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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기 집(육삼정 의거로 항일 정신을 드높인 아나키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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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시

낮에는 밭을 갈아 잔뼈 굵었고
밤에는 글을 읽어 지혜 밝혀서
동서만방 고금의 문화 통하고
망해가는 조국의 운명에 울다

삼일운동 싸우고 고국을 떠나
만주 망명객으로 모사를 할제
홍길동 변신술의 의혈 청년은
적진의 수화에도 신출 또 귀몰
이상향에 그리는 꿈의 흑장미
슬픈 테러리스트의 아나키즘도
오직 나라만으로 희생의 일념

국경 없는 인류의 사랑의 꿈은
중국의 동지들과 손을 잡고서
공산당 무리와도 싸우고 싸워
중화농민자위대 기수가 되다

자유혁명연맹의 흑면의사로
친일 분자 수백명 음모연하던
육삼정 복마굴 몰살하려다
적에게 사로잡혀 옥중의 원혼되다


윗글은 구파 백정기 기념관에 걸린 백정기 의사에게 바치는 헌시이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전라북도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734 갈선 부락
[도로명 주소 : 전라북도 정읍시 영원면 갈선1길 17-13]
현재 상태 복원 / 원래의 가옥은 멸실되고 현재 건물은 복원된 것이다.

한국인들은 러시아 혁명을 인류 역사상 최초로 사회 개조를 완수한 쾌거로 보고, 사회주의를 새로운 세상을 이끌어갈 사상으로 이해하였다. 1919년의 3·1운동은 한국인의 사회주의 수용을 확산시켰다. 3·1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민중이 지닌 폭발적 힘이 드러나자 민중 해방을 부르짖던 사회주의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1920년대 사회주의는 한국인들 사이에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때 수용된 사회주의에는 아나키즘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한국인들은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원칙을 주장하는 사회진화론을 극복할 수 있는 논리로 상호부조론을 수용하였고, 상호부조론은 아나코코뮤니즘[공산주의적 무정부주의]의 주요한 이론이었다. 한국인들은 사회주의에 관한 정보를 1905~1920년까지 아나키즘이 활발하였던 일본과 중국을 통해서 받아들였다. 1880년대부터 소개된 사회주의의 내용은 테러 등 아나키즘과 관련된 것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아나키스트들은 정치 혁명에서 더 나아가 사회 혁명까지 완수해야만 진정한 민중 해방을 이룰 수 있으며, 민중의 직접 행동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일제강점기 한국인 아나키스트들도 민중 직접 혁명론을 민족 해방 운동론으로 바로 세우고, 여기에 입각해 민족 해방 운동을 전개하였다.
한국인들에게 아나키스트 운동은 곧 민족 해방 운동이었다. 일제강점기 최대 권력은 바로 식민지 지배자였고, 아나키스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우선 일제의 식민지 권력을 타도해야 했기 때문이다.
의열단이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자로 분화된 이후, 중국에 있었던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하여 아나키스트들을 조직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회영, 이을규, 이정규, 백정기, 정화암 등이 1924년 4월말 베이징에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여 아나키즘 선전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면서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를 모두 비판하였다.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여 활동하던 백정기는 1933년 3월 상하이 육삼정(六三亭)에서 침략 앞잡이인 주중 일본 공사 등을 처단하기로 결정하고 의거를 결행하던 중 사전에 피체되어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압송되었다. 백정기는 1934년 6월 5일 39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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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읽기자료 1

애국심이 강한 소년

백정기는 1896년 1월 19일 현재의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신운리에서 백남일과 윤문옥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는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였는데,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총명하고 활달하였다. 주경야독으로 공부를 하였으며 의리가 강하였다. 13세인 1908년 조팔락과 결혼하고 처가 근처의 전라북도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로 이주하였다. 14세 때 영주정사에서 간재 전우에게 수학하며 사서삼경에 통달하였으며 서예에도 소질을 발휘하였다. 또한 신학문을 배워 정치에 대한 식견도 높았다.
1910년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기자 영주정사에서 동문수학하던 학동들과 정읍천변의 소년봉에서 망국제(亡國祭)를 지낼 정도로 애국심이 강하였다. 망국의 설움을 통탄하며 고민하던 백정기는 일제와 결사 항쟁할 것을 결심하고 1919년 2월 서울에 도착하였다.
일제의 무단 통치에 반대하는 3·1운동이 전국적 규모로 확산되어 가자 정읍으로 내려와서 일제의 침략상을 알리고 정읍 지역의 3·1운동을 앞장서서 이끌었다.
그 해 8월 다시 상경하여 동지를 모아 일제 식민 통치 기관의 파괴와 방화, 침략 원흉의 처단, 일제의 보급로 차단 등의 항일 투쟁을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압록강을 건너 안동[安東, 현재 단둥[丹東]]을 거쳐 봉천[奉天, 현재 선양[瀋陽]]으로 갔다.
1920년 겨울 서울에 잠입하여 군자금 모집과 거사를 준비하던 중 일제 경찰의 불심 검문으로 검거되어 서울 중부 경찰서에 구금되었으나, 광부로 신분으로 위장하고 본적과 행적을 속여 풀려났다.

  • 질문1 백정기가 부안에서 태어나서 정읍으로 이주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백정기는 3·1운동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나요?
  • 질문3 백정기가 1920년 국내를 떠나 중국 봉천으로 건너간 이유를 써봅시다.

읽기자료 2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결성과 활동

백정기는 국내에서는 항일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다시 신의주, 봉천을 거쳐 1922년 베이징에 도착하였다. 그는 베이징에서 독립 운동을 하고 있던 이회영, 유자명, 이을규, 정화암, 신채호 등과 교류하였다.
백정기는 베이징 이회영의 집에 거주하며 이을규, 이정규, 유자명, 정화암과 함께 자유, 평등, 상호 부조가 실현되는 새 나라를 만들자고 결의하였다. 나아가 세계 각 민족과 상호 이해 협력하여 하나의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 일제를 비롯한 전 세계의 독재자와 온몸으로 싸우자는 뜻을 모아 1924년 4월에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였다. 이 단체는 기관지인 『정의공보』를 발행하여 무정부주의에 입각하여 민족주의 진영내의 잘못된 생각들을 비판하고, 무정부주의에 입각하여 독립 운동을 이끌어갔다. 『정의공보』는 9호까지 발행하고, 자금난으로 휴간되었다. 1924년 9월 백정기는 이을규, 이정규, 정화암 등과 함께 일제의 탄압을 피해 상하이로 가서 영국인이 경영하는 주물 공장에 들어가 폭탄 제조 기술을 익혔다. 또한 중국인 아나키스트들의 조직인 화남아나키스트연맹과 제휴하여 노동자의 사상 계몽에 힘썼다. 1925년 5월 30일 상하이에서 총파업이 일어나자 그는 중국인 아나키스트들과 연합하여 수만의 노동자를 동원하여 총파업을 지휘하였다.
백정기는 1927년 여름 중국인 동지 진망산 등의 제안으로 이을규, 이정규와 함께 푸젠성 취안저우[福建省 泉州市]에 한․중․일 3개국 동지들의 합작으로 민단 훈련소라는 농민 자위군을 조직하여 농촌 계몽과 농민의 조직화에 힘썼다.

  • 질문1 백정기가 1924년 4월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결성과 활동에 참여한 목적을 써봅시다.
  • 질문2 백정기가 1927년 푸젠성 취안저우에서 어떤 활동을 하였나요?
  • 질문3 정화암 등 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담했던 이들의 정치 성향은 [극좌파, 좌파, 중도파, 우파, 극우파] 중 어느 쪽에 가까웠던 걸까요?

    ☞ 참고 : 평등과 공공성을 더 중시하면 좌파이고, 능력・경쟁・힘을 더 중시하면 우파이며, 그것들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면 극좌파, 극우파가 된다.

읽기자료 3

남화한인청년연맹 창립

1928년 5월말 난징[南京]에서 중국, 일본, 필리핀, 베트남, 인도 등 7개 민족 대표 120명이 모여 동방무정부주의자대회를 조직하였다. 한국 대표로 참가한 백정기는 한․중 양국이 연합하여 일제를 타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이 동맹의 기관지인 『동방』의 편집 위원으로 활약하다가 과로로 폐결핵에 걸려 요양소에 입원하였다.
1930년 백정기는 상하이에서 유자명, 유기석, 장도선, 정해리, 정화암, 안공근, 오면직, 이현근 등과 함께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전투 체제로 개편한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창립하였다. 이 단체는 일본 침략 세력의 저지와 일본 밀정 섬멸 작전을 주요 임무로 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은 주중 일본 대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 암살 미수 사건과 밀정 옥관빈, 이용로 등을 처단한 사건 등이다.
1937년 중일전쟁 때 그는 두개의 전지공작대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하나는 정화암, 유기석, 유자명 이강 등이 주도한 학도병 귀순 공작과 포로 구출 작전이었고, 다른 하나는 나월환, 이하유, 박기성, 김동수, 이재현 등이 중심이 된 실전 참가였다. 특히 후자는 뒤에 광복군 제2지대로 개편되었다.

  • 질문1 백정기가 참가하여 조직한 남화한인청년연맹의 결성 목적을 써봅시다.
  • 질문2 남화한인청년연맹의 대표적인 활동을 써봅시다.
  • 질문3 중일전쟁 시기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어떤 활동을 하였나요?

읽기자료 4

흑색 공포단의 결성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백정기는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남화아나키스트연맹,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중심으로 항일구국연맹을 조직하고, 기관지 『자유신문』을 발행하여 항일 투쟁을 선전·고취하였다. 제1차 상하이 사변이 일어나자, 한·중·일 동지들과 일본 기관 및 군사 시설의 파괴, 일제의 요인 암살, 반일 선전을 목적으로 하는 항일 구국 연맹의 실천 기관으로 흑색 공포단을 조직하였다.
1932년에 이회영이 비밀리에 상하이에서 만주로 가던 중 체포되어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자, 백정기는 정화암, 이달 등과 함께 이회영의 행적을 밀고한 이규서, 연충열 등을 처단하였다. 1933년에는 오면직, 엄순봉, 주열, 안경근이 일본 영사관의 밀정이었던 이종홍을 처단하였으며, 변질자인 옥관빈을 처형하였다. 그리고 1935년 엄순봉, 이규호, 이규창 등이 상하이조선인거류민회 회장인 친일파 이용노를 처형하였다. 상하이조선인거류민회는 한인들의 자치 기관처럼 보이는 이름과 달리 실제로는 상하이 거주 교포들, 특히 항일 운동가들에 대한 정보를 일본 영사관에 제공하는 일제의 어용 기관이었다.

  • 질문1 1931년 조직된 항일구국연맹에 참여한 단체 이름을 써봅시다.
  • 질문2 흑색공포단의 결성 목적은 무엇인가요?
  • 질문3 1932년 이규서, 연충열 등을 처단한 이유를 써봅시다.

읽기자료 5

육삼정 의거의 준비

주중 일본 공사 아리요시는 1932년 7월 23일 장제스[蔣介石]와 국민당 정부의 승인을 받아 특명 전권 대사인 주중 공사로 임명되었다. 1933년 중국 군벌은 주중 공사 아리요시에게 4천만 엔을 주어 열하를 근거지로 항일 유격전을 벌이고 있는 의용군과 한족의 항일 독립군을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아리요시는 국민당 정부의 고위 관료들을 매수하려는 비밀 회의를 상하이 육삼정에서 열기로 계획하였다.
정보를 입수한 흑색공 포단은 1933년 3월 5일 합숙소인 백정기의 집에서 모였다. 이날 함께 한 정화암, 원심창, 엄순봉, 이강훈, 이달, 이수현, 정해리, 오세민, 야다베[失田夫] 등이 아리요시를 암살하고, 중국 군벌과 일본 공사의 밀약 사실을 폭로하여 아리요시의 계획을 무산시키기로 결의하였다.
의거를 담당할 적임자는 서로 지원하는 바람에 그날 정하지 못하여 다음날 아침 제비뽑기로 백정기와 이강훈이 선정되었고, 현장 안내는 원심창이 맡기로 결정하였다.

  • 질문1 육삼정 의거를 계획한 목적을 써봅시다.
  • 질문2 육삼정 의거에 참여하기로 한 세 사람의 이름을 써봅시다.
  • 질문3 육삼정이 있던 상하이 훙커우 공원은 1932년에 누구의 어떤 의거가 있었던 장소인가요?

읽기자료 6

육삼정 의거의 실행

백정기와 이강훈은 은밀하게 정화암과 이용준이 준비한 폭탄과 권총으로 아리요시 공사 암살을 준비하였다. 무기는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 의거 때 사용한 것과 똑같은 폭탄으로 정하였다. 3월 14일 밤에는 거사 장소인 육삼정을 답사한 후, 잠복 장소로는 육삼정 건너편에 있는 중국 요리점인 송강춘(松江春)으로 정하였다. 류자명은 거사 이후 보도용으로 사용할 흑색 공포단 명의의 선언문을 베이징[北京], 톈진[天津], 난징[南京]의 각 신문사에 제공하기로 하였다.
3월 17일 오후 8시경, 백정기를 포함한 네 사람은 류자명에게 무기를 받고 자동차를 몰아 육삼정으로 향하였다. 야다베가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자리를 뜨고 백정기 등 세 사람이 송강춘에 들어섰는데, 여기에 이미 변장한 일제 경찰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상황을 눈치 챈 세 사람은 일제 경찰과 싸움을 벌이며 탈출하고자 하였으나 결국 체포되고 말았다. 후일 야다베가 일제의 회유에 넘어가 밀정이 되어 일본 영사관에 미리 육삼정 의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밝혀졌다.
비록 거사는 성공하지 못했으나 다음날 아침 베이징, 텐진, 난징 등 각 신문에 육삼정 의거 계획이 대서특필되었다. 이로 인해 장제스와 아리요시 공사의 밀약은 세상에 폭로되었고, 군벌 반대 세력과 민중들의 시위가 격화되어 밀약은 실패로 돌아갔다. 육삼정 의거는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 침략 음모를 폭로시켜 중국인과 한국인의 항일 의식을 크게 북돋웠다.

  • 질문1 육삼정 의거를 일으킨 때는 언제인가요?
  • 질문2 육삼정 의거가 실패한 이유를 써봅시다.
  • 질문3 육삼정 의거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7

백정기의 순국과 유해 봉환

백정기를 비롯한 세 사람은 일본 나가사키로 압송되었다. 이 의거가 있은 후 양일동이 일본으로 건너가 최학주, 정찬진, 정철, 홍성환 등과 협력하여 이들의 압송지역을 알아내고 구명 운동을 위한 비용을 마련하였다. 홍성환이 나가사키까지 찾아가 백정기 등 3인을 면회하고 변호사를 선정하여 구명 운동을 폈으나 실패하였다.
나가사키 법원에서 백정기와 원심창은 무기 징역, 이강훈은 징역 15년 형을 선고 받았다. 백정기는 1934년 6월 5일 향년 39세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광복 후 백범 김구가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3의사의 유해를 발굴하여 국내로 모시고 돌아오기로 하여 재일조선건설동맹 회원들을 중심으로 유해를 발굴하였다. 1946년 7월 6일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의 유해는 국민장을 치룬 뒤 서울특별시 용산구의 효창 공원 3의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 질문1 육삼정 의거를 실행한 백정기를 비롯한 세 사람의 구명을 위해 어떤 활동들이 있었나요?
  • 질문2 백정기가 순국한 때는 언제인가요?
  • 질문3 3의사의 유해 발굴을 주도한 단체 이름을 써봅시다.
  • 질문4 3의사의 국민장이 치러진 때와 유해를 안장한 장소를 써봅시다.
  • 질문5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이끌다가, 해방 후 국내로 돌아와 3의사의 유해 봉환을 지시하고 주도한 민족 지도자는 누구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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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사진은 백정기 등 3인의 육삼정 의거에 관련된 『동아일보』1933년 11월 11일자 기사이다.

  • 질문1 일본의 아시요리 공사를 암살하고자 했던 조직과 주요 가담자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 질문2 백정기 등 3인이 일본의 아리요시 공사를 처단하려고 한 이유를 써봅시다.

시각자료 2

사진은 백정기의 무기 징역 판결문이다.

  • 질문1 백정기가 무기 징역을 선고받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시각자료 3

사진은 서울 효창공원에 있는 윤봉길・이봉창・백정기 3의사의 묘이다.

  • 질문1 3의사에게 바치는 감사의 편지를 써 봅시다.
  • 질문2 3의사의 묘 왼쪽으로 또 하나의 무덤이 보이는데, 이 무덤은 가묘(假墓, 유골이 안장되지 않은 임시 무덤)이다. 누구의 무덤인지 조사하여 말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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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모둠별로 백정기의 처지가 되어 옥중에서 국내 청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고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2
모둠별로 백정기의 일생을 UCC로 만들어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모둠별로 ‘이달의 독립운동가 백정기’ 포스터를 만들어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4
모둠별로 “육삼정 의거 성공하다”라는 제목으로 가상 역사신문을 만들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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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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