 1월 8일 예정대로 동경의 요요기 연병장에서 육군시관병식이 거행되었다. 이봉창은 가지고 있던 폭탄을 일왕을 향해 던졌다. 폭탄 투척 후 체포된 이봉창은 모두 9차례에 걸쳐 신문을 받았다. 재판은 대법원(현 최고재판소)에서 이뤄졌다. 그리고 1932년 9월 30일 그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 10월 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의 나이 서른둘이었다.
이봉창이 원래 살던 집은 현재 없어지고 다세대 빌라가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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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방황하는 식민지 청년

이봉창은 1901년 8월 10일 부친 이진구와 모친 손씨 사이에 2남으로 태어났고, 주로 용산의 금정(현 효창동) 일대에 살았다. 아버지가 병석에 누우면서 집안 형편이 기울어 이봉창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라야 했다. 10세에 용산에 있는 문창보통학교에 입학한 그는 4년 만에 이를 졸업하고 생계를 위해 19세 때까지 5년여 동안 일본인 상점에서 점원으로 일하였다. 이때 이봉창은 일본말을 능숙하게 할 정도의 실력을 갖게 되었다.
1919년 8월경 이봉창은 용산역에 취직하였다. 용산역에서 일하는 동안, 이봉창은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커다란 차별이 있음을 체험하였다. 자기보다 늦게 채용되어 자기가 가르쳤던 일본인이 자기의 상급자가 되어 “거꾸로 내가 그들 밑에서 일하는 처지가 됐다”고 한다. 이봉창은 이러한 민족적 차별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되었다. 그렇지만 자신이 조선인으로 태어났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그러한 차별을 견디어낼 수밖에 없다는 것, 그 이상의 생각은 갖지 못한 상태였다.
이봉창은 조선인이 차별받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자신은 조선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이고, 조선인이기 때문에 별 도리 없이 참아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자기보다 늦게 들어온, 더욱이 자기가 가르쳤던 일본인 밑에서 일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많은 번민을 하였던 것 같다. 결국 그는 친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용산역에서 일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 질문1 이봉창이 느낀 일본인과 조선인에 대한 차별대우가 어떤 것인지 찾아봅시다.
  • 질문2 이 같은 차별대우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분은 어떤 행동을 하였을지 이야기해봅시다.

읽기자료 2

신일본인의 꿈과 좌절

용산역에서 사직한 후 이봉창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은 국내보다 일자리도 많았고 임금도 훨씬 높았다. 이로 인해 많은 한국인 노동자들이 일본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이봉창도 오사카에 도착한 후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조선인인 그가 일자리를 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이러한 현실을 부정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조선 사람임에도 취직을 부탁하거나 세상에 얼굴을 내미는 자체가 잘못이라는 생각을 갖기도 하였다.
이봉창은 일본에서 일본인과 같은 대접을 받으며 살고자 하였다. 일제의 식민지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자신은 일본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인으로 태어났지만, 일본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고, ‘신일본인’이란 용어를 쓴 것은 그러한 의미였다. 무엇보다도 이봉창은 일본말을 잘 하였기 때문에, 일본에서 자신의 생활을 영위하는 데 큰 불편을 느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일본인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 이처럼 일본에 건너온 후, 이봉창은 일본사회에 비교적 쉽게 적응하였다. 처음에는 ‘조선인’으로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지만, 얼마 안 있어 별다른 차별 없이 자신을 일본인과 동등하게 여기며 생활할 수 있었다. 그는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이름을 갖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봉창의 의식과 생활을 뒤바꾸어 놓는 계기가 있었다. 일왕즉위식에 참관하려다 구금된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봉창은 경찰에 구금된 사건을 계기로 자신을 돌이켜보고, 많은 생각을 하였다. 이봉창은 자신이 일본인으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다가 자신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봉창은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혼란의 핵심은 ‘조선인으로 사느냐’ 아니면 ‘일본인으로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 문제를 가지고 이봉창은 심각하게 고민하였다.

이때부터 (중략) 사상도 절로 변해 어떤 사상운동에 몸과 마음을 던지기로 마음먹고 기회를 엿보았으나 기회를 찾지 못했다. 그때의 사상은 특별히 정한 사상은 없었다. 무엇이든 좋다. 누군가 끌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들어갈 기분이었다. 그 후 다시금 생각하게 되어나는 조선인이니까 조선독립운동에 몸을 바쳐서 우리 2천만 동포를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기회를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스스로 생각을 고쳐먹어 한번 완전히 일본사람으로 속이고 살아볼까 하는 생각도 났다.

이봉창은 2년여의 번민 끝에 조선인으로 사는 길을 택하였다. 조선인으로 산다는 것, 그것은 이봉창에게 있어 조국독립운동에 몸을 바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바로 조선인으로 살기 위해, 즉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상하이 망명을 결심하였다.

  • 질문1 이봉창이 말하는 ‘신일본인’은 무엇이며, 오늘날 이봉창처럼 자신을 ‘신일본인’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은 감정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찾아봅시다.
  • 질문2 이봉창이 2년여의 번민 끝에 결국 조선인으로 사는 길을 택한 것은,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무엇이 있었기 때문일까요?

읽기자료 3

상하이 1년, 운명을 바꾼 김구와의 만남

1931년 1월 중순 상하이에 도착한 이봉창은 곧바로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이봉창이 임시정부를 찾아갔을 때 그는 임시정부 인사들로부터 의심을 받았다. 일본말과 한국말을 섞어가며, 그리고 행색조차 일본인과 흡사한 그를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이런 이봉창을 유심히 보고 관찰한 인물은 백범 김구였다. 어느 날 이봉창은 청년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일왕을 도살하기는 극히 용이한데 어찌하여 독립운동자들이 이것을 실행하지 않느냐”고 하면서, “내가 작년 도쿄에 있을 때 일왕이 교외에 행차한다기에 구경하였는데, 일왕이 바로 내 앞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고 만약 지금 내 손에 총이나 폭탄이 있다면 일왕을 처치하는 것은 쉬울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김구는 이봉창을 찾아가 그의 본마음이 어떤지 떠보았고, 봉창이 한 말을 다음과 같이 적어놓고 있다.

제 나이 31세입니다. 앞으로 다시 31년을 더 산다 해도 과거 반생 동안 방랑생활에서 맛본 것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으니,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꿈꾸며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하이로 왔습니다.

김구와의 만남은 이봉창의 인생행로를 결정짓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에 있을 때 누군가가 끌어주는 사람을 갈망하였다가, 상하이에 와서 김구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일왕의 처단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폭탄과 자금을 준비한 김구는 이봉창을 불러 일본으로 향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고 12월 13일 이봉창이 일본으로 향할 준비를 갖추고 찾아오자, 안공근(안중근의 동생)의 집으로 데리고 가 한인 애국단에 입단시키고 미리 준비해 간 선서문을 읽어주었다.

나는 적성(赤誠 ;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정성)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정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야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首魁 ; 일왕)를 도륙(屠戮 ; 사람이나 짐승을 마구 죽임)하기로 맹세하나이다.

한인애국단에 입단하고 선서식을 마친 후, 혁명의 동지로서 마지막 밤을 함께하고자 이봉창은 김구와 밤을 같이 보냈다.
다음날(12월 14일) 이봉창은 김구와 함께 사진관으로 갔다. 이 세상에서는 함께 있지 못하지만, 저 세상에서라도 함께 있자는 뜻으로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김구의 얼굴이 굳어졌다. 김구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이봉창이 웃는 얼굴로 도리어 김구를 위로하며 “저는 영원한 쾌락을 누리고자 이 길을 떠납니다. 큰일을 반드시 이룰 것인데 서로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으십시다.”라고 하였다. 오히려 이봉창이 김구를 위로한 것이다. 1931년 12월 17일 상하이를 떠난 그는 일본 고베를 거쳐 22일 동경에 도착하였다.

  • 질문1 이봉창이 중국으로 건너가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해 봅시다.
  • 질문2 임시정부의 사람들은 이봉창을 왜 의심했으며, 김구는 이봉창의 진심을 어떻게 알 수 있었나요?
  • 질문3 김구가 거사 전에 이봉창을 가입시킨 단체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4

제국의 심장에 폭탄을 던지다.

1931년 12월 22일 동경에 도착한 이봉창은 28일 《도쿄 아사히 신문》을 통해 1932년 1월 8일 육군시관병식이 거행된다는 것과 이 행사에 일왕이 참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봉창은 즉시 김구에게 “상품은 1월 8일 꼭 팔릴 터이니 안심하라”는 전보를 보내 1월 8일에 거사하겠다는 것을 알렸다. 관병식은 예정대로 동경의 요요기 연병장에서 거행되었다. 이봉창이 도착하였을 때, 일왕의 마차 행렬이 경시청 정문 앞을 막 통과하고 있었다. 이봉창은 가지고 있던 폭탄을 일왕을 향해 던졌다. 폭탄은 일왕의 마차 뒤쪽에서 커다란 폭음을 내며 폭발하였다. 목적한 대로 일왕을 처단하지는 못하였지만, 일본의 수도 한 복판에서, 그것도 경시청 정문 앞에서 일본인이 신성시하는 일왕을 향해 폭탄이 투척되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것은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폭탄을 던진 후 관계없는 사람들이 체포되는 것을 보고, 자신이 폭탄을 던진 사람이라고 밝히고, 자진하여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에도 이봉창은 당당하고 의연한 태도를 견지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9년에 처음 공개된 이봉창의 재판기록을 보면 이봉창은 굽히지도 않았고, 비겁하게 굴지도 않았다. 일본인 판사 앞에서 ‘일왕의 목숨을 빼앗고 싶었는데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라고 떳떳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봉창은 신문 과정에서 배후에 대해 집중적인 조사를 받았다. 그렇지만 끝까지 김구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오직 백정선의 지시를 받았다고 하며, 김구를 끌어들이지 않았다.
이봉창은 체포된 후, 모두 9차례에 걸쳐 신문을 받았다. 재판은 대법원(현 최고재판소)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1932년 9월 30일 사형이 선고되었고, 10월 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의 나이 서른둘이었다.

  • 질문1 이봉창이 김구에게 보낸 “상품은 1월 8일 꼭 팔릴 터이니 안심하라”는 전보의 내용을 해독해 봅시다.
  • 질문2 이봉창은 왜 신문 과정에서 김구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백정선이라는 김구의 가명만을 말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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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한국에 있는 형에게 보내기 위해 찍은 기념사진

  • 질문1 이봉창이 이승에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함경북도 청진에 있는 형에게 보내달라는 부탁과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이 사진과 함께 형에게 남기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지 가상 유언장을 작성해 봅시다.
  • 질문2 이봉창이 태극기 앞에서 마지막 기념사진을 찍은 것은, 자신의 어떤 결심을 알리기 위해서였을까요?

시각자료 2

삼의사의 묘(서울 효창 공원)

  • 질문1 삼의사의 묘에 가서 각각 무덤의 주인을 찾아 참배하고, 그들의 활동내용을 조사해 봅시다.
  • 질문2 맨 왼쪽에 비석이 세워져있지 않은 무덤은 누구의 무덤인지 알아봅시다. 또한 비석을 세우지 않은 이유에 대해 조사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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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최근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테러활동과 같은 것으로 잘못 인식하거나 그 차이점을 모르는 경우가 있다.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테러활동과 유사한 점은 무엇이고, 다른 차이점은 무엇인지 토의하여 봅시다.
모둠활동 2
한인애국단 단원 윤봉길의 활동 내용을 찾아서 이봉창의 활동과 비교해보고, 다음 글에 나타난 한인애국단의 활동 목적을 말해 봅시다.

내가 조국의 자유와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혁명 사업에 헌신한지 무릇 40년에 하루라도 폭렬행동을 잊은 적이 없다. 물론 이러한 행동으로만 우리의 혁명 사업이 전부 성공되리라고 생각하는 바는 아니지만, 참담한 시선에 처한 우리로서 최소의 역량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은 이길밖에 다른 길이 없다. 그러므로 오직 이 방면에 전력을 경주하였다.
<김구, 「동경작안의 진상」>


우리는 소위 폭행-테러라는 것을 결코 찬양하는 자가 아니며 혁명의 사선을 헤매던 우리에게는 이 길이 최소의 역량을 가지고 가장 위대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확호한 인식에서 출발되었다.
<김구, 『도왜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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