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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학수 집터(독립을 위해 평생을 무장 투쟁에 바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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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조국의 독립에 몸 바친 참군인

선생은 조국 광복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최전방에서 광복군을 지휘하였다. 이렇듯 선생은 대한제국의 군인으로 독립군을 거쳐 광복군에 이르기까지 활동하였던 유일한 인물이자 일평생 군인으로 최전선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였다.

국가보훈처에서 2013년 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황학수에 대한 홍보자료의 제목과 내용 일부이다. 황학수(黃學秀)는 어릴 적 어머니로부터 중국 악비(岳飛)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고 한다. 악비는 금(金)나라의 침략을 물리친 송(宋)나라 때 무장으로, 중국인들은 악비를 ‘구국의 영웅’이자 ‘충신’으로 여기고 있다. 황학수의 어머니는 “악비의 어머니는 악비의 등에다가 진충보국(盡忠報國)이라는 글자를 새겨주었고, 악비는 이를 잊지 않아 훌륭한 인물이 되었다.”며 “남자는 남자다운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니 대의(大義)를 알도록 공부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하였다고 한다.
이런 어머니의 영향 때문인지, 혼란한 세상일에 휩쓸리지 말고 조용하게 살기를 바란 아버지의 뜻과는 달리 황학수는 동학군에 참가하는가 하면,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각종 군사기관에서 장교로 활동하였다. 중국으로 건너간 그는 상하이[上海: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군무부의 육군무관학교 교관, 서간도 서로 군정서 참모장과 군무부장, 북만주 지역의 신민부 참모부 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한국 독립당과 한국 독립군을 편성하고, 부사령관이 되어 중국군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큰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국군의 오해로 한국 독립군이 무장 해제되자, 만주를 떠나 다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찾은 황학수는 1940년 충칭[重慶: 중경]에서 김구, 지청천(이청천), 이범석 등과 함께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고, 광복군 총사령 대리로서 1940년 11월에 시안[西安: 서안]으로 이전한 시안 광복군 총사령부의 최고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광복군 총사령부가 1042년 10월에 충칭으로 다시 돌아오자 임시 정부의 국무위원과 생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이때부터는 군인으로서의 역할보다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황학수는 대한제국의 군인으로 출발하여 한국 독립군을 거쳐 한국 광복군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독립군으로 활동하였던 인물이었다. 군인으로서 일평생을 항일 무장 투쟁에 몸 바친 이였다.
황학수와 관련된 사적지로는 충청북도 단양군 어상천면 대전리에 그가 살았던 집터가 있으며, 서울특별시 국립서울현충원 ‘임시 정부 요인 묘소’에 그의 묘와 묘비가 세워져 있다. 주요 활동 무대가 중국이었던 탓인지 국내와 관련된 그의 사적지는 많지 않으며, 있더라도 안내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는 편이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충청북도 단양군 어상천면 대전리1구 400
[도로명 주소 : 충청북도 단양군 어상천면 삼화동길 108]
현재 상태 없어짐 / 가옥이 남아 있지 않다.

일제 침략에 맞선 독립 운동은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중국을 비롯하여 일본과 미국, 러시아, 동남아, 유럽 등 세계 각지에서 독립 운동이 펼쳐졌다. 그 가운데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중국에서의 활동이 가장 활발하였다. 일찍부터 경제적 이유로 평안도 사람들이 서간도로 이주하고, 함경도 사람들은 지린[吉林: 길림]과 옌볜[延邊: 연변] 등의 북간도 지역으로 이주하였으며,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국권 회복을 위하여 정치적 망명객들이 줄지어 이곳으로 이동하였다. 룽징[龍井: 용정]을 중심으로 이상설(李相卨) 등이 최초의 민족 학교인 서전서숙을 설립하는 것을 시작으로 각지에 많은 학교들이 설립되어 독립군을 배출하였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1910년을 전후하여 많은 애국지사들이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국외에서는 무장 투쟁이 가능하였다. 1910년 초 신민회 회원들이 칭다오[靑島: 청도]에서 회의를 개최한 것을 비롯하여, 상하이와 베이징[北京: 북경]을 중심으로 많은 애국지사들이 망명하였다. 상하이에서는 신규식(申圭植)을 중심으로 동제사(同濟社)가 결성되었으며, 1915년 이상설(李相卨)을 중심으로 설립된 신한 혁명당이 베이징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북간도에서는 간민회(墾民會)․중광단(重光團) 등 자치 기관이면서 독립 운동을 병행하는 단체들이 조직되고, 서간도에서는 경학사(耕學社)․부민단(扶民團) 등이 중심이 되어 독립 운동 기지가 세워졌으며, 신흥 강습소라는 독립군 양성을 위한 무관 학교가 설립되었다.
1918년 11월 지린 지역에서는 김교헌(金敎獻) 등 39명의 민족 운동가들이 3·1운동보다 앞선 시기에 무오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1919년 도쿄[東京: 동경] 유학생들의 2․8 독립 선언에 이어 1919년 거국적으로 펼쳐진 3·1운동에 많은 동포들이 참여하여 중국 각지에서도 만세 운동이 펼쳐졌다. 3·1운동은 국내외 독립 운동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마침내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4월 11일 수립. 선포는 4월 13일)되어 독립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920년대에 들어서 1919년 지린 지역에서 조직된 의열단(義烈團)이 국내외에서 활발한 의열 활동을 펼쳤으며, 북간도에서는 무장 독립 단체인 대한 독립군, 대한 국민회군, 북로 군정서 등이 조직되어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와 같은 해 10월 청산리 전투 등을 승리로 이끌었다. 서간도에서는 서로 군정서, 대한 독립단, 한족회 등이 결성되어 국내 진공 작전 및 무장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중국 내륙의 상하이에서는 임시 정부를 비롯하여 각 단체들이 결성되어 활동하였고, 베이징에서는 신채호(申采浩)․박용만(朴容萬) 등이 임시 정부와 노선을 달리하는 또 다른 세력을 형성하여 활동하였다. 1921년 쑨원[孫文: 손문]을 중심으로 한 호법정부(護法政府)가 광저우[廣州: 광주]에 수립되자 이곳에서도 독립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신규식은 쑨원을 만나 임시 정부의 승인을 요청하였고, 많은 한국 청년들이 광저우의 황포군관학교와 중산대학에 입학하여 군사 훈련을 받기도 하고 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크게 패한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의 한국인들을 학살하는 간도 참변을 일으켰다. 이후 독립군 부대들은 연해주 근처의 밀산부로 이동하여 서일(徐一)을 중심으로 대한 독립군단을 조직한 후 러시아의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 현 스보보드니)로 이동하였는데, 이곳에서 독립군 부대 간의 의견 다툼으로 인해 러시아군에게 죽임을 당하는 자유시 참변을 겪게 된다. 남은 독립군들은 다시 만주로 돌아와 자치 정부의 성격을 지닌 참의부(1923), 정의부(1924), 신민부(1925)를 조직하였다. 이후 3부 통합 운동을 실시하여 국민부와 혁신 의회로 재편되었는데, 국민부는 조선 혁명당과 조선 혁명군을, 혁신 의회는 한국 독립당과 한국 독립군을 조직하여 1930년대 만주에서의 무장 투쟁을 주도하였다.
1930년대에는 한인 애국단(韓人愛國團)의 의열 활동과 함께 만주 지역에서 한국 독립군과 조선 혁명군이 중국군과 연합 작전을 전개하여 쌍성보 전투(1932), 흥경성 전투(1932), 대전자령 전투(1933) 등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르고, 동북 항일 연군이 보천보 전투(1937)에서 승리하였다. 중국 상하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32년 윤봉길(尹奉吉) 의거를 계기로 근거지를 상하이에서 항저우[杭州: 항주]로 이전하였고, 임시 정부 요인들이 난징[南京: 남경] 등지로 흩어져 활동하였다. 또한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면서 전쟁 상황에 따라 임시 정부와 민족 혁명당을 비롯한 독립운동 단체 및 세력들이 여러 곳으로 이동해 다니며 독립 운동을 펼쳤다.
1940년대에는 충칭이 독립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충칭은 난징을 점령당한 중국 국민당 정부가 임시 수도로 정한 곳으로, 임시 정부를 비롯한 많은 독립 운동 세력들도 모두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한국 청년 전지 공작대, 한국 광복군, 조선 의용대, 조선 의용군 등 무장 세력이 활동하였는데, 이들 무장 세력은 시안, 뤄양[洛陽: 낙양], 옌안[延安: 연안], 내몽고 등 각지에 대원들을 파견하여 활동하였다. 특히 김두봉이 이끄는 조선 의용군은 중국 팔로군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싸웠으며, 임시 정부의 한국 광복군은 영국군과연합 작전을 펼쳐 인도․미얀마 전선에 한국 광복군 공작대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한편, 한국 광복군은 중국에 주둔한 미군의 지원을 받아, 훈련받은 정규군을 국내로 침투하려는 작전을 준비하였으나, 예상보다 빨리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하는 바람에 실행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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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평생을 조국의 독립에 몸 바친 ‘참군인’ 황학수

황학수는 호가 몽호(夢呼)이며, 1879년 서울 화동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1884년 충청북도 단양군 어상천면 대전리 삼화동으로 내려와 살게 되었는데, 삼화동은 행정 구역으로는 단양군에 속해 있지만, 생활권은 제천이었다. 아버지의 바람은 아들이 혼란한 시국에 휩쓸리지 말고 조용하게 사는 것이었다. 황학수가 16살 때인 1894년,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서울에서 책방을 경영하는 집의 딸과 결혼시켜 안정된 생활을 하길 원했으나, 그해 전라도 지역에서 일어난 동학 농민군의 봉기가 제천에도 휘몰아치자 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황학수는 스스로 동학군에 참가하였다.
1895년 아버지와 어머니가 연이어 세상을 떠나자 그는 서울로 올라왔다. 1898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1900년 무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육군 참위로 임명되어 1907년 8월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당할 때까지 7년 반 동안 각종 군사 기관에서 장교로 활동하였다. 일제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자 황학수는 군복을 벗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하라는 권유도 있었지만, 뿌리치고 제천으로 내려갔다. 이곳 유지들과 함께 1909년 부명학교(1911년 제천공립보통학교로 개창, 1945년 동명학교로 개칭)를 설립하고 인재 육성에 전념하였다.
육군무관학교 동기생들 모임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동기생들 중 상당수가 만주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과, 그곳이 지리적으로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적합하다는 말을 들고서 황학수도 만주로 가서 독립군 양성에 힘쓸 작정을 하였다. 그는 독립군을 양성하려면 적지 않은 군자금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오대산에서 금광을 시작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재산만 날려 버렸다. 이 무렵 3·1운동이 일어났으며, 그는 중국으로 망명할 생각이 절실하여 군자금을 마련하지 못한 채 맨손으로 떠났다.
중국 상하이까지 간 황학수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임시 의정원의 충청도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지만, 1919년 11월 군무부 참사로 임명된 이래 주로 군무부의 일을 맡거나 육군무관학교 교관으로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일을 하였다. 서간도에서는 서로 군정서의 군사 조직을 재건하고 참모장과 군무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이어 북만주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 운동 단체인 신민부에서 참모부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 한국 독립당을 결성하고 부위원장이 되었으며, 한국 독립당 직속으로 한국 독립군이 조직되자 1932년 부사령관이 되어 중국군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싸운 전투에서 여러 차례 큰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국군의 오해로 한국 독립군이 무장 해제당하여 더 이상 활동하기가 어렵게 되자 만주를 떠나 중국 본토로 들어갔다. 그는 난징[南京]에서 지청천 등과 함께 조선 혁명당에 참가하였으며, 1938년 5월 조선 혁명당, 한국 독립당, 한국 국민당의 3당 통합 회의가 개최되자 지청천 등과 함께 조선 혁명당 대표로 참석하여 민족 혁명당을 창당하는데 기여하였다.
다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찾은 황학수는 1938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군사위원을 지내고, 1939년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 특파원으로 시안[西安]에서 의용군을 모집하였다. 의용군을 바탕으로 1940년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광복군 총사령 대리로서 시안 총사령부의 최고 책임자로 활동하며 항일전을 지휘하였다.
1940년 11월에 시안으로 이전했던 광복군 총사령부가 1942년 10월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있던 충칭으로 옮겨가자 황학수 또한 충칭으로 갔다. 그가 충칭에 돌아왔을 때, 임시 정부는 물론이고 충칭의 정치 판도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그동안 임시 정부에 참여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던 조선 민족 혁명당을 비롯한 좌익 세력들이 임시 정부에 참여한 것이다. 1942년 10월 좌익 인사들이 참여하면서 임시 정부의 기구와 조직도 확대 정비되었다. 종전의 7명이었던 국무위원이 11명으로 증원되었고, 정부의 부서도 종래의 외무·내무·법무·재무·군무부 외에 학무부·선전부·교통부·생계부 등 4개 부서가 증설되었다. 황학수는 이 과정에서 임시 정부의 국무위원과 생계부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그의 삶은 군인에서 정치인으로 바뀌게 되는데, 황학수는 생계부장 이외에 한국 독립당의 주요 간부로도 활동하였다
황학수는 1945년 해방 후 귀국하여 임시 정부와 한국 독립당 활동을 계속하는 한편 대종교에도 관여하다가 1953년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국가보훈처에서는 2013년 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그와 관련된 사적지로는 충청북도 단양군 어상천면 대전리에 그가 살았던 집터가 있으며, 서울특별시 국립서울현충원 ‘임시 정부 요인 묘소’에 그의 묘와 묘비가 세워져 있다.
이와 같이 황학수는 대한제국의 군인으로 시작하여 한국 독립군을 거쳐 한국 광복군에 이르기까지 활동하였던 인물이자 일평생을 군인으로 최전선에서 활동한 독립 운동가였다. 군인으로서 일평생을 항일 투쟁에 몸 바친 ‘참군인’이었다.

  • 질문1 서울 출신인 황학수는 어느 지방으로 이주하여 성장하였는지 대답해 봅시다.
  • 질문2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 장교였던 황학수가 군복을 벗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대답해 봅시다.
  • 질문3 한 평생 군인으로 살아온 황학수가 어떤 직책을 맡으면서 정치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하였는지 써봅시다.

읽기자료 2

일제 강점기 항일 무장 투쟁 부대

일제 강점기 국외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군대(단체)로는 대한 독립단, 대한 독립군, 대한 독립군단, 대한 국민회군, 서로 군정서, 북로 군정서, 광복군 사령부(대한민국 임시 정부), 한국 독립군(한국 독립당), 조선 혁명군(조선 혁명당), 동북 인민 혁명군, 동북 항일 연군, 조선 의용대(민족 혁명당=조선 민족 혁명당), 조선 의용군, 한국 광복군(광복군, 대한민국 임시 정부)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대한 독립단(大韓獨立團)은 1919년 3·1운동이 큰 성과 없이 끝나자 만주로 망명한 독립 운동가들이 각 단체 대표 및 의병 계열의 인사들을 합쳐 조직한 단체이다. 1919년 4월 15일 삼원보(三源堡)에서 나눠져 있는 단체를 해체하고 단일 기관으로 조직되었다. 뒷날 대한민국 임시 정부 광복군 사령부에 통합되었다.
대한 독립군(大韓獨立軍)은 1919년 홍범도가 의병 출신과 연해주와 간도에 거주하던 한국인을 중심으로 만주에서 조직한 항일 독립군 부대이다. 1919년 8월 혜산진(惠山鎭) 공격을 시작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활발히 전개했으며, 특히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1920년 10월 김좌진과 이범석이 지휘하는 청산리 전투에 참여하여 큰 승리를 이끌었다. 청산리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이 한국인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우는 등 ‘간도 참변(間島慘變)’을 저지르며 대대적인 독립군 공격에 나서자, 중국과 러시아 국경 지대인 미산[密山: 밀산]으로 이동하여 다른 독립군 부대와 함께 대한 독립군단으로 통합되었다.
대한 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은 청산리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피해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흑룡강성]의 미산에 모인 독립군 부대들이 1920년 12월 북로 군정서의 주도 아래 대한 독립군, 대한 국민회(간도 국민회), 대한 신민회 등을 합쳐서 조직한 독립군 연합 부대이다. 서일이 총재에 맡았으며, 다시 러시아 자유시(현 스보보드니)까지 이동하였다. 러시아군의 지원으로 무기를 보충하고, 러시아군의 작전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러시아 혁명 후 일본의 강력한 압력에 굴복한 러시아가 독립군에게 무장 해제를 요구하자, 이에 저항하는 독립군과 러시아군 사이에 1921년 6월 서로 총을 겨누는 ‘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흑하 사변(黑河事變)]’이 발생하였다. 이때 많은 독립군이 희생되었으며, 대한 독립군단은 결국 해산되었다.
서로 군정서(西路軍政署)는 1919년 3·1운동에 자극받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제의에 따라 그해 5월 만주에서 조직된 무장 독립 운동 단체이다. 신흥 학교를 신흥 무관 학교로 개편하는 등 군인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군대 사령관은 지청천이 맡아 국내 및 서간도 지역의 일제 통치 기관을 습격․파괴하고, 민족 반역자와 친일파를 처단하는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일제의 집요한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1920년 북만주 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겼으며, 1922년 대한 통군부로 흡수되었다.
북로 군정서(北路軍政署)는 북간도에서 설립한 중광단(重光團)에서 시작되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중광단이 정의단(正義團)으로 확대·개편되었는데, 정의단은 무장 투쟁을 위해 대한 군정서(大韓軍政署)[군정회(軍政會)]를 1919년 7월 조직하였다. 이 군정회는 1919년 12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지시에 따라 북로 군정서로 개편되었다. 북로 군정서는 총재 서일, 총사령관 김좌진, 연성대장 이범석을 중심으로 북간도에서 유력한 군사력을 갖춘 군대로 성장하였으며, 특히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후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피해 미산으로 이동하여 다른 독립군 부대들과 대한 독립군단을 결성하고, 러시아 자유시로 이동하였으나 러시아군에 의해 무장해제 당하였다.
광복군 사령부(光復軍司令部)는 3·1운동 이후 만주 전 지역에 흩어져 있던 독립군을 통합하기 위해 남만주에 있던 각 단체들이 1920년 2월 조직한 통합 군사 기관이다. 이후 광복군 사령부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군무부 밑에 소속되어 각 지역의 군영 설치 및 군사 훈련, 일제 기관에 대한 파괴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만주에 있는 독립군 각 부대가 대한 통의부로 통합될 때 이에 흡수되었다.
한국 독립군(韓國獨立軍)은 별도로 조직된 부대의 명칭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한국의 독립군’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한국 독립당 소속의 군대를 한국 독립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20년대 독립군들은 일제의 탄압에 맞서 만주 지역 독립 단체들 간의 활발한 통합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수립된 것이 1923년부터 1925년까지 차례로 수립된 ‘참의부’, ‘신민부’, ‘정의부’라는 군정부(軍政府)이다. 참의부는 압록강 건너편의 서간도 지역에 수립되어 임시 정부의 직속 부대로 활동하였으며, 정의부는 남만주 길림․봉천 일대를 중심으로 결성되었고, 신민부는 자유시 참변을 겪고 돌아온 독립군을 중심으로 북만주 일대에서 결성되었다. 이후 3부는 민족 유일당 운동에 따라 남만주의 ‘국민부’와 북만주의 ‘혁신 의회’, 2개로 다시 통합되었다. 이후 국민부는 조선 혁명당을 조직하고 조선 혁명군을 두었으며, 혁신 의회는 김좌진이 암살된 후 한국 독립당을 조직하였다. 이 한국 독립당 소속의 군대를 한국 독립군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지청천이 이끈 한국 독립군은 중국의 호로군과 연합하여 1932년 쌍성보 전투 등에서 크게 승리하기도 하였다.
조선 혁명군(朝鮮革命軍)는 1929년 3월 만주 지린[吉林]에서 항일 단체 지도자들이 국민부를 지지하면서 조직한 조선 혁명당의 군대이다. 친일 인사 숙청, 교민 보호, 국내 진입 작전 전개, 일제 기관 파괴, 일제 관헌 및 악덕 부호 응징을 주요 목표로 하였다. 양세봉이 이끈 조선 혁명군은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여 1932년 흥경성 전투와 영릉가 전투 등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으며, 1938년 9월까지 남만주 일대에서 활발하게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 질문1 대한 독립군과 북로 군정서를 이끈 총사령관이 누구인지 각각 써봅시다.
  • 질문2 간도 참변과 자유시 참변은 무엇인지 설명해 봅시다.
  • 질문3 한국 독립군과 조선 혁명군을 이끈 인물은 누구인지, 이 부대가 승리한 전투들의 공통 특징은 무엇인지 각각 써봅시다.
  • 질문4 1930년대 초부터 한국 독립군 부대들이 중국군과 연합하여 항일 전쟁을 벌인 것은 1931년에 일제가 일으킨 어떤 침략 전쟁 때문인지 조사해 봅시다.

읽기자료 3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군 부대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광복군

동북 인민 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과 동북 항일 연군(東北抗日連軍)은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 독립 투쟁 단체로, 동북 인민 혁명군은 중국 공산당 만주성 위원회가 1933년 9월에 조직한 무장 부대이다. 당시 만주에서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 독립군과 양세봉이 지휘하는 조선 혁명군이 일본군의 공격에 밀려 중국 본토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이곳에 계속 살던 한국인들은 일본군의 공격에 저항하여 군대를 조직했으며, 농민들은 각 지역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이러한 농민 봉기가 발전하여 항일 유격대가 조직되었는데, 이들은 일본군에 맞서 싸우면서, 동만주 지역에 근거지를 건설하였다. 이러한 활동의 바탕 위에 중국 공산당 만주성 위원회는 동북 인민 혁명군을 조직하였다. 1936년 12월에 중국 공산당이 중국 국민당과 손잡고[제2차 국․공합작(1937년)] 항일 통일 전선을 결성하면서 동북 인민 혁명군은 동북 항일 연군으로 확대․개편되었다. 동북 항일 연군의 한국인 무장 부대들은 활발한 유격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조국 광복회를 이끈 김일성도 동북 항일 연군에 가담하여 1937년 보천보(普天堡)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북 항일 연군은 1940년대에 들어서 일제의 대규모 공격으로 그 활동이 크게 위축되어 소련의 연해주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조선 의용대(朝鮮義勇隊)는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의 군사 조직이다.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은 김원봉의 조선 민족 혁명당, 김성숙의 조선 민족 해방 동맹, 류자명의 조선 혁명자 연맹, 최창익의 조선 혁명 청년 연맹 등 중국 본토에서 활약하던 사회주의 계열의 4당을 연합하여 1938년 10월 중국의 임시 수도 한커우[漢口]에서 결성되었다. 일본군에게 중국군이 거듭 패배하자 독립 운동 단체들은 중국 국민당 정부와 협의하여 조선의 독립군을 참전시키기로 하고 조선 의용대를 창립하였다. 조선 의용대 대장은 김원봉이 맡았다. 1938년 10월 난징마저 일본군에게 점령되자 조선 의용대는 여러 곳으로 흩어졌고, 1940년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광복군이 조직된 뒤로는 이탈자가 늘어났다. 결국 김원봉을 비롯한 조선 의용대의 일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와 함께 가 있는 충칭으로 간 뒤 1942년 7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최창익을 비롯한 또 다른 조선 의용대의 일부는 옌안으로 이동하여 중국 공산당의 지원을 받아 조선 독립 동맹과 조선 의용군을 조직하였다.
조선 의용군(朝鮮義勇軍)은 1942년 7월 조선 의용대 화북지대를 개편한 조선 독립 동맹의 군대이다. 조선 의용군은 중국 공산당과 함께 행동한 사람들[무정(武亭) 계열], 민족 혁명당 및 조선 의용대를 조직했다가 옌안으로 들어온 사람들[김두봉(金枓奉)과 박효삼(朴孝三) 계열], 일본군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해 오거나 포로가 된 사람들 등의 세 집단으로 구성되었다. 주된 임무는 중국 공산당 팔로군(八路軍) 및 신사군(新四軍)과 협력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거나 한국인에 대한 선전·조직 활동을 벌이는 것이었다. 해방 후 조선 의용군의 일부는 만주로 이동하고 일부는 중국 공산당에 협력하여 중국 국․공 내전에 참가하였다.
한국 광복군(韓國光復軍, KIA: Korea Independence Army)은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의해 창설된 항일 무장 군대이다. 총사령에 지청천, 참모장에 이범석이 임명되었으며, 3개의 지대로 편성되었다. 병력과 무기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곤란을 겪기도 하였지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독립군 부대로 활약하였다. 1942년 김원봉의 조선 의용대가 합류하면서 한층 군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한국 광복군은 1941년 12월 중국 국민당 정부와 마찬가지로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였으며, 중국 각지에서 대일전에 참가하고, 영국군의 요청에 따라 인도·미얀마 전선에 광복군 공작대를 파견하여 영국군과 함께 전투에 참가하였다. 1945년 미국 전략 정보처(OSS)의 지원 아래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였으나, 예상보다 빠른 일본의 항복으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한국 광복군은 동북 항일 연군, 조선 의용군과 함께 마지막까지 항일 무장 독립 전쟁을 펼친 세력이었다.

  • 질문1 1920년대 독립군들이 연합하여 일본군에게 크게 승리한 대표적인 전투 2가지를 써 봅시다.
  • 질문2 조선 의용대와 조선 의용군을 이끈 대표적인 인물을 각각 대답해 봅시다.
  • 질문3 한국 광복군이 한층 군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어떤 부대가 합류하면서였는지 대답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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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한국광복군 시안[西安] 사무소 간부들<br>출처 : 독립기념관 ‘9월의 독립운동가 황학수 선생 선정 및 특별전 개최(https : //www.i815.or.kr/kr/news/press.php?code=bodo&mode=V&no=92238&site_dvs_cd=kr&menu_dvs_cd=050301&skey=&sval=&code=bodo&GotoPage=7&key_bbs_cd=)

한국 광복군 시안[西安] 사무소 간부들의 모습이다.

  • 질문1 입고 있는 옷차림에서 유독 바지 모습이 다른 사람을 찾아 사진에 표시하고, 어떤 지위에 있는 사람일지 추측하여 말해 봅시다.
  • 질문2 황학수는 한국 독립군 총사령 대리로서, 시안 총사령부의 최고 책임자의 위치에 있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앉은 자리로 보아 누가 황학수일지 찾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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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거나 독립 운동을 하는 방법에는 크게 자결, 무장 투쟁론(의열 활동, 무장 투쟁), 준비론(실력 양성론, 애국 계몽 활동), 자치론(타협적 민족주의), 외교론(외교 활동) 등 다양하다. 각각의 독립 운동 방법의 특징과 한계를 정리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2
황학수의 생애를 소개하는 간단한 안내문을 작성하여 친구들과 공유하면서, 황학수의 생애에서 본받을 점들이 무엇이며, 그것을 지금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실천할 수 있는지 토론해 봅시다.
모둠활동 3
일제 강점기 무장 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가운데 홍범도,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 김원봉, 김두봉 등이 관여한 독립군 부대와 참여 전투를 정리․요약한 표를 만들어 자신의 카페나 블로그, 밴드 등에 올려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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