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영역

본문영역

  • 도입
  • 역사적 배경
  • 읽기
  • 시각자료
  • 모둠활동

주요사적지 배움터

이천의병전투지 - 백현(을미의병 최초의 대규모 승리)

도입

우리 500년 예(禮)의 나라가 견양(犬羊)같은 오랑캐에게 먹힌단 말이냐. 아! 우리 수천만 민족이 과연 희생의 참혹을 면하지 못한단 말이냐. 나는 차라리 고개 뱃속에 장사할망정 살아서 욕을 당하지 않겠다.

이천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를 주도적으로 조직하여 항일 의병 활동을 펼쳤던 김하락(金河洛)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남긴 말이다. 김하락, 조성학(趙性學), 구연영(具然英), 김태원(金泰元), 신용희(申龍熙) 등 5명은 단발령이 공포된 다음날의병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서울에서 계획을 세운 직후 이천으로 내려와 이천의병을 결성하였다.
이천의병은 1896년 1월 18일 이천의 광현(廣峴, 넓고개)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처음으로 치열한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광현 전투는 전기 의병사상 최초의 대규모 승리로 평가받고 있다. 김하락이 이끈 이천 의병은 이후 약 7개월에 걸쳐 끈질기게 항일 투쟁을 계속하다가 김하락이 영덕 전투에서 순국하면서 와해되었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경기도 이천시 신둔면 수광리 산 4-4
현재 상태 변형 / 현재 넓고개는 광주 실촌읍 신촌리를 연결하는 4차선 포장 도로로 우측에 동원대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4차선 도로 우측에 이천수창의소 연합 의진(義陣)의 광현 전투를 기념하는〈이천 의병 전적비〉가 건립되어 있다.

동학 농민 운동을 계기로 조선에 군대를 출동시킨 일제는 1894년 6월 21일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였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갑오개혁에 대항하여 안동, 상원 등에서 위정척사파 유생층이 주도한 갑오의병이 일어났고, 많은 관리들이 벼슬을 버리고 의병 봉기를 계획하였다.
청일전쟁 후 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되자, 조선은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의 침략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조선 침략에 차질을 우려한 일제는 1895년 8월 20일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친일 내각을 성립시켰다. 이어 단발령까지 반포되자 전통적 유교 사상을 신봉하는 재야 지식인 및 전․현직 관료들은 일제의 침략적 행위에 대항하였다.
단발령이 반포된 직후 서울에 거주하던 김하락 등 다섯 사람이 의병을 일으키기로 하고 활동 지역으로 이천을 선택하였다. 이들은 이천에 와서 짧은 기간 동안 대규모 의병을 조직하였다. 당시 이천군 화포군(火砲軍) 도영장(都領將) 방춘식(방춘식(方春植)의 협조가 일정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또한 이전부터 있었던 이천, 음죽, 충주, 진천 등에서 일어났던 자발적인 의병 활동도 이천 의병의 빠른 조직화 작업과 사기 진작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읽기

읽기자료 1

이천수창의소의 결성

이천 의병의 조직과 활동 상황은 김하락의 『진중일기(陣中日記)』와 김태원의 『집의당유고(集義堂遺稿)』 등의 기록을 통해 소상하게 알려지고 있다.
이천수창의소는 서울에서 내려온 김하락, 조성학, 구연영, 김태원, 신용희 등이 중심이 되어 경기도 이천에서 결성되었다. 이들은 단발령이 발표된 바로 다음 날인 1895년 12월 31일 의병 활동을 계획하고, 1896년 1월 1일 이천에 도착하였다. 특이한 점은 이들 중 이천 출신 인물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들이 의병 항쟁을 계획한 바로 다음날 이천에 도착했다는 사실은 오래 전부터 어떤 종류의 계획이 진행되었고 이천 지역의 인물들과도 상당한 교감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다섯 인물이 이천에 당도한 즉시 당시 이천군 화포군 도영장(지방 관아에 소속된 장교들인 영장의 우두머리) 방춘식을 방문했던 점이 특히 주목을 끈다. 방춘식은 김하락 등과 함께 포군(砲軍) 100여 명을 선발하는 등 이들의 거병 계획에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이천수창의소는 지휘를 하는 군영인 본진을 이천의 이현에 두고 구연영은 양평, 조성학은 광주, 김태원은 안성, 신용희는 음죽에서 각각 의병을 모집하였고 김하락은 이현에서 총 지휘의 역할을 맡았다. 관포군들의 활동과 주변 지역의 적극적인 호응으로 짧은 기간에 많은 의병이 모집되었다. 구영연은 양평에서 300여 명, 조성학은 광주에서 300여 명, 신용희는 음죽․죽산에서 화포군 300여 명을 모집하였다. 또한 김태원은 안성에서 의병 활동을 했던 민승천(閔承天)과 연합하기로 하였다. 이로써 최소한 900여명 이상의 의병이 모집되었을 뿐만 아니라 용인, 안성, 포천, 시흥, 수원, 안산 등에서도 의병을 자원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짧은 기간에 대규모의 의병이 결성된 것은 방춘식과 그 휘하의 관포군들이 적극적으로 활약했던 것과 이천과 인근 지역에서 의병 봉기의 기운이 고조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천에서 이천수창의소가 결성되었을 때 지도부 조직은 다음과 같다.

창의대장 : 민승천
각군도지휘 : 김하락
도총 : 조성학
좌군장 : 김귀성
우군장 : 신용희
선봉장 : 김태원
중군장 : 구연영
후군장 : 박주영(朴周英)
소모 : 전귀석(全貴錫)
유격장 : 김경성(金敬盛)
돌격장 : 심종만(沈種萬)
도지휘종사 : 안옥희(安玉熙)
대장종사 : 최순룡(崔順龍), 김명신(金明信)
도총종사 : 조순희(趙舜熙)
중군종사 : 최진엽(崔鎭曄)

상층 지도부는 대부분 서울에서 내려온 인물들이 맡았다. 창의대장에 추대된 민승천은 이천 의병에 참여하기 전에 안성에서 대규모 의병을 일으켜 활동했던 경험을 평가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대부분의 전기 의병이 해당 지역의 유생들 중심이었던 데 반하여 이천 의병은 외부 인물들이 주도했던 것이다. 특히 이천 의병이 경기도의 여러 지역 연합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지도부 조직은 각 지역의 대표들로 구성되었다. 또한 이천 의병은 다른 지역과 달리 남한산성의 300여 명, 양평의 300여 명, 음죽․죽산의 300여 명, 이천의 100여 명 등 약 1000여 명의 관군이 참여했다는 특성을 보여준다.

  • 질문1 이천 의병의 활동을 소상하게 알려주는 기록은 무엇인가요?
  • 질문2 이천 의병이 조직된 때는 언제인가요?
  • 질문3 이천 의병의 조직을 주도했던 인물들을 말해 보시오.
  • 질문4 이천수창의소 결성에 참여했던 의병들의 출신 지역을 모두 말해 보시오.
  • 질문5 다른 지역의 의병과 비교하여 이천 의병이 갖는 특징은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2

광현(백현) 전투

1896년 1월 17일 이천 의병 결성이 마무리되었을 때 일본군이 수비대 병력 100여 명을 파견하여 이천을 공격해 온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김하락은 의병이 아직 정규 훈련을 받지 못한 상황임을 감안하여 매복 작전을 쓰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조성학, 김태원, 김귀성, 신용희 등이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광현을 중심으로 야산에 매복하였다.
1월 18일 이른 아침 일본군 수비대를 맞이하여 이천수창의소의 첫 번째 전투가 시작되었다. 광현 아래쪽 오목한 곳에 대기하고 있던 조성학이 일본군과 두어 시간 동안 격전을 벌이다가 쇠북을 울리며 퇴군하여 광현 쪽으로 달아나니 일본군이 고함을 치며 쫓아와 광현 아래 다다랐다. 이때 대포를 쏘며 구연영이 앞을 가로막았고, 김귀성, 신용희는가 산 중턱으로부터 쏜살같이 내려왔고으며, 조성학은 적의 퇴로를 차단하여 사방에서 협공하였다. 일본군이 꼼짝없이 포위망에 갇힌 신세가 되었을 때, 김하락이 공격을 가하였다. 일본군은 죽은 자가 수십 명이었고 우리 쪽 사상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한참을 싸우다 저녁 10시경이 되자 일본군이 퇴로를 찾아 몰래 도망하자, 우리 쪽 병사들이 밤새도록 뒤를 쫓아 광주군 도척면 노곡리 노루목 장터에 도착하니 새벽이 되었다. 이천수창의소가 결성된 후 치른 첫 전투에서 하루 동안의 접전 끝에 패하여 도망하는 적을 광주까지 추격하여 섬멸한 것이다. 『진중일기』에는 일본 군사 180명 가운데 36명이 패해 달아났고, 마지막까지 살아 돌아간 자는 두어 명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이 다소 과장되었다 하더라도 이천창의소가 대승을 거둔 사실만은 틀림이 없다.
광현 전투는 을미 의병 사상 최초로 대규모 승리를 거둔 전투였다. 광현 전투의 대규모 승리는 이후 의병 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데 일정한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이천 의병이 이후 7개월 동안 이동을 계속하며 끈질긴 항쟁을 할 수 있었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 질문1 광현 전투에서 이천 의병이 처음 일본군을 맞아 벌인 작전을 말해 보시오.
  • 질문2 광현 전투는 얼마 동안 계속되었나요?
  • 질문3 광현 전투에서 살아남은 일본군 수비대의 병사는 몇 명이었나요?
  • 질문4 광현 전투가 전기 의병의 역사에서 갖는 의미를 설명하여 보시오.

읽기자료 3

이현 전투

광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의병들은 하루 동안 휴식을 취한 후 다시 훈련을 시작하였다. 1896년 1월 25일 눈이 내려 훈련을 중지하고 조성학은 이현, 구연영을 남천(南川), 김태원을 원적산(圓寂山), 신용희는 여주 경계, 김귀성은 양지 경계를 각각 지키면서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또한 심종만에게 군사를 이끌고 한강 위아래를 순찰하게 하였다. 이로 보아 초기 이천수창의소의 활동 범위가 이천 읍내와 신둔면 일대를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용인군 경계까지, 동쪽으로는 이포 방면의 남한강까지였음을 알 수 있다.
광현 전투에서 참패한 일본군은 또다시 이천 의병을 공격하였다. 이천수창의소는 같은 해 2월 11일 일본군 200여 명이 광주부에서 잤다는 척후병의 보고를 받고 적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드디어 2월 12일 새벽 일본군이 4개 부대로 나누어 공격해 왔다. 김태원이 거느린 부대는 정면으로 돌격전을 벌이고, 조성학은 원적산에 잠복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하고, 구연영은 이현 동구를 지켰고, 신용희와 심종만은 좌우로 매복하였으며, 김하락은 유격병을 거느리고 높은 곳에 올라 지휘하고, 민승천 대장은 중앙 진영을 지키도록 하였다. 쌍방 간에 전투가 벌어지자 우레 같은 총소리와 우박이 쏟아지는 듯한 탄환 속에서 하루 종일 싸움이 계속되었다. 승부가 나지 않아 양 군은 잠시 후퇴하였다.
2월 13일 새벽 다시 전투가 시작되었다. 두어 시간이 지나자 의병들이 얼굴을 들고 싸울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측으로 서북풍이 강하게 불고 심한 눈보라가 일었다. 이때 눈보라를 등진 일본군의 공격이 일시에 시작되었다. 여러 군사가 손발을 놀릴 수 없어 빈총을 들고 사방으로 흩어졌고 자신의 목숨을 지키려 하였다. 예기치 않았던 날씨 탓에 결국 참패한 이천 의병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민승천은 자신의 친위부대를 이끌고 죽산 쪽으로, 구연영은 원주 쪽으로 갔으며 나머지 장졸들도 모두 흩어졌다. 일본군은 이현으로 들어와 한 마을을 불태우고 닭, 개까지 없애는 만행을 저지르며 의병들을 수색하였다.
비록 강한 바람과 눈보라 때문에 두 번째 전투에서 패하고 말았지만, 일본군과 대등한 모습으로 하루 종일 격전을 벌이면서 물러서지 않을 만큼 이천수창의소의 병력은 막강하였다.

  • 질문1 이천 의병의 활동 지역으로 추정되는 범위를 말해 보시오.
  • 질문2 이현 전투에서 의병이 패하게 된 주요 원인은 무엇인가요?
  • 질문3 일본군이 이현으로 들어와서 어떤 만행을 저질렀나요?
  • 질문4 이현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이천 의병이 막강하였음을 알 수 있는 근거를 말해 보시오.

읽기자료 4

남한산성 전투

이현 투 패배 후 흩어졌던 김하락, 구연영, 신용희 전귀석, 김태원, 민승천 등은 각각 군사를 이끌고 다시 이천으로 모여들어 의병을 재정비하였다. 포군이 1,800여 명이고 장수와 종사관을 합해 약 2,000여 명의 병력 규모를 갖게 되었다. 초기 이천수창의소의 조직 편제를 그대로 유지하였으며, 다만 창의대장에는 민승천 대신 광주에서 활약하다가 이천 의병에 합류한 박주영(朴周英)을 추대하고 심상회를 여주대장으로 임명하는 등 지도부를 일부 개편한 정도였다.
이천수창의소는 조직을 재정비한 후 2월 28일 남한산성으로 이동하였다. 이미 남한산성에 입성하여 관군의 공격을 받아 위태하게 된 심진원(沈鎭元)의 광주 의병이 세 차례나 이천수창의소로 구원을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에는 광주 의병 외에 양근 의병이 합세하고 있었다. 남한산성이 견고하였을 뿐만 아니라 군수 물자가 풍부하게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의병은 강력한 전투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남한산성을 근거로 한 연합 의병이 강력한 전투 진용을 갖추게 되자, 큰 위협을 느낀 일본군 측은 고종을 협박하여 의병 토벌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끝까지 협조하지 않자, 일제는 친일 관리들을 위협하고 거짓 조서를 만들어 관군 500여 명을 이끌고 남한산성을 포위하였다. 3월 5일 [벌어진 첫 전투에서 연합 의병이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2~3일 동안 산발적인 접전에서도 의병이 모두 승리하였다. 전세가 이렇게 되자 정부는 강화도 병사 300여 명을 남한산성으로 이동 배치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남한산성의 군량 보급로를 끊고 항복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연합 의병 측에서 오히려 관군들이 대의(大義)를 좇아 의병과 더불어 왜적을 물리치지 않는다면 적으로 간주하여 토벌하겠다는 글을 보냈다.
남한산성 연합 의병의 기세가 높아지자 정부에서는 계속 병력을 증가시켰고, 남한산성 쪽으로 합세해 오는 의병도 늘어나면서 대치 상태가 지속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연합 의병은 3단계로 나누어 서울 진공 계획을 수립하였다. 1단계는 수원을 점령하여 서울 남쪽의 요충지를 장악하고, 2단계는 춘천, 분원, 공주, 청주, 수원 의병이 연합하여 남한산성을 포위한 관군과 일본군을 격파하고, 3단계는 삼남 지방의 의병까지 총동원하여 서울로 진격하여 러시아 공사관에 있는 고종을 환궁시킨 다는 것이다. 남한산성 연합 의병은 서울 진공 계획을 실행에 옮겨 수원 방면의 의병들을 동원하여 수원을 점령하였다. 또한 춘천 지역의 의병 일부가 한강 상류를 건너 광주에 합류하는 등 2단계 계획도 추진되었다.
그러나 3월 22일 남한산성이 함락되면서 연합 의병의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남한산성이 점령된 이유는 첫째 식량 부족으로 인한 의병들의 동요, 둘째 이천수창의소 대장 박주영이 살해될 정도로 심각해진 의병장들의 내부 분열, 셋째 수원유수의 벼슬자리를 주겠다는 관군의 회유에 넘어간 김귀성의 배신 등이다. 결국 관군은 김귀성을 통해 성벽의 취약한 부분을 알게 되었고, 이곳으로 500여 명의 병력을 들여보내 남한산성을 점령하였다.
남한산성에서 패배하여 의병 최초로 계획된 서울 진공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또한 이천수창의소도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

  • 질문1 이천수창의소 의병이 남한산성으로 이동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1896년 3월 5일 관군과 1차 전투를 벌인 남한산성 연합 의병에 참여했던 세력들을 모두 말해 보시오.
  • 질문3 남한산성 연합 의병이 구상했던 서울 진공 계획 3단계를 차례로 말해 보시오.
  • 질문4 남한산성이 관군 및 일본군에 의해 함락된 배경 세 가지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5

영남으로 이어지는 김하락과 이천 의병의 활동

남한산성의 함락 이후 김하락이 이끈 이천 의병은 관군의 집요한 추적으로 활동이 어렵게 되자 4월 9일 이천을 출발하여 영남으로 이동하였다. 이천 의병은 4월 12일 제천에 도착하여 유인석 의병으로부터 환대와 격려를 받았다. 같이 활동하자는 유인석의 제의를 뿌리치고 김하락은 단양과 풍기, 영주를 차례로 거쳐 예천에서 서상열(徐相烈) 의병과 연합하였다. 그러나 경주 공격을 반대하는 서상열과 결별하고 4월 28일 의성에 도착한 김하락 의병은 금성면 금성산에 위치한 수정사(水淨寺)에 진지를 세웠다. 이후 의성에서 활동하던 김상종(金象鍾) 의병 및 청송 지역 의병과 합세하여 의성 연합 의병(이천 의병-의성 의병-청송 의병)을 결성하였다.
의성 연합 의병은 5월 14일 청송군 안덕면의 성황현(城隍峴)에서 전투를 벌여 관군을 격퇴시키고 관군 10여 명을 사살하였다. 성황현 전투 후 100여 명의 병사를 추가로 모집하고, 각각 독립적 성격을 띠었던 3개 의병을 단일 의병으로 개편하였다. 5월 20일 산운리(山雲里)로부터 공격해 오는 관군 100여 명을 비봉산(飛鳳山)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기습 공격하였다. 5월 25일 관군이 또 다시 공격해 오자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5월 26일 경주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6월 15일 경주에 도착한 의성 연합 의병은 경주 유림 김병문(金炳文), 이시민(李時敏) 등과 연합하여 경주 연합 의병을 조직하였다. 경주 연합 의병은 6월 17일 조성학이 선봉이 되어 경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러자 인근의 청송과 영덕의 의병들이 경주 의병과 연합하기 위해 경주성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사태가 위급하다고 판단한 대구부 관찰사는 대구 주둔 일본군 수비대에게 병력을 요청하는 한편, 6월 23일 정예병을 투입하여 경주성을 공격하였다. 의병들이 맞서 싸웠으나 결국 30여 명의 전사자를 내며 경주성이 함락되었다.
경주성에서 패전한 후 김하락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6월 29일 영덕에 도착하여 신돌석(申乭石)과 합세하였다. 이후 영해로 옮겼다가 7월 9일 안동의 유시연(柳時淵)이 이끈 6개 부대와 연합하여 안동 화촌(花村)으로 들어갔다. 7월 14일 김하락이 영덕으로 공격해 오는 군사들과 맞서 싸우다 갈빗대에 탄환을 맞고, “살아서 왜적 놈들에게 욕을 당하지 않겠다.” 하고 강물에 투신하여 순국하였다. 이로써 김하락을 중심으로 이천에서 조직된 의병은 약 7개월에 걸친 격렬한 항쟁을 끝맺었다.

  • 질문1 김하락이 활동했던 지역을 찾아서 위치를 확인하고 ‘김하락의 이천의병 이동로’라는 이름의 지도를 만들어 봅시다.
  • 질문2 김하락 의병이 영덕에서 합세한 의병장은 누구인가요?
  • 질문3 김하락이 강물에 투신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시각자료

시각자료 1

사진은 광현에 건립된 이천의병전적비에 새겨진 글이다.

이천 의병 전승 사적비문

조상의 강특함과 예지가 우리 강토를 지키고 반만년 역사와 문화는 전승 창달해 왔다. 개화기에 간교한 왜구가 이 땅을 침략하여 심지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자행하니 온 민족의 분노는 하늘에 닿았다. 김하락, 김태원, 구연영, 조성학, 신용희 등의 열사들이 이천에서 창의하니 그 의병 수가 2000여에 달하였다. 서기 1896년 1월 17일 왜군이 이천으로 오는 것을 이속 넓고개(광현)에서 전멸시켰는데 이것이 을미의병의 첫 전승이었다. 그해 6월에 이르는 동안 주둔한 왜병과 격렬한 포격전을 했는데 한성에 주둔한 왜병의 전 부대가 지원 내침케 하는 등 여러 전투를 계속하여 영남에 이르기까지 장렬히 싸웠으니 이천 의병은 막강하다고 했다. 을사 정미 의병으로 이어 국치 후에도 이천은 지방 의병의 근원지로서 항일운동이 계속되었으니 서울 남부지방에 있어 독립투쟁사를 빛낸 최대의 중심지였다. 그후 김하락, 조성학은 영남에서, 김태원, 심용희는 호남에서 각각 전사하였고 구연영은 이천에서 장렬히 순국했다. 그리하여 우리 이원회원 일동은 이 의병 열사들의 고귀한 충절을 귀감으로 삼고 그 충혼을 길이 추모하고자 이 전적비를 건립한 것이다.

  • 질문1 소리내어 비문의 글귀를 읽어 봅시다.
  • 질문2 비문의 내용에서 이 비석을 건립한 이유를 찾아 말해 봅시다.
  • 질문3 이천 지역에서 일어난 을사의병 및 정미의병의 활동을 정리하여 발표해 봅시다.

시각자료 2

자료는 이천수창의소 의병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김하락의 초상과 이천 의병의 활동을 기록한 김하락의 『진중일기』이다.

  • 질문1 김하락의 입장에서 의병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한 가상의 연설문을 작성하여봅시다.
  • 질문2 이천수창의소의 활동을 기록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진중일기』의 머리말을 써 봅시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모둠활동

모둠활동 1
모둠별로 단발령 직후 서울에서 김하락, 조성학, 구연영, 김태원, 신용희 등이 거병을 모의하는 내용으로 연극을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2
모둠별로 이천수창의소가 항쟁을 벌인 시기에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 활동을 이천 의병과 비교하여 서로 다른 특징을 정리하고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규탄하며 항일 의병을 모집하는 내용의 격문을 작성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4
일본군에게 승리한 광현(백현) 전투의 상황을 역할극 시나리오로 작성하여 연습한 후, 동영상으로 만들어 봅시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하단영역

관련사이트

주소: 충남 천안시 동남구 북천읍 삼방로 95 전화: 041-560-0441 팩스 : 041-560-0426 
 Copyright 2014 THE INDEPENDENCE HALL OF KOREA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