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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9월 6일, 밀양 읍내는 길거리가 막히고 교통이 두절되어 완전 철시 상태가 되었고, 영결식장에 모인 사람이 만여 명에 달하였다. 마산·대구·약목·부산·동래·양산·진주·김해 기타 각 군에서 온 사회단체 대표들과 동지 수백 명이 조기와 만장을 들고 길게 참렬하였다. 장례위원장 정웅(鄭雄)의 인사말와 30인 장례위원회 명의의 영결문(永訣文 : 죽은 사람을 영원히 보내는 글) 낭독에 수천 명이 통곡하여,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백여 통의 조문과 조문전보도 일일이 낭독되었고, 밀양청년동맹 외 각 단체가 교대로 상여를 운구하였다.
밀양군내의 전 경찰력을 동원하여 비상경계 태세에 돌입해 있던 일제 경찰 당국은 장례행렬이 어느 순간 대규모 시위대나 봉기군으로 바뀔까봐 지레 겁을 먹었다. 그래서 경남도경이 경북도경에 지원을 요청하여 수십 명의 형사대를 파견 받아 곳곳에 잠복시켰다. 또한 조기·조문·만장 등을 압수하고 갑자기 길을 막아 장의 행렬의 진로를 방해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이러한 일제의 횡포에 군중이 조악(弔樂 : 죽은 이의 명복을 비는 음악)을 울리며 경찰서로 몰려가 포위하고 대치하니, 일제는 경상남북도의 경찰을 총동원하여 간신히 진압하였다.이런 소란 속에 영구(靈柩 : 시신을 넣은 관)는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용지리 선영(先塋 : 조상들의 묘가 있는 산)에 가까스로 도착하여 안장되었다.
수십 개 사회단체가 공동 주관하여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이 장례는 백민 황상규의 사회장(社會葬)이었다. “나는 죽어도 집에서는 죽지 않고 대중을 위하여 밖에서 일하다가 밖에서 죽겠다”고 늘 다짐하던 황상규는 이렇듯 사망한 이후에도 조국의 독립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일찍이 일합사와 광복단 운동부터 시작하여 의열단, 청년회, 신간회 운동으로 이어진 항일독립투쟁의 가시밭길을 한 치의 흔들림도, 한 순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의연당당하게 헤쳐 온 용맹한 투사였다. 그의 ‘선비형 용장(勇將 : 용맹한 장수)’과 같은 모습은 주위의 많은 동지들과 지역사회의 후배 운동가들에게 본받고 싶은 선구자가 되기에 충분하였다.그는 생전만 아니라 사후에도 밀양 출신 의열단계 독립운동가들의 영원한 맏형이요 정신적 대부(代父)였다. 그는 명성과 실제 행동이 일치하였고, 열정이 강하며, 지혜와 성심이 있고 수완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기질과 성품으로 자기만의 편안한 삶을 조금도 누리지 않고, 일생을 다할 때까지 고통의 길을 걸었고, 어려움을 겪을 때에도 절대로 피하거나 굴함이 없이 정면으로 뚫고 나간, 실로 위대한 독립투사요, 언행일치의 진실된 민족지도자였다.
일본 식민통치에 맞서 목숨을 걸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싸웠던 황상규의 애국정신을 찾아가 보자.
역사적 배경
| 현재 주소 | 경상남도 밀양시 노상하 4길 43-1 |
|---|---|
| 현재 상태 | 멸실 / 멸실되어 현재 음식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
백민 황상규는 1890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황문옥(黃文玉)과 허경순(許敬順)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908년 7월 밀양의 노동야학에서 체조교사를 역임한 그는 경술국치 후 일합사(一合社)를 결성하고 광복단(光復團)과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 등 국내 비밀결사단체에서 활동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조직이 와해되자 그는 중국 지린(吉林)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와 조선독립군정사(朝鮮獨立軍政司)를 결성하고 재무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19년 2월에는 독립운동가 39명 중 하나로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며 독립 의지를 대내외에 널리 알렸다.
몸을 바쳐 적들을 처단하는 방법으로 조국의 독립을 완성하고자 1919년 11월 지린에서 같은 밀양 출신의 김대지, 김원봉 등과 함께 의열단(義烈團)을 결성한 그는 국내의 일제식민통치기관 총공격을 계획하고, 1919년 12월 중순 경 먼저 국내로 들어와 거사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거사계획이 사전에 발각되면서 1920년 6월 일본경찰에 붙잡혀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1926년 4월 옥고를 마친 후 그는 청년운동 등 밀양지역 사회운동을 주도하였고 1927년 12월에는 신간회 밀양지회를 설립하여 지회장을 역임하였다. 1929년에는 신간회 중앙본부 서기장 겸 서무부장으로도 활동하였다. 이렇게 국내외를 무대로 다양한 방략의 독립운동을 전개한 그는 평소 앓던 병으로 인해 1931년 9월 자택에서 서거(逝去 : 훌륭한 분이 돌아가심)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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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국내 항일 운동
국권회복에 청춘을 바치겠다는 비장한 결의에 의해 1913년 비밀결사 일합사(一合社)가 결성되었다. 일합사는 친목단체로 위장한 채 조직은 철저히 비밀에 붙여진 국지적 조직이었다. 황상규를 비롯하여 밀양의 청년지사이던 김대지·구영필·윤치형, 경북 칠곡 사람인 이각, 서울 출신이면서 초빙을 받아 마산으로 가서 창신학교 교사로 부임해 있던 안확, 훗날 마산의 3·1운동을 주도하고 신간회 지회장도 맡게 되는 실업인 명도석 등이 같이 참여하였다.
이와 별도로 1913년 말에서 1914년 초쯤에 황상규를 필두로 김대지와 이각이 비밀결사 광복단에 가입하였다. 경상북도 풍기에서 의병운동의 경력자인 채기중·한훈 등 10여 인의 발기로 결성되었는데, 조직망을 넓히고 회원을 늘려가는 과정에 경남지역의 청년지식인들이 영입되었다. 그 후 1915년 대구에서 박상진의 주도로 대한광복회가 결성될 때 광복단원들도 대부분 참여하여 새 조직의 일원이 되었다. 대한광복회 단원들은 1916년부터 군자금 확보와 무기 구입을 위한 공격적 거사를 수차례 감행하였다. 그로 인해 일제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되고 조직이 노출되어, 1918년 1월부터 주축인물 다수가 검거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1917년경에 구영필과 김대지가 만주 봉천과 평양에서 연이어 일경에 피체되고, 명도석 등 다른 회원들도 줄줄이 체포됨에 따라, 광복회의 미 체포 회원들은 후일을 기약하며 국외로 피신하는 길을 택하였다. 선생도 1918년 말에 고국을 떠나 광복회 만주본부가 설치되어 있던 곳인 만주 길림으로 갔다.
- 질문1 비밀결사로 결성되었던 ‘일합사(一合社)’라는 이름 속에 담겨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 질문2 황상규 등 경북 지역의 독립 운동가들이 참여한 단체로, 1915년에 대구에서 박상진을 중심으로 결성된 무장 투쟁 단체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2
만주 망명 직후의 독립운동
만주 길림에서 황상규는 여준, 조소앙, 김좌진, 손일민 등 여러 망명 지사들과 함께 무장투쟁의 의지를 모아서 1919년 2월 말에 대한독립의군부를 결성하고 재무를 담당하였다.그리고 국외 망명 독립운동자들의 이름으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의 서명자 39인 중 1인이 되었다. 의군부는 장차 무장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수행하기 위해 현재의 주·객관적인 여건을 감안해 뜻있는 개인이 목숨을 각오하고 일제의 기관과 중요 인물을 처단하는 ‘육탄혈전’이라는 대일항전의 방책을 결정하였다. 소수 정예의 결사대를 조직해서 폭탄을 갖고 적의 요새를 부수는 투쟁을 결행함으로써 ㉠ 일제의 통치기관과 그 요인들을 타격·섬멸하자는 것이었다.
그 무렵 처조카 김원봉, 밀양의 3월 만세시위를 주동했던 윤세주와 윤치형, 창원의 4월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배동선, 청주의 3·1운동을 주동했던 곽재기 등이 길림에 집결하였다.이들 10여 명의 청년들은 길림성 파호문 밖의 중국인 집을 빌려서 합숙하며 폭탄 제조법 및 사용법을 익혔다. 그리고는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함”, “충의의 기백과 희생정신을 확고히 가짐”, “죽음을 피하지 않고 단의(團義) 실현에 매진함”, 등의 10개 공약을 정하고, 비장한 결의를 다지며 의열단을 결성하였다. 의열단의 단장은 김원봉이라는 것이 통설이지만, 황상규가 의열단 결성에 깊이 관여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 질문1 밑줄 친 ㉠의 일제 통치기관과 그 요인들에 해당되는 예를 찾아봅시다.
- 질문2 황상규와 같은 밀양 출신으로, 의열단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들을 조사해서 두 명 이상 말해 봅시다.
읽기자료 3
의열단의 국내 특공거사 참여
의열단원들은 한마음으로 지체 없이 국내거사 준비에 돌입하였다.1920년 3월 김원봉과 곽재기·이성우가 상해로 내려가서 백방으로 애쓴 결과, 1차로 탄피 3개와 폭약을 구입하였다. 그것으로 화약압축식 대형폭탄, 도화선 점화식 중형폭탄, 투척 즉발식 소형폭탄 1개씩을 제조하였다.다시 4월 중순에는 폭탄 13개 제조용의 폭약과 탄피, 권총 두 자루, 탄환 1백 발을 추가 구입하였다. 그 사이 다른 단원들은 속속 국내로 잠입하였다.황상규는 김상윤·윤세주와 함께 자금조달을 위해 선발대로 1919년 12월 중순경에 입국하였다.뒤이어 밀입국한 단원들도 밀양·부산·마산·서울 등 각자의 연고지로 분산하여 잠복상태로 들어갔다.
한편 상해에서 구입한 무기의 국내 밀반입은 두 차례에 걸쳐 이어달리기 식으로 진행되었다. 1차분 폭탄은 곽재기가 이병철에게 넘겨주었고, 이병철은 밀양구락부의 대표이던 김병환에게 넘겼고, 김병환은 자기 집의 마루 밑에 숨겨놓았다. 2차분은 이성우가 이병철에게 건네주었고, 이병철은 배중세에게, 다시 배중세는 창원군 진영에 사는 강상진의 집 창고에 숨겨두었다.
거사 결행일은 1920년 7월 10일경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밀양 김병환의 집이 경기도 경찰부원에게 불시에 수색을 당하여 은닉폭탄 3개가 적발, 압수되어 버리고 만다. 밀양의 폭탄이 적발됨과 더불어 경성부 관내에 경찰의 특별경계령이 내려져서, 물샐 틈 없는 감시망이 가동되기 시작하였다.그러던 중 6월 16일에 황상규는 서울 인사동에서 이성우·이낙준과 거사 행동계획을 논의하던 중에 ㉠ 밀정 김진규의 제보를 받은 김태석과 그 부하들의 급습을 받아 동지들과 함께 불행히도 체포되고 말았다. 무기 점검 차 부산에 가 있던 곽재기와 김기득도 검거되고 윤치형·배중세 등 다른 단원들과 협력자들도 연이어 체포되었다. 이 특공거사 계획은 당시 ‘밀양폭탄사건’이라는 이름으로 크게 보도되었다. 이 사건은 3·1운동 이후로 세상의 이목을 가장 놀라게 한 사건으로 총독부 당국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비록 실패하였지만 의열단의 ‘제1차 암살파괴계획’은 독립운동의 전투성을 크게 고양시켜 준 선도적 사례였다.
1920년 6월 21일의 결심공판에서 황상규에게 징역 7년형이 선고되었다. 그 형량은 경성복심법원 판결에서도 변경되지 않고 그대로 확정되었다가 1923년 5년 4개월로 감해졌고, 1926년 4월 24일에 마포의 경성형무소에서 만기 출옥하였다.
- 질문1 밑줄 친 ㉠의 밀정 김진규와 김태석과 그 부하들을 비판하는 글을 써봅시다.
- 질문2 악질 친일파 김태석의 악행을 조사하여 일곱 가지 이상 말해 봅시다.
읽기자료 4
지역사회 운동을 주도하고 민족문화운동에 참여하다
출옥한 황상규는 먼저 출옥해 있던 의열단 동지들인 윤치형·윤세주와 함께 밀양의 청년운동에 가담하였다. 1920년 창립 이후로 활동이 극히 부진했던 밀양청년회에 신임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몇 명의 일본인 지주의 이익을 위해 경상남도가 추진하던 밀양군청 이전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언론운동과 한글운동 등의 전국적 민족문화운동에도 참여하여 힘을 보탰다. 일제의 극심한 언론통제에 맞서서 새로운 민족지를 육성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영남 출신 민족 자본가들을 중심으로 중외일보를 인수하고 주식회사로 재창립하려는 움직임이 나오자 발기인으로 동참하였다. 1929년 10월에는 조선교육협회에서 조선어사전편찬회를 발기하여 총회를 개최하였는데, 선생도 그 발기인 중 1인이었다.
- 질문1 ‘육탄혈전’을 주장하던 선생이 출옥한 이후 지역사회운동과 민족문화운동에 참여한 까닭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 질문2 1926년에 출옥한 황상규가 1929년까지 벌인 활동들을 말해 봅시다.
읽기자료 5
신간회 운동에 헌신하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전열 내의 좌우합작에 의한 최대의 민족협동전선 조직이었던 ㉠ 신간회(新幹會) 운동에도 황상규는 헌신적으로 참여했으며, 마지막에는 ‘해소론’에 반대하여 조직을 지켜내고자 무진 애를 썼다. 신간회는 1927년 2월 서울에서 결성되었다. 신간회 중앙본부는 자체의 인적·조직적 역량을 확충함과 아울러 지방조직의 구축 및 활성화에도 힘쓰기 시작하였다.
1927년 12월 19일에 밀양에서도 신간회 창립대회가 개최되었다. 그는 대회의 임시의장이 되어 본부 규약을 낭독하고 지회 규칙을 통과시켰다. 임원선거에서 황상규가 회장, 김병환이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신간회 밀양지회의 창립과 조직구성을 주도한 이들은 3·1운동과 의열단 창건 및 밀양폭탄사건에 직접 참여했거나 지역 청년운동을 이끌어 온 인물들 중심의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선생과 윤세주가 지역의 민족운동 재활성화에 앞장서면서 그 기운과 실력이 신간회 지회 설립으로 결집된 것이다.
그는 신간회 밀양지회의 창립 및 초기 활동 단계에서 최고 지도자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군내 선전홍보 및 조직 확충, 인근지역 지회와의 유대증진 활동을 폈고, 본부 대회에도 출석하였다.
1929년 11월 광주에서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들의 일대 충돌사건이 발생하자 신간회 본부에서는 진상조사단을 급파하였다. 서무부장이었던 그는 허헌 위원장과 김병로 재무부장과 함께 11월 9일 광주로 내려가서 광주고보 학부형회 위원들을 만나고 유관기관을 방문하면서 사건진상 조사와 구속학생 석방을 위해 노력하였다.또한 귀경 후 중앙상무집행위원회에서 선생이 진상을 보고했고, 상집위원회와 집행부는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적 운동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12월 13일에 ‘광주학생사건 진상발표 대연설회(민중대회)’를 열기로 결정하였다.그러나 일제 경찰이 대회 개최를 금지하고, 허헌을 비롯한 신간회 간부 및 회원 외 청년·노동·여성단체 관계자 등까지 잡아 가두는 대탄압을 가하였다. 이로 인해 신간회 본부 기능이 마비되어버렸다.
1930년 일부 우파의 타협 노선과 좌파의 합작 분리 노선이 드러난 이후 경성지회가 중앙본부 일부 간부를 인정할 수 없다는 ‘통의문’을 전국 지회들에 발송하여 본부에 맞서고, 신간회 ‘해소론’에 호응하는 움직임이 일부 지방지회들에서 나오면서 신간회 전체조직은 격랑에 휩싸이기 시작하였다.거기에 더해 일제는 은밀히 신간회 전체대회를 연기시키는 공작을 벌이고 해소론이 번져가게끔 책동하였다.
이런 사태 속에서 해소론의 이면을 꿰뚫어보고 있던 그는 당당하게 신간회 해소론을 공박하고 반대하는 입장을 계속 주장하였다. 밀양지회도 정기대회 결의 등을 통하여 일관되게 해소 반대 입장을 발표하였다. 인근의 마산지회와 양산지회도 같은 내용의 결의를 거듭 내고 신간회를 끝까지 지켜내려 하였다.그러나 1931년 5월에 개최된 전체대회에서 해소 안이 졸속으로 가결되고 경찰이 그 결과를 밀어붙임에 의해 신간회는 스스로 해체 소멸되고 말았다.
- 질문1 밑줄 친 ㉠의 신간회 결성을 주도한 좌·우 독립운동 세력에 대해 각각 설명해 봅시다.
- 질문2 황상규가 신간회 해소를 끝까지 반대하였던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시각자료
시각자료 1
황상규 동상(밀양독립운동기념관 야외전시장)
- 질문1 밀양독립운동기념관 야외전시장에 전시돼 있는 황상규의 동상입니다. 야외 전시장을 둘러보며 황상규와 관련 있는 독립운동가들을 찾아봅시다.
- 질문2 황상규의 독립 운동을 1910년대와 1920・30년대로 나눠서 정리해 봅시다.
시각자료 2
의열단이 조선총독부 관공리에게 보낸 경고장
- 질문1 의열단이 어떤 의도로 조선인 관공리들에게 경고장을 보냈을지 생각해 봅시다.
- 질문2 의열단의 경고장을 받아본 조선총독부 관공리들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생각해 봅시다.
- 질문3 내가 일제 강점기에 살았다면, 어느 쪽 편에 섰을지 생각해 봅시다.
시각자료 3
의열단의 자금 협조 명령서
- 질문1 의열단의 자금 협조 명령서에서 주장하고 있는 독립 운동 방법을 찾아봅시다.
- 질문2 그 시대에 내가 의열단의 자금 협조 명령서를 직접 받아서 읽었다면 어떤 행동을 했을지 적어봅시다.
- 질문3 의열단과 관련된 영화 ‘암살’을 보고 소감문을 작성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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