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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신문사 터(언론으로 애국 계몽에 앞장선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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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국가의 사무에서 시세의 득실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가지도 모르는 것이 없기 때문에 집안에 가만히 들어앉아서 세상일을 모두 알게 해줌으로써 아래의 사정이 위로 전해져서 고통이나 환난을 밝히기 어려운 것이 없으니 유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라에 신문이 있음은 어두운 창에 불올 비추는 일과 같고 사람이 신문을 보는 일은 밤에 종이 울림과 같다. 그러므로 신문의 목적은 옛 것을 익혀 새 것을 알고 근본을 밝혀 응용에 도달하는 일로서 그 시대의 목탁이 되기 위하여 하지 않는 일이 없다.

(기자는) 지위가 없고 권력도 없지만 세상 일에 눈을 부릅뜨고 시대의 근심에 눈을 돌린다. 그 논리의 전개는 공정하고 그 사실의 논평은 온당하며, 권세 있는 자를 피하지 않고 남을 지배하려는 간특한 야심가들을 겁내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도리에 어긋난 중요한 문제에 봉착하면 모두 차분히 논평을 전개하여 바른 길로 충고하는 뜻을 비친다.


윗글은 신문의 역할과 기자의 사명에 대한 『황성신문』1898년 9월 6일 논설이다.
『황성신문』은 독립협회 활동의 한 축을 이루었던 개신 유학자 층을 주 대상으로 하여 1898년 9월 5일 창간한 국한문 혼용 신문이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린동 33
[도로명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계천로 41]
현재 상태 멸실 / 영풍문고 앞 지하철 1호선 종각역 5번 출구 앞에 기념표석이 세워져 있다.

애국 계몽 운동은 우리의 ‘실력’과 ‘힘’이 일본 제국주의보다 부족했기 때문에 국권을 빼앗겼다고 인식한 사람들이 한국 민족의 실력과 힘을 양성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던 운동이다. 애국 계몽 운동은 갑신정변, 갑오개혁, 독립협회로 이어지는 개화 자강 계열의 운동을 계승하였다. 이 운동은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언론․종교․문학․예술․학술․군사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전개 되었다. 애국 계몽 운동은 일제에게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예속된 국민들을 크게 각성시켰다. 그 결과 짧은 기간에 많은 성과를 내어 민족 역량을 크게 증강시킨 것이 사실이었고, 이때 양성한 실력이 독립운동에 큰 원동력이 되었다.
『황성신문』은 애국 계몽 운동의 한 방법으로 창간되었다. 독립 협회 운동의 한 축을 이루었던 개신 유학자 층을 주 대상으로 하여 1898년 9월 5일 창간한 국한문 혼용 신문이다. 창간 당시 사장은 남궁억, 주필은 장지연이었다. 『황성신문』은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간당할 때까지, 일제 침략을 규탄하는 논설과 보도를 통해 민족 언론의 역할을 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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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황성신문』 창간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상황

1896년 2월 아관 파천 이후 계기로 선포된 대한 제국이 근대적인 개혁인 광무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대한 제국은 이 개혁을 통해 대외적으로 자주 독립을 표방하고 황제권을 강화해 나갔다. 하지만 격화된 제국주의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는데, 아관 파천 시기 러시아에게 빼앗긴 이후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외세의 경제 침탈 등에 대해 무기력하게 대응하였다.
1896년 7월에 설립된 독립 협회는 1898년 12월 해산당할 때까지 열강에게 국권을 침탈당하고 지배층에게 민권 유린을 당하는 상황 속에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자주 국권·자유 민권·자강 개혁을 추구하는 근대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독립 협회는 대중 집회인 만민 공동회에 관료와 민중을 참여시킨 관민 공동회를 1898년 10월 개최하였다. 정부 대표로 박정양, 민영환 등 개혁파 관료가 참여하고 민간에서 독립 협회를 비롯한 여러 사회단체와 일반 시민, 학생 등이 참여하여 함께 국정을 논의하였다. 그 결과 관민 공동회는 정치 개혁의 기본 방향을 제시한 헌의 6조(獻議六條)를 가결하여 발표하였다. 박정양 등의 관료가 황제를 설득하여 재가를 얻었는데, 헌의 6조를 실시하기 위해 중추원을 의회식으로 개편한다는 중추원 관제도 공포하였다. 중추원 관제는 의원을 관선과 민선 각 25명씩으로 구성하되, 민선 의원은 독립 협회에서 선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조병식, 민종묵 등은 독립 협회가 황제권 탈취를 도모한다는 소문을 퍼트리고 황국 협회를 동원하여 만민 공동회를 공격하였으며, 정부도 독립 협회 간부를 체포하였다.

  • 질문1 아관 파천 이후 성립된 대한 제국이 추진한 개혁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조사해 봅시다.
  • 질문2 광무개혁의 성과와 한계를 조사해 봅시다.
  • 질문3 독립 협회의 활동 방향 세 가지를 써봅시다.
  • 질문4 대한 제국이 독립 협회를 해산할 때 동원했던 단체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2

『황성신문』의 출발 『경성신문』

「황성신문」은 이미 있었던 『경성신문(京城新聞)』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창간되었다. 「경성신문」은 1898년 3월 2일에 창간하였다. 『경성신문』의 사장은 독립 협회 전회장인 윤치호의 명의로 되어 있고, 그 사옥도 윤치호의 집으로 되어 있었다. 윤치호의 4촌 동생인 윤치소가 실질적인 경영을 하였으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에 발간되었다.

『경성신문』의 발간 목적은 상업의 중요성을 깨우치고 양반, 지식층에 존재하는 미개화의 요소를 해소하여 국가의 부강과 자주 독립을 이루는데 이바지하는 것이었다.
『경성신문』은 1989년 4월 6일 『대한황셩신문』으로 제목을 바꾸고 『경성신문』의 발행 호수를 이어받아 11호로 발행되었다. 신문의 제목을 ‘경성’에서 ‘대한황셩’으로 바꾼 이유는 자주 독립 국가로서 신문 발행을 널리 알리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대한황셩신문』은 일본에서 도입된 인쇄 시설 준비로 며칠 휴간한 뒤, 편집 방향을 검토하였다. 다른 신문과 비교하여 차별성을 갖고 양반 유생을 독자로 유도하고자 제목도 『황성신문』으로 바꾸고 국한문 혼용체를 채택하게 되었다. 『대한황셩신문』이라는 이름을 5개월 동안 사용하고, 다시 『황성신문』으로 변경하였으나 발행 호수는 제1호로 시작되었다. 1910년 국권을 빼앗은 일제는 ‘대한(大韓)’, ‘제국(帝國)’, ‘황성(皇城)’ 등 독립을 상징하는 단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황성신문』도 『한성신문(漢城新聞)』으로 바뀌었다.
『한성신문』은 1910년 8월 30일부터 9월 14일까지 『황성신문』의 발행 호수를 이어받아 발행하였으나 국권 피탈 직후 발행되어 신문의 제대로 된 역할은 찾아보기 힘들다.
『황성신문』은 『경성신문』으로 시작하여 『한성신문』으로 끝날 때까지 12년 6개월 간 존속했던 신문이었다.

  • 질문1 『황성신문』의 출발은 어떤 신문인가요?
  • 질문2 『경성신문』의 제목을 『대한황셩신문』으로 바꾼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3 『대한황셩신문』의 제목을 다시『황성신문』으로 바꾼 목적을 써봅시다.

읽기자료 3

『황성신문』의 창간 취지

『황성신문』은 전통적 지식인을 위해 한문을 주로 사용하고, 고전 발간을 소개하는 내용 및 논설을 많이 싣고 있다. 논설 중 유학자들에게 사대 정신을 없애고 조선의 정신을 심어주기 위한 내용이 많았는데, 이 과정에서 한국사를 바탕으로 조상의 업적과 위인, 발해 등 고대의 영역을 다루었다. 이와 함께 한국의 토지 제도, 화폐 제도에 관한 논설도 실었다.
이 신문은 전통적인 유학과 서양의 근대 문물과 학문의 조화를 주장하며 그 실마리를 실학에서 찾았다. 그리하여 정약용과 같은 실학자와 실학사상을 소개하여 서구 문물을 수용하는 바탕으로 삼고자 하였다. 또한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논설을 통해 반일 의식을 고취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일제가 신문지법을 제정하자 언론의 자유를 탄압한다며 반대하는 글을 썼다. 아울러 국민들이 깨칠 수 있도록 서적과 문자에 대한 비중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자주 독립의 기틀을 다지는 교육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황성신문』은 의병 운동에 대해서는 정세에 어둡고 동족을 자멸하게 하는 오류라고 비판하면서 먼저 실력을 양성한 후 국권 회복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매일신문』과 『뎨국신문』은 일반 사람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글을 채택하였으나, 『황성신문』은 한글과 한문을 함께 쓰는 국한문 혼용체를 채택하여 지식층인 양반과 유생을 대상으로 신문을 발행했음을 알 수 있다.

  • 질문1 『황성신문』이 실학자와 실학 사상을 소개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황성신문』이 일제의 침략에 반대하여 어떤 활동을 했는지 써봅시다.
  • 질문3 『황성신문』이 의병 운동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4 『황성신문』이 국한문 혼용체를 채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4

『황성신문』의 정치적 개혁 방향

『황성신문』이 구상한 정치 체제는 입헌 군주제였다. 『황성신문』 논설진이 개신 유학자나 온건 개화파라는 점을 생각하면 급진적인 정치 체제를 구상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당시 입헌 군주제 역시 진보적인 권력 구상이었다. 『황성신문』은 세계 각 나라들이 국가 이익과 국민 복지를 위하여 법에 근거한 상원과 하원을 두고 있음을 소개하고, 의회 제도가 완비된 나라만이 높은 문화 수준과 경제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의회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국민과 정부를 동등하게 파악하는 근대적인 주권재민을 주장하였다. 또한 신체와 재산의 자유와 평등권은 모든 사람이 균등하게 부여받은 것이기 때문에 정부가 보장해야 한다고 하였다. 다만 상하 관계를 기본 축으로 하는 지배 질서를 전제하였다는 점에서 인민 주권론이 아니라 군주 주권론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황성신문』은 문명개화와 부국강병을 당장 해결해야 할 과제로 보고 국민의 정치적 참여보다 애국심 배양을 통한 국가 구성원의 결속을 중요하게 여겼다. 당시 전국적인 규모의 농민 봉기를 관리들의 부정부패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보고 농민들을 유교적인 인의(仁義)로 설득하여 국가 단결을 굳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황성신문』은 근대 민주주의의 중요한 바탕인 의회 제도를 언급했지만 국민을 위하기보다 입헌 군주제를 통해 왕조 체제를 지키고자 하였다. 이처럼 『황성신문』은 근대화된 왕조 국가를 지향하는 대한 제국을 의회 제도와 입헌 군주제를 골자로 하는 사회로 개혁하고자 하였지만, 유교적인 봉건 의식과 그릇된 국민에 대한 관점 등의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 질문1 『황성신문』이 지향한 정치 체제는 무엇인가요?
  • 질문2 『황성신문』이 의회 제도의 도입을 주장한 이유를 써봅시다.
  • 질문3 『황성신문』이 인식한 국가의 당면 과제는 무엇인가요?
  • 질문4 『황성신문』의 지향한 정치 제체의 한계점을 써봅시다.

읽기자료 5

『황성신문』의 경제적 개혁 방향

『황성신문』은 부국강병의 방법으로 수출 강화와 민족 산업의 육성을 강조하였다. 우선 지주제를 바탕으로 상업농을 강화시켜 외화를 획득해야 한다면서 쌀 수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지주의 농업 경영을 장려하고자 새 농법과 농기구 개량을 소개하는 등 농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였다.
아울러 국민이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민족 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도 주장하였다. 외국 상품의 수입으로 인한 국내 수공업자의 몰락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기술 개발과 상업의 진흥을 제시하였다.
또한 세계 각국의 문명 발달과 경제 발전이 기계 발명과 제조업 발달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 경제와 민족의 생존에 제일 시급한 것은 공업의 장려라고 하였다.
시장을 개방하면 국내의 상업이 발전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외국과의 무역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황성신문』은 조세의 부과와 징수가 지방 관료의 책임으로 이루어지는 현 조세제도를 정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중앙 정부가 조세 업무를 담당하여 세금을 공정하게 부과하고 세출의 내역을 공개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보조 화폐인 백동화 주조로 인한 물가 폭등, 국민 생활의 피폐, 무역의 침체 등을 비판하면서 화폐 제도 개혁을 주장하였다. 당시 백동화는 요금만 납부하면 주조가 허가되었기 때문에 위조 사례가 많아서 화폐 제도가 문란해져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으로, 중앙은행을 설치하고 금본위제를 실시할 것을 촉구하였다. 국가 예산은 정부에서 먼저 예산안을 만든 후 확정 여부를 결정하도록 하여 국가 재정의 효율적인 운영을 주장하였다.

  • 질문1 『황성신문』은 지주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졌나요?
  • 질문2 『황성신문』은 민족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목적을 무엇이라고 했나요?
  • 질문3 『황성신문』은 외국과의 무역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졌나요?
  • 질문4 『황성신문』은 화폐 제도의 문란을 막기 위해서 어떤 방향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나요?

읽기자료 6

『황성신문』의 사회적 개혁 방향

『황성신문』은 봉건적인 신분 질서의 개혁을 통해 문벌과 계급에 관계없이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교육을 통하여 여성의 권리 신장과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도모하고 남녀 평등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황성신문』은 근대 교육을 국민의 계몽과 인재 양성, 주권을 확립하는 지름길로 보았다. 그리고 국가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국민 모두가 신분의 구분 없이 직업 교육을 통하여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황성신문』이 지향하는 교육은 결과적으로 부국강병을 위한 인재 양성, 근대적 교육 기관 증설, 실업 교육 강조, 선진전인 서구 기술 문명 수용이라고 볼 수 있다.

  • 질문1 『황성신문』은 여성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가졌나요?
  • 질문2 『황성신문』이 직업 교육을 강조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7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지난날 이등 후작(이토 히로부미)이 한국에 오자 어리석은 우리 국민이 …… 크게 환영하였더니, 천만 뜻밖에 5조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3국의 분열을 빚어낼 조짐인즉, 그렇다면 이등 후작의 본뜻은 어디에 있었던가? 우리 대황제 폐하의 성의(聖意)가 강경하여 거절하였으니 조약이 성립되지 않은 것인 줄 이등 후작 스스로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도다.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던 것이다. 아, 4천년의 강토와 5백년의 사직을 남에게 갖다 바치고, 2천만 국민들을 남의 노예가 되게 하였으니, ……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천만 타국인의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 기자 이래 4천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 질문1 이 논설과 관련이 깊은 역사적 사건은 무엇인가요?
  • 질문2 밑줄 그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을 흔히 “을사○○”이라고 부르는지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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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사진은 『황성신문』이다.

  • 질문1 『황성신문』은 『대한황셩신문』의 제목을 바꾼 것이다. 신문의 제목을 바꾼 이유를 써봅시다.
  • 질문2 『황성신문』은 위정척사파, 급진 개화파, 온건 개화파 중 어떤 정치사상을 바탕으로 한 신문이었나요?

시각자료 2

사진은 『황성신문』1909년 8월 19일자에 실린 대성 학교 학생 모집 광고이다.

  • 질문1 대성 학교를 세운 사람은 누구인가요?
  • 질문2 대성 학교를 세운 목적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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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모둠별로 『황성신문』 창간사를 작성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2
모둠별로 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의 지면을 제작하여 봅시다.
모둠활동 3
모둠별로 1907년에 『황성신문』에 실렸을 것 같은 국채보상운동 의연금 모금 광고 문구와 그림을 만들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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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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