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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거처, 심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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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60여 년 전의 경성부 성북정은 오늘날의 성북동과 달리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숲이 깊고 오가는 사람들도 거의 없는 곳이었다. 바로 앞에 혜화문 안에 번화한 거리가 있었으나 이곳은 너무나도 외지고 깊은 골짜기였다.
이 성북동 산기슭에 조그만 한옥이 있었다. 바로 심우장이다. 심우장은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1944) 스님이 인생의 마지막을 보낸 곳이다. 이곳은 1933년 조선일보사 사장 방응모 등 몇몇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지은 집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져 있고 중앙에 대청마루를 두고 좌우 양쪽에 온돌방을 배치한 모습을 하고 있다. 서재로 쓰던 우측 방에 걸려 있는 심우장(尋牛莊)이라는 편액의 ‘심우’는 ‘소를 찾는다.’라는 뜻으로, 수행자가 도(깨달음)를 구하는 과정을 소를 찾아 돌아다니다 마침내 불성을 깨닫는 과정으로 표현한 것이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현재 상태

한용운은 조선 말기 국운이 기울어가던 1879년 8월 29일 충청도 홍주 땅[지금의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결성면 만해로 318번길 83)]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유천(裕天)이었다. 유천은 6세 때부터 서당에서 한학 공부를 시작하여 9살이 되던 해에 『서상기』와 『통감』을 독파하고, 『서경』에도 능통할 정도의 실력을 쌓았다.
한때 만주 간도성 등을 다니며 광복운동을 하다가, 1905년(광무 9)에 강원도 인제에 있는 백담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1905년 1월 26일 백담사 연곡 스님을 은사로, 영제 스님을 계사로 하여 수계를 하였는데, 이때 받은 계명이 봉완,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였다.
1910년 일제가 강제로 우리나라 주권을 빼앗은 후,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사찰을 모두 일본 조동종의 관리 아래 두려고 하는 등 한국 불교를 일본 불교화 하려 하였다. 이에 맞서 만해, 만공 스님 등이 대항하였지만, 총독부가 “모든 사찰의 주지와 재산에 관한 권한은 총독이 가진다.”라는 내용의 「조선사찰령」을 반포하였다. 이에 30본산이 모두 총독의 손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만해는 국경을 넘어 만주로 발길을 돌렸다.
중국으로 건너간 만해는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하여 격려하고, 만주와 시베리아 등을 돌아다니다 1913년 귀국하여 불교학원에서 강의를 하며 지냈다. 그러나 불교계의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비장한 각오로 다시 백담사로 들어간 만해는 『조선불교유신론』을 1913년 5월 25일 불교서관에서 발행하였다. 이 유신론에서 “유신운동의 기본적인 목표와 방향이 정신문화의 혁명에 있다.”라고 주장한 그는 불교인이건 아니건 인간에게는 누구나 정신을 새롭게 해야 하며 그 길만이 조선이 살 길임을 강조하였다.
또한 만해는 불교 경전을 대중화하기 위한 작업으로 경남 양산 통도사에서 팔만대장경을 모두 살펴보면서 『불교대전』을 편찬하였다. 『불교대전』은 예전부터 내려오던 장경 위주의 편찬 방법에서 벗어나 주제별로 엮어진 최초의 책이었다. 이후 1916년부터는 서울의 계동에서 월간지 『유심』을 발간하여 민중계몽운동에 앞장서는데 힘썼고, 계속 서울에 머물면서 문화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조국의 독립과 민족 광복의 기운이 높아가고 있던 1919년 2월 24일 만해는 손병희・권동진・오세창 등과 만나 최린(崔麟)으로부터 독립운동에 대한 계획을 듣고, 이 계획에 적극참여하기로 하였으며, 최남선(崔南善)이 처음 작성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들을 검토하였다. 또 경남 합천 해인사 백용성 스님에게 이 계획을 알려 불교도로서 적극 참여할 것을 부탁하여 민족대표로 함께 참여하겠다는 허락을 받았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인사동의 태화관에 모인 29명의 민족대표(원래는 33인이었으나 4명은 지방에 살아 참석 못함)를 대표하여 만해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함께 만세 삼창을 하였다. 이러는 가운데 미리 연락받고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민족대표는 모두 체포되었는데, 만해는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감옥에서 나온 뒤에도 만해는 계속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노력하여 1923년 2월에는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하였고, 교육에 대해서도 남다른 관심을 기울여 그해 4월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여 저항문학에 힘을 보탰으며, 1927년에는 신간회에 가입, 중앙집행위원 및 경성지회장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만해는 불교계를 중심으로 한 사회개혁운동에도 힘써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바꿔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였으며, 그해 월간지 『불교』를 넘겨받아 많은 글을 발표하면서 불교를 대중화하고 항일 독립투쟁 사상을 심어주는 데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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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만해 한용운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뚜렷이 구분되는 항일투쟁이었던 3·1운동의 초기 계획 단계부터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만해는 1919년 1월 말 이미 최린과 파리강화회의와 민족자결주의 등 국제 정세를 이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뜻을 같이 하였다. 때마침 이미 천도교 측에서 독자적으로 만세운동을 계획하여 추진하고 있었으므로 만해는 천도교 측 계획에 동참하였다.
만세운동 추진 과정에서 만해는 유림과 불교계 인사들이 동참하도록 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그는 먼저 경남 거창에 거주하던 영남의 대유학자인 면우 곽종석을 만나 민족대표로 참가하겠다는 동의를 얻어냈다. 이어 불교계 인사들과 접촉하면서 부산 동래 범어사까지 다녀오는 등 동분서주하여 당시 경남 합천 해인사 승려 백용성의 동참을 이끌어 냈다.
또한 만해는 불교계 측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독립선언서」는 2월 27일 밤 비밀리에 2만여 매가 인쇄되었는데, 이 중 3천여 매를 다음날인 2월 28일 전달받았다. 이날 밤 12시 그는 자신의 집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중앙학림 학생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눠주고 3월 1일 오후 2시 이후 배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3월 1일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들에게 만해는 “오늘 우리가 여기에 모인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한 것으로 자못 영광스러운 날이며, 우리는 민족대표로서 이와 같은 선언을 하게 되어 그 책임이 크니 앞으로 모두 힘을 합쳐 조선 독립을 이루도록 꾀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연설을 하였다.
당시 태화관에 모였던 민족대표 33인은 현장에서 경찰에 체포되었다. 만해 또한 경찰서로  잡혀갔는데,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21년 12월 22일 가석방되었다.
만해는 감옥에서 ‘옥중투쟁 3대 원칙’을 정하고는 몸소 실천에 옮겼다. 첫째는 ‘변호사를 대지 말자’는 것이었다. 내 나라를 내가 찾는데 누구에게 변호를 부탁할 것이며, 변호해 줄 사람도 받을 사람도 없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사식(교도소나 유치장에 갇힌 사람에게 사사로이 마련하여 들여보내는 음식)을 받지 말자’는 것이었다. 온 천지가 다 감옥인데 호의호식하려고 독립운동하지 않은 이상, 밖에서 넣어 주는 사식을 먹지 말자는 것이었다. 셋째는 ‘보석(보증금을 받거나 보증인을 세우고 풀어 주는 일)을 요구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감옥에 있으면서도 만해는 독립운동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심문 과정에서 검사가 “「독립선언서 공약삼장」에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라는 구절이 있는데 그것이 폭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묻자 “조선 사람은 단 한 사람이 남더라도 독립운동을 하자는 뜻이다.”라고 당당히 말했다. 재판정(법정)에서도 “피고는 이후에도 조선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렇다. 언제든지 그 마음을 고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이 몸이 없어지면 정신만이라도 남아 영세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만해는 감옥에서 작성한 「조선 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를 통해 다음과 같은 주장도 하였다. 첫째, “민족 자결의 원칙은 정의이며, 인류가 누릴 행복의 근원이기 때문에 어떠한 무력도 감히 조선 민족이 다른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스스로 정치적 운명을 결정하는 자결의 원칙과 독립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둘째, 조선 독립 선언의 이유를 말하면서 조선 민족의 실력과 세계 대세의 변천과 민족자결 조건에 대하여 역사적 현실성과 미래의 이상을 분석하여 설명하고 있다. 셋째, 조선 독립 선언의 이유를 4개 항목으로 밝히면서 “참으로 침통하고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겠다.”라고 하면서 “독립의 목적을 달성치 아니하면 저항을 멈추지 않을 것”임을 밝히고 있다. 넷째, 조선은 독립 국가의 필수 요소인 토지, 백성, 문화가 갖춰진 당당한 독립국임을 깨닫게 하고 있다.
1921년 12월 22일 가석방 된 만해는 불교혁신운동, 교육진흥운동 등 다양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30년대 불교혁신운동을 통하여 불교청년회, 불교유신회, 비밀결사 만당과 불교청년총동맹 등 청년 승려들의 활동을 주도하였고, 월간지 『불교』의 간행을 통해 불교 개혁과 민족운동을 함께 연결하여 전개하였다. 또한, 일제가 조선인을 우민화(정치적 관심이나 비판력을 둔화시킴)하려는 수준 낮은 교육정책을 비판하면서 교육을 통한 실력 양성을 위해 조선인에 대한 정당한 교육을 요구하고,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전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여성해방 및 농민·노동자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인 저술 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만해의 민족주의운동은 일제에 대한 철저한 비타협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가 1927년 좌우합작의 민족유일당운동인 신간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것도 평소 비타협주의 노선을 지키면서 민족 간의 분열 해소를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불교계를 대표하여 『조선일보』 계열 및 기독교, 천도교 구파의 비타협적 민족주의자 34명과 함께 신간회 발기(창립)에 참여하였다.
1927년 2월 15일 오후 7시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3백여 명이 참석한 신간회창립총회에서 만해는 중앙집행위원으로 뽑혔다. 이후 다시 6월 10일 경성지회장으로 뽑히는 등 신간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3·1운동 이후 10년 사이에 벌어진 최대 사건이라 평가되는 광주학생운동을 민족적·민중적 운동으로 확산시키고자 한 민중대회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12월 13일 오후 2시 번화가를 택하여 광주학생운동 사건의 정체를 폭로하고, 구속된 학생의 무조건 석방을 요구하며, 경찰이 학교를 함부로 짓밟지 못하게 하고, 포악한 경찰정치와 항쟁할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연설 광고문을 인쇄하고 배포하여 청중을 모아 공개연설회를 개최한 뒤, 시위운동을 하는 것이었다.
만해는 이 연설회의 연사를 제의받고 기꺼이 허락하였으나, 계획을 사전에 알아낸 일제 경찰에 의해 많은 이들이 잡혀가고 신간회 본부가 수색당하여 각종 인쇄물이 압수되는 등 계획한 일이 차단당함으로써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비록 만해는 이 사건으로 체포되거나 감옥에 갇히지는 않았지만, 일본 경찰로부터 주요 감시 대상이 되어 더욱 심한 감시를 받았다.
최초의 좌우연합전선으로 조직된 신간회는 1930년에 들어 해소론이 제기되어 같은 해 12월 6일 해소가 결정되었다. 신간회에 기대와 애착이 컸던 만해는 해소론이 제기되자 이를 반대하였고, 해소된 뒤에도 재건설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의 생각으로는 지상 목표인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서는 모든 이념과 각자 서로 다른 사상이나 주의를 버리고 대동단결해야 하는 것이었기에 신간회 해소의 원인을 제공한 일제와의 타협을 꾀하던 개량주의적 민족주의자는 물론, 이념과 노선을 우선하는 공산주의 진영에게도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 질문1 한용운이 3·1운동으로 체포되어 감옥에서 심문을 받을 당시 「독립선언서 공약삼장」 가운데 어떤 부분에 대해서 “조선 사람은 단 한 사람이 남더라도 독립운동을 하자는 뜻이다.”라고 밝혔나요?
  • 질문2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최초의 좌우연합전선이자 민족유일당인 단체로 1927년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함께 연합하여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는 무엇인가요?
  • 질문3 1927년 창립된 신간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한용운이 맡았던 지위는 무엇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2

1925년 여름 만해는 한국 시문학의 금자탑으로 불리는 『님의 침묵』 원고를 끝마쳤다. 8월 29일 강원도 백담사 오세암에서 「독자에게」라는 시로 마무리된 총 88수의 시는 3·1운동으로 감옥살이를 했던 당시부터 집필된 것이었다. 젊은 시절 만주·러시아·일본, 그리고 전국 각 사찰을 떠돌며 독립운동과 불교 개혁을 온몸으로 실천했던 만해에게 감옥 생활은 모처럼의 안정과 함께 그동안 보고 듣고 겪었던 일들을 시심으로 불타오르게 하였을 것이다. 한용운이 『님의 침묵』을 직접 구상하였던 당시는 조선불교청년회 회장을 맡으면서 불교혁신운동을 전개하고, 민립대학설립운동과 같은 교육운동에 힘쓰던 때였다. 시집에 실린 시들은 하나같이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이 용암수처럼 분출된 실체라 할 수 있다.
『님의 침묵』에 실린 시 대부분은 ‘님’을 중심축으로 구성되었다. 국어사전에는 ‘님’이 ‘임의 옛말’로 설명되어 있다. 임은 절대적으로 존경하고 따르고 우러러보는 마음의 대상을 나타내는 총칭이자 기호였다. 즉 임은 단순히 임금이나 애인의 상징에만 그치지 않고, 자기의 모든 것, 즉 자기의 생명과 영혼을 다 바칠 삶의 집중적 초점이었다. 임은 근대로 오면서 개인적 차원을 벗어나 민족의 위대한 인물 또는 강토·조국·호국신으로까지 확대되었다. 특히 일제 암흑기의 임은 다원화되어 지금까지의 관념에다 내세를 염원하는 임이나 연인의 그리움, 기다림 등이 추가되었다.
불교에서 해석하는 ‘님’ 역시 일반적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아, 불교의 이상적 염원인 부처를 상징하는 경우가 많았다. 무속과 민속에서도 임은 사랑의 대상이자 존경의 대상이었다. 이 ‘존경의 대상인 임’이 내세나 종교적 기원의 대상일 때 이 ‘지향의 임’은 내세에 대한 기원의 정서가 중심을 이루게 된다. 따라서 무속이나 민간에서 섬기는 조왕님·용왕님·서낭님·산신령님·북두칠성님·성주님·제석님 등도 내가 극진하게 섬기겠다는 신앙이자, 지향의 임이다. 이 임은 자기를 섬기는 사람에게 영험과 복락을 준다고 믿어, 둘 사이의 신앙체계가 형성된다. 무속이나 민간신앙의 임도 남녀 간의 임이나 종교의 신과 같다. 그렇다면 한용운이 『님의 침묵』에서 사모했던 ‘님’은 어떠한 존재일까? 우선 『님의 침묵』에 실린 「님의 침묵」이라는 시부터 읽어보자.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배기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만해에게도 ‘님’은 조국이 될 수 있고, 민족도 될 수 있으며, 부처님도 될 수 있고, 이성도 될 수 있는, 다시 말하면 어디까지나 복합체로 구성된 존재였다. 이는 만해가 위대한 종교가이면서도 독립운동이라는 속세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어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이렇게 복잡한 ‘님’ 중에서도 3·1운동이라는 활화산 같은 열기를 경험하면서 탄생한 『님의 침묵』에서 만해가 특별히 노래하였던 ‘님’은 불타도 이성도 아닌, 바로 일제에 빼앗긴 조국이었다.

  • 질문1 만해가 시집 『님의 침묵』을 쓸 때는 대략 어느 시기, 어떤 활동을 하던 때인가요?
  • 질문2 만해가 노래한 여러 ‘님’ 중에서 가장 특별한 의미를 가졌던 ‘님’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읽기자료 3

만해에게 ‘님’은 변치 않는 사모의 대상이었다. 만해가 경성부 성북정에 자리 잡았던 1930년대, 점차 독립의 염원이 사그라지고 독립운동가들마저 하나둘 변절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던 그때에도 ‘님’에 대한 사랑, 즉 조국에 대한 그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1933년 만해를 존경하고 따르던 동지 몇 사람이 그를 위해 집 한 칸을 마련해 주고자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만해는

“성북정에서 남향으로 집을 세운다? 그러면 내 집 정문이 곧장 총독부를 바라보고 서 있게 될 것이 아닌가? 안 되지! 그 꿈에도 보기 싫은 돌집을 향한 집에 살다니. …… 볕이 안 들고 샘물이 없더라도 내 집은 여기다 세울 수 없어. 반대편 저 산비탈에나 지으면 모를까!”

하였다. 본래 옳다고 생각한 일이면 목을 내놓고라도 하고야마는 만해의 성격을 아는 터라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선택된 곳은 거기서 맞은편으로 바라다 보이는 산기슭 정북향의 응달쪽이었다. 그곳은 길도 없는, 수풀 속을 한참 올라가야 하는 외진 곳이었다. 이렇게 해서 지어진 집이 바로 심우장이다.
이곳에서 살던 한용운의 방은 언제나 불기 없는 찬방이었다. 한국 전체가 커다란 감옥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만해이니만큼 따뜻한 온돌에 앉아 편안한 삶을 누린다는 것은 분수 밖의 일이었다. 이 냉돌 위에서 그는 참선을 하거나 불경을 읽으면서 생활하였다. 이때 그의 자세는 온종일 흐트러짐이 없었다. 너무도 꼿꼿한. 그리고 무서우리만큼 딱딱한 자세로 말미암아 그는 결국 ‘저울추’라는 별명까지 얻었다지만, 이 별명이야말로 그의 곧은 지조, 매서운 절개를 한마디로 잘 설명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비록 냉돌에 앉아있었지만, 그의 열변을 듣고 있노라면 누구나 타오르는 불꽃을 느낄 수 있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적극적인 항일 투쟁을 하기 어려웠다 하더라도 그의 몸짓은 오직 일본 통치에 대한 거부의 그것이었다. 만해 한용운은 매사에 초지일관하는 자세로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갔다. 일제 말기 신사 참배와 학병 동원, 그리고 일체의 회유책을 거부함으로써 한 가닥 양심의 촛불을 밝혔다.
아래는 심우장에서 한용운에 얽힌 일화들이다.


마곡사 조실 송만공(宋滿空) 선사는 만해와 유일하게 견줄만한 걸승이자 고승이었다. 서로는 언제나 의기가 서로 합치했다. 선문선답으로 시대적인 울분을 달랠 때도 있었지만, 투철한 민족사상이나 장부다운 기개와 포부로 암울한 시대를 헤쳐 나가곤 하였다.
하루는 백강 이병우와 만공의 제자인 박고봉 스님 두 사람이 만공에게 제의하였다.
“스님, 스님께선 여한이 없는 생애를 사셨으니 이제 다시 미나미 총독을 만날 기회가 있다면 그자를 한번 해치우는 게 어떨까요?”
“그렇게 하지.”
만공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누가 알면 세상이 뒤집힐 모의였다. 만공이 곧 만해에게 달려와 그 자초지종을 말했다.
“이번에 내가 한번 그 거사를 하고자 하는데 만해는 어떻게 생각하나?”
한용운이 대꾸하였다.
“만공, 그럴 필요가 있겠소? 내 말 좀 들어 보오. 그 뭐 시체가 다 되어 가는 사람에게 손을 대려 하다니…….”
“시체라고?”
“얼마 안 있으면 그자의 운명도 끝장날 걸세. 쫓겨 가거나 자살하거나 할 텐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그 시체 다 된 놈에게 더러운 피를 흘리게 하여 어찌 업을 지으려오. 그런 생각만은 마오.”
만해의 예언은 적중하여 몇 년 뒤 일본은 패전 국가가 되었다.


언젠가 31본산(30본산이었으나 1924년에 하나가 추가됨) 주지 회의 때였다. 만해는 몇 차례나 강연 초청을 받고 거절하다 마지못해 나가게 되었다.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해마다 새해가 되면 총독 앞에 나가 세배를 하십니다. 조선을 통치하고 있는 총독의 얼굴을 직접 우러러본다는 것은 참으로 영광된 일이겠지요. 그리고 기회만 있으면 총독을 찾아가서 얘기를 하십시다.”
이렇게 서두를 떼고 나서 만해는 좌중을 훑어본 다음,
“그런데 총독은 매우 바쁜 사람입니다. 조선 통치에 관한 온갖 결제를 하다 보면 변소 갈 시간도 없는 게 당연한 일일 겁니다. 여러분은 자비를 바탕으로 살아가는 스님이 아닙니까. 남의 생각도 해줘야지요. 조선 총독을 좀 편안케 해주시려거든 아예 만나지 마십시오. 부탁입니다.”
하고 끝맺었다.


만해는 1942년 단재 신채호 선생의 유고집을 간행하기로 하고 자료 수집을 해 나갔다. 하지만 이 일은 발각되어 그 화가 제자인 최범술에게 미쳤다. 최범술이 이 일로 경찰부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되어 1년이 지나도록 풀려날 줄을 몰랐다.
하루는 만해가 생화 한 다발을 들고 제자 효당을 면회하러 왔다. 문제의 요시찰 인사가 경찰부에 나타났으니 일제 당국이 면회를 허용할 리가 없었다. 면회를 거절당한 만해는 생화를 그들 앞에 던져 놓고 그 자리를 떠났다. 출감한 후 최범술이 심우장으로 스승에게 인사드리러 갔다.
“선생님, 그때 생화를 유치장에까지 가지고 오신 것은 어찌 된 일이었습니까?
“그건 자네가 감옥에 있는 걸 축하하기 위해서였지…….”
웃음을 자아내는 격조 높은 사랑의 표시였다.


만해는 감옥 안에서 이미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였으며, 출옥 후에도 수없이 변절해 가는 옛 동지들을 생각할 때마다 한 가닥 동정을 금하지 못하면서도 그들을 항상 천시하였고 심지어 증오하였다. 상대가 거물급이면 거물급일수록 그의 울분은 더욱 컸다. 더구나 독립선언서를 지은 육당 최남선이 조선총독부에 굴복하여 다소의 물질로 호강을 한다는 소리를 듣고는 업신여기며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만해는 어느 날 길에서 육당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여, 만해, 오랜만일세.”
“…….”
그는 육당을 힐끗 한번 쳐다보고는 아무 말 없이 그냥 지나쳐 버렸다. 육당은,
“이봐, 만해. 나야, 날세.”
하고 그의 뒤를 추격이라도 할 듯이 급히 쫓아갔다.
그때 만해는 휙 되돌아보았다.
육당은 눈앞이 캄캄하였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멍하니 만해가 사라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하염없이 서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종로 경찰서장 이사카[伊坂. 가짜 일본인으로, 본명은 윤종화(尹鍾華)]란 자가 방문해 왔다.
그는 경기도 경찰부장과 『매일신보』, 『경성일보』의 두 기자를 대동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한 술 더 떠서 경무국 도서관 직원도 끼어 있었다. 그들은,
“선생님께서 학병들에게 한 말씀 신문에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라를 위하는 심정으로 써 주십시오.”
라며 회유하였다. 만해는 물론 이를 완강히 거부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협박조로 나왔으나 일단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며칠 후 그들이 다시 왔을 때도 만해는 여전히 그들의 강요를 완강히 거부하였다. 그들은 일단 후퇴하였다가 세 번째로 다시 왔다. 그때에는 그들도 그의 꿋꿋한 자세를 굽히게 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방법을 달리하였다.
“이 종이에 존함 석 자만이라도 써 주시오.”
“여보, 내가 허수아비요?”
하고 한층 더 완강히 거부하였다. 그리고 다시 고함을 질렀다.
“내 모가지를 베어 가시오. 나는 거기에 이름도 쓸 수 없소.”
하였다. 일제의 총검이 동양 천지를 뒤덮고 있을 그 당시에 만해의 이와 같은 자세는 실로 불요불굴의 기개 바로 그것이었다.


창씨개명을 한 춘원 이광수가 어느 날 심우장으로 만해를 찾아왔다. 집 뜰에 들어서는 춘원을 본 만해는 춘원이 이미 창씨개명한 것을 알고 있던 터라 찾아온 인사도 하기 전에 그를 내다보고 노발대발하며,
“네 이놈, 보기 싫다.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아라.”
하고 큰소리로 꾸짖었다. 춘원은 청천벽력 같은 이 말에 집에 들어가기는커녕 변명할 여지도 없이 무색한 낯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만해는 그의 강직한 성격 때문에 생활이 몹시 가난하였다. 일제는 이런 사실을 좋은 기회로 하여 그에게 유혹의 손길을 뻗쳤다.
어느 날 한 청년이 목침덩이만한 보따리를 들고 선생을 찾아왔다. 그러고는 은근한 낯빛을 지으며 그 보따리를 만해 앞에 밀어 놓았다.
“선생님, 이거 얼마 안 되는 것입니다만 생활에 보태 쓰시라고 가져왔습니다.”
그 돈의 액수가 얼마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상당한 액수임은 틀림없었다.
“그런데 젊은지, 나를 이렇게 생각해 주는 것은 고마우나, 그 돈은 대관절 누가 보낸 것이지?”
“저어, 실은 총독부에서 오라 해서 갔더니…….”
“뭐라구!”
채 말끝이 떨어지기도 전에 만해의 낯빛은 갑자기 굳어졌다. 그 돈 보따리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어느새 그는 그 돈 보따리로 젊은이의 뺨을 후려치며,
“이놈! 젊은 놈이 그따위 시시한 심부름이나 하고 다녀! 당장 나가!”
하고 소리쳤다. 젊은이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돌아갔다.


1943년 4월 29일, 만해가 입적하기 바로 전 해의 천장절이었다. 이날 동회의 서기가 찾아왔다.
“선생님, 저어, 오늘 조선 신궁에 좀 다녀오셔야겠습니다.”
“난 못 가겠소.”
“어째서 못 가십니까?”
“좌우간 못 가겠소.”
“좌우간 못 가다니요? 그런 법이 어디 있나요?”
“그런 법이 어디 있다니? 그럼 왜놈은 법이 있어 남의 나랄 먹었나?”
동회 서기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만해가 워낙 그런 인물인 줄 아는 터라 다소 양보했다.
“그럼 기라도 다시지요.”
“그것도 못 하겠소. 일장기는 우리 집에 있지도 않구……”
“자꾸 그렇게 말씀하시면 곤란합니다. 배급 통장을 빼앗긴다니까요.”
“옳지, 거 참 좋소, 배급 통장은 여기 있네.”
만해는 선뜻 배급 통장을 던지다시피 내어 주면서,
“이제부턴 그따위 심부름일랑 두 번 다시 오지 마소.”
라고 잘라서 말했다.


『불교』 잡지에 관여하던 어느 날이었다. 홀연 식산은행에서 연락이 오기를,
“도장을 가지고 방문해 주시오.”
라는 급보였다. 그러나 그는 모르는 체할 뿐이었다.
그러자 얼마 후 은행 측에서 사람이 달려왔다. 그는 만해 앞에 서류 뭉치를 디밀었다.
“무슨 일인가?”
“선생님, 이 근처 성북정 일대의 땅 20만 평을 무상으로 분배해 드리려는 겁니다. 여기 도장만 찍으시면 곧 선생님 재산이 됩니다.”
만해는 그를 더 이상 거들떠보려고도 아니하고,
“에이, 이 사람아! 나 그런 것 모른다네.”
하며 곧 돌려보냈다.
그 누구도 만해를 회유할 수는 없었다.

  • 질문1 한용운의 별명은 무엇이고, 어떠한 이유에서 생긴 별명인가요?
  • 질문2 본문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총독부가 심우장에 거주하던 한용운에게 바랬던 것은 무엇이었으며, 일제의 온갖 회유에도 한용운이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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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사진은 죄수들의 신상을 기록해 놓은 문서(카드)이다.

  • 질문1 위 문서에 있는 분이 만해 스님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는 무엇이 있나요?
  • 질문2 위 문서는 어느 기관에서 무엇을 위해 작성했을까요?
  • 질문3 서대문형무소에서의 경험은 만해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까요?

시각자료 2

사진은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어느 시집의 표지이다

  • 질문1 이 책의 이름은 무엇이며, ‘누가’ ‘언제(또는 일제 강점기 어느 시기)’ 발간한 ‘책인가요?
  • 질문2 이 책에서 주로 노래하고 있는 ‘님’은 무엇을 상징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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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일제강점기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친일의 길로 돌아서기도 했던 암흑의 시기였다. 변절한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신변의 안정과 풍족한 생활이 보장되었는데, 이에 일제의 제안은 거부하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무엇보다도 나라를 위해서는 일제와 타협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나라를 위해 일본과 타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측’과 ‘타협은 사기다. 절대로 타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측’, 두 모둠으로 나누어 자신의 의견을 주장해 봅시다.
모둠활동 2
「3·1독립선언서」는 나중에 친일의 길로 들어선 최남선이 집필하였다. 3·1운동에 늦게 가담한 한용운은 최남선의 논조에 불만이 있었지만, 시간 부족으로 직접 선언서를 작성하지는 못하였고, 대신 ‘공약삼장’을 추가하여 만세운동의 행동강령으로 삼았다고 한다. 「3·1독립선언서」를 찾아, 최남선이 작성한 「선언서」 부분과 한용운이 추가한 「공약삼장」을 비교하면서 만해가 굳이 추가로 「공약삼장」을 집필한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지 말해 봅시다.
모둠활동 3
시집 『님의 침묵』은 모두 88편의 시로 구성되어 있다. 『님의 침묵』에 실린 시들을 읽어보고 시에서 한용운이 그리고 있는 ‘님’에 대해 자신이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 서로 토론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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