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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동 상륙지(장사상륙작전, 적을 속여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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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포항에서 7번 국도를 따라 북쪽 영덕 방향으로 25km 정도 올라가면 장사해수욕장이 오른쪽에 보인다. 그곳에 ‘장사상륙작전 전적지’라는 표지판이 있지만,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장사해수욕장에 들어서면 소나무가 길게 늘어서 있는데, 이 소나무 숲 남쪽 끝쯤에 6‧25전쟁과 관련된 탑이 하나 서 있으며, 뒤편 양옆으로 무덤이 만들어져 있다. 이 탑은 ‘장사상륙전 전몰용사 위령탑’인데, 이 위령탑 건립에 대하여 한 표지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대원 90%가 학생의 신분으로 호국 일념에 지원 입대 하여 적 후방에 작전상륙을 감행하여 8일 간이나 식량 보급도 없는 극한 상황에서 혈전을 치르다가 전사한 전우들의 고귀한 희생정신과 감투정신을 찬양하고 호국 충정을 기리며, 후세들에게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심어주고저 …(생략)… 영령들이여! 우국청년(의사)들이여! 그대들의 명복을 온 국민이 빌고있으니 고이 잠드소서

장사상륙전(장사상륙작전)이라? 인천상륙작전이라는 말은 많이 들어왔고, 혹 통영상륙작전은 들어봤지만, 장사상륙작전은 듣지 못하던 말이다. 더구나 이 작전을 전개한 군인의 90%가 학생 신분이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또 이 작전은 인천상륙작전과 관련 있는 작전이라고도 하니 도대체 무슨 작전이었을까?
북한군의 남침으로 후퇴를 거듭하던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을 최후 방어선으로 치열한 공방전을 펼칠 때,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총 반격전을 위한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을 펼치면서, 북한군의 눈을 동해로 돌려 적을 속여서 전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던 동해안 장사동에 상륙하려던 작전이 바로 장사상륙작전이다.
장사상륙작전은 장사동상륙작전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현재의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長沙里)는 1914년부터 1988년 사이에는 장사동(長沙洞)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장사동이라는 지명은 영덕 이외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장사동(長沙洞), 강원도 속초시 장사동(章沙洞, 현 영랑동), 경상북도 상주시 공검면 지평리 장사동 등이 있다. 또 장사리라는 지명은 영덕 이외에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장사리(長沙里) 등도 있다.
여하튼 6‧25전쟁 당시 작전명 제174호에 따라, 국군 제1유격대대(대대장 이명흠)는 대원 772명, 지원 요원 56명과 함께 해군 수송함인 문산호를 타고 9월 14일 16시경 부산항에서 출발하였다. 다음날인 9월 15일 새벽 5시경 장사동 해안 상륙지점에 도달하였으나, 태풍을 만나 배가 암초에 걸려 움직일 수 없었다. 북한군의 포격이 빗발치는 가운데 병사들은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 끝에 상륙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맹렬한 공격과 함께 적의 후퇴로를 막는 등 북한군을 꼼짝 못하게 하였다.
이렇게 장사상륙작전은 적의 관심을 끌면서 그들을 속여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따라서 장사동 상륙지(上陸地: 상륙한 곳)는 6‧25전쟁 사적지로서의 의미가 매우 큰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의 유명세에 밀려서인지 그동안 장사상륙작전은 ‘잊혀진 상륙작전’이 되어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영덕 사회단체 및 장사상륙참전유격동지회의 노력으로 ‘장사상륙전 전몰용사 위령탑’이 세워졌으며, 해마다 9월 14일 탑과 무덤이 있는 이곳에서 합동위령제가 열리고 있다. 최근에는 장사상륙작전이 널리 알려지는 것과 함께 이곳 일대에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이 꾸며지고 있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74-1 일대 [도로명 주소: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동해대로 3592 (장사리)]
현재 상태 원형 보존 / 전쟁 당시의 모습이 거의 훼손되지 않고 보존되어 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갑작스러운 남침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후퇴를 거듭하여 수도 서울을 점령당하고, 대전마저 잃었으며, 다시 대구까지 밀려났다. 이제는 더 이상 밀려날 수 없다는 각오로 낙동강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았다. 낙동강전선까지 진격한 북한군은 유엔군과 국군의 강력한 방어전투에 더 이상 내려오지 못하였다. 약 1개월 반 동안 낙동강전선을 중심으로 전선에 큰 변화 없이 치열한 전투가 반복되었다. 이런 상황에 국군과 유엔군은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하였다.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6월 29일 한강방어선을 돌아볼 무렵 ‘블루하트작전(Operation Blue Heart)’ 계획을 세웠는데, 이는 미 지상군을 수원 부근에 투입하여 북한군이 내려오는 것을 막으면서 동시에 미 기병사단을 인천으로 상륙시켜 북한군을 포위하여 무찌르려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북한군이 밀고 내려오는 속도가 예상외로 빨라지자 미 제24사단만으로는 북한군의 진격을 막아내기가 불가능해져 최초의 계획을 취소하고 미 제1기병사단을 충북 영동 지역에 투입할 수밖에 없었다.
블루하트작전이 취소된 후, 맥아더 장군은 참모진에게 블루하트작전보다 큰 규모의 ‘크로마이트작전(Operation Chromite)’ 계획을 세우도록 지시하였다. 계획을 세우는 과정에서 3개의 상륙지점, 즉 서해안의 인천(100-B계획)과 군산(100-C계획), 동해안의 주문진(100-D계획)이 검토되었다.
상륙 예정지인 인천은 서울로 들어갈 수 있는 가장 짧은 거리이고, 수도 서울을 되찾으면 적에게 심리적으로 타격을 줄 수 있는 점 등 유리한 점이 많아 맥아더 장군은 인천을 상륙지점으로 하는 100-B계획을 합동참모본부에 보고하였다. 그런데 미 합동참모본부는 인천항에 이르는 물길이 좁아 대규모 함정의 진입이 어렵고, 조수간만의 차가 커 병력이나 물자 수송이 어려운 점 등을 들어 상륙작전지역으로 인천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반대 의견을 내세웠다. 그리고 대안으로 군산이나 아산만 일대로 상륙지점을 변경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전략적, 심리적, 정치적인 이유를 들어 중요한 수도 서울을 짧은 시간 안에 되찾기 위해서는 인천에 상륙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마침내 합동참모본부는 8월 28일 유엔군사령부의 계획인 ‘크로마이트작전’을 승인하였다. 이에 따라 8월 30일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 명령을 내렸으며, 이어서 상륙작전 날짜를 9월 15일로 확정하였다.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함에 앞서 인천상륙작전을 최대한 숨길 필요가 있었다. 이에 상륙지를 인천이 아닌 군산이라 공식 발표하기도 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해나가는 가운데 국군해병대는 미 해군 함대의 지원 포격을 받으며 군산, 목포, 포항, 영덕 등 동해안과 서해안 여러 곳에서 적을 속이는 작전을 전개하였다. 9월 12일 군산으로 병력이나 장비를 이동함으로써 마치 공격할 것처럼 보여 적을 속이기도 하였으며, 9월 14일과 15일 이틀간에 걸쳐 동해안 삼척 일대를 포격하기도 하였다. 또 경북 영덕 장사동 지역에서 상륙작전을 펼치기도 하였다. 북한군은 인천이 아닌 군산에서 상륙작전이 이루어질 것으로 판단하여 군산 방어를 강화하였으며, 그 결과 다른 지역의 방어력이 감소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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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장사상륙작전(장사동상륙작전)

적의 경계를 분산시키기 위하여 실제 전투는 하지 않지만, 병력이나 장비를 움직임으로써 마치 공격할 것처럼 보여 적을 속이는 작전을 양동작전(陽動作戰)이라고 한다. 장사상륙작전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한 양동작전의 하나로 이루어졌는데, 부족한 병력 문제로 학도병(학도의용군)들이 많이 동원되어 펼쳐졌다.
1950년 9월 초 육군본부는 1개 대대 규모의 유격대를 해상으로부터 장사동 해안에 상륙하여 적을 혼란에 빠뜨리고 몰아낼 작전(작전명 제174호)을 세웠다. 이 작전을 위하여 이명흠(훗날 이종훈으로 이름을 바꿈) 대위가 지휘하는 독립유격대 제1대대가 선발되었다. 이 유격대는 1950년 8월 말 경남 밀양에서 편성되었으며, 병력의 대부분은 학도병들로 구성되었다.
1950년 9월 14일 오후 4시, 독립유격대 제1대대 772명과 지원 요원 56명을 태운 해군 수송선 LST(Landing Ship Tank: 상륙용 함정) 문산호는 부산항에서 출발하였다. 배로 이동하는 동안 미 해군 하트먼(Hartman) 소장이 지휘하는 제95.2기동함대의 구축함 엔디코트호의 보호를 받아 15일 새벽 5시쯤 장사동 해안 상륙지점에 도착하였다(일부에서는 9월 13일 오후 부산에서 출발하여 14일 새벽 장사동에 도착했다고도 하지만, 공식적인 전투 기록에는 14일 출발과 15일 도착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태풍 ‘케지아’가 몰고 온 심한 파도에 휩쓸리다 배가 좌초(坐礁: 배가 물 속 보이지 않는 바위나 산호 따위에 얹힘)되었다. 장사동을 점령하고 있던 1개 대대 규모의 적들은 맹렬한 사격을 해왔는데, 제1유격대대원들은 해안가 30여m에 이르는 소나무까지 줄을 연결하여 상륙을 시도하였다. 빗발치는 북한군의 총탄을 뚫고 10여 시간의 전투 끝에 학도병들은 상륙에 성공, 장사동 남쪽 고지를 되찾았다.
이후 9월 14일부터 19일까지 6일간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 끝에 장사리 부근의 북한군을 몰아내고 그들의 보급로를 끊는 데 성공하였다. 나아가 동해안을 차지하고 있던 북한군 제2군단에게 큰 타격을 주고, 그들의 세력을 흩트려놓았다. 그러는 사이에 한국 해군본부가 보낸 LST 조치원호가 19일 오전 6시 현장에 도착하여 철수작전을 펼쳐 110명의 부상자를 포함하여 640여 명을 구출, 20일 오전 6시 부산항에 돌아왔다. 그러나 129명이 전사하였으며, 조치원호가 철수할 때까지 미처 배에 오르지 못한 39명은 적의 포로가 되었다.
비록 장사상륙작전은 소규모로 치러진 양동작전이었지만, 이 작전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도록 하는 데 이바지하였으며, 또한 국군과 유엔군이 대대적인 반격을 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맥아더 장군이 1960년 10월 31일에 쓴 한 편지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귀하의 동지들이 수행한 전투는 혁혁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최고의 찬사를 받을 만한 것이었습니다. 722유격대의 동지들이 보여준 용맹과 희생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영원히 빛나는 귀감이 될 것입니다.”라고 한 것만큼 장사상륙작전은 6‧25전쟁에서 중요한 전투였지만, 그에 비해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잊혀진 상륙작전이 되었다.
장사상륙작전에 참가한 학도병들의 고귀한 희생정신과 호국충정을 되살려 후세들에게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 주기 위한 노력은 1980년 9월 14일 장사리 해안에서 위령제를 지내는 것으로 시작되어 이때부터 해마다 9월 14일에는 이곳에서 위령제가 열리고 있다. 1991년에는 영덕 사회단체 및 장사상륙참전유격동지회의 노력으로 ‘장사상륙전 전몰용사 위령탑’이 세워졌다. 이 위령탑은 ‘장사상륙작전 전몰용사 위령탑’ 또는 ‘장사상륙(작)전 전몰학도병 위령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014년 현재, 학도병들이 묻혀있고, 아직도 LST 문산호의 잔해가 바다속에 묻혀있는 있는 장사해수욕장 및 위령탑이 있는 이곳은 2012년부터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 조성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어 LST 문산호 전시장을 비롯한 각종 시설로 새롭게 꾸며지고 있다. 잊혀진 상륙작전 대신 ‘잊을 수 없는 상륙작전’으로 거듭나고 있다.

  • 질문1 장사상륙작전을 펼친 제1유격대대는 대부분 어떤 신분의 군인들로 구성되었는지 써봅시다.
  • 질문2 장사동 해안에서 상륙작전이 펼쳐진 때는 언제쯤(년‧월‧일)인지 써봅시다.
  • 질문3 제1유격대대원들이 타고 간 함정 이름과 이 함정이 좌초되자 구조하러 온 함정의 이름을 각각 써봅시다.
  • 질문4 장사상륙작전은 6‧25전쟁에서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말해 봅시다.

읽기자료 2

학도의용군(학도의용대)

학도병(學徒兵, Student soldier)은 전쟁 또는 전쟁과 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 학생들이 학업을 중단하고 전투에 참여한 병사를 가리키는 말이며, 의용군(義勇軍, Volunteer troops)은 뜻이 있는 민간인이 스스로 조직한 군대나 그런 병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학도병은 학도의용군이라고도 하는데, 학도의용군(學徒義勇軍)은 학생 신분으로 조직된 군대나 병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6‧25전쟁이 일어난 다음 날인 1950년 6월 26일 10시, 문교부는 서울 이북 지역의 초등학교에 임시휴교령을 내림과 동시에 중등학교 이상에 대해서는 학교장의 판단에 따라 휴교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위급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자 스스로 임시 ‘학도위문대(學徒慰問隊: 장병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학생들로 조직된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곤 하였다.
서울을 빼앗긴 후, 피난길에 나선 서울시내 각급 학교의 학도호국단 간부 학생 200여 명은 수원에 모여 ‘비상학도대(非常學徒隊)’를 조직하였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1950년 6월 29일부터 한강 방어선 전투에 직접 참가하였다. 경기도 시흥의 전투에서 학생들은 처음으로 총과 실탄을 받아 교복과 교모(校帽: 학교 모자)를 그대로 입은 채 전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당시 학도병에 관한 일은 국방부 정훈국이 맡아보았는데, 정훈국은 비상학도대에 소속되어 있는 학생들에게 피난민 구호, 전황 보도 및 길거리 선전 등 주로 후방에서 민심을 안정시키는 일을 하도록 하였다. 많은 학생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현역 군인으로 지원해 나갔으며, 나머지 학생들도 학생들만으로 전투부대를 구성하여 직접 전투에 나설 수 있도록 해달라고 국방부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국방부는 국가의 장래를 짊어질 학생들의 직접 전투에 참가하는 것을 반대하면서 정훈국의 지도에 따라주길 바랐다.
7월 1일 대전에 내려온 피난 학생들과 이 지역 학생들 700여 명이 ‘의용학도대(義勇學徒隊)’를 스스로 조직하여 그 중 상당수가 병사로 입대(入隊: 군대에 들어가 군인이 됨)하였다. 그리고 전선의 변동에 따라 대구로 이동하게 된 이들은 ‘대한학도의용대(大韓學徒義勇隊)’로 재편성되어 국군 10개 사단과 소속된 부대에 편입되었다. 한편, 부산에서도 대한학도의용대가 조직되어 여러 가지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정부가 부산으로 수도를 옮긴 후 이 두 개의 학도의용대는 하나로 통합되었다. 그리고 국방부 정훈국 소속 유일한 전시 학도병 조직체로 발전, 대한민국 학도의용군으로서 적지 않은 활동을 하였다.
어린 중학생 소년에서 다 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대한학도의용대의 이름으로 전투에 직접 참여한 학생들은 6‧25전쟁 기간 모두 27,700여 명이나 되고, 후방지역이나 우리가 다시 찾은 지역에서 민심을 안정시키는 등 선전활동에 참여한 학생들은 무려 200,000명이나 되었다. 개인적으로 입대를 지원하여 국군 정규 부대의 장병으로 참전하는 학생들이 줄을 이었으며, 상당수의 여학생도 간호사로 전투에 참여하였다.
당시 국군의 모든 사단에 학도병이 없는 부대가 없을 정도였는데, 학도병들은 계급도 군번도 없이 크고 작은 많은 전투에 참여하여 많은 희생과 함께 큰 공을 세웠다. 특히 낙동강 방어선에서 큰 역할을 하였으며, 학도병 가운데 약 700여 명은 1950년 7월 중순 부산에서 유엔군으로 편입되어 일본에 건너가 훈련을 마친 다음 9월 15일에 개시된 인천상륙작전에 정규 부대원으로 참전하기도 하였다. 또한, 국군 제3사단 소속 22연대와 26연대, 국군 제1사단 소속 15연대는 7월 중순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보충할 병사 대부분을 학도병으로 채웠고, 8월 초순 대구에서 새로이 편성된 국군 25연대도 병력 대부분을 학도병으로 채웠다. 이들 부대에 들어간 학도병들은 다부동‧포항 등 여러 곳에서 숱한 희생을 무릎 쓰며 조국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그리고 8월 초 대구에서 육군본부 정훈감실 아래에 조직된 ‘학도기간대(學徒基幹隊)’ 약 1,500여 명은 곧이어 밀양에서 창설된 국군 유격부대에 편입되었는데, 이들은 적의 후방지역으로 침투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그중 제1대대는 인천상륙작전 당시 하나의 양동작전으로 감행된 경상북도 영덕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되어 100여 명의 희생자를 냈으며, 제2‧제3‧제5대대는 10월 초부터 태백산맥 일대에 투입되어 쫓겨 달아나는 적을 물리치다가 12월부터는 다시 호남지역으로 투입되어 활동하였다. 전투 외에도 학도병들은 지리산 일대와 같이 공산 게릴라들의 활동이 활발하던 38도선 이남의 취약지구나 38도선 이북으로 북진하여 우리가 차지한 지역에서 주민들에 대한 선전활동을 벌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한편, 1951년 국군이 38도선을 넘어 올라가자 그곳에 있던 학생들은 스스로 ‘학도호국단, 학도의용대, 대한청년단 학생부’ 등을 조직하여 국군의 작전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1‧4후퇴 때에는 무리지어 남쪽으로 내려와 학도의용군 이름으로 계속 싸웠으며, 그 가운데 많은 학생이 정규 군인으로 입대하기도 하였다. 또 약 700여 명에 이르는 재일교포 학생들도 조국을 구하기 위해 일어서기도 하였다. 이들은 조총련의 온갖 협박과 방해공작을 무릅쓰고 유엔군 부대에 지원, 참전하여 59명이 전사하고 95명이 실종되기도 하였다.
1951년 3월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대공세를 막아내고 전선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국가의 앞날을 짊어질 청년학도들은 시급히 학원으로 돌아가 학업을 계속하라는 담화를 발표하였고, 문교부는 전국에 흩어진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복교령을 내렸다. 그 내용은 “① 모든 학도는 원래의 본분인 학업으로 돌아갈 것, ② 군 복무로 학업이 중단된 학도의 군 복무 사실이 인정되면 학교 당국은 무조건 복교를 인정할 것, ③ 군 및 각급 학교는 군 복무로부터 복교하는 학도들에게 특별 배려를 해줄 것, ④ 군 복무로 학년 진급이 안 된 학도는 본인의 희망에 따라 학년 진급을 인정할 것” 등이었다.
이에 따라 학도의용군은 3월 16일 강원도 홍천에서 무기를 놓고 군복을 벗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수의 북한 출신 학도병들을 비롯하여 끝까지 싸우기를 주장하던 학도병들은 곧바로 입대하여 계급과 군번을 받고 계속 전투에 참여하였다.

  • 질문1 학도의용군에 관한 일을 담당하던 기관은 국방부 부서는 어디였는지 써봅시다.
  • 질문2 학도병들이 하던 일은 전투 이외에 어떤 일들을 하였는지 말해 봅시다.
  • 질문3 학도병을 가리키거나 그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말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생각나는 대로 다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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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장사상륙전전몰용사위령탑

경북 영덕 장사동 해안 뒤편 송림에 세워져 있는 기념탑이다.

  • 질문1 탑에 ‘長沙上陸戰戰歿勇士慰靈塔’이라고 쓰여 있다. 우리말로 읽어봅시다.
  • 질문2 長沙上陸戰戰歿勇士慰靈塔의 뜻을 해석하여 이 위령탑은 무엇을 위해 세운 탑인지 말해 봅시다.
  • 질문3 왼쪽에 보이는 깃발은 태극기와 장사상륙참전유격동지회 깃발이다. 장사상륙참전유격동지회는 주로 어떤 분들로 구성된 단체일지 말해 봅시다.

시각자료 2

장사동 상륙 작전

6‧25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 측 병사의 모습이다.

  • 질문1 맨 오른쪽 병사는 정규 군인 같지만, 나머지 대부분 병사는 군인 복장 모습이 아니다. 차림새로 보아 이들 신분(원래 직업)은 무엇일지 써봅시다.
  • 질문2 학생 신분으로 전쟁에 참여한 병사를 무엇이라고 부르는지 말해 봅시다.
  • 질문3 학도병은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것으로 국방부 정훈국 학도의용대장이 발행한 신분증명서가 전부였다. 이들에게는 군복은 물론 계급이나 ○○도 없었다. 빈칸에 알맞은 말은 무엇인지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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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625전쟁 기간이 이루어진 상륙작전으로는 어떤 작전들이 있었는지 조사하여 보고서로 제출해 봅시다.
모둠활동 2
자신이 만약 6‧25전쟁 당시 학도병이었다고 가정하여 전쟁터로 떠나기 전 부모님께 보내는 편지를 써봅시다.
모둠활동 3
6․25전쟁 중에 학도병은 크게 두 가지 방법에 의해 모집되었다. 학생 스스로 원해서 입대한 경우도 있지만, 급박한 전쟁 상황에서 병력이 모자를 경우에는 다른 방법도 사용하였다. 다른 방법은 무엇이었는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면서 찾아보고,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고 느낀 점을 써봅시다.
모둠활동 4
자신이 사는 주변에 6․25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참가하신 분이 계신지 알아보고 그분을 찾아가 경험담을 듣고 그 내용을 녹음하여 제출해 봅시다. 만약 그런 분이 계시지 않으면 학도병과 관련된 영상이나 영화를 보고 감상문을 제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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