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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승 생가(한글을 지키기 위한 조선어 학회의 민족 운동)

도입

1938년 3월에 교육령을 개정하였을 때에 정규 과목이던 조선어를 선택 과목으로 바꾸고도 4월부터는 아예 조선어를 못 가르치게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였다. 학교 안에서 조선어 쓰는 이를 발견하면 학교에 따라서 벌금이나 견책, 처벌하면서 태도 점수까지 깎았으며, 교외에서는 보도연맹원이 있어서 조선어 쓰는 이를 발견하면 불러 말하고, 혹은 학교에 알려 단속하게 하였다. 조선어 쓰는 것을 민족 운동으로 여기고, 일본어를 쓰지 않는 것을 항일 운동으로 여겼다. 이처럼 일제는 우리말을 버리도록 민족적 양심을 파멸시키려 하였는데, 우리말과 우리글을 말살시키려는 방침은 아예 우리 민족성을 없애려는 것이었다. 일부 친일하는 자는 겉으로만 하지 않고 진심으로 충성을 다하여 자기 집안에서 5․6세 된 아이들과도 일어만 쓰면서 이것을 자랑하기까지 하는, 양심이 마비된 못난 이들도 없지 않았으나, 청년들은 반발하는 이가 더 많았다.

1938년 3월 제3차 <조선교육령>이 공표된 이후의 모습이다. 이처럼 우리말과 우리글을 금지하는 등 일제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 및 언어까지 완전히 말살하려는 정책, 이른바 민족 말살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 동안 우리글과 우리말을 지키기 일에 힘써온 조선어 학회는 일제로부터 독립 운동 단체로 인식되어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일제는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를 적용하여 1942년 10월 1일부터 조선어 학회 회원과 관련 인물들을 잡아들였다(조선어 학회 사건).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이자 조선어 학회 회원이었던 일석 이희승(一石 李熙昇)도 이때 붙잡혀가 갖은 잔혹한 고문을 당하고 징역 2년 6개월의 형을 받아 감옥 생활을 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 문화를 지키려는 국학 운동을 줄기차게 펼침으로써 우리는 일제 35년 지배를 받고도 우리의 언어와 역사, 문화를 지켜 낼 수 있었다. 정부에서는 우리말과 우리글을 지키고 연구한 이희승의 공로를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으며, 이희승은 1994년 10월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는가 하면, 2012년 10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경기도 의왕시 포일동 87-13
[도로명 주소 : 경기도 의왕시 양지편로 13-31]
현재 상태 변형 / 기본 골격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곱은자집(ㄱ자집)으로, 후대에 대문간의 외양간과 창고 등을 살림방으로 개축하면서 전체적으로 튼 ‘ㅁ’자 형태의 구조이다. 주향은 남향으로 안마당에 낙수물이 모여 바깥마당의 텃밭으로 흐르도록 되어 있다. 봉당(封堂: 주택 내부에 있으면서 마루나 온돌을 놓지 않고 바닥면을 흙 따위를 깔아 만든 공간)은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다.

1910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우리나라는 식민지로 전락하여 조선 총독부의 지배를 받게 된다. 35년간의 일제 강점기는 단순한 강점이 아니라, 우리 민족을 근본적으로 말살하려는 시기였던 만큼, 우리말과 우리글은 물론 민족 문화가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국권 상실과 함께 우리의 국어가 ‘조선어’라는 민족어로 전락하고, 외국어였던 일본어가 “국어”로 불리게 되었다.
일제는 1911년 8월 제1차 <조선교육령>을 발표, 국민 정신의 함양과 일본어 보급을 교육의 목적으로 내세웠다. 이런 의도 아래 조선 총독부는 1911년 4월 『조선어사전』 편찬에 들어가고, 1912년 4월에는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을 제정하였는데, 이는 모두 일제 식민 통치를 편리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철자법은 국문 연구소(國文硏究所: 대한제국이 1907년에 설치한 한글 연구 기관)에서 이미 작성한 <국문연구의정안>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다. 비록 무단 통치 기간에 형식적으로나마 조선어 교육을 허용하였으나, 이 또한 일본어 위주의 이중적인 언어 정책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 광문회의 『조선어자전』을 비롯한 사전 편찬, 김희상의 『조선어전』을 비롯한 문법책 저술, 주시경을 중심으로 한 조선어 강습원의 국어 강습 등 국어 연구 및 국어를 지키려는 운동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활동은 우리말과 우리글을 지키려는 국학 운동이자 국권 회복 운동, 항일 운동의 성격을 띠었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일제의 무단 통치는 문화 통치로 바뀌게 된다. 일제는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와 한국인의 문화 창달을 보장하고, 한국인 경영의 신문을 허용하고, 우리 민족의 풍습을 존중하는가 하면 차별 대우를 하지 않겠다”는 유화 정책을 내세웠다. 1922년 2월에는 제2차 <조선교육령>을 공포, 교육 제도의 개선과 조선어 장려 등을 내세웠다. 조선 총독부가 계획한 『조선어사전』이 1920년 3월 출판되고, 1921년 3월 <언문철자법>이 개정되어 언문일치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문화 통치 기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한글 신문이 창간되고, 조선어 연구회(1921)를 비롯한 각종 문학과 학술․문화․예술 단체들이 조직되고 다양한 잡지들이 발간되었으며, 국학 운동을 비롯한 각종 계몽 운동이 활발해졌다. 하지만 문화 통치는 허구에 불과하였다. 신문이나 잡지 발행은 일제의 검열을 받아야 했으며, 일제의 의도에 맞는 내용이 아니면 삭제되거나 압수되고, 발행을 못하게도 하였다. 한국인에게 교육의 기회 확대를 주장하였지만, 한국인의 취학률은 20%를 넘지 못하였다.
1931년 만주 사변을 일으킨 일제는,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키면서 우리나라를 일본의 중국 대륙 진출을 위한 병참 기지로 삼아 전쟁에 필요한 인력과 군자금, 군수품을 조선으로부터 얻으려 하였다. 이를 위해 사상 통제를 강화하고, 산미 증식 계획을 다시 실시(1940)하여 곡식은 물론 금속까지 빼앗아갔다. 지원병제(1938)와 징용제(1939)․징병제(1943)를 실시하여 한국인을 전쟁에 동원하는 한편, 여자들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군수 공장에 보내는가 하면, 일본군의 성노예로 내몰기조차 하였다.
또한 일제는 우리 민족을 아예 말살하고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해 신사 참배 강요(1935)와 황국 신민 서사(1937년 제정)를 강요하였다. 1938년 4월 제3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조선어 과목을 정규 과목에서 폐지하고 조선어 사용을 아예 금지하였으며, 대신 일본어만 사용하도록 강요하였다. 우리 이름까지 일본 이름으로 바꾸는 창씨개명(1940)을 강요하였으며, 심지어 내선일체와 일선동조론으로 우리 역사를 거짓으로 꾸미기도 하였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전 국토를 병영화하면서 더욱더 무자비한 감시와 탄압을 자행, 1942년 10월 조선어 학회 사건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1943년 3월 제4차 <조선교육령>과 1945년 5월 <전시교육령>을 통해 우리글과 우리 역사는 완전히 폐지되었으며, 학교 교육을 한낱 전쟁 수행을 위한 도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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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국어 연구학회와 조선어 연구회, 조선어 학회, 한글 학회

일제 강점기 이전인 1908년 8월 31일, 주시경(周時經)이 중심이 되어 국어 연구를 목적으로 국어 연구학회(國語硏究學會)가 조직되었다. 국어 연구학회는 그 아래에 강습소를 설립하여 국어 강습 활동을 펼치는 한편, 문법책을 펴낼 계획을 세우고, 고어와 방언을 수집하는 일을 하였다. 1911년 9월 3일 열린 국어 연구학회 총회에서 학회의 이름을 ‘배달말글모음’[조선 언문회(朝鮮言文會)]으로 바꾸고, 그 아래에 둔 강습소도 조선어 강습원으로 개편하였다. 이후 1913년 3월 23일 ‘한글모’로 다시 이름을 바꾸어 1917년까지 활동하다가 4년 동안 활동이 중단되었다.
1921년 12월 3일, 국어를 연구하고 보급·선전할 목적으로 주시경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조선어 연구회(朝鮮語硏究會)가 창설되었다. 조선어 연구회는 이전의 국어 연구학회를 토대로 한 한글 연구 단체로써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결성된 민간 학술 단체로 평가되기도 한다. 조선어 연구회는 국어 연구뿐 아니라 우리말과 우리글을 통해 민족 정신을 드높이고자 노력하였다. 한글 계몽 순회 강연회를 열고, 1926년에는 음력 9월 29일(훈민정음 반포일)을 가갸날(1927년부터 한글날)로 정하였다. 1927년 2월부터는 기관지 『한글』을 간행하여 한글의 보급과 선전에 힘썼으나, 재정난과 일제의 탄압으로 1928년 10월 제9호를 내고 휴간하였다. 1929년에는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를 조직하여 『조선어사전』 편찬 사업을 시작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출판하지 못하였다.
당시 일제는 조선어 연구회의 활동을 허용하는 대신 조선어 연구회와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어용 단체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이런 이유 등으로 조선어 연구회는 1931년 1월 10일 총회에서 학회 이름을 조선어 학회(朝鮮語學會)로 바꿨다. 조선어 학회는 한글 강습을 열어 민족 의식을 드높이는데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1932년 5월 기관지 『한글』을 다시 창간하였다. 1933년 10월 29일 한글날 기념식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발표하여 혼란된 한글 표기를 통일하였으며, 1936년 10월 28일 한글날에 <사정(査定)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발표하여 표준말의 정리와 체계를 세웠다. 이때 발표한 내용은 오늘날까지도 한글 표기의 기준이 되고 있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조선어 학회는 1937년 한글 가로쓰기 안을 결의하는 등 한글 정착에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1940년에는 <외래어 표기법>을 발표하는가 하면, 훈민정음 원본(해례본)이 발견되어 계산한 결과 양력 10월 9일을 한글날로 변경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40년대 일제가 민족 말살 정책을 강력히 시행하면서 조선어 학회의 활동도 위축되었다. 1942년 10월 일제는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과 <치안유지법>에 따라 조선어 학회를 내란죄의 주동 단체로 규정, 조선어 학회 회원과 관련 인물들을 잡아가는 이른바 '조선어 학회 사건'을 일으켰다. 이에 1942년 10월 1일부터 1943년 4월 1일까지 회원 33명이 항일 독립 운동 혐의로 붙잡혀가고, 48명이 증인으로 붙잡혔다. 혹독한 고문 끝에 이윤재(李允宰), 한징(韓澄) 등 두 명이 목숨을 잃기까지 하였으며, 대다수가 형을 받았다. 이에 조선어 학회의 활동은 1945년 8월 15일 해방될 때까지 중단되었으나, 해방 후 1949년 9월 25일 학회 이름을 다시 한글 학회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글 학회는 1929년 조선어 연구회의 『조선어사전』 편찬 사업을 이어받아 1947년 10월 제1권 『조선말 큰사전』을 시작으로 1957년 10월 총 6권의 『큰사전』을 완간하였다. 『큰사전』 완간은 근 30년 만에 이루어진 숙원 사업이었다. 『조선말 큰사전』에 사용된 원고는 현재 등록문화재 제524-1호와 제524-2호로 지정되어 한글 학회와 독립기념관에 각각 전해지고 있다.

  • 질문1 조선어 연구회와 조선어 학회가 발행하였던 잡지 이름은 무엇인지 대답해 봅시다.
  • 질문2 한글날은 처음 음력 9월 29일에서 양력 10월 29일, 다시 10월 28일로 바뀌었다가 최종적으로 양력 몇 월 며칠로 정해졌는지 찾아 써봅시다.
  • 질문3 1942년 10월 1일부터 일제가 벌인 조선어 학회 사건은 어떤 사건인지 설명해 봅시다.
  • 질문4 1929년 조선어 연구회의 『조선어사전』 편찬 사업은 결국 1947년 제1권 무슨 사전으로 시작하여 1957년 총 6권의 무슨 사전으로 완간되었는지 대답해 봅시다.
  • 질문5 일제는 온건하게 학문적으로 한글을 연구하던 조선어학회를 왜 독립 운동 단체로 규정하였을지 자신의 생각을 말해 봅시다.

읽기자료 2

한글 말살 정책에 저항한 우리말 지킴이 이희승

호가 일석(一石)인 이희승(李熙昇)은 1897년 4월 28일(실제 생년월일은 1896년 6월 9일)경기도 의왕시 포일동(당시 주소: 경기도 광주군 의곡면 포일리 또는 경기도 시흥군 의왕면 포일리)에서 태어났다. 1903년부터 5년간 대인 교습처럼 사숙에서 한문을 배우고, 1908년 이정옥(李貞玉)과 결혼한 다음 곧 상경하였다. 1910년 관립 한성외국어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나라가 망하자 폐교되어 경성고등보통학교에 다니다가 자퇴하고, 1912년부터 1913년까지 양정의숙(養正義塾)에서 법학을 전공하였다. 1914년 사립 신풍학교 교원으로 취임하였지만, 학구열이 많았던 이희승은 1915년 사립 중동학교 야간부에 다녔으며, 1918년 3월 중앙학교(현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경성방직주식회사에 취직하여 학비를 마련하였다. 1923년 10월 전문학교 입학 검정시험에 합격한 것을 바탕으로 1925년 연희전문학교 수물과(數物科)를 졸업하고, 이어 1927년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수료한 다음, 1930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경성사범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면서 조선어 학회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3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가 되어 조선어와 조선문학을 강의하였다.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 조직에 참여한 이희승은 조선어 연구회(조선어 학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조선어 학회에서 추진하고 있던 <한글맞춤법통일안>(1933년 완성)과 <표준어사정(標準語査定)>(1937년 완성)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34년 5월에는 우리의 역사․언어․문학을 연구하고자 이윤재․손진태․이병도 등과 함께 학술 단체 진단학회(震檀學會)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조선어 학회에서 발행한 잡지 『한글』에 1938년부터 2년 동안 ‘한글맞춤법통일안 강의’를 연재하는 등 한글맞춤법 연구는 물론 이를 일반 대중들에 알리는데도 앞장섰으며,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에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말을 우리글을 지키는데 솔선수범하였다.
일제는 조선어 학회를 민족 정신을 계승하는 민족 운동 단체로 규정, 1942년 10월 1일부터 조선어 학회 회원은 물론 관련 인물들을 붙잡아갔다(조선어 학회 사건). 이희승 역시 이때 체포되어, 1945년 1월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았다. 감옥 생활을 하던 중 해방되어 1945년 8월 17일 풀려난 이희승은 곧바로 상경하여 다시 교직과 연구 생활을 계속하였고, 1946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어 1961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그의 강의 노트는 1955년 『국어학개설』이라는 이름으로 발간되었으며, 더불어 이희승은 10여 년의 노력 끝에 1961년 『국어대사전』을 편찬하였다.
4·19 혁명이 이어지던 1960년 4월 25일, 계엄령 아래에서 “학생의 피에 보답하자”며 3·15 부정선거 규탄 대학교수단 데모에 앞장서기도 하였던 이희승은, 1963년부터 동아일보 사장을 맡아 당시 박정희 군사 정권의 탄압에도 지조를 굽히지 않은 채 2년 동안의 임기를 무사히 마쳤다. 이후 대구대학 대학원장(1965),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장(1966), 단국대학교 부설 동양학연구소 소장(1971~1981)을 역임하며 국학 및 동양학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 밖에도 국어 학회 명예회장과 고문, 단군 선양 단체인 현정회(顯正會) 이사장을 맡았으며, 정부가 추진한 ‘한글 전용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한자 교육을 통한 국어 교육의 정상화’를 목표로 한 ‘한국 어문 교육 연구회’를 설립하여 회장 및 명예회장을 지내다 1989에 사망하였다.
이희승은 우리 민족 문화와 정신이 짓밟히던 일제 강점기 암울한 시대에 끊임없이 우리말을 연구하였고, 해방 후에도 국학 및 동양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 매진하였다. 그의 이러한 노력으로 우리는 일제 35년의 지배를 받고도 우리말과 우리글을 지켜 낼 수 있었으며, 한글을 널리 보급할 수 있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그의 공로를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으며, 그가 죽은 뒤인 1989년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하였다. 또한 이희승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하는 1994년 10월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으며, 국가보훈처가 주관하는 2012년 10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서울시 종로구 동숭동 이희승이 살던 집이 있던 자리에는 2002년 6층 높이의 ‘일석 학술 재단’ 건물이 세워졌으며, 일석 학술 재단에서는 2003년부터 우수한 업적을 남긴 국어학자에게 ‘일석국어학상’을 수여하고 있다.
현재 경기도 의왕시 포일동에 이희승이 태어난 집이 전해지고 있으며,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문봉동 Royal Saddle 승마장 뒤쪽에 있는 그의 묘에 추모비가 세워져 있고,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 남산 한옥마을의 남산골정원 안에 ‘일석이희승학덕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이희승의 출생지인 의왕시에서는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에 ‘갈미한글공원’(갈미는 내손동의 옛 지명)을 조성하여 이희승의 한글 사랑 정신을 널리 알리고 있다.

  • 질문1 이희승의 호는 무엇인지 한글과 한자로 모두 써봅시다.
  • 질문2 이희승이 회원으로 활동하다 일제에 붙잡혀 감옥 생활까지 하게 된 단체 이름을 써봅시다.
  • 질문3 1961년 이희승이 편찬한 사전 이름은 무엇인지 대답해 봅시다.
  • 질문4 이희승이 태어난 곳(시 또는 군)의 이름과 현재 그곳에 이희승과 관련하여 세워져 있는 공원 이름은 무엇인지 대답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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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조선말 큰사전』 원고<br>출처 : 문화재청(http://www.cha.go.kr/) -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검색 - 우리말 큰사전

등록문화재 제524-1호로 지정된 『조선말 큰사전』 원고이다.

  • 질문1 위 사진에 보이는 ‘E ~ 팀파니’는 무슨 뜻일지 말해 봅시다.
  • 질문2 위 사진의 오른쪽은 단어의 뜻을 풀이한 원고 내용으로 보인다. 이희승 선생이 직접 쓴 손 글씨를 보면서 느낌 점을 말해 봅시다.
  • 질문3 위 원고는 등록문화재 제524-1호로 지정되었다. 등록문화재가 무엇인지 조사해보고, 위 원고를 비롯하여 이희승 선생이 쓴 원고의 모든 내용을 영구 보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자신의 생각을 말해 봅시다.

시각자료 2

조선어학회사건을 겪은 회원<br>출처 : 국가보훈처 - 이달의독립운동가 - 이희승 - 포토갤러리)(http://www.mpva.go.kr/narasarang/month_hero_view_photo.asp?id=401&ipp=12)<br>또는 조선어학회 회원들(1949. 앞줄 맨 왼쪽이 이희승)<br>(출처 : 국내독립운동·국가수호사적지 사이트(http://sajeok.i815.or.kr/) - 이희승 생가

‘조선어 학회 사건’을 겪은 조선어 학회 회원들이 영도사에 모여 찍은 사진이다.

  • 질문1 조선어 학회 사건은 일제가 1942년 10월 1일부터 조선어 학회 회원과 관련 인물들을 강제로 붙잡아간 사건이다. 조선어 학회는 어떤 활동을 하였기에 일제가 회원들을 잡아갔는지 대답해 봅시다.
  • 질문2 사진에 “단기 4282년”이라고 쓰여 있다. 단기 4282년은 단군기원 4282년으로, 단군이 B.C. 2333년에 조선을 세운지 4282년 되는 해라는 뜻이다. 그러면 사진을 찍은 때는 서기로 몇 년인지 계산해 봅시다.
  • 질문3 사진 아래 맨 왼쪽에 쓰여 있는 ‘十一會’(십일회)는 조선어 학회 사건을 겪은 이들인 만든 ‘조선어 학회 수난 동지회’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어째서 십일회라고 이름 지었는지 조선어 학회 사건을 참고하여 대답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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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현재 10월 9일인 한글날은 여러 차례 날짜가 변경되었다. 한글날 날짜가 변경된 이유를 자세히 조사하면서 개천절, 스승의 날, 충무공 탄신일 등도 함께 조사․정리한 후, 어째서 그날이 기념일이 되었는지 주변 사람들에게 홍보해 봅시다.
모둠활동 2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글은 역사적으로 많은 고난과 희생 속에서 얻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한글이 외국어(특히 영어)보다 푸대접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자신이 하루 동안에 돌아다니는 거리에서 눈에 띠는 간판이나 각종 광고․홍보물을 기록한 후 한글과 외국어의 비율을 비교해 보고, 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적어 봅시다.
모둠활동 3
일제 강점기 교육은 <조선교육령>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조선교육령>은 몇 차례 고쳐 실시하게 된다. 일제 강점기 여러 차례 공포된 <조선교육령을> 조사하여 이를 비교할 수 있는 표로 정리하여 보고서로 제출해 봅시다.
모둠활동 4
이희승 선생의 생가 앞에 세울 안내판 내용을 만들어서 발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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