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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 공동회 집회 터(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민중 집회)

도입

우리 대한이 자주 독립하는 것은 세계 만국이 다 한가지로 아는 바다. 훈련 사관과 재정 고문을 외국 사람에게 맡기는 것은 대한 자주 독립 권리에 대단히 관계가 있다. 이것은 곧 이천만 동포 형제의 한가지로 부끄럽고 분하게 여기는 바다. …… 지금 있는 러시아 사관과 러시아 고문관에 대한 긴치 아니한 것과 대한이 자주하는 권리를 스스로 행하는 것이 가한 것은 러시아가 모두 스스로 아는 바이니, 대한의 권리를 지키고 러시아의 정론을 쫓아 러시아 사관과 러시아 고문관을 모두 곧 물려 보내는 것으로 결정하여 러시아 공사에게 통고하자. 이것은 당연한 일로 우리 대한 이천만 동포의 한가지로 원하는 바이오, 세계 각국도 한가지로 아는 바이다. 오늘날 대한국 국민들의 이같이 긴급한 형세를 정부에 말하여 전국 인민이 원하는 대로 통고하도록 하자.

윗글은 『독립신문』1898년 3월 15일자에 실린 만민 공동회 연설문이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린동 33
[도로명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계천로 41
현재 상태 완전변형 / 과거 백목전이 있었던 영풍 문고 동쪽 인도와 보신각까지의 차도를 포함하는 거리이다.

아관 파천 1년 후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1897년 8월 연호를 광무로 고치고, 10월에는 대군주에서 황제로 승격하였으며, 국호를 대한 제국으로 바꾸며 대외적으로 완전 자주 독립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대한 제국 성립 후에도 러시아는 한국의 이권을 빼앗고 내정 간섭을 강화하였다.
이에 독립 협회는 러시아의 침략 정책을 비판하는 한편, 친러파 관료들의 해임을 요구하는 강경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독립 협회 간부들은 운동의 방향을 그동안의 계몽 운동에서 민족 독립을 지키기 위한 정치 운동으로 전환할 것을 결정하였다. 독립 협회는 1898년 2월 21일 구국 정치 운동을 선언하는 강경한 상소문을 고종에게 올렸으며, 3월 10일 종로 백목전 앞에서 1만여 명이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여 국민의 힘으로 러시아의 침략 정책을 막고 자주 독립을 달성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자리에서 민중은 러시아의 군사 교관과 재정 고문의 철수를 결의하는데, 결국 고종이 러시아의 내정 개입 및 이권 탈취를 중지시켰다. 1만여 명이 모인 이 집회는 최초의 만민 공동회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정치 집회로서 큰 의의를 가진다.
한편, 1898년 10월 김홍륙의 독차 사건이 벌어지면서 정부 내 친러파 관료들에 대한 비판 여론을 독립 협회가 주도하였다. 독립 협회는 의회 설립, 친러 수구파 관료의 퇴진과 개화파 정부 수립을 요구하여, 10월 12일 정부 내각을 교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경운궁 앞 광장을 매일 가득 메우면서 철야 집회를 진행했던 만민 공동회의 영향력이 있었다.
3월에 열린 제1차 만민 공동회 이후 중요한 정치적 사안이 있을 때마다 수시로 만민 공동회가 개최되었다. 4월 30일 숭례문 앞에서 열린 서재필의 재류를 요청하는 만민 공동회, 6월 20일 종로에서 열린 무관 학교 학생 선발 부정을 비판하는 만민 공동회, 7월 1일과 2일 종로에서 열린 독일 등 외국의 이권 침탈을 반대하는 만민공동회, 7월 16일 종로에서 열린 의병에게 피살된 일본인의 배상금 요구와 경부 철도 부설권 침탈을 반대하는 만민 공동회 등은 민중이 자발적으로 개최한 민중 대회였다.
만민 공동회가 열렸던 백목전 앞 종로 네거리는 보안회가 일본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반대하는 대중 집회를 여러 날 개최한 것을 비롯해 3·1운동에 이르기까지 민의의 광장으로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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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자주 독립을 외친 최초의 만민 공동회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여 국호를 대한 제국, 연호를 광무로 바꾸면서 황제권을 강화하고, 국가의 독립을 대내외에 천명하였다. 하지만 러시아는 군사 교관과 재정 고문을 파견하여 한국의 재정, 군사,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1898년 2월 21일 독립 협회 회원 135명은 완전한 자주 독립의 달성과 내정 개혁의 추진을 요구하는 '구국 운동 선언 상소’를 고종에게 올렸다. 독립 협회는 회칙을 개정하고 새로운 집행부를 구성하여 자주 국권과 자유 민권을 보장하기 위한 운동을 펼쳐 나갔다.
이에 러시아 공사는 대한 제국 황제와 정부가 군사 교관, 재정 고문의 철수를 요구할 경우 이를 받아들일 뜻이 있으므로 24시간 이내에 회신해 달라고 통고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독립 협회는 정부를 위협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발적으로 만민 공동회를 열어 정부에게 결단을 내리도록 재촉하여 요구하기로 결정하였다. 1898년 3월 10일, 서울 종로의 백목전 앞에는 1만 명이 넘는 군중들이 몰려들었다. 이 자리에서 회장으로 선출된 시전상인 현덕호를 중심으로 러시아의 군사 교관과 재정 고문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집회는 매우 질서정연하고 진지하게 진행되었다. 이 집회가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민중 대회로 평가되는 제1차 만민 공동회이다.
결국 고종도 러시아 공사에게 만민 공동회에서 드러난 백성의 뜻을 전달하였다. 러시아 공사 측도 이를 받아들여 군사 교관과 재정 고문을 철수시키고 절영도 조차(租借) 요구를 철회했으며 한러 은행도 폐쇄하였다. 일본 공사도 절영도의 석탄 창고 터를 되돌려 주었다.
만민 공동회는 정부가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던 상황 속에서 민중이 스스로 나서 민중과 국가를 위해 자주와 독립을 쟁취한 사건이었다.

  • 질문1 1898년 2월 21일 독립 협회에서 올린 '구국 운동 선언 상소’의 주요 내용을 써봅시다.
  • 질문2 1898년 3월 10일 만민 공동회에서 결의한 사항은 무엇인가요?
  • 질문3 1898년 3월 10일 열린 만민 공동회의 역사적 의의를 써봅시다.
  • 질문4 만민 공동회의 러시아 재정 고문과 군사 교관 철수 등의 요구에 대해 고종은 어떻게 대응했나요?

읽기자료 2

개혁 내각의 출범

만민 공동회를 계기로 민중의 힘을 깨닫고 민권 의식이 높아지자 독립 협회는 조직을 재정비하였다. 때마침 회장 이완용이 전라북도 관찰사로 좌천되자, 회장 대리 겸 부회장 윤치호를 비롯하여 이상재 등 젊은 회원들이 독립 협회의 운영을 담당하였다. 5월 말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하급 관료와 언론인, 교사들이 독립 협회에 다수 가입하여 독립 협회는 민중의 주장을 대표하는 정치 운동 단체로 변화하였다. 독립 협회는 자주 독립뿐만 아니라 국민의 생명과 재산권 수호, 연좌제 부활 저지, 언론과 집회의 보장, 탐관오리 및 수구파 관료의 축출 등 민권 보장 및 참정권 획득 운동을 본격적으로 펼쳐 나갔다.
독립 협회의 움직임에 위기를 느낀 고종이 황제권의 강화에 힘을 기울였다. 아울러 그는 독립 협회에 대한 강경책을 추진하되, 차선책으로 독립 협회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거나 협회의 회원이며 개혁 성향을 띤 박정양, 민영환 등을 등용하여 협회의 민권 운동을 억제하려는 정책을 병행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황제 중심의 권력 구조를 부정하는 세력이 독립 협회에서 나타났다. 그들은 7월 초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인재의 공평한 등용, 민의의 수렴, 무능하고 부패한 관료의 교체 등을 주장하였다. 이에 조병식 등 수구파 관료들이 독립 협회를 해산시키려고 하자 독립 협회는 이에 맞서 종로에서 만민 공동회와 집회를 개최해 조병식 등의 사직을 권고하였다.
고종과 독립 협회의 대립이 악화되자 고종은 조병식을 면직하여 독립협회와 화해를 모색하였다. 독립 협회는 회장에 윤치호, 부회장에 이상재를 임명하여 체제를 정비한 다음, 만민 공동회를 열어 본격적으로 개혁 내각을 수립하고 중추원을 의회로 개편하기 위한 운동을 펼쳤다. 이 운동에 수많은 학생들이 참여하고 상인들도 철시를 통해 응원하였다. 고종이 독립 협회의 요구를 수용하여 박정양, 민영환 등을 정부 요직에 임명함으로써 10월 12일 개혁 내각이 출범하였다.

  • 질문1 독립 협회가 벌인 참정권 획득 운동의 내용을 써봅시다.
  • 질문2 독립 협회가 회장에 윤치호, 부회장 이상재 체제로 개편한 뒤 만민 공동회를 열어 추진한 운동은 무엇인가요?
  • 질문3 만민 공동회가 추진한 중추원의 의회 개편 운동에 고종은 어떻게 대응했나요?

읽기자료 3

관민 공동회를 통한 헌의 6조 결의

박정양 등으로 구성된 개혁 내각은 독립 협회와 협력하여 내정 개혁과 의회 설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10월 15일 정부 대신과 남궁억 등 5명의 총대 위원은 '백성과 나라를 모두 편하게 하는’ 정책을 마련하기 위해 관민 협상을 최초로 벌였다. 독립 협회 측이 잡다한 세금의 혁파와 의관(중추원 관직)의 반수를 독립 협회에서 선발한다는 내용의 중추원 개편안을 내놓자, 박정양 등은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답변하였다.
그러나 박정양 내각과 독립 협회가 제시한 의회 개설 협상에 대한 수구파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수구파의 지시를 받은 황국 협회가 항의 집회를 열자, 박정양은 사직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황국 협회 회원들의 집회를 해산시켰다.
고종은 박정양의 의정 서리 직책만 해임하고 조병식을 찬정으로 재기용하고, 독립 협회의 토론과 집회를 원래 정해진 장소에서만 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격분한 독립 협회가 철야 농성을 하면서 고종의 조칙 철회와 수구파 대신의 해임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이에 고종은 박정양을 참정으로 승진시키고 한규설, 윤치호를 각각 중추원 의장과 부의장으로 임명해 중추원 관제의 개정을 지시했으며, 토론과 집회 제한 명령을 철회하였다.
독립 협회는 중추원 관제 개정안을 정부에 제출하고,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10월 28일 종로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회장인 윤치호는 황제권을 인정하고 정부와 협력해 내정 개혁을 추진한다는 원칙을 표명하였다. 이는 고종의 독립 협회에 대한 오해와 불신을 해소시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아울러 그는 관민 공동회의 취지가 관료와 백성이 한자리에 모여 황실을 보호하며 국정을 계획하고 백성들의 민원을 논의하는데 있다고 해명하였다.
10월 29일 전·현직 관리와 각종 단체, 학생, 시민이 참석한 최초의 관민 공동회가 열렸다. 첫 번째 연사로 등장한 백정 박성춘은 “나는 대한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 몰각합니다. 그러나 충군애국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이에 나라에 이롭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길은 관(官)과 민(民)이 합심한 연후에야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차일(遮日)에 비유하건대, 한 개의 장대로 받치면 역부족이지만 많은 장대를 합해 받치면 그 힘이 매우 공고해집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관민이 합심하여 우리 대황제의 성덕에 보답하고 국운이 만만년 이어지도록 하게 합시다.”라고 연설하여 큰 지지를 받았다. 이날 회원들은 황제에게 바치는 헌의 6조를 채택하였다. 헌의 6조는 전제 황권을 튼튼히 하고 재정, 인사권 및 이권 문제는 정부와 중추원의 협의로 결정할 것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박정양 등 개화파 관리들도 헌의 6조에 찬성하였다. 박정양은 관민 공동회의 경과를 보고하고 헌의 6조를 재가해 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고종도 헌의 6조의 실행을 재가하고 중추원의 법령 개정을 포함하는 조칙 5조를 반포함으로써 관민공동회의 결정을 존중하였다.
10월 31일 독립 협회는 고종의 황제 즉위를 기념하는 개천 기원절 경축연을 독립관에서 열었다. 그들은 경축연을 마치고 국기와 독립협회기를 들고 노래를 부르며 인화문으로 가서 만세를 불렀다. 이어 종로에서 관민 공동회를 진행하여 헌의 6조에 대한 정부의 조치가 이루어지기를 요구하였다.

  • 질문1 10월 15일 정부 대신과 독립 협회 대표가 벌인 최초의 관민 협상에서 독립 협회가 제시한 조건은 무엇인가요?
  • 질문2 10월 28일 종로에서 열린 집회에서 윤치호가 표명한 원칙을 써봅시다.
  • 질문3 10월 29일 관민 공동회에서 채택한 헌의 6조의 주요 내용은 무엇인가요?
  • 질문4 헌의 6조에 대해 고종은 어떻게 대응했나요?
  • 질문5 입헌군주제를 추구했던 독립협회는 왜 대한 제국의 극대화된 황제권을 인정했나요?

읽기자료 4

중추원 관제의 마련

관민 공동회는 고종이 중추원 개편안을 재가한 11월 2일에 이르러 해산하였다. 이 개편안에 따라 중추원이 법률 및 칙령을 개폐하고, 의정부의 건의 및 자문 사항과 인민의 헌의 사항 등을 심의·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중추원은 황제 및 의정부의 권력 남용을 견제하고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 또한 관선·민선 의관 각각 25석 중 당분간 독립 협회가 민선 의관을 선출하도록 규정함으로써 중추원은 과도기적인 국회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11월 4일 박정양이 독립 협회에 중추원 의관 50명의 반수인 25명을 선출하여 그 명단을 알려 달라고 요청했고, 독립 협회 회원은 11월 5일 독립관에서 투표로 의관을 선정하기로 결정하였다.
박정양 내각이 출범한 10월 2일부터 만민 공동회가 스스로 해산한 11월 2일까지 진행었던 한국 역사상 최초의 의회 개설 운동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황제권을 인정하면서 중추원의 기능을 강화하여 황제의 권한을 견제하고, 관민이 협동하여 점진적으로 내정 개혁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 질문1 고종이 11월 2일 재가한 중추원 개편안의 내용을 써봅시다.
  • 질문2 10월 12일부터 11월 2일까지 진행된 한국 역사상 최초의 의회 개설 운동의 내용은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5

헌의 6조와 중추원 관제의 후퇴

독립 협회가 개편된 중추원을 주도하며 국정 전반에 걸쳐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자, 개혁에 반대하는 관리들이 독립 협회에 대한 탄압책을 모색하였다. 11월 4일 조병식 등은 ‘박정양 대통령 추대설’을 가짜로 만들어 퍼트렸다. 독립 협회가 고종을 내쫓고 박정양을 대통령으로 내세워 군주제를 공화제로 바꾸려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고종은 이를 빌미로 이상재, 남궁억 등 독립 협회의 지도자 17명을 체포하고, ‘협회’를 모두 없애라는 지시를 내렸으며 박정양 등을 파면하고 개혁에 반대하는 관리들을 중심으로 황제권을 강화해 나갔다.

  • 질문1 독립 협회 탄압을 위해 조병식 등 수구파 관료가 꾸민 일은 무엇인가요?
  • 질문2 ‘박정양 대통령 추대설’에 대해 고종은 어떻게 대응했나요?

읽기자료 6

만민 공동회를 통한 민중의 저항

11월 5일 민중들은 경무청 앞에서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고 구속 인사 석방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만민 공동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순경들의 위협에도 물러나지 않았다. 밤이 깊어 갈수록 사람들은 늘어났고, 만민 공동회 참석자들에게 돈이나 음식을 제공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상인들은 상점 문을 닫아 항의했으며, 만민 공동회에게 발포하라는 명령을 받은 군인이 달아나 버리기도 하였다.
조병식 내각은 경찰과 군대를 동원해 만민 공동회를 해산시키려고 하였지만 시행하지는 못했다. 어려움에 빠진 고종은 민중의 신망이 두터운 한규설을 법부 대신에 임명하고 조병식 등을 해임시키는 동시에 구속했던 독립 협회의 지도자 전원을 석방하였다. 하지만 군중은 해산을 거부하고 종로로 장소를 옮겨 다섯 차례의 상소를 통해 조병식 등 5흉의 처단, 헌의 6조의 실시, 독립 협회의 재건 등을 요구하면서 집회를 확대시켜 나갔다.
그러나 고종은 11월 21일 보부상이 중심이 된 황국 협회를 동원해 만민 공동회를 습격하여 군중들을 폭행하였다. 그 다음 날에는 마포 나루에서 신기료장수(헌 신을 기워서 고쳐주는 직업) 김덕구가 보부상에게 맞아 죽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정부의 무자비한 탄압은 오히려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발하여 전국적으로 만민 공동회를 지지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위기를 느낀 고종은 조병식 등 수구파 대신을 경질하고 민영환, 박정양을 등용하며 독립 협회의 재건을 지시하였다. 하지만 만민 공동회는 그동안 실시된 고종의 조치에 불만을 품고 집회를 해산하지 않았다. 독립 협회 회장 윤치호가 고종의 명령을 믿고 정부 측에 시간적 여유를 주자고 설득하여 11월 24일부터 2일간 만민 공동회를 해산하는데 동의하였다. 11월 26일 만민 공동회가 다시 열리자 고종은 사태 수습을 위해 경운궁 돈례문으로 나아가 독립 협회 재건, 헌의 6조의 실시, 조병식 등 ‘8역’ 처벌 등 5개 조항의 만민 공동회 건의를 받아들였다. 만민 공동회는 고종의 약속을 받고 해산하였다.

  • 질문1 11월 5일 열린 만민 공동회의 요구 사항은 무엇인가요?
  • 질문2 만민 공동회가 전국적인 지지를 받게 되는 계기가 된 사건 두 가지를 써봅시다.
  • 질문3 11월 26일 고종은 만민 공동회의 저항에 대해 어떻게 대응했나요?
  • 질문4 보부상들이 황국 협회에 가담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읽기자료 7

만민 공동회의 좌절과 독립 협회의 해산

고종은 약속과 달리 중추원을 의회가 아닌 정부의 자문 기관으로 만들고 자신의 측근들을 내각에 다수 진출시키는 등 만민 공동회의 요구에 반대되는 조치를 내렸다. 이에 대항하여 민중은 12월 6일 만민 공동회를 다시 개최해서 고종에게 5개 조항의 즉각 실천을 요구하였다. 만민 공동회는 정부 측의 무력 탄압에 대응하기 위해 투석꾼을 고용하고, 집회 장소를 광희문으로 옮겨 대신과 관리들에게 동참을 강요하였다. 아울러 정부 대신에 임명할 11명을 공천하면서 민영환, 윤치호, 박영효, 서재필을 투표로 선출한 뒤 박영효의 사면을 건의하였다.
이러한 만민 공동회 내 급진파의 과격한 활동과 박영효 소환 운동은 고종과 주한 외국 공사들에게 경계심을 불러일으켰고 만민 공동회에 호의적이었던 일부 시민의 반발을 샀다. 만민 공동회 내 온건파는 급진파의 행동이 만민 공동회에 대한 민중의 지지를 감소시키고 정부 측에 탄압의 빌미를 제공했다고 비판하였다. 주한 외국 공사들은 겉으로 만민 공동회에 대한 정부의 무력 진압을 반대했지만 자국민의 이권 보호를 위해 이를 묵인하였다. 특히 러시아와 프랑스 공사는 반러 운동을 전개해 왔던 만민 공동회의 해산에 찬성하였고, 일본 공사는 독립 협회를 향후 자국의 침략 정책에 저항할 세력으로 인식하여 만민 공동회 진압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12월 23일 만민 공동회 운동에 불안감을 느껴 왔던 고종은 군대와 황국 협회를 동원해서 만민 공동회를 해산시키고 독립 협회와 만민 공동회의 지도자를 체포하였다. 12월 25일에는 만민 공동회가 불법이라는 내용의 명령을 발표하였다. 그 결과 만민 공동회가 강제 해산당하고 독립 협회는 해체되었으며, 민중과 협조 속에 근대적 개혁을 추진하려고 했던 박정양, 민영환 등 개혁 성향의 인사들도 점차 관직에서 배제되었다. 이로써 관민 공동회와 만민 공동회가 추진했던 근대적 개혁 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 질문1 12월 6일 만민 공동회가 다시 개최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만민 공동회가 12월 6일 고종에게 요구한 사항은 무엇인가요?
  • 질문3 주한 외국 공사들이 실질적으로 만민 공동회의 해산에 찬성한 이유를 써봅시다.
  • 질문4 고종은 12월 23일 어떤 방법으로 만민 공동회를 해산하였나요?
  • 질문5 왜 고종 황제는 무력까지 동원하여 만민 공동회와 독립 협회를 강제 해산시켰을까요?

읽기자료 8

만민 공동회의 의의

만민 공동회의 반러 활동으로 러시아가 한반도에서 물러나 랴오둥 반도까지 후퇴하였다. 이때부터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한반도를 둘러싼 외세 간의 세력 균형이 이루어졌다. 아울러 열강의 이권 침탈과 침략을 물리침으로써 잠깐이나마 민족의 자주 독립을 지키고 열강의 침략을 저지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만민 공동회는 시민들에게 자유 민권 사상을 보급하고, 민중에 의한 독립 운동의 기반을 축적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젊은이들이 만민 공동회의 참가에 참가하여 민족의 독립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이들은 이후 독립 운동의 인적 토대가 되었다. 또한 성리학적 사고에 젖어 있던 애국적 인사들이 근대적 자주 민권, 자강 사상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 질문1 만민 공동회의 반러 활동이 한반도 정세에 끼친 영향을 써봅시다.
  • 질문2 훗날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만민 공동회의 역할을 써봅시다.
  • 질문3 독립 협회와 만민 공동회가 당시 대한 제국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던 러시아를 집중 견제하였지만, 상대적으로 견제를 소홀히 한 나라는 어디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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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1898년 10월 29일에 있었던 박성춘의 연설 기록화이다.

  • 질문1 연설대에 선 박성춘의 복장을 참고하여 박성춘의 신분이 무엇인지 써봅시다.
  • 질문2 박성춘의 연설 중 주요 내용을 정리하여 써봅시다. .

시각자료 2

사진은 『독립신문』1898년 11월 1일자 사설이다.

  • 질문1 ‘읽기 3) 관민 공동회를 통한 헌의 6조 결의’를 참고하여 1898년 10월 28일부터 10월 31일까지 관민 공동회가 활동한 내용을 날짜 별로 정리해 봅시다.
  • 질문2 독립 협회와 만민 공동회가 결국 해산 당한 것은 개혁 세력이 어떤 부분에 대한 실권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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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모둠별로 러시아의 이권 침탈과 침략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작성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2
모둠별로 헌의 6조와 중추원 관제의 시행을 촉구하는 포스터를 만들어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모둠별로 독립협회 및 만민 공동회의 주장과 황국 협회의 주장을 정리하여, 전지에 큰 글씨로 써서 촌극 형식으로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4
모둠별로 고종과 조병식 등 수구파를 피고로 세우는 ‘역사 법정’ 시나리오(검사의 기소장, 변호사의 변론문, 판사의 판결문)를 작성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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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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