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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희 생가(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주도한 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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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전이 진회 목 벤 거사를 하려다가
어찌 옥중에서 공사를 할 줄 생각했으리
이 마음은 밝고 밝아 물어볼 것 없으니
대한의 신자 마음 대한이 응당 알 것이지


이 시는 1905년 11월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수백 명의 유생을 거느리고 서울에 올라가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처단과 을사늑약의 파기를 주장하다 대구 경무서에 체포 되었을 때 이승희가 지은 시이다.
한계(韓溪) 이승희는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다.”고 하며 옥중에서도 이토 히로부미를 꾸짖는 편지를 쓴 대유학자이다. 그는 영남 주리론(主理論)의 대통을 계승하여 위정척사론을 정립하고, 개항 시기에는 무분별한 개국․개항에 반대하며 성리학적 전통 질서를 옹호하였다.
이승희의 굽힐 줄 모르는 의기와 애국애족 정신에 바탕을 둔 행동은 해외 독립투쟁에까지 이어져서 조국광복의 밑거름이 되었다. 1908년 연해주로 망명한 뒤 밀산현 봉밀산에 한흥동이라는 독립운동 기지를 개척하여 독립군 양성의 기반을 닦고, 한인공교회를 창립하여 중국의 동지들과 유대를 강화하며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서거한 국외 독립 운동 기지 개척의 선구자, 한계 이승희를 찾아가 보자.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한개2길 43
현재 상태 변형 / 여러 차례 수리하였으며, 현재 민속자료로 지정·보존하고 있다.

이승희는 공자의 유교 이념에 근거하여 동양의 새로운 정치이론과 세계상을 구상하였고, 유교를 통해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이루고자 혼신의 힘을 다 바친 독립 운동가였다.
개항시기에는 척사상소를 올려 무분별한 개국에 반대하고 성리학적 전통 질서를 옹호하였다. 나아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곽종석 등 문인들과 함께 포고문을 각국 공사관에 보내 일제의 침략만행을 규탄하고 열강의 각성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특히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수백여 명의 유생들을 거느리고 서울로 올라와 을사5적의 처단과 조약 파기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또한 주한 일본군사령부에 일본의 배신과 침략행위를 비판하는 글을 보냈다.
1907년에는 국권회복을 위해 경북 성주에서 국채보상단연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어, 각지에 통문을 보내 담배를 끊고 국채를 보상하여 국권을 되찾자고 호소하였다. 이와 함께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여기에 편지를 보내 일본의 침략 만행을 낱낱이 폭로하고, 한국이 독립주권국가임을 역설하였다. 나아가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인해 고종황제가 강제 폐위되자 그 부당성을 일본 정부에 강력히 항의하였다.
1908년 그는 일본의 노예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이상설, 유인석, 안중근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제자를 국내로 보내 독립운동자금을 널리 모금하여, 그 자금으로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앞장섰다. 만주와 연해주의 국경지대인 밀산현 봉밀산에 황무지를 구입하고 100여 가구의 한인 동포를 이주시켜 한흥동이라는 독립운동 기지를 개척하였다. 그리고 한민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하며 독립군 양성의 기반을 닦았다. 또한 캉유웨이(강유위 康有爲), 리원즈(이문치 李文治) 등 중국공교회 간부들과 유대를 강화하고,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밀산부 안동현으로 옮겨 한인공교회를 창설하였다. 또한 상하이의 박은식 등과 연락하여 언론기관의 설립과 국사교육을 논의하며 독립운동을 모색하였다.
이렇게 혼신을 다해 독립 투쟁을 벌이던 그는 1916년 2월 27일, 70세를 일기로 봉천성 북문 밖 일승잔에서 광복의 날을 보지 못한 채 망국의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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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읽기자료 1

향약을 강조하다

이승희는 아버지 이진상의 성리학을 정리하고 또한 철저한 유교적인 입장에서 당시의 민족문제, 현실문제에 대응하였다. 그는 기독교를 비판하고, 서양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임금의 굳은 의지에 의한 내수외양(內修外攘)만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19세기의 조선은 세도정치와 매관매직으로 부패한 관리들에게 저항하는 농민 봉기가 잇달아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반봉건 항쟁은 개항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며, 1894년 동학농민전쟁으로 그 절정을 이루었다. 이러한 농민항쟁에 대해 지방의 양반 지배층은 정부 차원에서의 조세문제 해결 방안 수립에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고, 또는 향촌 사회의 지배권을 직접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향약과 계 등을 실시하였다. 이는 향약과 계를 통해 동족집단의 결속을 강화하고 가부장적인 봉건윤리를 확립하면서, 농민항쟁을 방어하고 봉건적인 질서를 유지하려 한 것이다.
이승희도 1891년 성산향약(星山鄕約)을 제정하였다. 향약의 전형이었던 ‘여씨향약’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당시의 사회문제를 포괄하는 절목들이 만들어졌다. 유교 윤리의 기본이 되는 충과 효를 중심으로 형제간의 우애, 친족 간의 화목 등을 강조하였다. 동학이나 천주교를 믿는 행위, 세금의 납부에 불성실하고 국가의 법령을 어기는 행위, 사족(士族 : 선비의 집안과 그 자손)을 능욕하는 행위 등을 열거하면서 이를 억제하고자 하였다.

  • 질문1 이승희는 기울어가는 나라를 어떤 방법으로 구하려 하였는지 생각해 봅시다.
  • 질문2 이승희가 성산향약을 제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말해봅시다.
  • 질문3 이승희의 생각과 행동을 당시 역사의 흐름 속에서 판단해 보고, 그 의의와 한계를 말해 봅시다.

읽기자료 2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다

성리학을 공부하던 이승희는 민족이 식민지화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한 활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다른 척사(斥邪 : 악한 것, 즉 서양 문물을 배척함) 유생들과 마찬가지로 유교적 화이관(華夷觀 : 중국・조선과, 서양・일본 등 오랑캐를 구분하는 사상)을 가지고 서양의 종교에 대해서는 부정하면서도, 서양의 부강에 주목하고, 서양 정치에서 보이던 애민(愛民)을 강조하였다. 유교의 보존을 위해서도 서양의 학문, 특히 외교와 관련된 부문과 기술 문명은 수용하여 교육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심지어 국제간의 질서로 표방되던 서구의 만국공법(萬國公法 : 서양식 국제법)이 보편적인 도덕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급히 서울로 올라와 일본의 침략을 만국공법에 비추어 비판하면서, 을사오적을 토벌하고 조약을 파기할 것을 상소하였다. 그 뒤 헤이그에서 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의 침략행위를 국제사회에 알리려 노력하였고, 세계 각국 정부에도 편지를 보내 국제법으로 일본을 단죄할 것을 요청하였다.
1907년 전국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선생도 이 운동에 호응하여 성주지방에 통문을 내어 동참을 촉구하였고, 자신의 회갑연을 사양하고 그 비용을 내 놓았다. 집안의 부녀자들도 은반지를 뽑아 동참하였고, 비록 국채보상운동은 실패했지만, 이때 모인 기금은 뒷날 성명학교(星明學校)의 설립으로 결실을 맺었다.

  • 질문1 이승희가 대다수의 위정척사파 유생들과 사상적으로 달랐던 점이 무엇인지 찾아봅시다.
  • 질문2 이승희가 적극 가담했던 국채보상운동의 한계를 말해 봅시다.

읽기자료 3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앞장서다

이승희는 63세의 나이에 1908년 4월 부산에서 배를 타고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그는 헤이그 특사사건의 일원이었던 이상설을 만났다. 그는 이상설과 상의하여, 국내에서 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국외에 나와 있는 유민과 망명객을 한 곳에 집단으로 정착시키고 교육시켜 독립운동의 기지를 세우려고 하였다. 1909년 중국영토인 밀산부에 황무지를 사들여 개간을 시작하였다. 동네 이름도 ㉠ 한흥동(韓興洞)이라고 지었다. 그는 그곳에서 거의 4년간 한민족의 역사를 가르치고 한인의 단결을 도모하였다. 이곳은 훗날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 이후 독립군이 모여 재기를 다지는 집결지가 되었다. 이어 한인 동포들의 조직을 건설하고, ‘일송오강(日誦五綱)’, ‘오강십목(五綱十目)’이라는 글을 지어 한인 동포들과 같이 암송하면서 생활하였다. 이는 일종의 유교적 신앙생활 공동체였다. ‘일송오강’은 천지를 위해 마음을 세우고, 부모를 위해 몸을 세우고, 자기 인생을 위해 도리를 세우고, 백성을 위해 표준을 세우고, 만세를 위해 모범을 세운다는 것으로, 이 세계를 향한 기본 강령이었다.

  • 질문1 밑줄 친 ㉠의 한흥동이란 이름에 담겨져 있는 이승희의 의지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읽기자료 4

유교적 반전평화론을 펼치다

이승희는 유학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 반전평화를 주장하였다. 그는 국제연맹의 성격을 지닌 ㉠ ‘만국대동의원(萬國大同議院)’이라는 기구를 설립하자고 제안하였다. 만국대동의원에서 세계 각국의 문자와 언어, 윤리와 덕행, 헌법과 전장, 전쟁의 이유, 공작 기계, 화폐 상품 제도 등에 대해 모든 자료를 조사 연구할 것을 제안하였다. 여기서 대동(大同)이라는 개념은 세계주의를 지향하는 이념이었다. 그는 ‘사해동포(四海同胞 : 세상 모든 사람이 한 겨레)사상’을 강조하였다. 천지 사이에 태어난 인간은 모두 동포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종족과 지역, 그리고 국가의 구별 없이 도리를 함께 하여 ‘천하위공(天下爲公 : 세상은 공평해야 한다)’의 대동사회(大同社會 : 모든 사람이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 ‘중화대동회(中華大同會)’를 조직할 것을 제안하였다. 나아가 전쟁 자체를 거부하는 서양의 반전평화운동에 주목하였다. 그는 ‘의로운 전쟁’은 없다고 생각하였다. 전쟁은 모든 참전 국가를 멸망으로 이끌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는 ‘살생을 하지 않는 인의(仁義)와 대도(大道 :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도리)가 실현된 대동 평화의 세계’를 추구하였다. 국제사회에서 ‘인의의 교’가 실현된다면 국가 간의 전쟁이 없는 대동 평화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실천으로 옮긴 구체적 활동이 ㉢ 공교회(孔敎會) 활동이었다. 1913년 동삼성한인공교회를 창립하고 북경공교회로부터 공교회 한인지회로 공식 인가를 받았다. 공교회 운동은 중국 동삼성 지역(랴오닝 성[遼寧省], 지린 성[吉林省], 헤이룽장 성[黑龍江省]으로 둥베이 3성[東北三省]이라고도 불리며 만주 지역을 일컬음) 이주 한인의 정착과 자치단체 결성 및 활동을 도모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 질문1 ㉠ ~ ㉢을 통해 이승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했던 사회 모습에 대해 말해봅시다.
  • 질문2 이승희의 사해동포사상은 정통 성리학의 주요 이론 중 어떤 사상을 극복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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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이승희 생가인 한주종택의 사랑채

이승희 생가

  • 질문1 이승희의 생가는 현재 한주종택으로 불립니다. 한주종택을 둘러보며 주희와 이황의 유학을 숭상해온 집안임을 알 수 있는 현판을 찾아 사진으로 찍어봅시다.
  • 질문2 이러한 전통 한옥에서 산다면, 여름과 겨울에 어떤 장단점을 느끼게 될까요?

시각자료 2

이승희 관련 기사(황성신문, 1907. 4. 11일자)

국채보상운동 관련 기사

  • 질문1 위 기사는 이승희가 성주군의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결국 국채보상운동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국채보상운동이 왜 실패했는지 조사해서 정리해 봅시다.
  • 질문2 만약 국채보상운동이 성공해서 일본에 진 빚을 다 갚았다면, 일제가 어떻게 했을지 말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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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독립기념관 내 어록비공원에는 이승희의 어록비(語錄碑 : 말씀을 새긴 비석)가 세워져 있다. 이 비문에 새겨져 있는 내용을 통해 그가 남긴 뜻을 살펴보자.

위부모입신(爲父母立身) 부모를 위해 삶의 자리를 잡고
위천지입심(爲天地立心) 천지를 위해 마음을 바로 세우고
위오생입도(爲吾生立道) 나의 삶을 위해 도를 세우고
위사민입극(爲斯民立極) 이 백성을 위해 지극함을 세우며
위만세입범(爲萬世立範) 만세를 위해 본보기를 세워라


【질문 1】 독립기념관 야외공원에 세워진 독립운동가들의 어록비 가운데 심산 김창숙, 백범 김구, 도산 안창호의 어록비를 검색하여 그 내용을 정리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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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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