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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항 미곡 야적장(일제, 조선의 생명인 쌀을 빼앗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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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내항(內港)은 금강 하구 어귀의 항구로 1899년 5월 1일 개항 이후 8·15광복 전까지 호남 곡창지대에서 생산된 쌀이 일본으로 수출되는 대표적인 항구로 유명하였다. 일제는 전라도 등지에서 생산된 쌀을 이곳 군산항의 미곡 야적장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다가 일본으로 실어갔다. 쌀을 쉽게 배에 싣기 위하여 수면의 높이에 따라 자유롭게 움직이는 뜬다리 부두도 군산항에 설치하였다.
1910년 일제는 한국을 강제로 합병한 이후 토지 조사 사업을 실시하여 농지를 수탈하였다. 이 시기를 전후로 일본에서부터 한반도로 이주해 온 일본인들이 조선의 토지를 수탈하여 대지주로 성장하였다. 1920년대에 들어서 일제의 식민정책은 한국을 식량 및 원료생산지로 또 일본 공업 제품의 판매 시장으로 만들고자 산미증산계획에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식민지 농업 정책 때문에 곡창지인 전북 지역에 일본인 농장이 많았다. 일본인 지주들이 높은 소작료를 매겨 거둔 곡물은 가까운 군산항으로 집결되었다. 임시로 물건을 보관하는 군산 부두의 야적장에 쌀이 산처럼 높이 쌓였는데, 당시 군산에 있었던 10여 개의 정미소가 밤낮없이 가동되었을 정도였다.
1934년 한 해에 생산된 1,672만 석 가운데 약 60%에 해당하는 891만 석이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송출되었는데, 그 중 300만 석 이상은 전라도 지역에서 생산된 미곡이었다. 제3차 축항공사 기간에 만들어진 내항 창고 3동에는 쌀 25만 가마를 동시에 보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식민지 수탈로 몰락한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농민과 지식인들은 새로운 삶터를 찾아 항구 도시로 성장한 군산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다양한 조직을 만들어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키려 했을 뿐 아니라, 나라를 빼앗기고 차별받는 동포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군산항의 야적장에는 일제 강점기 농민들의 피땀인 쌀을 빼앗아 일본인의 배를 불리는 정책으로 고통받는 식민지 백성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다양한 유적들이 남아 있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전라북도 군산시 내항2길 32
현재 상태 인근에 군산 세관, 옛 조선은행 등이 있으며, 당시 쌀을 쌓았던 곳인 항만과 창고 주변은 진포해양테마공원과 방문객들을 위한 상가로 변했다.

군산은 1899년 개항을 했다. 개항과 동시에 몰려든 일본인들에게 전라도의 넓은 평야는 새로운 기회를 주는 땅이었다. 1910년 일제에 의한 강제 병합을 전후로 하여 그들은 일제의 강력한 지원 아래 토지를 빼앗고 새로 둑을 쌓아 농지를 만드는 간척 사업을 진행하였다. 전라도의 넓은 농지는 일본인 지주와 친일 지주들이 운영하는 거대한 농장으로 변하였고 대다수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일본인 지주들이 소작료로 받은 쌀은 군산항에 모여 일본의 오사카로 보내졌다. 이렇게 군산항은 일제 강점기 국내의 3대 항구로 곡물 수탈의 상징이 되었다. 군산의 동네 이름에는 장미동, 미장동, 미원동, 미룡동 등 쌀 미(米)자가 붙은 곳이 많은 데, 이는 바로 군산이 쌀 수탈의 기지였음을 보여준다.
군산내항 일대는 '쌀 곳간'을 의미하는 장미동(藏米洞)으로 불렸다. 일제가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와 충청도 일대에서 수탈한 미곡을 임시로 쌓아 두었던 부두 창고가 있었던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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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읽기자료 1

군산과 옥구 지역에 속속 건설된 일본인 농장

군산과 옥구 지역의 농장은 1903년 미야사키[[宮崎]], 구마모토[[熊本]], 시마타니[[島谷]], 오오쿠라[[大倉]] 등의 일본인들에 의해 설치되기 시작하였으며, 1910년 이전에 이미 10개의 일본인 대농장이 형성되었다. 그 후 1920년대에 이르러 50 정보 이상을 소유한 일본인 농장이 14개소, 30 정보 이상을 소유한 일본인 농장이 10여 개 소 등 총 20개가 넘는 일본인 농장이 세워졌다. 특히 1,000 정보가 넘는 거대한 농장이 전라북도에만 8개가 있어 전국 1위였다. 그 중 2개가 군산과 옥구 지역에 위치한 구마모토 농장과 이엽사 농장이었다. 이 중 구마모토 농장을 만들었던 구마모토에 대해 알아보자.
구마모토는 일본에서도 국제무역이 활발하게 이뤄지던 나가사키 출신이다. 그는게이오 대학 이재학과(지금 경제학과에 해당)에 다니던 중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해외 진출을 권장하던 시기에 조선에 건너왔다. 그는 전국을 여행하다가 우연히 군산의 넓은 농토와 만경강의 풍부한 수자원을 보고 대규모 농장 건설의 꿈을 키우게 되었다. 1903년 10월 일본 재계의 자금을 지원받아 500 정보의 논을 매입하여 시작한 농장은 1932년에는 농장 소유의 논만 3천 5백 정보로 여의도 면적의 10배가 넘는 규모로 확대되었다.
구마모토가 이렇게 대규모의 농장을 마련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조선의 토지 가격이 일본보다 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군산의 농지 가격은 일본의 10분의 1에 불과한 헐값이어서 농장을 운영할 경우 일본보다 4배가 넘는 토지 수익을 거둘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구마모토가 일본 재계의 자금을 지원받아 토지를 살 돈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친구의 소개로 미쓰이 은행 오오사카 지점장을 비롯한 일본 자본의 지원을 받아 토지를 쉽게 마련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일본인들이 군산의 토지를 쉽게 살 수 있도록 보증을 해 주는 ‘군산농사조합’의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농민들의 토지를 더욱 쉽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농장의 토지를 빌려 농사짓는 소작인들은 모두 한국인이었다. 그들이 농장에 내는 소작료는 수확의 40%였다. 그러나 농민들이 비료대금, 영농 자금 등의 비용을 모두 부담했기 때문에 농민들은 말 그대로 ‘죽지 못해 사는’ 가난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농사에 필요한 장비까지 따로 비용을 내고 빌려 썼다. 특히 구마모토 농장은 소작료도 다른 농장보다 비싼 편으로 풍흉에 관계없이 소작료를 일정 기간 안에 모두 내야 했는데 만약 약속한 날짜를 어기면 연체료를 내거나 목숨과도 같은 소작지를 몰수당하고 쫓겨나야 했다.
군산의 일본인 대농장들이 번영을 누리자 군산항의 쌀 수출량도 급속히 늘어났다. 1909년 군산항에서는 우리나라 전체 쌀 수출량의 32.4%가 통관되었다. 1920년대 일제가 추진한 산미증식계획으로 쌀 수출량은 점점 늘어나 1933년에 이르면 우리나라 전체 쌀 생산량의 53.4%가 일본에 반출되었다.

  • 질문1 군산에서 대농장을 경영한 대표적인 일본인 지주는 누구인가요?
  • 질문2 위의 일본인 지주가 대농장을 경영할 수 있었던 배경을 세 가지로 정리해 봅시다.
  • 질문3 농장에서 일하는 소작농민들의 생활이 어려운 이유를 두 가지 이야기 해 봅시다.
  • 질문4 일본인이 한국에 와서 토지를 싸게 사서 농장을 만들어 경영한 것을 ‘수탈’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를 토지 매입 과정과 농장 경영면에서 말해 봅시다.
  • 질문5 조선총독부의 기관으로서, 1910년대 토지 조사 사업으로 수탈한 전라북도의 토지를 가장 많이 소유하고 있었던 기관은 무엇이었을까요?

읽기자료 2

일제 쌀 수탈의 전진 기지, 군산항

조선시대의 군산은 전국 최고의 곡창 지대인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쌀을 세금으로 거두어 모은 세곡이 모이는 군산창과 이를 보호하기 위한 군산진이 설치되어 호남 지역의 요충지였다. 1899년 5월 1일 군산항이 외국에 개항하면서 해안 일대에 외국 상인들을 위한 조계지를 설치하고, 개항장의 상업 행위를 감독하는 옥구 관리소를 두었다. 대한제국은 군산의 조계지가 일본에 독점되지 않도록 각국의 공동 조계지로 정하였으나,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진행되면서 왜곡된 성장을 겪었다. 특히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본격적으로 일제의 침략이 진행되면서 일본인 지주들이 군산과 주변 농토를 빼앗은 후 한국인 소작농을 착취하여 번영을 누렸다.
1905년 대한제국이 당시에는 거금인 8만 6천원을 도입하여 군산항의 제1차 축항공사를 시행하였는데 자금의 사용과 관리는 일본인이 도맡았다. 그 이유는 조선에서의 쌀 수탈이 목표였던 일제가 축항 공사를 진행하였기 때문이다.
제2차 축항공사는 1909년~1915년까지 32,900원의 예산으로 진행되었다. 이때 공사의 내용은 군산 부도에 자동 전화소를 설치하고 1912년 군산역까지 놓인 철도를 내항까지 연장하고 고정 잔교(사람과 짐이 오르내리기 쉽게 부두와 배의 옆 부분을 연결하는 다리 시설) 3기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수확한 쌀을 철도를 통해 군산항까지 나르고 일본 수출선에 바로 옮겨 실을 수 있었다. 이 시기는 군산의 무역량이 하루가 다르게 증가하던 때로, 개항 연도인 1899년을 기준으로 했을 때 1903년에는 4배, 1909년에는 10배, 1926년에는 70배의 무역 증가율을 보였다.
제3차 축항 공사는 군산이 최고의 무역 호황을 누리던 1926년~1933년까지 7년간 285만원의 공사비를 투입하여 진행되었다. 이때 내항의 화물을 쌓아두던 곳을 넓게 만들고, 항만에는 부잔교(뜬다리 부두) 3기를 설치하여 3천 톤 급 배 3척이 동시에 항구에 배를 댈 수 있었으며 육상에는 창고 3 동을 건설하여 쌀 25만 가마를 동시에 보관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철도선을 증설하여 하루 150량의 화차가 운행되었다. 이 축항 공사의 기공식에는 당시 조선의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참여하였는데 부두에 쌓여있는 쌀을 보고 “아! 쌀의 군산”이라는 탄성을 질렀다고 한다.
제4차 축항 공사는 1936년~1938년까지 6척의 배가 동시에 댈 수 있도록 항만을 고치는 공사였다. 이 시기에는 일제가 군산을 병참 기지로 만들려는 목적이 강한 공사였다. 이렇게 일제 강점기 내내 확장을 거듭하던 군산항은 광복 이후에는 일본과의 정치・경제 관계가 두절되면서 예전의 활기찬 모습은 사라졌다.
특히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미군이 실시한 폭격으로 대부분의 시설이 파괴되었다. 휴전 이후 외국 기술진에 의해 항만 시설이 재건되었으나 이후 공업화 과정에서 호남 지역이 소외되면서 무역항으로서의 모습은 다시 회복하지 못하고 쇠락하였다.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 이후부터 중국과의 경제 교류가 활발해지고 외항 및 군장 산업 단지가 조성되면서 군산이 ‘서해안 시대’를 이끄는 새로운 거점으로 도약하고 있다.

  • 질문1 총 4 차례의 축항 공사 중 가장 큰 공사가 진행된 시기와 그 이유를 설명해 봅시다.
  • 질문2 조선 총독인 사이토가 찾아 축항 공사의 기공식에 와서 “아! 쌀의 군산”이라고 탄성을 지른 이유를 설명하시오.
  • 질문3 군산항이 해방 이후 쇠퇴했던 원인을 세 가지로 정리하여 말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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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지도는 1872년 대원군 집권 당시 군산항을 그린 것입니다. 서해와 만나는 금강 하구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시대의 군산항은 주변 7개 읍에서 거둔 세금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습니다. 대원군 집권 시기에는 조세의 금납화가 상당히 이루어진 시기라서 대부분의 세곡 창고가 그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 질문1 조선 시대에 군산창이 호남의 세금이 모두 모이는 중요한 조운 창고가 된 이유를 지리적인 위치와 연관 지어 설명해 봅시다.

시각자료 2

사진은 1911년 군산 각국 조계지를 표시해 놓은 지도입니다.

  • 질문1 1910년 이후 군산에서 가장 세력이 큰 나라는 어디였을까요?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각자료 3

사진은 1920년대 군산 명산동을 찍은 것입니다. 아래 쪽 평지에 들어선 커다란 저택들은 일본인 거주지입니다. 산 위에 조그만 집들이 붙어 있는 지역이 조선인 거주지입니다.

  • 질문1 사진을 보고 1920년대 일본인 거주지와 조선인 거주지의 차이점을 설명해 봅시다.

시각자료 4

사진은 1926년 군산항 축항 기공 기념으로 만들어 놓은 전시물입니다.

  • 질문1 기념물의 모습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써 봅시다.

시각자료 5

사진은 군산의 최대 일본인 지주였던 구마모토의 별장입니다. 외부는 유럽 양식이고, 내부는 서양식 응접실과 일본식 주거 형태가 결합된 형태입니다.

  • 질문1 일제강점기 구마모토와 같은 일본인 대지주의 생활은 어땠을까요? 그리고 그들의 경제적 기반은 무엇이었는지 이야기 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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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1920년대 일제의 경제 수탈 정책에 대해 조사해 봅시다.
모둠활동 2
일제의 쌀 수탈이 우리 민족에게 끼친 영향을 계층 별로 이야기 해 봅시다.
모둠활동 3
일부 경제학자들은 “쌀 수탈이 아니라, 쌀 수출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쌀 수출”인데, 대다수 학자들이 “쌀 수탈”이라고 말하는 것은, 누구의 입장에서 말하는 걸까요?
모둠활동 4
일제강점기를 통해 왜 일본인의 토지 소유는 점점 늘어나고, 한국의 농민은 점점 토지를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는지 생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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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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