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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운동 진원지, 나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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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경 전남 나주역 개찰구를 나오던 광주중학 3년생 후쿠다는 출구를 소아가 가로막고 있어 걸음을 좌우로 왔다 갔다 하였던 바, 그 뒤에 광주여고보생 박희옥이 따라오다가 주저하고 있는 것을 목격한 박의 종제라 칭하는 광주고보 2년생 박준채는 돌연 후쿠다를 붙잡고 여학생에게 못된 장난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면상을 구타하여 쌍방이 싸우는 것을 역 취체 순사에 의해 제지되어 귀가하였다.”

 

지난 삼십일 오후에 나주역전에서 광주중학생 후쿠다 외 두 명이 광주여고보 여학생에게 히야까시(성희롱)’한 것이 원인이 되어 광주고보 학생 박준채와 결투가 되어 일장 활극을 이룬 바 경관의 저지로 싸움은 그치었으나

 

위의 상황은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원인이 되었던 나주역에서의 상황을 당시에 정리한 것이다. 첫 번째 글은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작성한 것으로 일인 학생이 박희옥이라는 조선여학생을 희롱할 생각이 없었는데, 이를 오해한 사촌동생 때문에 일어난 사건으로 정리하고 있다. 그러나 두 번째 글은 조선일보의 기사로 전혀 다른 사실을 전하고 있다. 1929년 10월 30일 일어난 나주역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일제강점기 광주-나주를 통학하는 한·일 학생들 사이에는 민족감정 때문에 종종 시비가 일어났는데, 1929년 10월 30일 오후 나주역에 도착한 열차에서 내리는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등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한 광주중학교 학생 후쿠다와 이를 말리는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 박준채 사이에 역 앞에서 시비가 붙었다. 이때 박준채는 후쿠다가 한국인을 비하한 데 분격하여 격투를 벌였고, 현장에 있던 일본인 순사가 이를 제지하면서 박준채의 뺨을 때렸다. 이튿날 통학열차 안에서 후쿠다를 찾아가 사과를 요구하던 박준채를 일본인 차장이 옆 칸으로 끌고가 힐난하여 한국인 학생들을 자극하였다. 이어 11월 1일 광주역 앞에서는 한·일 학생들이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 같은 분위기 속에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현재 상태

일제가 식민지교육에 대한 방침과 제도적 근거는 1911년 공포된 조선교육령(朝鮮敎育令)을 통해서이다. 조선교육령을 통해 일제의 식민지교육을 살펴보면 동화(同化)와 차별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일제는 한국인을 모두 충성스러운 신민(臣民)으로 만들기 위해 교육정책에 동화주의를 반영하였다. 특히 일본어 보급과 관련하여, 일제는 각급 보통교육기관의 규칙에서 

“국어(일본어)는 국민정신이 머무는 곳이며, 또한 지식과 기능을 습득케 하는데 불가결한 것이므로, 어떤 교과목에서나 국어를 정확하게 사용하고, 자유자재로 응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고 하여 그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보통학교의 주당 총 수업시수의 40%에 가까운 10시간을 일본어 과목에 배정하였다. 반면 조선어 및 한문 과목은 산술과 함께 주당 5~6시간을 배정하였다. 고등보통학교의 경우도 조선어 및 한문 과목이 주당 3~4시간임에 비해, 일본어 과목은 7~8시간을 배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보통학교 1학년부터 조선어 및 한문과를 제외한 모든 과목의 교과서를 일본어로 편찬하여 일본어로 교수케 하였다. 
다음으로 한민족을 일본의 2등 국민으로 만들기 위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조선의 학제는 보통학교 4년, 고등보통학교 4년, 실업학교 2년 또는 3년, 전문학교 3년 또는 4년이라는 학제로 나타났고, 행정적으로는 보통교육을 위주로 하였다. 이는 소학교 6년, 중학교 5년, 전문학교 4년, 대학 6년으로 이루어진 일본의 학제와 비교할 때, 3~6년이 단축된 제도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의 대학교육에 대한 어떠한 규정도 명시하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고등교육 기회를 주지 않았다. 
교육상의 차별은 보통교육기관의 명칭에서도 드러났다. 일본의 학제에서 ‘소학교’라는 명칭으로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예비교육기관의 성격을 보인데 비하여, 조선의 경우는 ‘보통학교’라는 명칭으로, 그 자체를 정규교육의 완성으로 설정하였다. 
더불어 실용주의를 표방하여 조선의 실업교육을 장려하였다. 종래 한국 교육에서 실업교육이 등한시된 것과 실업교육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고등교육을 배제한 보통교육과 실업교육의 일방적 강조가 의미하는 것은 바로 식민지 노예교육이었다. 
이를 통해 봤을 때 일제 식민지교육의 목표는 조선인들에게 최소한의 보통 및 실업교육을 통해 일제의 통치에 협조하는 순종적인 2등 국민을 양성하는데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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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읽기자료 1

나주는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근대 도시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나주를 변하게 한 가장 큰 것은 읍성의 철거였다. 읍성 철거의 명분은 도시의 확대와 도로의 건설이었으나 실제 이유는 일본인들의 거주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일본인들은 성안의 본정 부근과 성 밖의 대정정과 월견정에 주로 모여 살고 있었다. 이 사이를 나누고 있는 성과 성문의 존재는 일본인들에게 문젯거리였던 것이다. 따라서 성문이라도 보존하고자 하는 나주사람들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읍성은 모두 철거되었다. 이를 통해 일본인들의 주거지는 자연스럽게 통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읍성의 철거와 함께 나주의 모습을 바꾼 또 하나의 계기는 일제에 의해 새로운 도로의 개설이었다. 일제강점기 군청을 중심으로 먼저 동쪽으로 향하는 도로가 개설되고, 이후 군청의 남북을 가로지르는 도로가 개설되었다. 이후 읍성의 철거가 이루어진 나주의 중심부에는 井자형에 가까운 도로가 완성되었다. 이 도로들은 이후 조선인과 일본인 공간을 나누는 구분선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여러 신축 건물들도 나주의 모습을 바뀌게 하였다. 특히 일본인들이 살고 있었던 지역에 새로운 건축물들이 많이 들어섰는데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경찰서 건물이다. 다른 건물들이 대부분 단층인 시절에 나주 경찰서는 붉은 벽돌로 된 2층 건물로 지어져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또 동쪽 방면에서 군청으로 들어오는 자리에 세워졌는데, 이 도로가 가장 통행량이 많은 곳이었다. 따라서 이 도로를 지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조선인은 건물의 위세에 식민지를 절감하게 되고, 일본인들은 자부심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 외에 일본신사나 헌병주둔소, 면사무소, 지방법원출장소 등이 일본식 목조건물로 지어지면서 나주는 변화되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나주에는 이중 공간이 형성되었다. 일본인 소유의 토지는 본정, 금성정, 금정, 향교리, 월견정 등 도로를 중심으로 남쪽과 동쪽에 밀집하고 있었으며, 조선인의 토지는 과원정, 서문정 등 도로를 중심으로 북쪽과 서쪽에서 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일본인의 토지가 느는 지역에서는 조선인의 토지는 감소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거주 공간이 구분된 것이다. 그만큼 나주 지역의 민족적 공간은 뚜렷해졌다. 
상업지대도 구분되었다. 금융업과 일용잡화, 약방, 미곡 등을 취급하는 본정과 금성정 중심의 상권은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었다. 이에 비해 조선인들은 서문정과 군청 사이에서 상점을 포함한 여관, 술집 등 기타 상업 활동을 하였다. 나주 읍내장도 자리를 옮겨 오게 되면서 일본인과 조선인의 상업지역도 나누어지게 되었다.
이런 공간의 구분은 도시 시설의 차별로도 나타났다. 1925년 4월경에 전등이 등장하였으나 일본인들에게는 후하였고 조선인에게는 박하였다. 

“전남전기회사는 정(町), 동(洞)을 차별하였으므로 이런 행동을 방지하게 하되 만일 시민 요구에 응하지 아니할 시에 소등동맹을 단행할 것”

윗글은 나주지역 사람들이 결의한 내용 중 하나로 여기서 정과 동의 차별이란 바로 일본 공간과 조선인 공간의 차별을 뜻하는 말이다. 아마 일본인 주거지는 환하게 밝혀지고, 조선인 주거지는 여전히 어두컴컴했으리라 여겨진다. 
경제적인 차이도 심하였다. 1931년의 통계에 따르면 조선인은 1인당 평균 3백 평, 일본인은 1인당 1만여 평을 소유하고 있었다. 일본인이 조선인보다 약 33배에 달하는 토지를 더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조선인 소유지는 동양척식주식회사나 금융조합 등에 저당 잡힌 것이 많아, 이러한 점까지 고려하면 더욱 큰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나주시에 일본인이 이주하면서 조선인과 나누어져 생활하게 되었다. 주거지역은 북서쪽과 남동쪽으로 나누어졌으며, 상권도 이와 비슷하게 나누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주거 및 상권 등의 공간적인 구분은 도시 시설의 차이로도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공간적이 구분뿐 아니라 토지의 소유 등 경제력에서도 일본인과 조선인은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이중 공간은 조선인과 일본인의 경계를 뚜렷이 하면서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키워 나갔으며, 결국 나주역 사건과 같은 민족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 질문1 일제강점기 나주 시가지의 변화를 가져온 이유를 두 가지 이상 써봅시다.
  • 질문2 신축된 경찰서가 조선인과 일본인에게 각각 어떠한 느낌을 주었을지 써봅시다.
  • 질문3 일제에 의해 강요된 나주의 도시 변화는 어떠한 방향으로 추진되었을까요?
  • 질문4 조선인과 일본인의 거주지역 구분으로 나타난 차이와 차별 현상에 대해 써봅시다.
  • 질문5 조선인과 일본인이 경계를 뚜렷이 하면서 서로에 대한 감정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써봅시다.

읽기자료 2

광주학생운동의 발단이 된 나주역사건은 일찍부터 주목을 받아왔으나, 그 진상은 아직도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당시 광주고보생은 70~80여 명, 광주중학생은 100여 명 정도가 열차로 통학하고 있었다.  광주-송정리 구간은 일본인 학생들을 위한 전용칸이 있었으나, 송정리-나주-목포 노선은 그렇지 않아 한·일 학생들이 함께 타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이들 사이에 크고 작은 시비가 끊이지 않았고, 때로는 폭력 사태도 일어났다. 
그러던 중 1929년 10월 30일, 오후 4시 45분 광주역을 출발하여 5시 35분에 나주역에 도착한 열차에서 30여 명의 승객들이 내려 개찰구를 빠져나올 때 광주중학 후쿠타 슈조(福田修三)·다나카 히데노리(田中秀憲)·스에요시 카츠미(末吉克己) 등이 박기옥·이광춘 등 조선인 여학생을 밀쳤다. 마침 박기옥의 사촌동생인 광주고보생 박준채가 이를 보고 후쿠다를 나무라며 언쟁을 벌였다. 이때 후쿠다가 “조선인 주제에”라고 하자 박준채가 주먹을 날려 격투가 벌어지자 나주역의 일본인 순사 모리타(森田)가 이를 제지했다. 그럼에도 박준채가 후쿠다에게 “내일은 학교를 쉬지 말라”고 하자 모리타가 그의 따귀를 때렸다.
한·일 학생들간의 충돌은 이튿날에도 계속되었다. 1929년 10월 31일 역시 오후 4시 45분발 광주~송정리간 열차에서 박준채와 광주고보생 3~4명은 광주중학생들이 타고 있는 칸으로 후쿠다를 찾아가서 다시 따지며 사과를 요구했다. 하지만 후쿠다가 불응하자 박준채는 다른 고보생들과 함께 그를 때렸고 이 과정에서 다시 양측간에 격투가 벌어졌다. 이때 차장이 와서 말린 뒤 박준채와 후쿠다를 2등칸으로 끌고가 ‘패스’를 빼앗았다. 그런데 2등칸에 타고 있던 일본인 승객들이 일방적으로 박준채를 꾸짖었다.
이처럼 박준채는 이틀 연속 사과는 받지 못한 채 일본인들의 책망만 듣게 된 셈이다. 나주 유지의 아들인 그도 조선인에 대한 차별에서 예외가 아니었던 셈이다. 

  • 질문1 나주역 사건의 진행과정에 대하여 서술해 봅시다
  • 질문2 나주역 사건의 진행과정에 대하여 서술해 봅시다

읽기자료 3

광주에서 광주고보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나자 나주에서도 나주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준비가 시작되었다. 특히 박준채의 고종사촌이었던 유찬옥은 광주의 학생들이 시위를 하다가 다수 수감되어 있는 상황에서 사건의 발단지인 나주의 학생들이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농업보습학교 학생 및 나주보통학교 학생들과 함께 11월 17일 나주 읍내 장이 서는 날을 기하여 시위운동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때 마침 농업보습학교 학생들이 농번기를 맞이하여 17일부터 5, 6일간 임시 휴교키로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시위일을 27일로 변경하였다. 27일 정오에 양교의 학생들이 휴게시간을 기하여 다른 학생들을 선동 규합하여 조선민족 및 학생대중 만세를 부르고 나주읍내를 돌면서 시위운동을 하기로 하였다. 
27일 아침 농업보습학교와 보통학교의 5․6학년 학생들은 정오 휴게시간에 학교를 나와 시위를 벌였다. 농업보습학교 학생들이 선두에 서고, 보통학교 학생들이 뒤에 서서 이열종대의 대오를 짓고 행진하였다. 본정을 지나 군청 앞을 통과해서 나주시장에 다다랐다. 학생들은 그곳에서 전단지를 뿌리고 만세를 부르면서 행진을 계속하다가 경찰의 제지를 받고 해산하였다. 
나주학생봉기의 가장 큰 특징은 광주에서도 볼 수 없었던 보통학교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하였다는 점이다. 보통학교는 오늘날 초등학교로 초등학교 5․6학년의 어린 학생들까지 시위에 참여한 것이다. 이것은 나주가 바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원지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29일에는 영산포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동맹 휴학이 일어났다. 
1930년 2월 10일에는 나주농업보습학교 학생들과 보통학교 학생들이 제2차 시위를 전개하였다. 3월 1일이 다가오자 나주경찰서에서 나주의 학교와 청년단체들에 대한 예비 검속을 실시하고, 시내에 사복경찰관들을 배치하여 시위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나주지역 학생들의 봉기는 광주-목포로 이어진 봉기를 다시 한 번 일으킴으로써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전국적인 투쟁으로 확산시켜 나가는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 질문1 나주학생봉기의 가장 큰 특징을 써봅시다.
  • 질문2 나주학생봉기의 역사적 의의를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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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나주역에서 발생한 사건을 디오라마로 표현한 것이다

  • 질문1 위의 사진은 나주역 사건의 주인들을 묘사한 것이다. 이것을 보고 각 주인공들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말해봅시다.
  • 질문2 위의 디오라마로 보고 희롱당하는 여성이 자신의 누나, 동생, 또는 친구일 경우 나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생각해봅시다.

시각자료 2

1920년대 후반 나주에서 광주로 통학하던 학생은 일본인이 약 30명가량 되었고, 조선인은 그보다 많았다고 한다. 당시 통학열차는 아침 7시경 나주에서 출발하는 등교를 위한 열차와 저녁 5시경 광주에서 출발하는 하교를 위한 열차가 있었다. 당시 통학열차에는 여러 량의 객차가 연결되어 있어 조선인과 일본인 학생들은 각기 다른 칸을 사용했다. 하지만 가끔씩 섞여서 타는 경우도 있었고, 이 경우 양쪽 학생들 간에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 질문1 당시 나주는 공간적․경제적으로 조선인과 일본인은 나누어져 이중 공간을 형성하고 있었고, 통학 열차 또한 따로 타고 다녔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인 학생들과일본인 학생들이 서로에 대해 어떠한 감정을 가졌을까요?

시각자료 3

사진은 나주읍성 및 성문의 위치를 추정하여 표시한 것이다. 나주객사로 표시된 부근은 일제강점기 당시 군청부지이다. 

  • 질문1 일제강점기 나주읍성이 철거된 이유는 무엇인까요?
  • 질문2 일제강점기에 나주사람들은 나주읍성의 성벽은 해체되어도 성문만은 보존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남문도 1920년경 없어지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나주사람들이 일본인들을 어떻게 생각했을지 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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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113일은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난 날이다. 이 날은 현재 학생의 날로 지정되어 있다. 이 당시 학생들의 입장에서 일제의 통치를 반대하는 성명서를 작성하여 모둠별로 발표하여 봅시다.

모둠활동 2

나주에서는 어린 보통학교 학생들까지 시위에 참석 하였다. 그 이유로는 나주가 학생운동의 진원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어린 학생들의 시위 참여가 올바른 것인지 찬성과 반대 모둠으로 나누어 토론하여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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