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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호의숙 터(위정척사 사상을 반식민지 투쟁으로 연결했던 민족교육의 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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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1860년대 초 충장공 후손 영장(營將) 남석구공(南錫龜公)과 승지 남보영공(南普永公), 유학자 남계옥공(南啓沃公)이 말년에 설립한 종숙(宗塾)으로 남규희, 남택희와 여러 인물들로 이어지고 재단인 학량계(學糧稧)가 중도 해체되니 강계(講稧)를 조직 운영하고 타성들도 수학하게 되어 의숙이라 하다 조선말기(1870-1891)에 충장공 후예 등과자가 18명이고 영장(營將) 부사(府使) 군수(郡守) 주부(主簿) 의관(議官) 등 출사하였다. 이름 높은 스승으로 화서 이항로 선생 학통인 존재(存齋) 유진하(兪鎭하) 선생, 직암(直庵) 이철승(李喆承) 박사, 용암(庸庵) 심원성(沈元星) 선생이 있었고 독립운동과 기미년 대호지 4․4 운동 주도자로 후학 남정, 남상익, 남주원, 남상돈, 남상락, 남상집, 남상직, 남상은, 이춘응, 이대하, 전성진 선생을 들 수 있고……

2003년 10월에 세운 도호의숙 유지비 내용의 일부이다. 도호의숙(桃湖義塾)은 1860년대 당진군 대호지면 도이리에 의령 남씨 집안에서 세운 글방[宗塾]으로 화서학파(華西學派 : 위정척사 사상가 이항로의 학문을 잇는 성리학파)의 학맥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개항 이후 다른 지역에서 근대 학문이 일어났던 데 반하여, 도호의숙에서는 전통 학문에 치중하였다. 이러한 전통적인 교육은 도호의숙 출신의 인물들이 일제 강점기에 대호지의 3·1운동을 주도하고 독립 운동에 투신하는 데 자양분 역할을 하였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도이리 174
[도로명 주소 :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충장로 534-3]
현재 상태 멸실 / 당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으며 새로운 주택이 건축되어 있다.

1914년 조사에 의하면 대호지면의 인구는 849호에 4,657명으로 남자 2,402명, 여자 2,255명이었다. 이곳은 지형이 폐쇄적이어서 집성촌이 발달하였다. 동족마을이 발달되어서 문중의 자제를 교육시키는 종숙(宗塾 : 가문에서 만든 기숙형 글방)이 많았다. 도이리의 의령 남씨들이 설립한 도호의숙을 비롯하여, 밀양 박씨들이 1870년대 설립한 사성리의 반곡정사(盤谷精舍), 연안 차씨들이 세운 적서리의 강당(講堂) 등이 확인되고 있다. 이 외에도 두산리의 두릉정사(杜陵精舍), 송전리의 창말서당, 남주원이 사성리에 설립한 반곡학당 등이 있었다.
충장공 남이흥(南以興)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그의 큰 아들인 남두극(南斗極)이 면천 군수로 재임할 때 그의 어머니를 모시고 오면서 남이흥의 후손들이 대호지에 정착하게 되었다. 남두극은 1641년(인조 19) 도이리에 집을 지었으니, 이후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도이리를 비롯한 대호지 일대에 세거하게 된 것이다.
도이리에는 남이흥의 업적을 기리고 종중의 단합을 위한 활동이 이어졌다. 후손들의 대종계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도호의숙 역시 의령 남씨 종중의 남석구(南錫龜)와 남보영(南普永), 그리고 남계옥(南啓沃) 등이 중심이 되어 1860년대 초에 건립되었다. 이후 남보영의 아들 청파(靑坡) 남규희(南圭熙)가 1901년 도이리 신나무골[楓谷]에 단독 건물을 세우면서 본격적인 학당으로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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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사상적 배경

당진군은 서산, 예산, 홍성, 태안과 더불어 내포 지역에 포함된다. 이곳은 개항을 전후하여 위정척사적 학풍이 강하게 나타났다. 내포 지역 위정척사파는 최익현(崔益鉉), 유진하(兪鎭河), 윤석봉(尹錫鳳) 등의 화서학파(華西學派)와 김복한(金福漢), 이설(李偰)과 같은 남당학파(南塘學派)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홍성과 보령, 서산, 당진 등의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었다. 이들 학파에 속하는 학자들은 개화에 반대하며 외세를 배척하는 성향이 강하였고, 존화양이론에 근거하여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진 대호지면에 건립되었던 도호의숙은 화서학파 학맥의 영향이 매우 강하였고, 남당학파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화서학파는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를 이어받은 학맥으로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위정척사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항로는 경기도 양평에서 화이론(華夷論 : 성리학 문화를 지키는 중국 및 조선과 서양 오랑캐를 구분하는 사상)과 존화양이(尊華攘夷 : 성리학 문화를 받들고 오랑캐를 물리치자)의 이론을 체계화하여 위정척사의 이념을 구축하였다. 이항로의 사후에 그의 제자 유중교(柳重敎)가 제천으로 이주함으로써 을미사변 후 이곳에서 의병이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또한 경기도에 거주하던 최익현을 비롯하여 유진하, 윤석봉 등이 충남에 화서학파의 토대를 닦았다. 최익현은 1900년 4월 지금의 충남 청양군 목면 송암리로 이주하여 6년 여 동안 거주하면서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의 토벌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또한 1905년 12월 노성의 궐리사(闕里祠 : 공자의 영정을 모신 사당) 교수인 신협(申梜)의 초청을 받아 이곳에서 강회를 열어 일제의 침략에 대항할 방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유진하는 경기도 고양군 벽제 출신으로, 1871년 유중교의 문하생이 되어 화서학파에 입문하였다. 50세가 되었던 1895년 9월에 서산시 대산면 대로리로 이주하였다가, 1899년에는 서산시 운산면 거성리 추계마을로 이사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1906년 도호의숙에 초빙되어 강의를 하였다. 유진하는 이철승, 이철영, 심원성, 민태직 등 다수의 제자를 길러냈다.
이철승(李喆承)은 서산시 음암면 탑곡리 출신으로, 유진하가 추계에서 교육할 때 그의 문하생이 되어 수학하였다. 후에 이철승 또한 도호의숙과 보은의 관선정(觀善亭)에서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도호의숙에서는 남상혁을 비롯하여 남상찬, 남천우 등 다수의 문인을 양성하였다.
남당학파는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의 학설을 따르는 인물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대한제국시기 남당학파 인물로 김복한(金福漢)과 이설(李偰)을 비롯하여 백낙관(白樂寬), 김상정(金商玎), 김상덕(金商德) 등이 있다.
김복한은 한원진을 주자(朱子)에 버금가는 인물로 숭상하였다. 그는 과거에 급제한 후 동부승지로 고종을 측근에서 모셨으나, 1894년 일제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나타나자 벼슬을 벼리고 홍주로 낙향하여, 1896년과 1906년에 홍주 의병을 일으켰다. 3·1운동 때는 유림들의 독립 의사를 파리 강화 회의에 제출한 파리 장서 운동을 주도하였다. 김복한의 문인으로는, 그의 아들 3형제와 이철승, 김좌진, 남상혁 등이 있다. 남상혁은 3·1운동 이후 도호의숙에서 교육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 질문1 대호지면이 속한 내포 지역의 학문과 사상에 많은 영향을 준 두 학파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이항로의 문하생인 유중교의 제자로 도호의숙에서 강의했던 인물은 누구인가요?
  • 질문3 도호의숙에서 강의를 담당했던 인물 가운데 화서학파이면서 동시에 남당학파에 속한 인물들을 말해 보시오.

읽기자료 2

도호의숙의 설립과 운영

도호의숙은 원래 가문 내의 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종숙(宗塾)으로 세워졌다. 1860년대 초 남이흥의 7대손인 남석구와 그의 조카인 승지 남보영, 그리고 유학자 남계옥 등 세 사람이 처음 설립하고, 학량계(學量契)라는 일종의 운영 재단도 설치하였다고 한다. 1901년 남보영의 아들 청파 남규희가 도이리 신나무골에 집을 한 채 구입하여 본격적인 학당(學堂)의 성격을 갖게 되었으며, 그는 강학도 담담하였다. 의령 남씨 종중에서는 수십 두락의 전답을 제공하여 운영비에 충당하게 하였다. 또한 학당의 규약을 정하고, 원활한 운영을 위해 강계(講契 : 강의를 경제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만든 계)까지 설치하였다. 남규희가 죽은 뒤 그의 동생인 남택희(南宅熙)가 무과에 급제했으면서도 벼슬을 하지 않고 도호의숙의 운영을 담당하였고 학당을 넓히기도 하였다.
도호의숙은 1906년 2월 유진하를 훈장으로 모셔오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학생 수가 늘어서 서당이 비좁을 정도가 되자, 그 해 3월에 의숙 남쪽에 바깥채를 세웠다. 그러나 유진하가 1906년 8월 역질로 갑자기 사망하여 그의 제자인 어취선(魚聚善)을 모시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어취선은 화서학파의 유학자로서 제천의 유인석과 긴밀한 관계였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결국 강학을 맡을 이가 없어 1년이 넘도록 문을 닫았다가 1907년 11월 정기호(鄭耆好)를 초빙하여 학생들의 학업이 다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1908년 11월 정기호가 갑자기 가족을 데리고 떠나면서 또다시 문을 닫는다. 1909년 2월에 유진하의 문인인 심원성(沈遠聲)을 강사로 초빙하였다.
그런데 1909년 10월 과동에 거주하는 종중이 의숙을 철폐할 것을 주장하고, 종중계에서 탈퇴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글방에 오는 학생 수는 4분의 1로 줄었다. 게다가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당하면서 도호의숙은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1914년 봄 이후 유진하의 제자 이철승이 훈장을 맡으면서 의령 남씨 외에 다른 집안 출신도 모집하여 교육시켰다.
도호의숙은 1919년 대호지 만세 운동 후에 도호학당으로 개칭되었다. 그 후 도이강습소(桃李講習所)로 명맥이 이어지다가 일제의 강압으로 1930년대 초에 완전히 폐쇄되었다.

  • 질문1 처음 설립되었을 당시 도호의숙에 입학할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였나요?
  • 질문2 집안의 교육을 위해 독립된 건물을 마련한 인물은 누구인가요?
  • 질문3 도호의숙이 중간 중간 문을 닫았다가 다시 이어지게 되었던 이유를 말해 보시오.
  • 질문4 도호의숙에 초빙되어 강학을 담당했던 인물들을 말해 보시오.
  • 질문5 도호의숙이 1930년대 초 완전히 폐쇄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3

도호의숙의 교육 내용

도호의숙의 교육 내용은 유진하와 그의 제자 이철승의 교육과 방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학생들은 유진하와 이철승 같은 사상을 가진 유학자들로부터 위정척사론을 배웠다.
유진하는 주로 경서와 사기를 강학하였다. 초학자에게는 먼저 『소학(小學)』을 교재로 삼게 하고, 15세 이하에게는 반드시 『격몽요결(擊蒙要訣)』을 강학하여 학문의 방향을 교정하였다. 유진하는 제자들에게, 화서학파의 문하생들이 경서를 돌려가면서 외우게 하는 방식으로 철저하게 강학하였다. 또한 일반 서당에서 시를 읊고 짓는 것을 중시했던 반면, 도호의숙에서는 경전의 의미와 사기(史記 : 역사에 대한 의견)를 밝히는 산문으로 문장을 짓는 공부를 시켰다. 유진하를 강사로 초빙한 후 도호의숙에서는, 『대학』과 『소학』, 『송자대전』 한 질을 구입하였으며, 학생들에게 이항로의 문집인 『화서집』 한 질을 베끼게 하였다.
이철승은 삼강오륜이 학문의 근본이요, 사서삼경이 학문의 도구라면서 철저하게 주자학을 신봉한 유학자였다. 그는 “사람에게 사(邪 : 사악함)와 정(正 : 올바름)이 있는 것은 하늘의 음양(陰陽)이 병립(竝立 : 한 자리에 같이 있음)함을 용납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정(正)이 소멸하면 사(邪)가 장성하니, 그 약해지고 강해짐에 따라 사람에게 옳고 그름과 이롭고 해로움이 달라진다.”고 하였다. 이는 정학(正學 : 성리학)과 사학(邪學 : 서양에서 들어온 학문과 종교)은 결코 같이 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존화양이론을 철저하게 지키겠다는 내용이다. 이어서 “위정척사는 군자의 큰 의리이니, 이 의리가 있으면 인도(人道 :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가 있고, 이 의리가 망하면 인도가 식으니 경계하고 두려워하지 않겠는가”라고 위정척사가 곧 군자의 의리가 된다고 강조하였다. 이철승의 제자 남상혁은 『극재유고(克齋遺考)』에서, 신학문은 물질을 다루고 재주와 기술의 응용에만 관심을 가지기 때문에, 삼강오륜의 큰 도(道)을 알지 못한다고 하여, 구학문이라고 하는 유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신학문이 한갓 부국강병만을 알 뿐이라고 비판하였다.

  • 질문1 유진하가 처음 공부하기 시작하는 학생에게 반드시 공부시켰던 교재는 무엇인가요?
  • 질문2 다른 일반 서당과 달리 도호의숙에서 유진하가 중시했던 교육을 말해보시오.
  • 질문3 이철승이 학문의 근본이라고 강조한 것은 무엇인가요?
  • 질문4 이철승의 제자 남상혁은 신학문을 어떻게 평가하였나요?
  • 질문5 도호의숙에서 철저히 교육한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의 뜻을 말하고, 위정척사론이 외세의 침투에 대항하여 1860년대부터 1890년대의 역사에서 어떤 모습으로 전개되었는지 4 단계로 정리해 봅시다.

읽기자료 4

도호의숙과 대호지 4․4 만세 시위 운동

대호지 만세 시위는 1919년 이 지역 유생들이 고종의 인산에 참례하기 위해 상경하면서 시작되었다.
김복한이 남상혁을 불러 “너는 고향에 가서 어른들께 의거를 일으키라는 연락을 하고, 그곳에서 일하라.”고 지시하였다. 남상혁은 대호지로 와서 할아버지 남진희(南軫熙)와 무과에 급제하여 한성부윤과 장위영 경무사를 지낸 남명선 및 남계창(南啓昌), 남주원(南柱元), 남상집(南相集) 등에게 알렸다. 남상혁이 왔을 때는 마침 의령 남씨 문중에서 ‘남병사’라 불렸던 남명선의 집에서 망국의 한을 달래며 시국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김복한의 뜻이 전달되자 이 지역 유림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1919년 3월 3일로 발표된 고종의 장례일에 참례하기 위해 대호지 유생들이 상경하였다. 남계창이 조카 남주원과 함께 2월 27일 또는 28일경 서울에 가서 그곳의 정황을 파악하였다. 남주원은 도호의숙에서 6년간 수학하였고, 서울에서 중동학교와 해동신숙을 졸업하고 해미군 공립보통학교 학무위원을 지냈다. 그는 당시 대호지면에서 가장 큰 부자였다. 뒤이어 도호의숙에서 함께 공부한 유생 남상락, 남상돈, 남상직 등이 서울에 도착하자 이들과 함께 서울에서 전개된 3·1 동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귀향하여 독립 시위를 일으킬 것을 결의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1통을 얻어 석유 램프 안에 숨겨서 인천을 거쳐 배편으로 대호지까지 돌아왔다.
서울에서 돌아온 인물들을 중심으로 두 차례의 모임을 가진 뒤 ‘독립운동 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1차로 남상락, 이춘응, 남상집, 남상돈 등이 거사를 논의하고 생사를 함께하자며 의형제를 맺었다. 2차로는 당시 대호면장인 이인정(李寅正)을 포함하여 면사무소 직원 및 용인(庸人), 도호의숙 훈장 한운석(韓雲錫) 등 37명의 인물을 규합하였다.
독립운동 추진 위원들은 4월 4일 인근의 정미면 천의장에서 독립 만세 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4․9장인 천의장은 정미면, 대호지면, 고대면의 주민이 모이는 곳이었다.
4월 4일 아침 9시경 대호지면사무소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에 당진읍 주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도로 수선을 위해 집합하라는 면장 이름의 공문을 각 마을 구장들에게 전한 결과였다. 면사무소에 모여든 군중은 약 500여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
약 9m 정도 되는 대나무에 매단 태극기가 펄럭이는 자리에서 면장 이인정이 “조선 독립을 위해 조선 독립 만세를 부르며 천의장으로 향하자”는 연설을 하였다. 이어 도호의숙 훈장 한운석이 손수 작사한 애국가가 제창되고 남주원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후 만세를 부르며 천의장으로 행진하자 길가의 주민들이 시위 대열에 속속 합류하였다. 약 7km 정도 떨어진 시장까지 가는 사이에 군중의 수는 계속 늘어나 800명이 되었고, 시장에 도착한 후에는 1천 명이 넘어섰다. 시위대의 기세에 당황한 일본 경찰이 천의 주재소를 폐쇄하고 서산으로 철수하였다. 주재소는 시위 대열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시위대는 일단 귀가하였다. 다시 4월 8일 오후 6시 대호지면 송전리 뒷산에서, 7시경에는 조금리에서 봉화가 솟아 올랐다. 밤 10시에는 대호지면의 반대편인 수당에서 300명의 주민이 횃불을 올리며 만세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일제는 평화적인 시위대에 총을 쏘는 등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대호지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형을 받은 도호의숙 출신들은 18명에 이른다. 또한 대호지 만세 운동에 참여한 인물들의 위패를 봉안한 창의사에는 60명에 달하는 남이흥의 후손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 역시 도호의숙의 교육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도호의숙 출신들은 대호지 4․4 만세 시위가 처음 계획되는 단계부터 참여하여 이를 주도하였다. 또한 만주에서 독립군 활동을 한 남정(南正)을 비롯하여 40여 명의 인물이 독립유공자에 추서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위정척사 사상의 중심인 화서학파를 이은 도호의숙의 교육이 일제에 저항하는 반식민지 투쟁의 디딤돌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도호의숙이 단지 한학을 전수하는 서당으로서의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대호지 지역에서 민족 교육의 중심 역할을 한 것이다.

  • 질문1 김복한의 지시로 대호지에 가서 의령 남씨 문중 인사들에게 3·1 만세 시위 계획을 알렸던 인물은 누구인가요?
  • 질문2 대호지면 출신으로 서울의 3·1 만세 시위에 참여한 인물을 모두 말해 보시오.
  • 질문3 4·4 만세 시위에서 불렀던 애국가를 손수 작사한 도호의숙의 훈장은 누구인가요?
  • 질문4 대호지 4·4 만세 시위로 체포되어 형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몇 명인가요?
  • 질문5 도호의숙 출신 중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인물은 몇 명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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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자료는 화서 이항로의 영정이다. 이항로는 화서학파를 이루어 위정척사론과 의병항쟁의 사상적 기초를 형성시킨 인물이다.

  • 질문1 자기의 출신 지역에서 화서학파의 영향을 받은 인물과 그 행적을 조사하여 정리해 봅시다.
  • 질문2 위정척사론의 의의와 한계를 말해 봅시다.

시각자료 2

자료는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서울에서 충청남도 당진군 대호지면의 자택까지 숨겨 올 때 사용했던 남포등이다. 남포란 석유를 넣어 불을 켜는 등으로 남포등이라 한다. 이는 당시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운반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던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 질문1 서울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구해서 남포에 숨겨 대호지까지 가져 온 남상락의 입장에서 그 과정을 일기 형식으로 써 봅시다.
  • 질문2 독립선언서를 구해서 읽고 주요 내용을 요약하여 써 봅시다.

시각자료 3

자료는 당진시 정미면 천의리에 있는 ‘4·4운동기념탑’이다.

  • 질문1 기념탑에 새겨진 조각을 보고 떠오르는 이미지를 말로 표현해 봅시다.
  • 질문2 대호지 4·4 만세 시위를 표현한 조각품을 제작한다면 어떤 모습으로 만들 지 그려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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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외세가 침략해 오는 상황에서 위정척사 사상과 개화 사상 중 어느 것이 상황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지 모둠별로 토론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2
도호의숙 출신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사람들의 행적을 정리하여 발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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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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