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영역

본문영역

  • 도입
  • 역사적 배경
  • 읽기
  • 시각자료
  • 모둠활동

주요사적지 배움터

한훈 생가(광복단 결사대의 중심 인물)

도입

군등(君等)은 조선의 혈통을 받고 배달민족이란 긍지 아래 살아 왔거늘 어찌하여 부모의 육신을 깎고 형제의 피를 빠는가! 하늘이 뜻이 있다면 어찌 천벌이 없을 것이며 신(神)이 뜻이 있다면 어찌 재앙이 없을 소냐! 아 금수(禽獸)만도 못한 어리석은 무리여 그러고도 오히려 생명을 보존코자 하니 개탄치 않을 수 없다. 한번 기회가 오면 누가 너희들의 일편 고기를 회치고 싶지 않을 자 있으며, 한 줌의 소금을 가지고 기다리지 않는 자 있으랴! 그 후에 남을 너희들의 자손은 또한 어이 하려나?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보내려는가? 또 어느 지옥의 한 모퉁이에 방황케 하려는가? 오늘날 저 철창에서 신음하는 형제자매들은 모두 누구 때문인가? 그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의사(義士)들이거늘 군들은 이 의혼(義魂)을 죽이는 마귀에 그치려는가? 더 말하지 않겠노라. 부모를 모시고 처자를 거느린 자로서 너희들이 차마 할 수 있는 행동인가 깊이 생각하여 보라. 그러고도 오히려 너희들이 하는 일이 옳다고 하면 옳다고 믿는 대로 행하여 보라.

윗글은 한훈이 조직한 광복단 결사대가 1920년 미국 의원단이 내한했을 때 환영 나온 조선 총독 및 정무 총감 등을 처단하고자 계획하고 조선인 형사에게 보낸 경고문이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충청남도 청양군 남양면 흥산리 216
[도로명 주소 : 충청남도 청양군 남양면 거북미길 44-15]
현재 상태 변형 / 현 거주자의 아버지인 신창원이 1958년 구입했으며, 그 후 여러 번 소유자가 바뀌었다. 1970년대 새마을 사업 당시 초가 지붕을 개량했다.

1910년 대한 제국을 식민지로 만든 일제는 헌병 경찰제에 의한 무단 통치를 실시하였다. 한국인들은 일제의 강압적인 통치 속에서도 비밀 결사 활동, 독립 운동 기지 건설과 단체 조직 등의 방법으로 항일 투쟁의 기반을 닦아 나갔다. 마침내 1919년 거족적인 3·1운동의 결과 민주 공화제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이라는 성과를 낳았다.
일제는 3·1운동 이후 무력만으로 한민족의 저항을 막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이른바 ‘문화 통치’를 내세우면서 우리 민족운동계를 회유하고 분열시키고자 꾀하였다. 일제가 겉으로는 ‘문화 통치’를 내세웠지만, 뒷면에서는 여전히 경찰력을 사회 통제의 주축으로 삼고, 각종 악법을 무기로 삼아 식민 통치에 대한 한국인의 저항을 철저히 억압하고자 하였다.
망명 독립지사들은 더욱 교묘해진 일제의 ‘문화 통치’ 속에서 비무장·비폭력 독립운동만으로 독립이 어렵다는 점을 절실히 느꼈다. 이들은 민족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조직적인 무장 투쟁과 폭력적 수단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였다.
한훈도 전투적 독립운동 노선을 주장한 독립운동가 중 하나이다. 한훈은 1906년 친형과 함께 홍주 의병에 참여했으며, 1913년에는 경북 풍기에서 의병 출신들이 중심이 된 비밀 결사 조직인 광복단에 가입하였다. 광복단이 1915년 대한 광복회로 통합되자 역시 동참하였는데, 한훈은 대한 광복회의 전라도 지부에서 의열 투쟁과 군자금 모집에 힘을 쏟았다. 1918년 대한 광복회의 조직이 일제에게 발각되어 크게 파괴되자, 그는 체포를 피해 만주로 망명하였다.
홍주의병부터 줄곧 국내 독립 투쟁에 참여해 온 한훈은 3·1운동 이후 독립 전쟁론이 크게 부상하는 가운데 보다 적극적인 독립운동의 방도를 찾아 나갔다. 한훈은 1920년 6월 마침내 광복단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광복단 결사대는 조선 총독과 정무 총감,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파를 암살할 것을 결의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1920년 8월에는 친일파 처단을 목적으로 조직된 김상옥 중심의 암살단과 연합하였다.
광복단 결사대와 암살단원들은 1920년 8월 24일 미국 의원단을 환영하러 남대문 역에 나온 조선 총독 및 정무 총감을 암살하고자 하였지만 일제 경찰의 예비 검속으로 체포되었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읽기

읽기자료 1

홍주의병 참가와 이어진 독립 투쟁

한훈은 1906년 홍주 의병에 참여하였다가 전사한 외삼촌의 유언을 듣고 형 한태석과 함께 17세에 홍주의병에 참여하였다. 일본군의 공격으로 홍주 의병이 해산한 이후에 이용규 부대에 편성되어 곽한일의 지휘아래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곽한일은 홍주의병에서 적진으로 돌진하여 공격하는 돌격장(突擊將)과 군사를 모집하는 소모장(召募將)으로 활약하였다. 홍주성 전투 직후 이용규와 함께 흩어진 의병을 수습하고 충남 예산 대술의 이남규의 집에서 재차 거사를 추진하다가 일본군과 일진회의 습격을 받아 붙잡혔다.
곽한일이 붙잡힌 이후 한훈은 1907년 경 계룡의 신도안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 나철, 윤이병, 기산도 등이 주도한 오적 암살 계획에 결사대의 일원으로 참가하였으나 나철 등이 붙잡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만주로 망명한 한훈은 채기중을 비롯한 동지들을 만나 독립운동의 방향과 방법 등을 논의하였다.
1911년경 귀국한 한훈은 독립운동의 방도를 모색하던 중 1912년 유배에서 돌아온 임병찬, 곽한일, 이기상 등이 대한 독립 의군부를 조직하자 유장렬, 윤상보 등과 함께 참가하였다.
홍주 의병과 오적 암살 결사대, 대한 독립 의군부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한훈의 독립운동은 일관되게 무력 투쟁의 노선을 유지하였다.

  • 질문1 한훈이 홍주 의병에 참가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 질문2 한훈이 참가한 오적 암살 계획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3 1912년 한훈이 참가한 독립 운동 단체 이름을 써봅시다.

읽기자료 2

풍기 광복단 활동

1913년 한훈은 채기중을 만나 경상북도 풍기에서 풍기 광복단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풍기 광복단 결성에 참가한 인사는 의병 출신 인사가 많았는데, 홍주 의병 출신으로 유창순, 양제안, 전원식, 정성산, 유장렬 등이 참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광복단 결성에 한훈을 비롯한 홍주 의병 출신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광복단은 독립군의 양성을 위한 무기 구입과 군자금 모집을 주요 목적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한훈은 광복단 결성 직후 무기 구입을 위해 만주를 다녀왔으며, 1914년에 일제가 이권 침탈한 직산 금광을 습격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훈은 풍기 광복단의 일원으로 활약하면서 전라도 지역을 무대로 별도의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3년 대한 독립 의군부의 총대표인(總代表人) 곽한일과 김재순 등이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 침략의 원흉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군자금을 모집하였는데, 이때 한훈은 곽한일의 명에 따라 홍주의병 출신 김상보 등과 함께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이다가 1913년 7월경 발각되자 다시 만주로 망명하였다.
한훈은 풍기 광복단 가입 이후에도 홍주 의병, 전라도 출신들이 주도했던 오적 암살단 및 대한 독립 의군부 계열의 인사들과 동지적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이러한 조직적 기반은 뒷날 한훈의 군자금 모집 활동이 전라도 지역을 주무대로 이루어지는 배경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질문1 한훈이 채기중과 풍기에서 조직한 독립 운동 단체는 무엇인가요?
  • 질문2 풍기 광복단을 결성한 인물들의 출신을 써 봅시다.
  • 질문3 풍기 광복단의 주요 활동 목적을 써봅시다.
  • 질문4 한훈이 전라도 지역을 무대로 별도의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3

대한 광복회 활동

풍기 광복단은 1915년 대구 지역의 조선 국권 회복단과 연합하여 대한 광복회로 통합되었다. 대한 광복회는 1916년에 들어와 서울을 중심으로 조직을 확대, 강화해 나갔다. 이들은 국내에 100여 개의 혁명 기지를 건설한 뒤, 전국에서 같은 때 봉기하여 혁명적 독립전쟁을 수행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를 위해 대한 광복회는 친일 부호를 응징하여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면서 군자금을 모금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이에 따라 한훈은 무력 투쟁과 군자금 모집에 힘을 쏟았다.
그는 1916년 5월 김상옥, 유장렬, 이병호, 이병온 등과 함께 친일 부호인 전라도 보성의 양재성, 벌교의 서도현을 처단하며 투쟁에 앞장섰다. 1917년 1월 초에는 김상옥, 유장렬, 고제신 등과 벌교로 다시 내려가 서도현의 당질 서인선을 납치하여 75일 동안 감금하는 등 강력하고 적극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군자금 1만 원을 모금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때의 친일파 처단과 군자금 모집은 완벽하게 이루어져 일제 수사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훈은 1917년 3∼4월 무렵 이병온, 장남칠 등 4명의 동지와 함께 전북 순창의 조성 헌병 분대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는 혁혁한 성과를 올렸다. 1917년 전반기는 대한광복회가 소위 대구 권총 사건으로 박상진이 투옥되는 등의 수난을 겪고 있던 때였다.
한편 한훈이 1917년 7월 서울에서 윤홍중을 비롯한 여러 동지들과 독립운동의 방도를 논의했다는 기록이 확인되는데, 이때는 대한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이 출옥한 직후로 대한 광복회의 조직 확대와 관련된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하여 같은 해 7월 대한 광복회 충청도 지부가 만들어졌다. 재판 기록에는 1917년 7월 김한종이 박상진을 찾아가 충청도 지부를 조직되었다고 되어있지만, 충청도 지부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한훈을 비롯하여 유창순, 권상석 등 충청 지역 인사들이 이미 광복단과 대한 광복회에 깊게 관여하고 있었다.
대한 광복회는 군자금 모금을 위해 자산가들에게 고시문을 보내고 자발적인 의연금을 요청하였다. 모금이 잘 이루어지지 않자 포고문의 효력을 높이고 군자금 모금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1917년 말 칠곡의 부호 장승원을 처단하였으며, 1918년 1 월에는 충청도 아산 도고면장 박용하를 처단하여 부호들에게 경각심을 고취시켰다.
장승원와 박용하 처단 이후 대한 광복회 존재가 알려지면서 박상진, 채기중, 김한종 등이 체포되자, 대한 광복회 조직은 거의 파괴되기에 이르렀다. 한훈은 일제의 검거망을 피해 다시 만주로 망명하였다.

  • 질문1 대한 광복회의 모체가 된 두 단체의 이름을 써봅시다.
  • 질문2 대한 광복회가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택한 방법은 무엇인가요?
  • 질문3 한훈이 전라도 지역에서 벌인 활동 내용을 써봅시다.
  • 질문4 대한 광복회의 조직이 파괴된 계기가 된 친일파 처단 사건 두 가지를 써봅시다.

읽기자료 4

광복단 결사대의 조직과 활동

한훈은 3·1운동이 일어난 후 귀국하여 대한 광복회의 재건을 구상하고, 상하이로 건너가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연계를 시도하였다. 그 결과 이동휘, 이시영, 신익희 등의 임시 정부 요인들로부터 지원 약속을 받은 그는 1920년 3월 초에 권총 40정, 탄환 3천발, 폭탄 10개를 제공받아 귀국하였다. 그리고는 우재룡, 박문용, 김병순 등과 함께 조선 총독, 정무 총감, 이완용, 송병준과 조선인 악질 형사 등을 처단할 비밀 결사를 조직하기로 하고 동지 모집에 나섰다. 조직 이름은 광복단의 계보를 잇는다는 의미로 광복단 결사대라 지었다.
같은 무렵인 1920년 5월 한훈의 광복단 시절 동지였던 김상옥도 김좌진의 특명을 받고 북로군정서에서 비밀리에 파견된 김동순과 암살단을 조직하였다. 암살단의 조직은 만주 독립군들의 계획과 관련이 깊었다. 만주의 독립군 조직들이 1년 동안 준비하여 1921년 정월 쯤 국경을 돌파하는 게릴라전을 벌여 국경 일대를 점령 하거나 무너뜨리는 한편, 동해 연안을 항해하는 외국 선박들을 파괴하여 국제 문제를 유발하고 독립군을 국제법상의 교전 단체로 승인하도록 할 계획이었다. 이 작전에 크게 호응하여 일제 기관과 군대 및 경찰을 격파해 줄 국내 조직의 필요에 따라 암살단이 조직된 것이다. 김상옥과 그의 동지들은 북한산 골짜기에서 수차례 사격 훈련을 받는 등 필요한 준비를 하면서 행동할 기회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미국 의원단 내한 의 방문 소식을 접하고서, 이 기회를 이용하여 총독 이하 일제 고관들을 죽이고 친일 앞잡이 및 한인 고등계 형사들을 소탕하고자 하였다. 암살단은 6월경부터 행동 준비에 돌입하고 북로 군정서에 무기 공급을 요청하였다.
8월 10일경 만난 김상옥과 한훈은 암살단과 광복단 결사대가 활동 목적 및 행동 방침과 당면한 거사 계획까지도 거의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만 광복단 결사대는 아직 조직이 완성되지 않아 인적 구성이 약했고, 암살단은 무기가 거의 없는 사정이었다. 그래서 한훈과 김상옥은 두 조직이 힘과 자원을 합쳐서 같이 움직이기로 약속하였다. 이러한 계획 아래 거사 자금, 무기, 거사 때 뿌릴 취지서, 중추원 참의 및 한인 고등관에게 보낼 통고문, 한인 고등계 형사들에게 보낼 경고문, 시위용 태극기와 미국 국기 각 100장, 변장용 경찰복 등을 준비하였다.
그런데 거사 예정일 하루 전인 8월 23일 오전에 경찰 당국이 약 1천 명의 한인들을 대상으로 예비 검속을 개시하였다. 당시 일제 경찰이 감시하던 요시찰 인물 김상옥도 우선 검속 대상이 되었는데, 그가 급히 피신하자 경찰이 그의 집을 서들러 수색하였다. 숨겨두었던 인쇄물, 암살단 조직표 및 명부, 사진 등이 모두 발각되었고, 두 조직의 24명이 일제 경찰에 의해 피체되었다. 이 사건이 『혁신공보』 사건이다.
거사는 실패하였으나 이 사건의 재판은 연일 신문에 보도될 정도로 사회적 반향이 컸다. 특히 대한 광복회 계열 인사들이 조직이 무너진 후에도 계속 활동해 왔음이 확인되어 화제가 되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한훈은 원래 이 사건의 중요한 수령이니만큼, 답변할 때 태도가 매우 냉담하야 다른 피고와 같이 허둥지둥하지 아니하며 피고석에 꼿꼿이 앉아서 입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고 보도하였다. 한훈은 8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가 대한 광복회 활동 때 벌교의 서도현을 처단한 것이 드러나서 5년형이 추가되어 긴 옥고를 겪었으며, 옥중에서 몸이 너무 쇠약해져서 1929에야 형집행 정지로 풀려날 수 있었다.

  • 질문1 한훈이 조직한 광복단 결사대의 활동 목적을 써봅시다.
  • 질문2 김상옥이 조직한 암살단의 활동 목적을 써봅시다.
  • 질문3 광복단 결사대와 암살단이 활동을 같이하기로 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 질문4 두 단체를 거사가 결행하기 위해 준비한 물품을 써봅시다,
  • 질문5 두 조직의 24명이 일제 경찰에 의해 피체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 질문6 한훈의 징역형이 늘어난 이유를 써봅시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시각자료

시각자료 1

사진은 2008년 5월 22일 충청남도 계룡시 남선면 정장리 172-617 무공화공원에 세워진 ‘광복단 결사대 기념탑’이다.

  • 질문1 한훈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광복단 결사대의 활동 목적을 써봅시다.
  • 질문2 역사 신문에 한훈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의 광경을 취재한 가상 기사를 써 봅시다.

시각자료 2

사진은 한훈과 김상옥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 질문1 오른쪽 한훈과 왼쪽 김상옥이 함께 결행하고자 했던 거사 계획은 무엇인가요?
  • 질문2 1920년에 암살단을 이끌어 한훈과 연합했던 김상옥은 일제 경찰을 피해 탈출한 이후 1923년에 어떤 거사를 결행하고 순국하였나요?

시각자료 3

사진은 『동아일보』1920년 8월 26일자에 실린 기사이다.

  • 질문1 기사는 어떤 사건에 대해 쓴 것인가요?
  • 질문2 한훈과 김상옥의 거사가 실패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3 이 사건으로 한훈은 어떤 형량을 선고 받았나요?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모둠활동

모둠활동 1
모둠별로 광복단 결사대의 결성 취지문을 작성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2
모둠별로 한훈의 일대기를 여덟 장면의 만화로 표현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모둠별로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을 찾아 신문 기사를 써봅시다.
모둠활동 4
모둠별로 한훈과 대한 광복회 회원들이 친일파를 처단하는 장면을 짧은 역할극으로 만들어 봅시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하단영역

관련사이트

주소: 충남 천안시 동남구 북천읍 삼방로 95 전화: 041-560-0441 팩스 : 041-560-0426 
 Copyright 2014 THE INDEPENDENCE HALL OF KOREA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