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영역

본문영역

  • 도입
  • 역사적 배경
  • 읽기
  • 시각자료
  • 모둠활동

주요사적지 배움터

김철·김석 생가 터(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영원한 수문장)

도입

신의 도끼로 귀신을 주살하는 것이 춘추 대의고 [神斧鬼誅春秋大義]
해가 뜨고 달이 두루 비치니 강과 산이 모두 정연하다. [日昇月照河山重整]


김철(金澈, 1886~1934)이 『독립신문』 1921년 1월 1일자에 「경축 독립신문」이라는 제목으로 게재한 글귀로 조국 해방에 대한 그의 열망이 물씬 배어 있다. 김철은 전라남도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구봉마을 출신으로 1917년 상하이[上海]로 망명한 후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1918년 8월 신한청년당을 창당하고, 3·1운동 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후에는 임시정부의 주요 직분을 맡아 수행하였다. 그는 김구를 도와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를 주도하기도 하였다. 그는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고군분투하며 격무에 시달린 탓으로 1934년 중국 항저우[杭州]에서 폐렴으로 순국하였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전라남도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605-1~2
[도로명 주소 : 전라남도 함평군 신광면 일강로 873-12]
현재 상태 멸실 / 당시 건물은 사라졌다. 생가 터 왼편에는 동상, 뒤쪽으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운동역사관이 건립되어 있다.

김철의 호는 일강(一江)으로 1912년 경성법학교, 1915년 일본 메이지[明治)] 대학을 수학하였다. 1917년 상하이[上海]에 도착하여 1918년 신한청년당 결성에 참여하였으며 1919년 선우혁, 서병호 등과 독립운동을 위해 국내에 파견되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하이에 대한 독립 임시 사무소를 설치하였다. 이어 대한민국 임시 정부 의정원 전남 대표, 재무위원장, 교통차장, 군무위원과 육군무관학교 교관을 역임하였다. 또한 1919년 대한 적십자회, 1920년 의용단, 한중호조총사(韓中互助總社), 1922년 시사책진회, 1930년 한국 독립당, 1931년 9월 한국군인회, 중한항일대동맹 등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1934년 6월 29일 급성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석(金晳, 1910~1983)의 호는 구봉(九峯)으로 영광보통학교 4학년 때인 1923년 숙부인 김철의 부름을 받고 상하이로 건너갔다. 이어 상하이 영국중학교를 졸업하고 독립운동 자금 모금을 위해 국내에 잠입하여 나주군 문평면사무소 금고를 털어 도망하다 잡혀서 개성소년형무소에 2년간 수감당하였다. 1930년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법정대학 정치과에 입학하였고, 이어 의용단에 가입하여 간부로 활약하였다. 1932년 1월에는 한인애국단 청년 단체인 상하이 한인청년단을 조직하여 이사장직을 맡았다. 1933년 11월 22일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34년 12월 대구 복심원법원에서 5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읽기

읽기자료 1

성장 과정

김철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였으며 영광군 묘량의 외가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1908년 22세의 늦은 나이로 영광 광흥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영광의 뜻있는 인물들이 서당, 노인당, 향교 서당 등의 재산을 처분한 자금으로 향교의 명륜당에 설립되었는데, 경술국치 이후 한일 합방 반대 시위를 하다 2년만에 폐교 당하였다.
광흥학교를 졸업한 김철은 1909년 경성의 법부(法部) 법관양성소에 입학하여 1912년 3월에 졸업하였다. 당시 법관양성소의 입학 자격은 17세 이상, 35세 이하의 남자로 관립 일어학교나 관립 고등보통학교 졸업 또는 동등 이상의 학력 소지자였기 때문에 보통학교만 졸업한 김철의 학력으로는 입학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교육 기간이 1년인 예과(豫科)를 졸업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는 1915년 일본 메이지[明治)] 대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고향에 은거하고 있었다. 이 무렵 그에게 일제의 식민 통치에 협력하라는 회유와 협박이 계속되어 1917년 조국 독립에 투신할 목적으로 고향을 떠나 상하이로 향했다.
김석은 김철의 조카이며, 1923년 만 13살의 어린 나이에 삼촌 김철의 부름을 받아 상하이로 가서 상하이영국학교를 졸업하였다.

  • 질문1 김철이 처음 입학했던 근대 학교의 이름을 말해 보시오.
  • 질문2 김철이 고향을 떠나 상하이로 향했던 배경과 목적은 무엇이었는가요?
  • 질문3 김석이 삼촌의 부름을 받고 고향을 떠나 상하이로 향했을 대 그의 나이는 몇 살이었는가요?

읽기자료 2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수립과 초기 활동

1918년 상하이에 도착한 김철은 여운형(呂運亨), 장덕수(張德秀), 한진교(韓鎭敎), 선우혁(鮮于赫) 등과 신한청년단을 창당하였다. 신한청년당은 1919년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는 등 당원들을 국내외로 파견하여 한국 독립에 대한 의지를 알렸다. 김철도 국내로 잠입한 후 영광으로 가서 승려 차림으로 변복하고 지방 유지들의 협조를 구하였다. 또한 고향의 가산을 정리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만드는 한편 기산도(奇山度) 등과 독립 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상하이로 돌아가 프랑스 조계 내에 독립 임시 사무소를 설치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작업에 착수하였다.
1919년 4월 각 지방 대표들로 임시 정부의 국회인 초대 임시 의정원을 구성하였는데, 그중 전남 대표는 김철이 유일할 정도로 각 지역 간 의원 수의 균형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임시 의정원법 규정에 따라 1919년 4월 30일 새로이 의원을 선출하였다. 전라도 출신은 김철과 나용균(羅容均), 한남수(韓南洙), 장병준(張柄俊) 등 4명이었다. 1919년 4월 22일 임시 의정원 제2차 회의에서 김철은 임정 재무위원장으로 선임되었고, 법무부 위원으로도 임명되었다. 1919년 5월 김철은 임정 특파원으로서 국내에 들어와 영광군 백수면 장산리 김종탁을 13도 대표의 일원으로 선임하고, 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박은용을 의무금 요구특파원으로 선임하였다. 또한 6월 23일에는 예전부터 알고 있던 김요선(金堯璿)을 방문하여 동지로 가입시키고 의무금을 받았다.
1919년 8월 5일 임정은 위원제를 폐지하고 차장제를 시행했는데, 김철은 이때 초대 교통차장으로 임명되었다. 교통국은 국내와 연락, 정보 수집, 국내 동포와 일제의 동향 파악·보고함으로써 등을 통해 임정의 활동 방침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국내외 한인 사회를 기반으로 전개해야 했기 때문에 임정은 그들과의 연락 업무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제1차 의정원 회의에서 조직된 정부 6개 부처에 교통부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은 그러한 임정의 사정을 잘 말해 준다. 1919년 7월 말 최초의 임시 교통국인 교통부 안동(安東)지부가 설치되었다.
1920년 5월 28일 김철은 임정에서 설립한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학교는 중국에 있던 청년 중에서 일반 학교와 중국의 군관학교에 갈 수 없었던 사람 가운데 무관이 되려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하였다. 육군무관학교는 1920년 5월 8일 제1회 졸업생 19명을 배출하였고, 1920년 12월 4일 제2회 졸업식을 거행하였다.

  • 질문1 1919년 김철이 국내로 잠입했던 목적은 무엇이었나요?
  • 질문2 임정에서 설립한 육군무관학교에서 교육했던 대상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요?
  • 질문3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세우는데 김철이 주로 했던 역할은 정치・경제・문화・군사 분야 중에서 어느 분야인가요?

읽기자료 3

이승만의 탄핵과 헌법 개정

1924년 6월 임시 의정원은 임정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대통령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자 이동녕을 임시 대통령 직무 대리로 선출하였다. 그리고 헌법 제14조 선서, 제11조의 대통령의 국가 대표 정무총람 법률 공포 등의 위반, 제39조 법률 및 명령의 국무원 부서 등의 위반, 대통령을 선출한 임시 의원정의 노골적인 부인 등을 이유로 1925년 3월 13일 이승만 대통령 탄핵안을 상정하였다. 이어 3월 23일 이승만이 직무를 등한시하고, 임정과 임시 의정원을 부인하였다는 이유로 그를 면직시키고 박은식을 새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며칠 뒤인 3월 30일 대통령제를 국무령 지도 체제인 내각책임제로 개헌하여 임시 정부는 국무령제로 변경되었다. 이후 이상룡(李相龍), 양기탁(梁起鐸), 안창호(安昌浩), 홍진(洪震)에 이어 1926년 12월 14일 김구(金九)가 국무령으로 선출되어 내각을 구성하였는데, 이때 김철은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김구는 국무령 지도체제 하에서는 내각 구성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헌법 개정에 착수하였다. 김철 등이 수행한 개정 작업을 거쳐 대통령, 국무령 등의 정부 수반을 없애고 완전히 회의 지도 체제인 국무위원회제로 개편한 임시 약헌이 채택되었다. 이에 따라 1927년 8월 19일 국무위원회제 아래 내각이 구성되었고, 김철은 군무위원에 선임되었다. 1930년 11월 8일 국무위원 임기 만료에 따른 개각이 단행되어, 김철이 군무장(軍務長)으로 선출되었다. 1931년 5월 김구, 김철 등은 임정 국무위원 명의로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난징[南京]에서 개최되고 있던 중국국민회의에 임시 정부와 한국 독립당의 방침과 정책을 알리고, 일제의 만몽(滿蒙 : 만주와 몽골) 정책을 폭로하고, 장차 한국 독립당과 중국 국민당 사이에 긴밀한 연락 관계를 수립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 질문1 이승만이 탄핵을 받았던 사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이승만 탄핵 후 개헌을 통해 새롭게 출발한 정부 체제는 무엇이었나요?
  • 질문3 1927년 이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김철이 맡은 직책은 주로 어느 분야였나요?

읽기자료 4

한인애국단의 활동과 김석 투고 사건

군무장이었던 김철은 임정의 무장 활동을 관장하면서 김구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활동을 지원하였다. 김철은 국무회의에서 김구의 한인애국단 조직과 이봉창, 윤봉길 의거 등을 사전에 승인하여 실행시켰다. 이봉창은 1932년 1월 도쿄[東京]에서 일왕에게 폭탄을 투척하였으며, 같은 해 4월에는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홍구 공원에서 일본 상하이 주둔군 사령관 등을 폭살시키는 의거를 감행하였다. 윤봉길 의거로 일제 경찰의 추격을 받게 된 김구, 김철, 안공근, 엄항섭 일행은 미국인 피치(S. A. Fitch) 박사의 도움을 받아 일제의 추격을 따돌릴 수 있었다.
그런데 윤봉길 의거 직후 중국 측에서 임정으로 유입된 자금의 횡령 문제로 김구와 김철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김구는 군무장을 사퇴하고 이동녕과 함께 가흥으로 떠났는데, 김철의 조카 김석이 『지지신보[時事申報]』에 안창호는 진정한 혁명가가 아니라는 내용의 글을 투고하였다. 이에 김구 등은 김철, 조소앙, 김석을 크게 꾸짖으며 때리고 지니고 있었던 돈을 몰수하였다. 이 사건으로 5월 30일 외무장 조소앙이, 6월 2일에는 나머지 국무위원 전원이 사표를 제출하였다.
『지지신보』에 글을 쓴 김석은 영광보통학교 4학년 때인 1923년 숙부 김철의 부름을 받아 사촌 동생 김덕근과 함께 상하이로 건너갔다. 김철과는 숙부와 조카 사이였고, 의용단 및 한인애국단과의 관계로 김구와 매우 밀접한 사이였다. 김석의 행위로 김철과 김구를 비롯한 임정의 모든 국무위원들이 사표를 제출하는 결정을 하였다.
김석 투고 사건인 일명 ‘항주 사건’을 수습하기 위하여 논의를 거듭하였지만 해결되지 못하였다. 이 사건은 결국 임시 정부와 한국 독립당이 송병조ㆍ이유필계, 김철ㆍ조소앙계, 김구계로 나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 질문1 『지지신보』에 안창호를 비난하는 글을 투고한 인물은 김철과 어떤 관계였나요?
  • 질문2 임시 정부와 한국 독립당이 분열되는 계기가 되었던 사건을 무엇이라고 부르나요?

읽기자료 5

의용단의 조직

1920년 1월 김철은 김구, 김립, 김순애, 손정도, 윤현진 등과 의용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일본 경찰의 자료에는 평양, 황해도, 부산 등 의용단의 국내 활동 지역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의용단이 상하이에서 결성되기는 했지만 임정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국내에서 활동한 단체였음을 말해 준다.
의용단의 활동은 열 가지였다. 첫째, 포고문 살포와 선전으로 국민에게 적개심을 불러 일으킨다. 둘째, 정부를 도와 재정 업무를 지원한다. 셋째, 국민에게 국방의 의무와 납세의 의무를 다할 것을 고취한다. 넷째, 왜(倭) 총독부에 소속된 관리를 퇴진시킨다. 다섯째, 적의 관청에 납세를 거절케 한다. 여섯째, 일본 화폐 사용을 억제한다. 일곱째, 군사적으로 실제 행동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여덟째, 임정의 공보와 기관지를 전달케 한다. 아홉째, 본 단(團)과 주의가 같은 다른 단체를 상호 협력하고 원조한다. 열째, 정부의 명령이나 지휘가 있을 때와 광복 운동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는 따라온다.

  • 질문1 상하이에서 조직된 의용단의 조직원들이 실제로 활동했던 지역은 어디였나요?
  • 질문2 의용단의 활동 열 가지를 읽어 봅시다.

읽기자료 6

한국 독립당의 결성과 활동

1926년경부터 국내외 독립운동 전선에서 민족 유일당 동이 전개되었다. 국내에서는 신간회가 조직되었고, 중국 본토에서는 민족 유일당 결성을 위한 촉성회가 결성되었다.
1927년 3월 21일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 집행위원으로 김갑, 김철, 오영선, 이동녕 등 25명이 선임되었다. 그해 9월 집행위원 25명은“한국의 유일한 대독립당 성립을 촉성함.”, “한국 독립의 필요한 민족적 일체 혁명 역량의 총집중을 노력함.”이라는 강령을 포함하여 유일 독립당의 조직을 목적으로 한 선언서 발표하였다.
1930년 1월 25일 임정 핵심 세력과 안창호에 의해 프랑스 조계의 임정 사무소에서 한국 독립당이 결성되었다. 한국 독립당의 성립은 민족 유일 독립당이라는 민족운동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중국 관내에서 최초로 이루어진 본격적인 정당 활동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한국 독립당은 청년 단체로 상하이한인청년단, 부인 단체로 상하이한인애국부인회와 상하이한인여자청년동맹, 소년 단체로 상하이 한인소년동맹을 두었다. 김철은 한국 독립당 의 재무부 주임을 맡았다.
1934년 3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단일당 조직으로 개편하기 위해 각 단체의 대표 12명이 난징에서 각 단체 대표 회의를 개최하였는데 김철은 김두봉, 송병조와 함께 한국 독립당 대표로 참가하였다. 그러나 그해 5월 4일 급성 폐렴으로 쓰러져 항저우[杭州] 소재 광자병원(廣慈病院)에서 입원 치료하였으나, 1934년 6월 29일 4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 질문1 상하이에서 한국 독립당이 결성된 것은 언제인가요?
  • 질문2 1934년 3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 난징에서 각 단체 대표 회의를 개최했던 목적은 무엇인가요?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시각자료

시각자료 1

자료는 김철의 첫 번째 아내 김정자가 목매어 자결했던 ‘단심송’이다.

1919년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고향을 방문한 이후 고향에 가지 못하는 김철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은 김정자는 상하이로 남편을 찾아왔다. 그러나 김철은 찾아온 아내에 ‘이혼하고 다른 사람과 재혼할 것’을 거듭 권하였다. 전남 함평과 상하이가 너무 멀어 남편 없이 혼자 고생하며 고통 받는 아내의 어려움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그의 아내는 마을 뒤 소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하고 말았다.

  • 질문1 독립운동에 매진하느라 가정 생활도 포기했던 김철이 아내의 사망 소식을 듣고 애통해하는 마음을 담을 글을 편지 형식으로 써 봅시다.

시각자료 2

자료는 김철과 그의 조카 김석의 사진이다.

  • 질문1 김철이 열세살인 어린 조카를 상하이로 불러들이려 설득하는 내용의 편지를 써 봅시다.
  • 질문2 김석이 숙부 김철의 부름을 받고 상하이까지 간 것은 어린 나이에도 어떤 생각을 가슴에 품고 있었기 때문일까요?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모둠활동

모둠활동 1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독립운동 노선을 비판했지만, 김구는 끝까지 임시 정부 에 활동하였다. 임시 정부의 독립 노선에 대한 비판을 찾아보고 김철의 처지에서 반박하는 글을 써서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2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나가서 싸우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오갈 데 없는 가족을 돌보는 것이 옳은지 토론해 보고 모둠별로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3) 현재 대부분 독립 운동가의 후손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아보고, 국가보훈처에서 행하는 보훈정책의 부족한 점을 두 가지만 찾아서 개선 방안을 토론하고 정리하여 발표해 봅시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하단영역

관련사이트

주소: 충남 천안시 동남구 북천읍 삼방로 95 전화: 041-560-0441 팩스 : 041-560-0426 
 Copyright 2014 THE INDEPENDENCE HALL OF KOREA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