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는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근대 도시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나주를 변하게 한 가장 큰 것은 읍성의 철거였다. 읍성 철거의 명분은 도시의 확대와 도로의 건설이었으나 실제 이유는 일본인들의 거주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일본인들은 성안의 본정 부근과 성 밖의 대정정과 월견정에 주로 모여 살고 있었다. 이 사이를 나누고 있는 성과 성문의 존재는 일본인들에게 문젯거리였던 것이다. 따라서 성문이라도 보존하고자 하는 나주사람들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읍성은 모두 철거되었다. 이를 통해 일본인들의 주거지는 자연스럽게 통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읍성의 철거와 함께 나주의 모습을 바꾼 또 하나의 계기는 일제에 의해 새로운 도로의 개설이었다. 일제강점기 군청을 중심으로 먼저 동쪽으로 향하는 도로가 개설되고, 이후 군청의 남북을 가로지르는 도로가 개설되었다. 이후 읍성의 철거가 이루어진 나주의 중심부에는 井자형에 가까운 도로가 완성되었다. 이 도로들은 이후 조선인과 일본인 공간을 나누는 구분선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여러 신축 건물들도 나주의 모습을 바뀌게 하였다. 특히 일본인들이 살고 있었던 지역에 새로운 건축물들이 많이 들어섰는데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경찰서 건물이다. 다른 건물들이 대부분 단층인 시절에 나주 경찰서는 붉은 벽돌로 된 2층 건물로 지어져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또 동쪽 방면에서 군청으로 들어오는 자리에 세워졌는데, 이 도로가 가장 통행량이 많은 곳이었다. 따라서 이 도로를 지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조선인은 건물의 위세에 식민지를 절감하게 되고, 일본인들은 자부심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 외에 일본신사나 헌병주둔소, 면사무소, 지방법원출장소 등이 일본식 목조건물로 지어지면서 나주는 변화되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나주에는 이중 공간이 형성되었다. 일본인 소유의 토지는 본정, 금성정, 금정, 향교리, 월견정 등 도로를 중심으로 남쪽과 동쪽에 밀집하고 있었으며, 조선인의 토지는 과원정, 서문정 등 도로를 중심으로 북쪽과 서쪽에서 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일본인의 토지가 느는 지역에서는 조선인의 토지는 감소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거주 공간이 구분된 것이다. 그만큼 나주 지역의 민족적 공간은 뚜렷해졌다.
상업지대도 구분되었다. 금융업과 일용잡화, 약방, 미곡 등을 취급하는 본정과 금성정 중심의 상권은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었다. 이에 비해 조선인들은 서문정과 군청 사이에서 상점을 포함한 여관, 술집 등 기타 상업 활동을 하였다. 나주 읍내장도 자리를 옮겨 오게 되면서 일본인과 조선인의 상업지역도 나누어지게 되었다.
이런 공간의 구분은 도시 시설의 차별로도 나타났다. 1925년 4월경에 전등이 등장하였으나 일본인들에게는 후하였고 조선인에게는 박하였다.
“전남전기회사는 정(町), 동(洞)을 차별하였으므로 이런 행동을 방지하게 하되 만일 시민 요구에 응하지 아니할 시에 소등동맹을 단행할 것”
윗글은 나주지역 사람들이 결의한 내용 중 하나로 여기서 정과 동의 차별이란 바로 일본 공간과 조선인 공간의 차별을 뜻하는 말이다. 아마 일본인 주거지는 환하게 밝혀지고, 조선인 주거지는 여전히 어두컴컴했으리라 여겨진다.
경제적인 차이도 심하였다. 1931년의 통계에 따르면 조선인은 1인당 평균 3백 평, 일본인은 1인당 1만여 평을 소유하고 있었다. 일본인이 조선인보다 약 33배에 달하는 토지를 더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조선인 소유지는 동양척식주식회사나 금융조합 등에 저당 잡힌 것이 많아, 이러한 점까지 고려하면 더욱 큰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나주시에 일본인이 이주하면서 조선인과 나누어져 생활하게 되었다. 주거지역은 북서쪽과 남동쪽으로 나누어졌으며, 상권도 이와 비슷하게 나누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주거 및 상권 등의 공간적인 구분은 도시 시설의 차이로도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공간적이 구분뿐 아니라 토지의 소유 등 경제력에서도 일본인과 조선인은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이중 공간은 조선인과 일본인의 경계를 뚜렷이 하면서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키워 나갔으며, 결국 나주역 사건과 같은 민족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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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
일제강점기 나주 시가지의 변화를 가져온 이유를 두 가지 이상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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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2
신축된 경찰서가 조선인과 일본인에게 각각 어떠한 느낌을 주었을지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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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3
일제에 의해 강요된 나주의 도시 변화는 어떠한 방향으로 추진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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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4
조선인과 일본인의 거주지역 구분으로 나타난 차이와 차별 현상에 대해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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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5
조선인과 일본인이 경계를 뚜렷이 하면서 서로에 대한 감정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써봅시다.
광주학생운동의 발단이 된 나주역사건은 일찍부터 주목을 받아왔으나, 그 진상은 아직도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당시 광주고보생은 70~80여 명, 광주중학생은 100여 명 정도가 열차로 통학하고 있었다. 광주-송정리 구간은 일본인 학생들을 위한 전용칸이 있었으나, 송정리-나주-목포 노선은 그렇지 않아 한·일 학생들이 함께 타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이들 사이에 크고 작은 시비가 끊이지 않았고, 때로는 폭력 사태도 일어났다.
그러던 중 1929년 10월 30일, 오후 4시 45분 광주역을 출발하여 5시 35분에 나주역에 도착한 열차에서 30여 명의 승객들이 내려 개찰구를 빠져나올 때 광주중학 후쿠타 슈조(福田修三)·다나카 히데노리(田中秀憲)·스에요시 카츠미(末吉克己) 등이 박기옥·이광춘 등 조선인 여학생을 밀쳤다. 마침 박기옥의 사촌동생인 광주고보생 박준채가 이를 보고 후쿠다를 나무라며 언쟁을 벌였다. 이때 후쿠다가 “조선인 주제에”라고 하자 박준채가 주먹을 날려 격투가 벌어지자 나주역의 일본인 순사 모리타(森田)가 이를 제지했다. 그럼에도 박준채가 후쿠다에게 “내일은 학교를 쉬지 말라”고 하자 모리타가 그의 따귀를 때렸다.
한·일 학생들간의 충돌은 이튿날에도 계속되었다. 1929년 10월 31일 역시 오후 4시 45분발 광주~송정리간 열차에서 박준채와 광주고보생 3~4명은 광주중학생들이 타고 있는 칸으로 후쿠다를 찾아가서 다시 따지며 사과를 요구했다. 하지만 후쿠다가 불응하자 박준채는 다른 고보생들과 함께 그를 때렸고 이 과정에서 다시 양측간에 격투가 벌어졌다. 이때 차장이 와서 말린 뒤 박준채와 후쿠다를 2등칸으로 끌고가 ‘패스’를 빼앗았다. 그런데 2등칸에 타고 있던 일본인 승객들이 일방적으로 박준채를 꾸짖었다.
이처럼 박준채는 이틀 연속 사과는 받지 못한 채 일본인들의 책망만 듣게 된 셈이다. 나주 유지의 아들인 그도 조선인에 대한 차별에서 예외가 아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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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
나주역 사건의 진행과정에 대하여 서술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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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2
나주역 사건의 진행과정에 대하여 서술해 봅시다
광주에서 광주고보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나자 나주에서도 나주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준비가 시작되었다. 특히 박준채의 고종사촌이었던 유찬옥은 광주의 학생들이 시위를 하다가 다수 수감되어 있는 상황에서 사건의 발단지인 나주의 학생들이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농업보습학교 학생 및 나주보통학교 학생들과 함께 11월 17일 나주 읍내 장이 서는 날을 기하여 시위운동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때 마침 농업보습학교 학생들이 농번기를 맞이하여 17일부터 5, 6일간 임시 휴교키로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시위일을 27일로 변경하였다. 27일 정오에 양교의 학생들이 휴게시간을 기하여 다른 학생들을 선동 규합하여 조선민족 및 학생대중 만세를 부르고 나주읍내를 돌면서 시위운동을 하기로 하였다.
27일 아침 농업보습학교와 보통학교의 5․6학년 학생들은 정오 휴게시간에 학교를 나와 시위를 벌였다. 농업보습학교 학생들이 선두에 서고, 보통학교 학생들이 뒤에 서서 이열종대의 대오를 짓고 행진하였다. 본정을 지나 군청 앞을 통과해서 나주시장에 다다랐다. 학생들은 그곳에서 전단지를 뿌리고 만세를 부르면서 행진을 계속하다가 경찰의 제지를 받고 해산하였다.
나주학생봉기의 가장 큰 특징은 광주에서도 볼 수 없었던 보통학교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하였다는 점이다. 보통학교는 오늘날 초등학교로 초등학교 5․6학년의 어린 학생들까지 시위에 참여한 것이다. 이것은 나주가 바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원지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29일에는 영산포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동맹 휴학이 일어났다.
1930년 2월 10일에는 나주농업보습학교 학생들과 보통학교 학생들이 제2차 시위를 전개하였다. 3월 1일이 다가오자 나주경찰서에서 나주의 학교와 청년단체들에 대한 예비 검속을 실시하고, 시내에 사복경찰관들을 배치하여 시위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나주지역 학생들의 봉기는 광주-목포로 이어진 봉기를 다시 한 번 일으킴으로써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전국적인 투쟁으로 확산시켜 나가는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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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
나주학생봉기의 가장 큰 특징을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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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2
나주학생봉기의 역사적 의의를 써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