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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로 집터(법정에서 일제에 맞서 싸운 인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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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日政)에 박해를 받아 비참한 질곡에 신음하는
동포를 위하여 도움이 될 수 있는 행동을 하려 하네.


김병로가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면 쓴 글의 일부이다. 그는 ‘나라를 잃고 거처할 곳 없는 거리의 사람’을 뜻하는 ‘가인(街人)’이라는 호에서 알 수 있듯이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의 폭압에 맞선 독립 운동가들을 변호하는 데 전력을 다했고, 해방 후에도 청빈과 강직으로 우리나라 사법부의 주춧돌이 되었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길고 잔혹했던 일제의 식민통치 기간 동안 민족의 양심과 지조를 끝까지 지킨 인사들은 많지 않다. 특히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은 1930년대 만주 사변과 중일 전쟁을 거치면서, 일제의 통치가 폭압적으로 변하자 독립에 대한 꿈을 저버리고 소극적으로든 적극적으로든 일제에 협력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김병로는 민족주의 계열의 지도자 가운데서도 일제의 총동원 체제에 맞서 끝까지 타협하지 않고 법정에서 싸웠다. 그는 해방 후에도 친일파와 손잡은 독재 정권이 분단을 도모하고 독재를 꿈꿀 때 당당하게 맞서 좌우 합작과 그 활동을 바탕으로 한 민족 통일 국가의 수립에 적극 나섰으며,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으로서 권력으로부터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는 데 앞장섰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하리길 160
현재 상태 현재 조OO(74)씨가 거주하고 있다.

일제는 국권을 빼앗은 후 헌병경찰을 동원하여 강압적인 무단 통치를 펼쳤다. 또한 토지조사사업, 회사령 등을 통해 우리민족의 경제적 기반을 빼앗았다. 우리민족은 이에 맞서 1919년에 거족적인 3·1운동을 전개하였다. 3·1운동의 함성이 지나간 후, 일제는 통치 정책을 무단통치에서 이른바 ‘문화통치’로 바꾸었다.
3·1운동 이후 독립 운동은 사상별, 계층별, 지역별로 분화되어 전개되었다. 특히 독립 후 어떠한 정치체제를 가진 나라를 만들 것인가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으로 분화하였다.
국내의 민족주의 운동은 민족의 역량을 키워 일제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하는 우파 세력과, 민중의 힘을 결집시켜서 일제에 비타협적인 정치 투쟁을 전개하고 대중을 계몽하고자 하는 좌파 세력으로 나뉘었다.
실력 양성 운동의 대표적 사례로 물산 장려 운동과 민립대학 설립 운동 등이 대표적이다. 그밖에도 교육의 보급과 언론을 통한 민족의식의 각성, 한국사와 한국어 연구를 통한 민족 문화 지키기, 민족 기업 양성 등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운동은 민중 봉기를 통한 독립이 좌절된 이후, 장기적으로 민족의 실력을 길러 기회가 왔을 때 독립을 도모하자는 취지에서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실력 양성 운동의 일부분은 192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일제와 타협하는 자치 운동으로 변질되었다.
민족주의 우파 세력 일부의 타협론에 반발하여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은 약화된 독립 운동의 힘을 모으기 위해 민족 유일당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운동의 결과 탄생한 단체가 신간회였다. 신간회는 전국에 지부를 두고 다양한 계몽 활동과 함께 광주학생운동의 진상 규명 활동 등 국내 민족 운동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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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읽기자료 1

의병에서 법학자로 변신한 김병로

가인 김병로는 개항 이후 외세의 본격적인 침탈이 전개되기 시작한 1887년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에서 유학자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4살 무렵 조선의 마지막 유학자로 이름을 떨친 간재 전우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1905년 을사늑약의 체결에 반대하여 일어난 최익현의 의병에 참가하였다. 1906년에는 김동신의 의병 부대에 합류하여 순창읍의 일본인 관서를 습격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의병투쟁이 수그러들자 친척인 김성수의 장인이 세운 전라남도 창평군의 창흥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우면서 당시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과 일본 유학을 결심하였다.
1910년 일본 도쿄에 건너간 그는 메이지 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메이지 대학과 주오 대학이 공동으로 설치한 법률고등연구과(오늘날 대학원 석사과정)와 니혼대학 법과 과정에 동시에 적을 두고서 공부해 2년 만에 졸업하였다. 그는 유학 중에 금연회를 조직하여 조선 유학생의 학자금을 보조하는 등의 사회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5년 7월 귀국한 뒤, 1916년 경성법학전문학교 조교수, 1917년에는 보성전문학교 강사로 법학을 가르쳤다. 1919년 3·1운동 직후 교수직을 그만두고 법학자로서 경력을 인정받아 총독부 산하 부산지법 밀양지원에서 1년간 판사로 활동하다가 31살 때 변호사 자격을 얻고 변호사 활동을 시작하였다.

  • 질문1 김병로가 의병 활동에 나선 계기가 된 사건은 무엇인가요?
  • 질문2 김병로가 일본으로 유학을 결심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3 김병로는 법조인이 되기 위해 법학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는 무슨 목적으로 법조인이 되고자 했을까요?

읽기자료 2

법정에서 독립 투쟁을 벌이다.

일제 강점기에 법조계에 몸 담았다는 것은 친일파로서 부와 권력을 누렸다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판사와 검사는 그런 말을 듣는 것이 합당할지 몰라도 변호사의 경우에는 전혀 다른 경우들이 많다.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에게 잡혀 온 독립운동가를 구하기 위하여, 또한 재판의 과정에서 민족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법정 독립 투쟁에 나선 변호사들이 있기 때문이다. 김병로를 비롯한 허헌, 이인 변호사가 바로 그들이었다. 김병로는 변호사 개업 후 수많은 독립운동 관련 사건을 맡아 무료로 변론하였다.
일제 강점기 조선 총독부가 만든 법정에서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제정한 일제의 법률로 독립 운동가를 변론한다는 것은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김병로를 비롯한 몇몇 변호사들은 독립 운동가들의 독립 투쟁을 정당화할 수 있도록 열렬한 항일 변론을 펼쳤다. 그들은 일제가 독립 운동가를 처벌하고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요식절차에 불과한 형사재판을 치열한 독립 투쟁의 마당으로 변모시켰다. 당대의 조선 사람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받은 재판투쟁은 또 하나의 독립운동이었다.
그는 변호사로 개업한지 며칠 안 되어 맡은 대동단 사건의 변호를 시작으로, 1921년 항일 무장단체 보합단 사건 등 독립운동 관련 사건의 변호를 전담하다시피 하였다. 그와 허헌․이인 등은 독립운동 변호 활동이 비용문제로 곤란을 겪게 되자, 1923년 권승렬․김용무 등과 함께 형사변호공동연구회를 발족하였다. 이들은 항일독립운동 사건을 무료로 변론하는 한편, 일반 형사 사건에서 받은 수임료 전액을 연구회의 활동 자금으로 삼았다.
형사변호공동연구회는 겉으로 연구단체임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항일 변호사들이 공동전선을 형성하여, 법정을 통해 ‘독립운동이 무죄’임을 주장하는 독립운동 후원단체였다. 이 연구회는 독립투사들을 무료 변론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을 돌보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형사공동연구회가 맡은 첫 사건이 의열단원인 김상옥 의사 사건이며 이어 김시현 등의 제2차 의열단 사건, 단천 농민 조합 사건, 여운형·안창호 등이 연루된 치안유지법 위반사건, 흥사단 사건, 6·10만세운동, 간도 참변, 정의부 사건, 대한광복단 사건 등 1백여 건이 넘는 독립운동 사건을 변호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그는 이인, 허헌과 함께 일제 강점기 인권변호사 3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 질문1 김병로 등의 변호 활동을 독립투쟁으로 볼 수 있는 이유를 글에서 찾아 정리해 봅시다.
  • 질문2 김병로 등이 형사변호공동연구회를 조직한 이유를 이야기 해 봅시다.
  • 질문3 김병로의 변호사 활동 내용으로 보아, 그가 법학을 공부하여 법조인이 된 목적은 무엇이었나요?

읽기자료 3

신간회를 통해 민족유일당 운동을 전개하다

그는 법정에서의 항일 변론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2년 이상재, 윤치호, 이승훈, 김성수 등과 함께 민립대학기성회를 발족하여 민립대학설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민족주의 세력 중 일부가 시도한 일제와 타협하는 자치운동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비타협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 사이에서 추진되던 민족 유일당 운동의 결실로 신간회가 창립되자 신간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신간회 초대 회장인 이상재가 한 달 반 만에 별세하고, 후임 회장으로 권동진이 뽑히면서 허헌과 함께 그의 비서 역할로 활동을 하였다. 그는 지부 조직의 확대와 노동쟁의․소작쟁의 등의 공정한 노력 등을 통해 신간회의 기반을 넓히는데 기여하였다. 이러한 역할로 1929년 신간회 전국 대회에서 중앙 집행위원 겸 회계장으로 선출되었다. 1929년 말 광주학생운동의 진상을 알리고 일제의 잔학상을 규탄하기 위해 민중대회를 계획하다, 신간회의 주요 간부들이 이른바 민중대회 사건으로 경찰에 검거되자 김병로는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어 신간회를 이끌었다. 그러나 1931년 신간회는 일제의 탄압과 일부 우파의 타협 노선, 코민테른의 전략 변화에 따른 좌파의 분리 노선으로 인해 마침내 해소(解消 : 스스로 해체하여 소멸함)되고 말았다.
김병로는 신간회가 해소된 후에도 민족 운동 사건에 대한 변호와 법정 투쟁을 계속하였으나,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면서 변호사 정직 처분을 받는 등 일제의 탄압으로 법정투쟁이 어려워지자 서울 근교 양주군 노해면(지금의 서울시 창동)에서 농사지으며 은둔(隱遁 : 숨어서 지냄)생활을 하였다. 그는 1940년대 일제가 창씨개명을 요구할 때에도 성을 바꾸지 않았고 일제의 배급도 받지 않았다.

  • 질문1 김병로를 비롯한 비타협 민족주의 운동 세력이 사회주의 세력과 연합하여 만든 단체는 무엇인가요?
  • 질문2 김병로가 일제 말기에 변호사를 그만두고 시골에 은둔한 이유는 무엇인지 이야기 해 봅시다.

읽기자료 4

해방 후 친일파 청산과 사법부의 독립에 힘쓰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그는 통일 민족국가 수립 운동에 적극 나섰다. 1945년 9월 8일 여운형 등이 주도했던 좌・우 합작 단체인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서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의 사법부장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1945년 9월 16일 우파 세력이 결집한 한국민주당이 창당되자 적극 참여하였다. 한국민주당은 ‘조선공산당’ 등의 좌파 세력과 대립했지만, 김병로는 좌파와의 대화와 타협을 강조하였다. 그는 한국민주당이 토지 개혁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을 격렬하게 비판하면서, 대다수 농민들에게 토지를 무상으로 나누어 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이런 주장을 한 까닭은 일제 강점기 인권변호사로서 소작 쟁의의 변호를 맡으며 땅 없는 소작농민들의 열악한 생활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1947년 미군정청의 후원 아래 여운형과 김규식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위원회가 결성되고 합작 7원칙이 발표되면서, 김병로는) 토지 개혁 문제를 둘러싸고 한국민주당과 갈등을 빚고(다가) 마침내 탈당(脫黨 : 당에서 나감)한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초대 대법원장을 맡은 그는 초대 취임인사에서 사법부의 독립을 강조하는 등 이승만 정권의 간섭을 배제하고자 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인해 이승만 정권 아래에서도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려 노력한 많은 법관들이 배출될 수 있었다. 특히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장을 맞아 반민족행위자 처벌이 민족의 과제임을 널리 밝히고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친일파 청산에 적극적이지 않은 이승만 대통령이 친일파를 옹호하고 1949년 반민특위 습격 사건(6・6 사건)을 통하여 반민특위를 해산하자 정면으로 대통령을 비판하였다. 이후에도 이승만 독재 권력에 맞서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혼신을 다 하였다.
그는 1961년 5·16 군사정변이 발생하자 동아일보에 박정희의 민정 참여를 반대하는 글을 기고하였고, 야당 지도자들과 함께 군정 종식을 촉구하였다. 1963년 민정당 대표최고위원과 국민의 당 창당에 참여하여 대표최고위원으로 윤보선, 허정과 함께 야당 통합과 대통령 단일후보 조정 작업 등을 하였다. 그는 1962년 문화훈장,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으며, 1964년 1월 13일 간장염으로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 자택에서 향년 7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식은 많은 사람들의 애도 속에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그의 유해는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선열묘역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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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다음은 1927년 조선 공산당 사건 공판 당시 고문을 자행한 종로 경찰서 고등계 경찰에 대한 고소장을 제출하고 나오는 김병로 변호사에 대한 기사이다. (원 안이 김병로 변호사)

  • 질문1 독립 운동가를 고문한 종로 경찰서 경찰들에 대항해 김병로는 어떻게 대응했는지 이야기 해 봅시다.
  • 질문2 조선공산당 사건 공판의 변호인으로는 김병로, 허헌, 이인 등의 조선인 변호사와 함께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布施辰治]가 함께 참여했습니다. 일본인 변호사가 독립 운동가를 변호한 이유를 이야기 해 봅시다.
  • 질문3 김병로는 토지 개혁을 주장하다가 한민당을 탈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한민당의 주도 세력이 토지 개혁에 반대 입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 한민당의 주도 세력은 토지 개혁에 반대했을까요?

시각자료 2

사진은 독립 운동가를 변호하고 재판정을 나오는 김병로의 모습이다.(맨 앞의 인물이 김병로)

  • 질문1 독립 운동가를 변호하는 김병로의 활동을 독립운동으로 말할 수 있는 근거를 다음 글에서 찾아봅시다.

    가인 선생은 공판에서 “조선 독립을 희망하는 사상은 조선인 전체가 가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정치 변혁을 도모했다고 하여 처벌한다면 양민(良民)을 억지로 법의 그물에다가 잡아 넣는 것”이라고 일갈(一喝 : 한 번 크게 꾸짖음)했다.

시각자료 3

사진은 1955년 12월 1일 김병로가 대법원장 시절 전국사법감독관회의(현 전국법원장회의)가 끝난 뒤 경무대를 방문하여 이승만 대통령과 찍은 사진이다.(앞 줄 오른쪽 흰색 도포 차림)

  • 질문1 다음 글을 읽고 친일파 청산을 위한 김병로의 노력을 정리해 봅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대법원장에는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인권변호사 출신의 김병로가 임명되었다. 김병로 대법원장은 반민특위 특별재판장도 맡았는데, 친일잔재 청산의 의지를 가진 김병로는 친일파에 의존하려던 이승만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김병로는 이승만의 비호(庇護 ; 감싸서 보호함) 아래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하고 특경대를 해산하자 이를 맹비난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마음고생이 심했던 그는 지병이 도져 한쪽 다리를 절단하는 아픔을 겪었다. 대수술을 받고 병석에 누운 그에게 이승만은 사표를 종용했지만, 그는 응하지 않았다. 어느 대법관 출신 인사는 “의족에 의지한 채 지팡이를 짚고 한쪽으로 기운 그의 모습은 병들기 시작한 사법부의 모습 그대로였다”고 안타까워했다.(<조선일보> 1971년 8월 7일)
  • 질문2 이승만 정권은 왜 친일파 처벌을 위해 구성된 반민특위를 해산시켰을까요?

시각자료 4

사진은 1957년 12월 김병로 대법원장의 정년퇴임식 장면이다.

  • 질문1 다음 일화를 통해 김병로가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지키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 해 봅시다.

    이승만 정권이 행한 사법권 침해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서민호 의원 사건을 들 수 있다. 서민호는 야당의원으로 이승만의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서 반대하는 데 앞장서 왔다. 1952년 4월 술 취한 현역 육군 대위가 서의원에게 시비를 걸고 먼저 권총을 쏘자 서 의원이 지니고 있던 호신용 권총으로 응사하여 육군 대위가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정당방위에 해당하는 사건이지만, 당국은 서 의원을 살인죄로 구속했다. 국회는 5월14일 서 의원에 대한 석방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자 이승만 정권은 조선방직 직공 3천명 등 시위대를 동원하여 법원을 포위하고 서 의원을 죽여라, 서 의원을 풀어주면 판사를 죽이겠다고 외치게 하였다.
    헌법 정신에 따르면 국회에서 석방 결의안이 통과되면 지체 없이 석방되어야 마땅한 것이지만, 검찰은 석방지휘를 하지 않았다. 결국 석방결의안 통과 닷새 후인 5월19일 안윤출 부장판사는 구속집행정지 결정을 내려 서 의원을 석방했다.
    이승만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김병로 대법원장에게 “도대체 그런 재판이 어디 있느냐? 현역 장교를 권총으로 쏴 죽였는데 무죄라니 될 말인가?”라며 판결을 비판했다. 이에 김병로는 “판사가 내린 판결은 대법원장도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무죄 판결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 절차를 밟아 상소하면 된다”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 질문2 일제 강점기에 일제의 악법에 맞서 독립 운동가를 변호했던 김병로는 해방 후엔 독재 정권의 탄압에 맞서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려고 애썼다. 결국 김병로가 지키려 했던 정치 신념(체제)은 무엇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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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각 모둠들은 역사적 사건을 선정하여 모의 법정 대본을 작성하고 이를 평가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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