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영역
도입
나는 네 사랑
너는 내 사랑
두 사랑 사이 칼로 썩 베면
고우나 고운 핏덩이가
줄줄줄 흘러내려 오리니
한 주먹 덥썩 그 피를 쥐어
한 나라 땅에 고루 뿌리리
떨어지는 곳마다 꽃이 피어서
봄맞이 하리.
이 시는 신채호(申采浩, 1880~1936)가 1910년 4월 망명하여 압록강 철교를 넘어 만주로 들어갈 때 지은 「한나라 생각」이다. 자신과 조국을 일체화시키는 그의 민족혼을 보여주는 글이다.
언제 돌아올지도 모를 망명길에 나서는 그의 등에는 괴나리봇짐에 『동사강목』 한 질이 들어 있었다. 그에게는 다른 어떤 것보다 민족의 역사를 짊어지고 가는 임무가 중요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으로 역사 연구를 또 하나의 독립 투쟁으로 간주했던 그의 마음을 잘 보여준다.
역사적 배경
| 현재 주소 |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 233 [도로명 주소 : 대전광역시 중구 단재로229번길 47] |
|---|---|
| 현재 상태 | 복원 / 생가는 복원되었으며, 주변은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
신채호는 본관이 고령(高靈)이며 1880년 외가가 있던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태어나, 1887년 할아버지가 살고 있던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로 이주하였다. 가정 환경은 궁핍하면서도 전통적인 선비의 풍모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몰락 양반 집안이었다.
그는 1898년 당시 개화파의 중진으로[중요 인물로] 꼽히던 신기선(申箕善)의 권유와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한 후 독립협회에 참여하여 이상재(李商在), 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내무부 문서부의 일을 맡아 보았다. 또한 이승만(李承晩), 이승훈(李昇薰), 안창호(安昌浩), 이동녕(李東寧) 등과도 교류할 수 있었다.
1901년 성균관을 마치고는 귀향하여 신규식(申圭植) 등과 산동학당을 열고 계몽 운동에 몰두하였다. 1905년 서울로 올라가 『황성신문』의 논설 기자로 언론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곧 『황성신문』이 폐간되자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위원으로 자리를 옮겨 민족 의식 고취에 전력하였다. 언론 활동과 함께 대한자강회와 대한 협회 등에 참여하고 신민회, 기호 흥학회 등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독사신론』, 『을지문덕』, 『수군 제일위인 이순신전』, 『동국거걸 최도통전』, 『대동사천년사』등을 저술하여 애국심 고취에 힘썼다.
망국 직전인 1910년 봄에 신채호는 국외로 탈출하여 중국과 러시아의 각지를 오가며 독립운동에 온 힘을 기울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광복회 조직에 관여했고, 『대양보』와 『권업신문』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1914년에는 만주의 『동창학교』와 관련을 맺고 국사 교과서로 사용하기 위해 『조선사』를 집필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한 29인에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위임 통치론’을 제기했던 이승만이 대통령에 선출되자 임시 정부와 결별하고, 반임시 정부 활동의 일환으로 『신대한』을 발행하여 무장 투쟁론을 지지하였다. 1923년에는 김원봉의 부탁으로 의열단의 강령 역할을 하는 「조선 혁명 선언」을 작성하였다.
1924년부터는 베이징[北京]에서 승려 생활을 하면서 역사 연구와 집필에만 몰두하다가, 1925년 환속하여 무정부주의동방연맹에 가입하였다. 그는 1928년 무정부주의동방연맹에 참가하고, 자금 조달을 위해 타이완[臺灣]의 가오슝[高雄]에서 일제에게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 감옥에서 1936년 순국하였다.
읽기
읽기자료 1
국내 언론 활동
신채호는 그의 나이 26세인 1905년 장지연의 초빙으로 『황성신문』의 논설 기자가 되었다. 그는 20대에 이미 박식하고 설득력 있는 문장을 쓰는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황성신문』에서 활동한 기간은 길지 않았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을 규탄한 장지연의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황성신문』이 무기 정간되자, 이듬해 양기탁(梁起鐸)의 천거로 『대한매일신보』 주필이(主筆 : 신문의 글을 주로 쓰는 언론인) 되어 민중 계몽을 통한 항일 언론 운동을 전개하였다. 자신의 주장을 간결하면서도 감동적으로 썼던 신채호는 언론을 통하여 역사 교육과 애국심을 강조하고 국권 회복을 위한 반외세 민족 운동 노선을 굳게 지켰다.
일제의 압박으로 국내 활동이 어려워지자 신채호는 1910년에 국외 망명의 길을 택하였다. 중국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간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언론 활동이었다. 『대양보』와 『권업신문』의 주필로 활동하면서 그는 일제의 침략을 폭로하고 독립운동 정신을 고취하면서 독립을 위한 방략도 제시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뿐만 아니라 만주 회인현(懷仁縣)과 베이징, 상하이[上海] 등지에서도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것은 바로 언론 활동이었다.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신채호는 상하이로 가서 임시 정부 조직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위임 통치 문제로 임시 정부를 탈퇴한 후 1919년 10월에 『신대한』을 창간하였다. 그는 이 신문을 통해 임시 정부의 외교 노선이 실력 양성론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무장 투쟁론을 제기하였다. 결국 1920년 4월 임시 정부의 압력으로 『신대한』의 발행이 중단되었다. 그는 1921년 1월 베이징에서 순한문의 월간 『천고』를 독립운동 잡지로 간행하였다. 이것은 백화문(白話文 : 대화체로 쓰는 한문)이 섞인 한문체의 잡지였는데, 한국인뿐만 아니라 중국의 독자층도 겨냥하였다. 『천고』에는 대부분 일본 제국주의 및 한국 독립 운동을 강조하는 논설이 실려 있고, 각 호당 고대사 관련 논문도 한 편씩 실었다. 다른 한편으로 『중화보』와 같은 중국어 신문에 논설을 기고하였고 특히 국내의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 등에 논설이나 사론(史論)이 소개되어 국내 독자들에게도 명성이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 질문1 신채호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활동했던 신문은 무엇인가요?
- 질문2 신채호가 국내에서 언론 활동을 통해 이루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나요?
- 질문3 신채호가 『신대한』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외교 노선을 비판하고 대안으로 제시한 독립 운동 방식은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2
역사 저술 활동
신채호의 역사관이 형성되는 시기에 량치차오[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의 일부가 『음빙실 자유서(飮氷室 自由書)』란 이름으로 번역되어, 그의 변법자강설이 우리나라 지식층과 계몽 운동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신채호는 량치차오의 『이태리건국삼걸전』을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신채호의 역사관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신채호는 이탈리아의 근대 국가 형성에서 나타났던 민족주의적 영웅을 한국에서도 재현하였다. 그는 소수의 영웅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는 ‘영웅주의 사관’에 입각하여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이순신전』, 『을지문덕전』, 『동국거걸최도통전(東國巨傑崔都統傳)』을 발표하였다.
신채호 중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고대사에 대한 관심을 갖고 고대 문화를 폭넓게 이해하였다. 1920년대 그의 논설과 역사 서술에서는 당시 사회를 이끌어가는 주체 세력으로서 민중을 강조하게 되었다. 역사의 주체인 민중이 혁명을 주도하여 항일 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인식은 폭력적 항일 운동과 무정부주의 투쟁을 전개하는 바탕이 되었다.
신채호가 역사를 서술하고 계속 연구하는 과정에서 영웅주의 사관이 민중 주체 사관으로 바뀌었는데, 그 바탕에는 반제국주의를 위한 민족주의가 있었다. 그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전력 질주하는 독립운동가로서 국권을 회복하고자 모든 수단을 사용하고자 했던 민족주의자였던 것이다. 그가 추구한 궁극적인 목적은 민족의 자강과 완전한 독립이었다. 이것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국사 연구’와 교육을 가장 먼저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그의 역사학은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지만, 민중을 주체로 하는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유교적 전근대 사학의 한계를 극복함으로써 근대 사학의 밑거름이 되었다.
- 질문1 신채호의 역사관이 변화했던 과정을 말해 보시오.
- 질문2 신채호가 민족의 자강과 완전한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간주했던 것은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3
「조선 혁명 선언」
김원봉은 1921년 4월 신채호가 주도한 이승만의 위임 통치 청원에 대한 성토문에 반임시 정부 계열 인사 54명과 함께 공동 서명을 하는 등 신채호와 노선을 같이 해 왔다. 신채호는 그런 김원봉으로부터 1922년 12월 의열단(義烈團)의 독립 운동 이념과 방법을 드러내어 밝히는 의열단 선언문을 작성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만주의 지린[吉林]에서 창립된 민족주의 폭력 노선의 항일 비밀 단체로서 신흥 무관 학교 출신의 김원봉이 지도하고 있었다. 독립운동 방법으로 암살, 파괴, 폭력을 선택한 의열단은 이미 많은 성과를 거두었고 단원도 늘어가는 추세였다. 하지만 그러한 운동 방식에 대한 비판이 있었으므로 의열단은 자신들의 이념을 이론적으로 정립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김원봉은 당대의 문필가로서 자신들의 무력 투쟁 방식에 가장 동조적이었던 신채호를 찾아와 그런 요청을 하게 된 것이다.
김원봉은 자신이 요청한 선언문 작성을 돕도록 유자명[柳子明, 본명 유흥식(柳興湜)]을 소개해 주었다. 유자명은 상하이 임시 정부에 참여하였으며 무정부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1921년 의열단에 가입하여 가장 탁월한 이론가로 활약하고 있었다. 신채호는 상하이의 한 여관에서 선언문을 집필하면서 유자명으로부터 무정부주의 이론에 대해 체계적인 설명을 들었다.]
신채호는 이때 무정부주의 이론을 일부 수용하여 1923년 1월 전체 5장 6,400여 자로 된 선언문을 작성하였다. 이 선언에서는 의열 활동의 당위성을 천명하고, 그들이 파괴할 다섯 가지 대상과 암살할 일곱 가지 대상을 열거하였는데, 이를 각각 ‘5파괴(破壞)’, ‘7가살(可殺)’이라고 하였다. 5파괴는 ‘① 조선총독부, ② 동양척식주식회사, ③ 매일신보사, ④ 각 경찰서, ⑤ 기타 왜적의 중요 기관’ 등 일제 식민통치 및 수탈 기관이고, 7가살은 ‘① 조선 총독 이하 고관, ② 군부 수뇌, ③ 대만 총독, ④ 매국적(賣國賊), ⑤ 친일파 거두, ⑥ 적의 밀정, ⑦ 반민족적 친일 관리와 지주’ 등이었다.
의열단의 이념과 운동 방향을 천명한 조선 혁명 선언은 김원봉과 의열단원들을 크게 감격시켰다. 의열단은 신채호가 쓴 조선 혁명 선언의 끝에 ‘조선총독부 관공리에게’라는 부속 문서를 덧붙이고 대량으로 인쇄하여 세상에 공표하였다. 그리고 의열단의 활동 때마다 이를 현장에 살포하여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알렸다.
- 질문1 김원봉이 신채호에게 조선 혁명 선언을 작성을 부탁했던 배경을 설명해 보시오.
- 질문2 신채호가 조선 혁명 선언 작성에 앞서 만났던 유자명은 어떤 인물이었나요?
- 질문3 조선 혁명 선언에서 언급한 파괴할 다섯 가지 대상과 암살할 일곱 가지 대상을 말해 보시오.
읽기자료 4
무정부주의 활동
1923년 후반기에 중국에 있던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일부에서는 이회영(李會榮)과 무정부주의 이론가 유자명 등을 중심으로 무정부주의를 공부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었다. 이들은 중국의 무정부주의자 리스청[李石曾] 등과 접촉하고 있었다. 조선 혁명 선언을 작성하면서 이미 유자명과 접촉했던 신채호는 일찍이 황성신문 기자 시절부터 무정부주의에 대한 글을 읽었으나 쉽게 동조하지는 않고 있었다.
1919년 10월 『신대한』을 발간하여 반임시 정부 활동을 시작하면서 신채호는 아나키즘을 소개했는데, 1921년 『천고』의 간행 단계에 이르러 한국 민족의 해방이 아나키즘에 입각하여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중국에 있는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의 독자 조직인 흑색청년동맹 베이징지부를 조직하였다. 그러다가 1924년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 바쿠닌(Mikhail Bakunin),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 등의 작품을 읽으며 그의 글에 무정부주의적인 요소가 더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그가 베이징에서 처음 결성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하고 기관지인 『정의공보』에 논설을 실은 것은 그가 무정부주의자로 본격적인 행동을 보이는 모습이다.
이후 신채호는 무정부주의 운동에 더욱 매진하게 되었다. 1927년 베이징에서 조직된 무정부연맹동방연맹에 조선 대표로 참가하였다. 북경 대회의 결정을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중국의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을 결집시켜 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을 결성하는 한편, 중국의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의 역량을 한군데로 결집시키기 위해, 1928년 4월 톈진[天津]에서 한국인 아나키스트 대회를 개최하여 잡지 등을 발행하여 선전 활동을 하려고 하였다. 신채호는 잡지 발행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위조 우편서류를 만들어 현금으로 찾으려는 계획을 세우고, 5월 8일 중국인 유문상(劉文祥)으로 위장하여 타이완으로 가서 돈을 찾으려다 타이완 지룽[基隆] 우편국에서 위조 서류를 발견하여 수사하던 경찰에 체포되었다.
- 질문1 신채호가 한국 민족의 해방이 아나키즘에 입각하여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잡지 이름은 무엇인가요?
- 질문2 아나키스트 운동을 하던 신채호는 무엇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공작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나요?
시각자료
시각자료 1
자료는 단재가 집필한 「조선 혁명 선언」인데, 최남선의 「3·1 독립 선언서」, 한용운의 「조선 독립 이유의 서」와 함께 뛰어난 명문으로 평가받고 있다.
- 질문1 조선 혁명 선언서의 내용을 인터넷에서 검색하여 읽어 봅시다.
- 질문2 조선 혁명 선언서에서 비판한 독립운동 방식들은 어떤 것들이었는지 조사해서 써 봅시다.
시각자료 2
자료는 독립기념관에 있는 신채호 어록비이다.
- 질문1 비문의 내용을 소리 내어 읽어 봅시다.
- 질문2 신채호가 독립을 위한 수단으로 제시한 것은 무엇인가요?
시각자료 3
신채호가 『대한매일신보』에 1908년 5월 12일부터 8월 18일까지 연재한 것을 모아 1908년(융희2년) 9월에 120쪽 분량으로 등사하여 펴낸 『수군제일위인이충무공전』이다.
- 질문1 뛰어난 영웅 한 사람이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할 수 있는지 아닌지 자신의 생각을 정하고 그 이유를 적어 봅시다.
- 질문2 역사를 발전시키는 힘은 뛰어난 인물에게서 나오는지, 아니면 평범한 민중에게서 나오는지 자신의 생각을 말해 봅시다.
모둠활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